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
108화.
독수리 같은 형체, 몸 곳곳에 드래곤을 연상시키는 두터운 비늘에 말의 얼굴을 한 괴물.
일명 샨타크라 불리는 괴물로, 시즌4의 메인 던전 보스 중 하나인 ‘기어다니는 혼돈’의 추종자들이었다.
저놈들을 잡으면 잡을 때마다 ‘혼돈의 파편’을 얻을 수 있는데, 꽤 쓸 만한 재료 아이템이기에 틈이 나는 대로 모아 두는 것이 좋았다.
“끼에에에에엑!”
놈이 주변을 뱅글뱅글 돌더니 번개처럼 세현을 향해 내리꽂았다.
거리가 가까워지면 질수록 놈의 비대한 몸뚱이가 시야를 가려 왔지만 세현은 팔짱을 낀 채 조금도 미동하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놈의 거대한 부리가 머리를 꿰뚫을 터였다.
그때, 퀸이 흰색 검을 잡아 허공에 가볍게 휘둘렀다.
쩌어어어어억-!
놈의 몸뚱이에 붉은 선이 그어지더니 그걸 기점으로 정확히 반으로 갈라져 허공으로 피와 내장을 흩뿌렸다.
‘뭐, 이 정도면 30대 후반 층까진 그냥 달려도 충분하겠네.’
세현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녹고 있는 놈의 사체로 다가갔다. 그 자리엔 보랏빛을 띠는 주먹 크기의 결정체가 남아 있었다. 이것이 ‘혼돈의 파편’이었다.
세현은 그걸 들고 뒤쪽을 슬쩍 바라보며 말했다.
“다들 준비됐어?”
“뭘 말씀하시는 겁니까, 주군?”
“싸울 준비 말이야.”
파직-!
손에 들린 혼돈의 파편이 으깨졌다. 그러자 보라색 연기가 주변으로 스멀스멀 흩어졌다.
그렇게 3~4분이 지났을 무렵.
“히이이익! 쭈, 쭈인님! 저것 보세요!”
에D츄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향. 그곳엔 샨타크들이 검은 구름을 뚫고 나와 하나둘씩 하늘을 빙글빙글 맴돌고 있었다.
백, 2백……
숫자가 늘어날수록 모두의 얼굴이 사색이 되어 갔다.
그 숫자는 가늠이 불가능할 정도로 늘어났고, 샨타크 무리가 하늘을 나는 거대한 뱀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끼에에에에에엑!!!”
잠시 후, 그 거대한 뱀이 아가리를 벌리고 일제히 지상으로 추락했다.
“앞으로!”
세현은 두 룩을 앞으로 내보낸 후, 에D츄를 그 뒤에 배치했다. 샨타크 무리가 그 앞에 그대로 충돌했고, 셋은 동시에 뒤로 빠르게 밀려났다.
“오에엑엑! 바, 발이 뜨거워요 쭈인님!”
“조금만 버텨!”
그 틈을 타, 양 날개에서 기동성이 좋은 근거리 딜러들이 빠르게 파고들었다.
‘역시 장비를 바꾸니 텐션이 확 올라가네.’
마사무네의 새로운 장비와 스티그마로 새 단장한 소환수들은 막강했다.
블랙, 화이트 나이츠가 메뚜기처럼 폴짝 폴짝 뛰어다니며 창과 양손대검을 팽이처럼 휘두를 때마다 못해도 샨타크가 2~3마리씩 썰려 나갔다.
거기에 퀸은 한술 더 떴다. 놈들의 몸을 발판 삼아 올라가며 곳곳에 검을 십자로 그어 공간을 폭발시켰다.
펑! 펑! 펑!
폭발은 한 번에 샨타크 수십 마리를 집어삼켰다.
이것으로 뱀처럼 뭉쳤던 샨타크들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세현은 그 틈을 치고 들어갔다.
“좋아, 이틈에 나도 한 번 신제품 성능 테스트 좀 해 보자고!”
그리고 붉은 검을 소환해 한 손에 꽉 쥐었다.
이는 ‘붉은 뱀의 검’이라는 이름의 아이템으로, 얇은 두께에 키만 한 크기의 붉은색 검신을 가졌다. 마사무네가 기존의 별운검을 베이스 재료로 삼아 개조한 것이다.
별운검의 가장 큰 장점인 소환수 숫자에 따라 강해지는 스킬을 모두 계승했다. 특히 소환수의 숫자에 따라 검의 공격력을 올려 주는 ‘장수의 기질’은 소환수 숫자에 따라 증가하는 공격력의 상한선이 무제한으로 바뀌었다.
세현은 자신이 소환수를 15마리까지밖에 소환하지 못한다는 것이 원통했지만, 당장 15마리 소환수의 버프를 적용 받는 것만으로도 이미 공격력은 70레벨치 이상 상승하여 괴물 같은 수준이 됐다.
거기 ‘붉은 뱀의 또아리’라는 새로운 액티브 스킬의 추가되어 이 검의 화룡점정을 찍었다.
촤르르륵-!
세현이 손잡이에 달린 작은 버튼을 누르며 붉은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검신이 불꽃을 튀기며 늘어나며 진짜 뱀처럼 앞으로 끝도 없이 뻗어 나갔다. 그 결과, 지나는 길에 있는 샨타크들의 목이니 날개들을 퍽퍽 꿰뚫어 버렸다.
이것이 뱀처럼 검을 자유자재로 늘려 적을 공격하는 ‘붉은 뱀의 또아리’였다.
“하하, 역시 신상이 좋구만.”
세현은 새로운 장비의 성능에 만족했는지 입꼬리를 올리며 다시 손잡이의 버튼을 지그시 눌렀다.
“돌아와!”
쐐애애액-!
그러자 붉은 뱀의 검이 뻗어 나간 것보다 배는 빠르게 검신이 줄어들며 몸이 꿰뚫린 샨타크들이 처참히 잘려 나갔다.
“손맛 좋은데!”
세현은 비릿한 미소와 함께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그 때마다 피와 고깃덩이가 후두둑 떨어졌다.
그렇게 양 측면에서 파고든 근거리 딜러들이 신나게 적을 도살하는 와중, 비숍과 화이트 폰들이 후방에서 지원을 했다.
“끼에에에엑!”
샨타크들은 대혼란 속에서 추풍낙엽처럼 쉴 새 없이 썰려 나갔다.
[허세현 님의 레벨이 104(으)로 올랐습니다.]
[허세현 님의 레벨이 105(으)로 올랐습니다.]
장장 서너 시간에 걸친 전투, 레벨이 두 번이나 오르는 동안 세현 일행은 온몸이 피로 범벅이 돼 버렸다.
바닥에 남은 무수히 많은 혼돈의 파편들만이 이곳에 샨타크들이 있었다는 증거였다.
“자자, 다들 주워 모읍시다.”
세현은 소환수들까지 동원해 바닥에 혼돈의 파편을 쓸어 담았다.
‘이거 뭐 싹쓸이 조업하는 중국 어선이라도 된 기분이네.’
인벤토리에 들어간 혼돈의 파편 개수는 총 1800여 개. 이 정도라면 추후에 장비 재료로 쓰기에는 충분하고도 남는 숫자였다. 자연스레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띄워졌다.
그때였다.
“그, 그대는 -이 , 입주자인가? 어, 엄청나게 강한 힘을 가졌군!”
머리 위에서 중성적인 느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자 인간의 몸에 박쥐 날개와 뿔을 가진 괴생명체가 천천히 날개를 퍼덕이며 세현의 앞으로 내려왔다.
딱히 적의는 없어 보였기에 세현은 팔짱을 낀 채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나, 나는 나, 나이트건트 무리를 이끌고 있는 ‘바룬’이라고 한다. 예, 옛 존재들에 맞서 싸우고 계신 고귀한 자, 노덴스 님의 하수인이지. 괘, 괜찮다면 내 얘기를 좀 들어 봐줄 수 이, 있겠나?”
‘어랍쇼, 이건…….’
세현은 이것이 히든 퀘스트의 전조라는 것을 확신하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고, 고맙네. 내, 내 얘기를 하자면-.”
요약하자면, 현재 노덴스라 불리는 ‘위대한 존재’에게 임무를 받은 상태로, 이곳에 ‘옛 존재’와 싸움에서 전초기지가 될 장소를 확보해 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예상했던 것 보다 ‘옛 존재’의 하수인들의 숫자가 훨씬 많아 고전하고 있다는 모양이었다.
“우, 우리가 저, 전초기지를 완성할 수 있게 도와줄 수 있겠나?”
추측하건대 그들이 전초기지를 지으려는 장소 근처에서 샨타크들을 압도적인 기세로 쓸어버린 것이 지금 이벤트 발생의 트리거가 된 모양이었다.
세현은 잠시 고민하다 한마디를 더 물었다.
“보상으로 뭘 줄 건데?”
“노, 노덴스 님에게 자네가 우리에게 도움을 주었다 말씀드리고 위대한 심연에서 그분을 만나 뵐 수 있게 해 주겠네. 자비로운 분이시니 분명 크, 큰 상을 내리실 거야.”
그 말이 끝나는 순간 세현의 눈앞에 팝업창이 출력됐다.
[#. 히든 스토리 퀘스트 / 진흙 속에 피어난 꽃]
- 절망과 비명 소리뿐인 드림랜드에서 고귀한 자의 하수인인 나이트건트들이 요새를 완성할 수 있도록 옛 존재의 하수인들로부터 지켜 주십시오. 요새가 완성되면 이곳에도 한 줄기 희망이 내리쬘지도 모릅니다.
퀘스트 클리어 조건: 10일간 요새 방어.
적정 레벨: 150 이상.
[수락하기]
‘흐음…… 이걸 어쩐다.’
세현은 잠시 고민했다. 어떤 보상을 주는지 모르는 데다 퀘스트 하나를 클리어하는 데 10일이라는 꽤 긴 시간이 걸리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해 볼까?’
히든 퀘스트는 아직 보상 면에서 세현을 한 번도 실망시킨 적이 없었다. 게다가 아파트의 특성상 클리어가 어려울수록 좋은 보상을 주는 것이 보통이다.
게다가 노덴스라는 녀석은 F급이던 시절에 한 번도 본적이 없기에 이 기회에 한 번쯤 봐 둬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어차피 한동안 경쟁자도 없을 테니까.’
상위권 길드들은 아직도 시즌3을 헤매는 중이다. 조금의 리스크를 감당하더라도 10일 정도는 충분히 투자해 볼 만했다.
세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락하기] 버튼을 눌렀다.
“고, 고맙네!”
나이트건트는 연신 고개를 꾸벅이며 감사를 전했다. 그러곤 고개를 하늘로 추켜올리더니, 입으로 호루라기를 부는 듯한 소리를 크게 내보냈다.
그 소리와 함께 허공으로 금빛 파장이 흩어지더니 잠시 후, 검은 구름을 뚫고 수백 마리의 나이트건트가 지상을 향해 날아들었다.
“바, 바룬 님! 저 입주자와 잘 이야기가 된 것입니까.”
“그, 그래. 이분께서 우리를 도, 돕기로 해 주셨다네.”
“다, 다행입니다! 저, 저분이라면 분명 임무에 성공할 수 있을 겁니다.”
나이트건트들은 생김새에 안 어울리게 감격한 듯 보였다. 아무래도 노덴스라는 놈이 준 임무가 그들의 힘만으로 성공시키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흐음…… 확실히 저 정도면 여기선 못 살아남겠네.’
호기심에 나이트건트의 상태 창을 열어 봤다.
그들의 스펙은 샨타크들과 비슷하거나 조금 낮은 편.
마수가 썩도록 넘쳐 나는 이곳에서 겨우 몇백 정도의 숫자로 전초기지를 만든다? 세현이 생각하기에도 이건 나 잡아 잡수 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럼 내가 지금부터 뭘 해 주면 되는데?”
“여, 여기 몰려오는 마수들을 마, 막아 주시면 됩니다.”
“오케이~ 그럼 공사들 시작하쇼.”
얘기가 끝난 후, 나이트건트들은 자신들이 가져온 작은 큐브를 바닥에 던졌다. 그것이 빛을 뿜자 바닥 근처에 전진기지를 짓는 데 사용될 자재들이 동시에 소환됐다.
“흐미……. 이 자재들을 10일 만에 다 쓴다고?”
쌓여 있는 자재 양이 성 하나는 족히 지을 수 있을 것 같은 수준이었다.
세현은 일행과 함께 멀찍이 떨어져 건축 현장이 잘 보이는 고지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소환수를 반반으로 나눠 한 무리는 주변의 고지대에서 마수들이 다가오는 것을 감지하도록 경계 명령을, 나머지 반절에는 ‘순찰’ 명령을 내려 이 근처에서 오토 사냥을 하게 했다.
그런 다음 바닥에 돗자리를 깔고 털썩 주저앉아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다.
“좋아. 한번 10일 동안 버텨 보자고.”
† † †
[2일째]
나이트건트들이 전초기지의 뼈대를 완성했다.
그러자 이를 발견한 마수들이 슬슬 몰려들기 시작했고, 이를 길목에서 막아 내야 했다.
이날 잡은 마수의 숫자는 총 500여 마리. ‘샤가이의 곤충’, ‘구그’ 등 등장한 몬스터들 대부분이 조무래기 급들뿐이라서 굳이 나설 필요가 없었다.
세현은 스마트폰으로 유튜브 영상이나 보면서 낄낄대던지 설희, 세이메이와 이야기나 하며 시간을 때웠다.
[4일째]
첫 건물이 완성됐다. 그건 거대한 캐논을 탑재한 포탑이었다.
감지 계통의 마법이 걸려 있는지, 주변에 마수가 다가오면 이를 자동으로 포착해 먼 거리에서 푸른 섬광을 발사해 섬멸했다.
불만이 있다면 전초기지에 지어 놓은 것치고 쓸데없이 화려한 장식들이 들어갔다는 것 정도다. 아마 이런 포탑이 몇 개만 더 있다면, 기지 방어가 더욱 수월해질 수 있을 터였다.
이날 나타난 마수의 숫자는 1000여 마리 정도. 전날의 딱 두 배 정도였지만 역시 강하지 않았고, 포탑이 있어 어렵지 않게 막아 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