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
110화.
<네놈은, 네놈은 누구냐! 이건 대체 무슨…….>
그때 세현의 머릿속으로 사념이 흘러들어 왔다. 아래 있는 문어가 말을 걸어온 것이리라.
놈은 지금 벌어진 상황이 조금도 이해되지 않는 듯 분노와 당혹감이 뒤섞인 말들을 계속해서 토해 냈다.
“너희들, 내가 입주자인 거 다 알고 있잖아?”
<입주자가 이런 힘을 쓸 수 있을 리가 없다. 이건 시스템의 한계선에서 벗어났어…… 이 정도라면 ‘그분’들이나 되어야 쓸 수 있는 수준!>
쓸모 있는 정보를 뱉을까 싶어 놈의 지껄임을 잠시 참아 줬지만, 온통 헛소리뿐이었다. 세현은 붉은 뱀의 검을 단단히 부여잡았다.
“쫑알쫑알 시끄럽네.”
아래로 뛰어내리며 검을 휘두르자 붉은 검신이 빠르게 늘어나 놈의 미간을 뭉텅 베어 버렸다.
세현은 놈의 얼굴을 몇 번이고 더 잘라 내 커다란 깍두기로 만들어 버렸다.
[‘크툴루 스타스폰’을 처치했습니다!]
[허세현 님의 레벨이 108(으)로 상승했습니다!]
[타이틀 ‘크툴루를 분노케 한’을 얻었습니다. 올 스텟 +2]
잠시 후, 마스터키가 놈이 사망했다는 것을 알려 왔다. 세현은 시체가 녹기 전에 갈무리를 시도해 최대한 많은 재료를 확보했다.
[스타스폰의 피부], [스타스폰의 빨판], [스타스폰의 눈알], [스타스폰의 체액] 등등 푸짐한 재료들을 양껏 채집할 수 있었다.
그중 제일 호기심이 동하게 한 것은 따로 있었다.
‘이건 나중에 구워먹어 봐야지.’
[#. 재료 아이템 / 스타스폰의 고기]
- 크툴루의 별이 낳은 스타스폰의 고깃덩이. 지방질과 단백질이 조화롭게 섞여 있어 먹음직해 보인다. 버터와 함께 볶으면 맛있을지도 모른다.
효과: 혈핵 순환 개선, 정력 강화, 피어 저항력 증가.
피어 저항력을 증가시켜 주는 것은 분명 시즌4 공략에 도움이 될 터였다.
게다가 설명을 읽어 보니 그 맛도 은근히 기대가 됐다.
아마 이게 스타스폰의 고기라는 것을 알면 세이메이나 설희가 기겁을 할 수도 있으니, 몰래 요리를 해서 포의 형태로 만들어 놓는 것이 좋으리라.
시체가 완전히 녹은 후에는 [스타스폰의 부름]이라는 완제품 방어구 한 세트가 드랍됐는데, 스펙도 좋을 뿐 아니라 마법 저항력 증가 등의 부가 옵션이 달려 있어 화이트 룩에게 이를 장착시켜 줬다.
‘그래, 들인 시간이 얼만데 이 정도는 나와 줘야지.’
이것만으로도 그간 10일간의 노동에 정당한 대가는 받았다 할 수 있었다.
“고, 공사를 재개해라!”
스타스폰의 사망 이후, 나이트건트들은 다시 건설을 재개했고 반나절쯤 더 시간이 걸려서 전초기지를 완성할 수 있었다.
[히든 퀘스트 ‘진흙 속에 핀 꽃’이 완료됐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입주자여! 그대 덕분에 이 절망뿐인 드림랜드에서 한 줄기 희, 희망이 비출 것입니다!”
퀘스트 완료 메시지가 출력된 직후, 나이트건트의 수장인 바룬이 다가와 세현에게 넙죽 엎드려 절을 했다.
“다, 당신은 희망입니다!”
“가, 감사합니다!”
그러자 주변의 다른 나이트건트들도 그들 따라 함께 절을 올렸다.
“고마우면 뭐 좀 줘 봐.”
세현은 표정하나 미동하지 않은 체 나이트건트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으, 응 ? 보상이라면 노덴스 님을 만나 뵙게 해 드리는 것으로…….”
“아우 씨 진짜!”
딱-!
성질이 뻗친 세현이 바룬의 이마에 딱밤을 먹였다.
“너, 저런 놈이 몰려온다는 얘기한 적 없잖아. 저거 잡게 해 놓고 보상이 이게 끝이라는 게 솔직히 말이 돼?”
나름 합당한 의견이었다.
세현은 그냥 적당히 10일 동안 마수들을 막으면 되는 퀘스트라고 생각했다. 마지막에 뭔가 있으리라고는 생각했지만, 그게 스타스폰 같은 무식한 놈일 줄은 생각도 못 했다.
거기다 크로노스의 힘을 써서 놈의 힘까지 키워 줬으니 뭐라도 받아야 속이 풀릴 것 같았다.
“…그, 그렇지요.”
[‘진흙 속에 핀 꽃’에 보상이 추가됩니다.]
바룬은 품속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내밀었다. 포션의 일종으로 보였는데, 보통의 것과 다르게 내부에서 형형색색의 빛이 동시에 뿜어지는 것이 작은 무지개를 연상케 했다.
[#. 포션 / 노덴스의 엘릭서]
- 위대한 존재, 엘더갓 노덴스가 그의 권속에게 내린 물약. 생명의 근원을 담고 있어 이를 마시면 죽어 가는 자도 되살릴 수 있다.
효과: 상태 이상 완전 회복, HP 완전 회복, 육체 재생.
“이, 이거라면 어떻습니까.”
“뭐 접수해 두지.”
표정은 없었지만, 팔룬의 목소리에서 아쉬움이 느껴졌다.
세현이 엘릭서를 잡아당기자 은근히 손을 떼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딱밤을 때리는 시늉을 하자, 그제야 엘릭서를 받을 수 있었다.
‘언젠간 쓸 일이 생기겠지.’
소환수는 소환 해제가 된다 해도 다시 폰부터 키워 얼마든지 복구가 가능하지만, 세이메이, 에D츄, 백설희는 되살릴 수 없다. 이들이 위기에 빠진다면 이 엘릭서를 이용해 다시 한 번 살리는 것이 가능할 터였다.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그래도 분명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 같기에 세현은 이쯤에서 적당히 납득하기로 했다.
“그 노덴스인가 하는 양반한테는 언제 찾아갈 건가?”
“저, 전초기지를 활성화시키면 바로 떠나도록 하죠.”
“그럼 서둘러.”
“아, 알겠습니다!”
바룬은 나이트건트들을 통솔해 전초기지 주변을 둘러싸도록 했다. 그리고 괴상한 울음소리를 허공으로 내뿜자, 그들은 그것에 맞춰 괴상한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러자 전초기지 중심부에 우뚝 솟아 있는 가장 큰 원통형의 건물이 갈라지며 중심부에서 구 형태의 푸른 빛을 뿜어냈다.
“포, 포탈이 열렸다!”
“최후의 희망, 위대한 자 노덴스시여! 위대한 심연에서 전사들을 보내 주소서!”
나이트건트들은 그곳을 향해 절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중심부의 푸른 구가 뭔가를 계속 토해 내기 시작했다.
삼지창을 든 회색 머리의 노인, 소라 고동을 나팔처럼 입에 물고 있는 아름다운 여인, 돌고래와 인간을 합쳐 놓은 듯한 인간과 수많은 나이트건트들까지……
‘저게 다른 이공간에 있는 존재들을 소환하는 모양이네.’
잠시 후, 모든 소환이 끝나자 전초기지 근처에는 수천, 어쩌면 수만에 달할지도 모르는 대군이 펼쳐져 있었다.
“허허허허! 팔룬, 고생했네! 자네가 이 막중한 임무에 무사히 성공한 덕에 이 절망뿐인 곳에 우리가 희망을 심을 기회를 얻었군!”
“가, 감사합니다, 넵튠 님!”
흰머리에 삼지창을 든 노인이 팔룬에게 다가와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말을 걸었다.
세현은 슬며시 그의 상태창을 띄워 확인해 봤다.
[#. 거주자 / 깊은 바다의 넵튠]
- 노덴스의 하수인. 위대한 심연군의 군단장 역할을 맡고 있다. 그의 삼지창은 벼락을 내리고 모든 것을 꿰뚫는다 알려져 있다.
레벨: 173
등급: 크로니클(A)
HP / MP: ??? / ???
‘꽤 강한 놈이네.’
상대의 스킬이나 전투 스타일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스펙 하나만큼은 스타스폰에 필적하는 수준이었다.
애초에 나이트건트 같은 약골들이 아니라 저놈이 전초기지를 건설하러 왔으면 됐지 않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굳이 벌집을 쑤시고 싶지 않았기에 세현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건 그렇고, 저자들은 누구인가? 옛 존재들의 하수인은 아닌 듯한데…… 혹시 입주자들인가?”
“넵튠님! 잠시 드릴 말이 있습니다!”
삼지창 할배가 세현을 쳐다보자, 팔룬은 그에게 바짝 다가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세현이 자신들을 도와줬으며 이곳을 습격한 스타스폰을 쓰러뜨렸고, 그 보상으로 노덴스를 만날 수 있게 돕겠다는 얘기까지 말이다.
“스, 스타스폰을 쓰러뜨려? 일개 입주자가?”
“그렇습니다.”
“대단하군, 대단해…… 좋아, 그 정도 은인이라면 충분히 노덴스 님을 알현할 자격이 있지. 팔룬 자네가 저자를 인도하게나.”
“아, 알겠습니다!”
말을 끝낸 팔룬은 다시 세현 쪽으로 다가왔다.
“저, 저를 따라오십시오. 포탈을 이용해 노덴스 님에게 갈 것입니다.”
“좋아.”
세현 일행은 모두 에D츄에 등에 탄 후, 어슬렁어슬렁 포탈로 이동했다.
“이 안으로 걸어 들어오시면 됩니다.”
팔룬이 푸른 구체 안으로 먼저 들어갔고, 세현은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슈우욱-!
구체에 몸이 닿는 순간, 진공청소기에 몸이 빨리는 것 같은 감각과 함께 주변 풍경이 변했다.
“뭐야 이건?”
세현 일행의 몸은 푸른 소용돌이가 치는 공간에 둥둥 떠 있었는데, 그 소용돌이의 표면 위로 무수히 많은 마수들의 모습이 잔상처럼 떠올랐다.
그 풍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정신력이 뭉텅뭉텅 깎여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저를 붙잡으시지요. 그리고 되도록 옆을 보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마수들의 여러분의 정신을 흔들 테니…….”
팔룬이 자신의 기다란 꼬리를 에D츄의 얼굴 쪽으로 내밀었다.
“츄?”
에D츄가 고개를 갸우뚱대자 세현은 발로 옆구리를 차며 말했다.
“에D츄, 그거 입으로 꽉 물어!”
“하지만 쭈인님! 냄새날 것 같이 생겼는데요!”
“시끄러! 그럼 내가 물까?”
세현이 이마를 퍽- 소리가 나게 때리자 혹이 부풀어 올랐고, 에D츄는 그제야 발룬의 꼬리를 입으로 붙잡았다.
“흐으으윽! 흐으읍! 꼬리에서 썩은 생선 냄새가 난다츄!”
마치 입에 똥이라도 넣은 것 같은 표정으로 울먹였지만, 세현은 내 알 바 아니었다.
“가겠습니다.”
발룬은 날개를 퍼덕이며 소용돌이 안쪽으로 들어갔다.
‘오른쪽, 오른쪽, 왼쪽, 아래, 위……’
소용돌이는 단순히 일직선이 아니라, 미로와 같은 구조로 돼 있었다. 세현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길의 구조를 대강이나마 머릿속에 새겨 넣었다.
“다, 다 왔습니다.”
잠시 후, 소용돌이를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어라?”
둥실-.
떠오르는 느낌과 함께 세현 일행의 몸을 거대한 물방울이 감쌌다.
“이곳이 최후의 희망이신 노덴스 님이 계신 위대한 심연입니다.”
몸을 감싼 거대한 방울은 팔룬을 따라 부유하며 앞으로 천천히 나아갔다.
“이거 잠수함이라도 탄 기분이네.”
“아름답습니다, 주군!”
어둠이 가득한 바닷속, 거대한 아귀들이 둥둥 떠다니며 반딧불처럼 빛을 밝히고 있었다.
또한 나이트건트들과 물고기 형태의 수인이 넘쳐 났으며, 여기저기 쌓여 있는 조개가 형형색색의 빛을 뿜으며 아름다운 풍광을 연출했다.
이곳은 마치 바닷속에 있는 우주 같았다.
“저곳이 노덴스 님이 계신 곳입니다.”
길의 끝에서 전체가 사파이어를 깎아 만든 것 같은 거대한 성이 모습을 드러내며 빛을 번쩍였다.
정문으로 다가가자 가재와 개를 적당히 섞어 놓은 것 같은 생김새의 수인들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파-팔룬 대장님! 안녕하십니까!”
“뒤에 있는 그분들은 누구입니까?”
“노, 노덴스 님을 만나 뵐 손님들이네, 피해 주게.”
“넵!”
팔룬의 한마디에 경비들이 물러서며 성문을 열었다.
‘얘, 생각보다 여기선 잘나가는 놈인가?’
전투력이 워낙 형편없었기에 세현은 팔룬을 그저 총알받이 하러 온 말단 간부쯤으로 여겼는데, 생각보다는 이곳에서 꽤 신망이 있는 녀석인 듯했다.
성 내부는 바깥 못지않게 아름다웠다.
잘 세공된 암석 위로 산호초들이 가지런히 붙어 있는데, 성 전체가 마치 저명한 예술가의 작품을 보는 듯했다.
이런 절경을 즐기며 성의 안까지 들어가자, 넓은 홀이 드러났다.
그 중앙에 놓인 거대한 의자에는 짧은 흰색 머리를 가진 근육질의 미남자가 앉아 있었는데, 발룬은 그에게 곧장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최후의 희망 노덴스시여, 저 발룬! 성공적으로 전초기지의 건설을 마치고 복귀했습니다!”
<워~ 고생했어. 십중팔구 죽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용케도 성공했네. 그 뒤에 있는 입주자들이 도와준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