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
99화.
라바 리자드들은 마치 레밍즈(자살쥐)라도 된 것 처럼 절벽 아래로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으아아아악! 사, 살려줘!!”
차마 탈출하지 못한 카드 병사들은 라바 리자드들과 함께 절벽 아래의 용암지대에서 단말마의 비명을 내질렀다.
세현이 절벽 위에 뛰어내린 몇 명의 카드 병사를 마저 정리하자 마스터키가 빛을 뿜으며 메시지를 출력했다.
[축하드립니다! 허세현 님의 레벨이 ‘90’(으)로 상승했습니다!]
“나이스.”
지난 몇 주간 세현은 E~F급 입주자들을 마주했던 일로 머리가 복잡했었다. 그걸 어떻게든 머리에서 떨쳐 내기 위해 미친 듯 사냥에 집중했다.
25층 메인 퀘스트를 숨도 안 쉬고 클리어했으며 이후에는 남들이 보면 미쳤다고 할 만큼 사냥에만 집중했다.
그 결과, 목표로 하던 시간을 며칠이나 앞당겨 90레벨에 도달할 수 있었다.
레벨 90.
현재 서큐버스 군단 멤버들 대다수가 130~140레벨까지 치고 나갔지만, 이전 허세현의 레벨을 생각하면 많이 따라 수치였다.
또한 레벨 업에 따라 폰의 최대 소환 가능 숫자도 8명까지 늘어 소환수만 14명이 됐으며, 에D츄, 세이메이, 백설희의 레벨도 80 중반까지 올라갔다.
이 정도면 충분히 자바워키 공략에 제대로 된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후~ 다들 고생했습니다. 다들 집 들어가서 좀 쉬죠.”
목표를 달성한 세현은 살짝 긴장을 풀고, 곧장 8층의 집으로 돌아갔다.
길드원들과 약속한 자바워키 공략일도 아직 3일이나 남은 상태, 레벨 업을 더 해도 좋겠지만 세현은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다.
피곤했다.
못해도 하루 이틀은 한동안 아무 생각 없이 놀고 먹고 퍼질러 자고 싶었다.
일단 8층으로 돌아가 마당의 평상에 앉아 같이 식사를 했다.
차려 먹는 것도 귀찮아 근처의 식당에서 초밥을 포장해 와 먹었고, 에D츄는 사료 한 포대를 바닥에 가득 부어 줬다.
간만에 사람다운 식를 하는 것에 행복감을 느끼던 중.
지이잉-.
상 위에 올려놓은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어?”
스마트폰 위에 찍힌 번호를 본 설희가 심각한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죄송해요, 잠깐 통화 좀.”
그러곤 멀찍이 떨어져 잠시 통화를 했다. 정확히 들리진 않지만 약간의 고성이 오가는 걸로 보아 평범한 일은 아닌 듯 보였다.
‘혹시….’
세현은 대강 짐작이 가는 부분이 있었다. 설희는 잠시 후 다시 테이블로 돌아왔다.
“무슨 급한 일이라도 생겼어요?”
“아, 그게요. 잠깐 밖에 좀 다녀와야 될 것 같아요. 별일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그러더니 급하게 집 밖으로 나가 버렸다.
“주군, 설희 공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요?”
“글쎄다.”
세현은 남은 스시를 3~4개를 동시에 입에 구겨 넣고 물과 함께 꿀꺽 삼켜 버렸다.
“이제부터 내가 알아봐야지.”
† † †
지어진 지 족히 수십 년은 돼 보이는 낡은 주택.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뭔가를 때려 부수는 소리와 고함소리들이 들려왔다.
“돈 언제 갚을 거야!”
“히이이익! 이, 이자는 냈는데요!”
“원금을 언제 낼 거냐고, 원금은! 당신네들이 갚아야 할 돈이 얼만 줄 알아?
중년 남자와 여자가 벌벌 떨고 있었다. 검은 정장에 선글라스를 낀 네댓 명의 거구들이 그들을 둘러싸고, 집안의 물건들을 죄다 박살 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딸년 빨리 오라 그래! 그 잘난 국가 대표 선수면 돈 많을 거 아냐 엉?!”
“저, 전화했으니까 제발 때리지만 말아 주세요!!”
잠시 후, 현관문이 열렸다.
“당신들, 무슨 짓이에요!”
백설희가 가쁜 숨을 내쉬며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검은 정장들은 선글라스를 살짝 추켜올리더니 기분 나쁜 시선으로 설희의 전신을 훑어봤다.
“오~ 잘난 따님이 오셨구만.”
“할 말 있으면 저한테 하세요.”
“아, 할 말? 할 말 많~지! 돈 값아, 35억.”
검은 정장이 손바닥을 내밀며 흔들자 설희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얘기가 다르잖아요. 이자도 꼬박꼬박 내고 있고, 원금도 갚고 있는데 왜 이러는데요?”
실제로 빚은 꼬박꼬박 갚아 나가고 있었다.
설희 또한 서큐버스 군단에서 수입을 올리고 있기에 못해도 4~5년만 있으면 빚을 모두 갚을 수 있을 터였다.
“그거야 옛날 전임자들 얘기고~ 우리는 새로 파견된 인간들이라서 말이야. 위쪽에서 최대한 빨리 다 받아 내라고 오더가 떨어졌거든.”
“그런 억지가!”
주먹을 꽉 쥐자, 검은 정장들이 뒤로 살짝 물러나더니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워워워~ 입주자라고 힘자랑하려고? 영상으로 찍어서 유튜브에 올릴까? 아니면 경찰에 신고? 언론사가 아주 좋~아하겠다 그지?”
“뭐 굳이 주먹다짐 하고 싶다면 그것도 우리도 나쁘진 않아.”
그들은 정장 단추를 풀러 왼쪽 팔목을 살짝 걷었다. 그러자 각양각색의 마스터키들이 슬쩍 비춰 보였다.
“이, 입주자?”
“어때, 이제 빚 갚을 마음 좀 생겼나? 니들 같은 악성 채무자 때문에 우리까지 나서는 거야.”
“…….”
설희가 분한 듯 고개를 떨구고 천천히 말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당장 돈을 마련할 방법이 없어요.”
“없긴 왜 없어~ 백설희 당신 A급 입주자 아니야? 여기저기서 대형 길드에서 오퍼가 올 텐데?”
끝까지 말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A급 입주자라는 설희의 신분을 이용해 돈을 긁어 오라는 얘기다.
그리고 그렇게 큰돈을 한 번에 지급해 줄 수 있는 길드는 몇 되지 않는다.
“시간을 좀 주세요.”
“시간이라~ 얼마면 되려나? 우리도 사정이 있어서 길게는 못 드려.”
“2주, 2주만 주세요.”
검은 정장들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못이기는 척, 큰 인심이라도 쓰는 마냥 대꾸했다.
“어우~ 이거 이러면 안 되는데 내가 당신 전성기 때 팬이었어서 봐줄게. 윗선에는 내가 잘 말해 둘 테니까, 2주 내로 35억 가져와.”
그들은 만족한 듯 낄낄거리며 방을 빠져나가기 위해 현관문을 열었다.
그때였다.
쾅-!
“뭐, 뭐야 씨발!”
갑자기 현관문이 열리며 가장 앞에 있던 검은 정장이 부딪혀 뒤로 날아갔다.
현관에는 더벅머리의 남자가 씨익 웃으며 서 있었다.
“35억 오셨다, 이 양아치들아.”
† † †
“허, 허세현이 여긴 왜?”
그 자리에 있는 것은 최근 ‘브레이브킹’이라는 가명으로 주가를 올리고 있는 입주자, 허세현이었다.
세현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비아냥대듯 말했다.
“왜? 별 듣도 보도 못 한 깍두기들도 찾아오는데, 설희 씨랑 같은 길드 소속인 내가 오면 안 되냐?”
“이런 또라이 새끼……. 컥!!!”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세현의 주먹이 검은 정장의 배를 때렸다. 그의 몸이 부웅 떠올라 벽에 처박혔다.
“씨발, 덮쳐!”
검은 정장들이 동시에 무기를 꺼내 달려들었다.
세현은 몸을 살짝 틀어 최초의 공격을 피한 후, 급소에 주먹을 한 방씩을 먹여 줬다.
“커어억!”
잠시 후, 검은 정장들은 모두 입에 게거품을 물고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세현은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가장 직급이 높아 보이는 놈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그러자 그는 잔뜩 겁먹은 목소리로 외쳤다.
“이,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아! 조사단에 신고하면 너 따위!!”
“하려면 하던지, 입주자들이 사채업하는 건 괜찮고?”
“이이익….”
“니들한테 이 짓거리 시킨 놈이 누구냐?”
“그야 나야 모르지, 윗선에서…….”
짝-!
세현의 오른팔이 검은 정장의 뺨을 세차게 때렸다.
“그러니까 그 윗선이 누구야.”
“내가 그걸 알 리가!”
짝-!
“누구냐.”
“몰라! 진짜로 모른다고!!”
짝-!
“누구?”
“거짓말 아니라 정말…….”
짝-!
“모, 몰라요 제발.”
몇 번의 ‘짝’ 소리가 반복되자 검은 정장의 목소리가 흐느낌이 되고 두 뺨이 퉁퉁 불어 터졌다.
‘정말 모르는 눈치인데.’
세현은 한숨을 푹 내쉬며 그를 바닥에 내친 후, 엉덩이를 걷어차며 말했다.
“야, 이 인간 부축해서 데리고 가. 여기서 있었던 일들 죽기 싫으면 절대 입 밖에 내지 말고.”
“네, 네!!”
검은 정장들은 혼비백산해서 방을 빠져나갔다.
“세현 씨.”
고개를 돌리자 담담한 얼굴의 설희와 벌벌 떠는 그녀의 부모들이 보였다.
세현은 험악했던 표정을 거두고 싱긋 웃으며 말했다.
“설희 씨, 잠깐 얘기 좀 하죠.”
두 사람은 조용히 아파트의 옥상으로 올라가 철문을 닫았다.
직후, 설희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해요, 세현 씨.”
“왜요, 잘못한 거 없잖아요.”
“하지만 이렇게 민폐만 끼쳐서……”
“흐음.”
세현은 잠시 고민하는 듯 신음하다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이거 길드장한테 말해 보는 건 어때요? 뭐 갚는다는 조건이면 그 정도 돈은 빌려주지 싶은데, 저도 한 3~4억 정도는 보태 드릴 수…….”
실제로 서큐버스 군단이라면 길드에 쌓아 둔 적립금이 몇십 억은 족히 될 터였다. 물론 백설희 개인에게 이를 빌려줄지는 모르지만, 허세현이 보증을 서 준다면 사카린 입장에서는 거절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건 안 돼요. 제가, 제가 어떻게든 해결할 테니까 ”
설희는 세현의 제안을 극구 거절했다. 누군가에게 폐를 끼친다는 것 자체가 싫은 모양이었다.
이런 면에서 은근히 고집이 있는걸 알기에 더 밀어붙여 봤자 설득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그럼 몇 가지만 물어볼게요. 오늘 찾아온 사채업자들 전부 입주자들이던데, 원래부터 그놈들이 찾아왔어요?”
“아, 아뇨…. 입주자들이 찾아온 건 오늘이 처음이에요.”
“빚은 어느 회사 앞으로 달려 있어요?”
“채권이 계속 다른 곳으로 이관돼서… 지금은 팽론이라는 회사 앞으로 돼 있어요.”
“오. 팽론.”
세현은 뭔가 알았다는 듯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딱 걸렸어 이 새끼들.’
대외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팽론은 블루울프에서 암암리에 운영하는 소비자 금융 기업이다.
세현의 전생, 시즌4가 종료될 때 즈음 다른 상위권 길드들에 의해 이 문제가 폭로되는 ‘블루울프 게이트’ 사건이 있었다.
이로 인해 블루울프는 조사단에게 탈탈 털려 갖은 치부가 드러났고, 핵심 멤버들이 줄줄이 구속되는 등 궤멸적인 타격을 입고 다시는 상위권으로 올라오지 못했다.
그 당시 블루울프가 팔콘 길드와 연관이 돼 있다는 의혹이 추가로 제기됐지만 조사단의 수사는 그즈음의 선에서 꼬리를 자르고 급하게 마무리됐었다. 누가 보더라고 한성 그룹이 빠르게 손을 쓴 것이었지만, 조사단 내부에도 팔콘의 끄나풀들이 많은 덕에 계속해서 수사 방해가 들어왔고 사건은 흐지부지돼 버렸었다.
세현은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을 무기로 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이거 잘만 파면 블루울프랑 팔콘 둘 다 골로 보낼 수도 있겠는데.’
입가에 비릿한 웃음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