# 112
112화.
시즌4 보스들의 경우 ‘이성도(SAN)’라는 별도의 수치를 관리해 줘야 하는 통에 타 시즌보다 난이도가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서큐버스 군단이 먼저 클리어를 한 상태기에 난이도가 하락한 상태다.
그런데도 32층에서 고전하고 있다면, 35층에 도착하려면 족히 몇 달, 아니 빨라도 최소 반년은 더 걸릴 터였다.
물론 서큐버스 군단이라고 순탄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35층 보스인 ‘니알라토텝’은 설정상 기존 보스들보다 한 단계 높은 ‘아우터 갓’ 취급을 받는 놈이다.
원래라면 충분한 레벨링과 장비를 갖춘 후에 도전해야 되는 절대 만만히 볼 수 없는 상대다.
하지만 세현은 뭔가 맥이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뭔가 피 끓는 일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최은철이라는 명백한 증오의 대상을 연료 삼아 항상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한 싸움을 이어왔다. 하지만 그런 존재가 사라지자 복수의 통쾌함보단 허무함이 덩그러니 남은 것이다.
이렇게 텐트에서 빈둥거리고 있는 와중에도 왕의 명령으로 <순찰>중인 소환수들은 계속 사냥을 하고, 아이템과 경험치를 벌어다 준다.
아마 지금 상태를 유지하기만 해도 세현은 아파트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계속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뭘 위해 싸워야 하나?’
이 메시지는 세현의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경쟁 상대가 없다는 것, 이것은 만족감보다는 허무함을 더 크게 안겨 줬다.
그러던 중, 하나의 사념이 세현의 가슴을 때렸다.
[내 힘이 필요할 정도의 치열한 전투는 없는 건가?]
근 몇 달 만에 들려온 목소리에 세현이 깜짝 놀라 벌떡 몸을 일으켰다.
시간의 신, 크로노스의 사념이었다.
“주군, 게임 졌다고 신경질 내시는 겁니까?”
“진정하세요, 세현 씨!”
사념이 들리지 않기에 세이메이와 설희가 완전히 오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세현은 일단 사념에 집중하기로 생각하고 대답을 미뤘다.
‘왜, 내가 싸움질 하고 다니면 너한테 득 되는 거라도 있냐?’
[그런 건 아니지만-.]
‘구라치고 있네.’
[…….]
세현은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크로노스의 사념에서 초조함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래, 이놈이랑 한판 붙어야 됐지.’
힘을 빌리면 빌릴수록 저놈은 세현의 몸속에서 천천히 성장한다. 두 의지는 언젠가는 세현이 그와 싸우게 될 것이라 예견했다.
‘으음…….’
잠시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시간을 자유자재로 컨트롤하며, 200레벨이 넘는 수백 명의 최정예 입주자들을 도륙하는 놈의 모습은 파괴신 그 자체였다.
그때의 전투를 떠올리자 세현은 심장이 작게 요동치는 것을 느껴졌다. 그리고 그 두근거림은 시체처럼 늘어져 가던 세현에게 하나의 다짐을 떠올렸다.
‘이놈과 싸운다.’
하지만 세현은 몸속에 암세포같이 자리 잡은 놈과 언제, 어떤 형태로 싸우게 되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렇기에 슬슬 놈의 속내를 알아 둘 필요가 있다 생각했다.
‘크로노스, 네놈은 나랑 언제 싸우게 되지?’
[싸운다라? 글쎄…….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군.]
놈은 노골적으로 시치미를 뗐다. 세현은 현재는 놈의 힘이 온전하지 않기 때문이리라 추측했다.
잠시 생각에 잠겨 놈의 속내를 알아볼 수 있는 말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놈의 폐부를 찌를 수 있을 법한 질문을 떠올렸다.
‘크로노스, 내가 50층에 가면 어떻게 되지?’
50층의 메인보스 크로노스. 이놈은 추측하건대 관리자 중 한 명이고 현재 세현의 몸속에 잠겨 있다.
그런데 50층에 도착한다면,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여태껏 한 번도 고민해 본 적 없지만 이에 대한 답을 듣는다면, 크로노스와의 싸움이 어찌 전개될지 예측할 수 있을 듯했다.
[그건 말할 수 없다.]
‘왜 말할 수 없는 건데?’
[…….]
재차 되묻자 크로노스는 잠시 침음을 흘리더니 다시는 대답하지 않았다.
‘50층에서 뭔가 일어난다.’
지금 상황에서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50층에 도착하면 뭔가 이벤트가 일어날 것이라는 걸 확신했다.
세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주군?”
“세현 씨?”
설희와 세이메이가 무슨 일이냐는 듯 멀뚱히 올려다보자 세현이 싱긋 웃으며 대꾸했다.
“나, 지금부터 공부 좀 해야 될 것 같아.”
“뭘 말입니까?”
“싸움!”
“에엥?”
두 사람이 의문스럽다는 듯 고개를 갸웃대는 와중, 세현은 스마트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급히 전화를 걸었다.
† † †
35층, 몬스터가 리젠되지 않는 한적한 공터 근처에 세현과 사카린이 마주보고 서 있었다.
“뭐야, 분위기를 보아하니 데이트 신청은 아닐 거고. 갑자기 바쁜 사람 왜 불러낸 건데?”
“에~ 존경하는 길드장님, 제가 여태 서큐버스 군단에 공을 많이 세웠지요?”
“뭐 그야 그렇지.”
“그럼 부탁 하나만 들어주실 수 있어요?”
“말해 봐.”
“저랑 한판 붙어 주세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사카린이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그, 그거 혹시 새로운 고백 방법 같은 거냐? 아니면 한판 붙자는게 혹시 육체적….”
“아뇨아뇨 미친! 이 양반이 뭐라는 거야! 그게 아니라. 대련 좀 한 번 해 달라고요!”
“아하~♥”
이는 크로노스와의 전투가 있을지도 모르는 50층을 준비하기 위함이었다.
그때까지 레벨과 아이템은 계속 좋아질 테지만 그것만으로는 한계가 명확하다. 50층에서 천년만년 머물 것이 아니라면 아마도 200 중반 대 레벨에 그에 맞는 유니크 아이템을 칠하는 게 끝일 터였다.
그렇기에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고, 그것이 바로 전투 센스를 기르는 것이었다.
세현의 전투 센스는 이미 수준급이지만, 아직 성장할 여지가 충분히 있다. 왜냐하면, 눈앞에 서 있는 사카린이 세현의 지금의 전투 센스를 가지게 한 스승이기 때문이다.
SSS급 클래스를 가진 현재에도 사카린의 전투 센스는 충분히 괴물같이 느껴졌다. 세현은 그녀와 대련을 통해 사전 정보와 아이템으로 적을 찍어 누르는 자신의 한계를 허물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오호라~ 그럼 뭐 줄 건데?”
“에엥? 뭘 줘요.”
사카린은 재미있다는 듯 입꼬리를 올리며 손바닥을 내밀었다.
“아무리 그래도 공짜로 대련해 달라는 건 너무 도둑놈 심보 아니냐? 나 사카린이야 사카린. 내 시급이 얼만 줄 알아?”
“……쫌생이.”
“쫌생이는 누가 쫌생이야!”
“아아아! 귀! 귀! 아프니까 놔요!”
“아프라고 하는 거거든?”
사카린이 귀를 세게 잡아당기자 세현의 귀가 새빨갛게 부풀어 올랐다.
“뭐, 그럼 크~게 인심 써서 대련해 준다, 해 줘.”
“오~ 고마워요 길드장님, 역시 최고.”
“하지만.”
“하지만?”
“그냥 대련하면 재미없으니까 규칙 하나 추가하자.”
“규칙이 뭔데요?”
“이기는 사람이 지는 사람 소원 들어주기!”
Level 43. 롤 모델
잠시 후-.
“자, 그럼 소환수 쓰기 없고. 작위 수여 쓰기 없고. 순수 자연빵으로 싸우기다?”
“네네~!”
두 사람은 대련 전, 서로 간에 합의를 이루고 무기를 각자의 손에 쥐었다. 사카린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입을 작게 열었다.
“허세현, 열 번까지는 네가 먼저 공격해.”
“열 번? 너무 절 호구로 보는 거 아니에요?”
“야, 소환사 클래스 상대로 맨몸으로 싸우는데 이 정도 핸디캡도 안 가지고 싸우면 내가 뭐가 되냐?”
“뭐, 그럼 갑니다?”
설명해 봐야 설득될 것 같지도 않기에, 세현은 붉은 뱀의 검을 꽉 붙잡고 앞으로 내달렸다.
촤라라락-!
검을 휘두르자 붉은 검신이 오른쪽으로 쭉 늘어나 뱀처럼 사카린을 향해 파고들었다. 궤도가 시시각각 변하는 가공할 일격이 빠르게 날아들었다.
하지만, 사카린은 사슬낫을 프로펠러처럼 강하게 회전시켜 날 부분으로 이를 튕겨 낸 후, 곧장 검신을 사슬로 묶어 몸 쪽으로 크게 잡아당겼다.
“젠자아앙!”
세현의 몸이 자연스레 공중으로 붕 떠올라 사카린에게로 끌려갔다.
그녀는 왼손을 뒤로 크게 뻗었다. 이대로 날아간다면 저 주먹에 곤죽이 되고 말 터. 세현은 충돌 직전에 쿠자이의 발로 공중을 찬 후, 검을 감싸고 있는 사슬낫의 연결 부위를 힘차게 걷어찼다.
촤르륵-!
팽팽히 감겼던 사슬이 맥없게 풀려났고, 세현은 검의 길이를 줄임과 동시에 공중에서 몸을 팽이처럼 회전시켜 검격을 날렸다.
부웅-!
하지만 사카린은 이런 상황을 예측이라도 했다는 듯,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회전력을 잃은 몸뚱이가 떨어지는 순간, 등에 묵진한 타격감이 느껴졌다.
“커헉!”
순간 호흡이 곤란했고, 세현의 몸은 앞으로 빠르게 날아갔다. 그 와중 고개를 돌리자 씨익 웃고 있는 사카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제에에엔장!”
세현은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다 가까스로 중심을 잡고 일어났다.
‘좋아, 이 정도는 돼 줘야지!’
머리와 갑옷에는 흙먼지가 더덕더덕 붙어 엉망진창이 됐다. 하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소환수를 앞세워 싸우는 것이 아닌, 직접 몸으로 충돌하고 수 싸움을 하는 감각. 이 감각이 살아 있음을 느끼게 했다.
“다음 가요~!”
“좋아, 덤벼 덤벼!”
세현은 멈추지 않고 사카린에게 달려들었다. 이후 일일이 횟수를 세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바닥을 굴렀지만, 전투의 고양감은 통증마저 마비시켰다.
‘역시 사카린이야.’
공방을 주고받을 때마다 깨우침도 늘어 갔다.
스텝, 페이크, 몸을 움직이는 각도와 무기의 특성을 활용하는 법까지-.
사카린의 움직임 하나하나에는 의미 없는 것이 없었고, 세현은 그것을 직접 체험하며 스펀지처럼 쪽쪽 자신의 것으로 빨아들였다.
그렇게 싸우길 30분여. 세현은 아주 조금씩이지만, 그녀의 생각과 패턴을 무수한 변수 속에서 어렴풋이 읽을 수 있었다.
바늘구멍 같이 작고, 찰나의 순간에만 존재하는 작은 호흡의 빈틈. 그 빈틈을 본 세현은 노림수를 띄웠다.
채애애애앵-!
세현이 직선 궤도로 뻗은 검을 사카린이 쳐내는 순간-.
‘빈틈이다!’
그녀의 무게중심이 미약하게 왼쪽으로 치우치는 것이 보였다.
사카린은 다시 한 번 사슬로 검신을 묶어 냈고, 세현은 검을 세게 잡아당기는 척하다가 그대로 놓아 버렸다.
“에에엑?!”
사카린이 몸을 뒤로 휘청거리며 당황했다.
전투 도중에 목숨이나 마찬가지인 무기를 버리겠다는 발상을 감히 예측하지 못했기에 나온 반응이리라.
“하아아아압!”
세현은 그 틈에 앞으로 내달렸다. 그리고 사카린에게 가까이 왔을 무렵, 쿠자이의 발로 공중을 한 번 더 걷어차 최대한 가속하며 주먹을 앞으로 내뻗었다.
사카린의 몸은 여전히 중심을 잡지 못했고, 이대로라면 세현의 주먹에 턱을 맞을 터였다.
“어엉?!”
하지만, 사카린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대로 넘어져 버렸고, 세현의 주먹은 부웅- 허공을 갈랐다.
“시도는 좋았어!”
그녀는 그대로 팔을 뻗어 땅을 짚고, 몸을 회전시켜 발꿈치로 공중에 떠 있는 세현의 턱을 때렸다.
빠악-!
세현은 어찌저찌 낙법으로 착지는 했지만, 턱을 맞은 탓에 뇌진탕이 일어나 몸이 휘청거렸다.
그 상태에서 사카린이 사슬낫을 몇 번 던져 오자 위태위태하게 몇 번을 겨우 받아 내다 결국엔 붉은 뱀의 검을 빼앗기고 말았다.
“허세현, 이 정도면 내가 이긴 것 같은데?”
“아아…… 졌네 졌어.”
분한 느낌이 들었지만 깔끔히 패배를 인정하며, 바닥에 털썩 앉아 버렸다.
사카린의 전투 센스는 실로 뛰어났고, 조금 전의 전투는 세현에게 분명히 큰 깨우침을 줬다.
“자, 소원 들어줘야지.”
사카린이 다가와 손을 내밀었고 이를 맞잡고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대꾸했다.
“말해 봐요.”
“나랑 데이트 좀 해 주라.”
그 말을 듣는 세현은 뭔가 잘못 들었다는 듯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쑤시더니 되물었다.
“에엥……? 잘 못 들었는데요.”
“데이트해 달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