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
96화.
“여어~ 여러분 고생 많으십니다!”
거구의 검은색 몬스터 대신 그 자리에는 흰색 중갑옷을 입은 남자가 여유 가득한 얼굴로 손을 흔들어 보였다.
“허, 허세현?”
“어떻게 여기에? 서큐버스 군단은 다른 거점에 있다고 들었는데?”
그의 정체는 서큐버스 군단에서 브레이브킹이라는 닉네임으로 연일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는 슈퍼루키, 허세현이었다.
“막아! 저놈을 퀘스트에서 이탈시키는 거다!”
거점을 지키던 입주자들이 빠르게 반응했다. 그들은 제각기 대인전에서 강한 위력을 발휘하는 스킬을 즉시 퍼부었다.
하지만 세현은 스킬들을 여유롭게 피해 내며, 별운검을 휘둘러 입주자들에게 데미지를 입혔다. 거기에 수십 마리의 소환수가 린치를 가하며 입주자들은 속수무책으로 데미지를 입고 제압당했다.
“하, 항복…….”
그들은 모두 항복을 선언했다.
“저기 조사단원님! 여기 이분들 전원 항복이라는데요!”
“아, 예예!”
잠시 후, 근처에 대기 중이던 조사단원 하나가 허둥지둥 달려와 이들을 퀘스트에서 이탈시켰다.
이 모든 게 채 5분도 되지 않아 벌어진 일이었다.
모든 입주자들이 아웃된 덕에 이 일대는 말 그대로 무주공산이 됐고, 세현은 5레벨짜리 블랙 폰 하나만을 남기고 모든 소환수를 소환해제했다.
그러곤 블랙폰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룩이랑 같이 거점 잘 지키고 있어라.”
그 직후, 세현이 싱긋 웃으며 다시 스킬을 발동시켰다.
“캐슬링.”
몸에서 빛이 뿜어지더니 그 자리에는 검은 거인, 블랙 룩이 나타났고 세현은 다시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 † †
서큐버스 군단이 지키고 있는 6번 거점은 여전히 전투가 한창이었다.
하지만 그 분위기는 서큐버스 군단이 황금날개를 상대로 밀어붙이던 수십 분 전과는 사뭇 달랐다.
사카린의 주력 스킬 ‘밤의 주인’의 발동 시간이 끝난데다가 장기전이 되니 기본적인 머릿수에서 오는 차이가 컸다.
한 명 한 명, 서큐버스 군단측 인원들이 전투 불능 상태가 되거나 항복으로 이탈할 때마다 전력의 차이는 점점 더 벌어지고 있었다.
아마 백설희가 쓰는 광역 버프 스킬마저 없었다면 이 전투는 진즉에 황금날개의 승리로 끝났을 것이다.
피투성이가 된 사카린이 이를 악문 채 사슬낫을 휘두르며 최은철과 김현, 정요셉의 조합을 홀로 상대했다.
어찌 저찌 치명상을 입는 것만은 막아 내고 있지만, 애초에 세 명 모두 엄청난 실력자이기에 사카린의 몸에는 상처가 하나둘씩 늘어 가고 있었다.
“허억…… 허억……. 야 최은철, 솔직히 여자 상대로 3:1은 좀 치사하다고 생각하지 않냐?”
“힘들면 항복하시죠? 저기 조사관도 있는데 말입니다?”
사카린의 근처에 조사관이 다섯 명이나 붙어 있었다. 여차하면 그녀를 퀘스트에서 탈락 처리할 심산인 듯 보였다.
“항복 같은 소리하고 있네, 내 몸에 손 하나라도 까딱하면 조사관이고 뭐고…….”
살의가 담긴 한마디, 그에 조사단들은 흠칫 놀라 뒤로 한 발씩을 물렸다.
“미쳤군요. 팔을 한두 개 잘라 드려야 정신을 차릴 겁니까?”
“그럼 이빨만 털지 말고 해 보시던가.”
최은철은 거침없이 사카린을 밀어붙였다.
결국 사카린은 더 버티지 얼마 가지 못해 어깨에 치명상을 입어 바닥에 나뒹굴었다.
“사카린 씨 탈락, 탈락입니다!”
옆에 있던 조사단원들이 동시에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하지만 사카린은 사슬낫을 계속 휘둘러 대며 그들이 다가오는 것을 막았다.
“가까이 오지 마! 나는 끝까지 할 거다!”
은철은 그런 사카린의 모습을 보며 가소롭다는 듯 웃으며 앞으로 걸어갔다. 어차피 사카린은 이제 조사단원들이 처리할 것이기 때문에 무시해도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머리를 쳤으니 이제 끝낸다.’
이제 서큐버스 군단에 남은 인원은 오직 4명뿐, 그 반면 황금날개는 38명이라는 상대적으로 넉넉한 인원이 남아 있었다.
“여, 여긴 못지나간다츄!”
“못 지나갑니다! 최은철 공!”
거점 앞에서 거대 햄스터, 여자 음양사, 백설희가 함께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웃기지도 않는군요.”
하지만, 애초에 이런 구성으로 A급 입주자들로 구성된 황금날개를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황금날개 멤버들이 달려들자 그들은 채 몇 분도 버티지 못하고 금세 나가떨어졌다.
“츄우우우! 부, 분하다!”
“조금만 더 버텨, 쥐새끼!”
하지만 마지막 남은 자들은 처절하게 저항했다. 이미 전투의 승패는 갈렸지만, 어떻게든 안으로 기어 들어가 팔콘이 거점을 먹는 것을 집요하게 방해했다.
“항복 못 해! 아직 못 한다고!”
특히 사카린은 지독하리만큼 마지막까지 발악을 하며 시간을 끌었다. 조사단원들을 뚫고 거점으로 들어와 계속 거점 내부로 기어들어 온 것이다.
결국에는 조사단원들에 제압돼 퀘스트에서 탈락 처리됐지만, 그 악에 받친 모습에 황금날개들도 기가 질릴 정도였다.
은철은 조사단원들에게 포박된 채 끌려가는 사카린의 모습을 보며 작게 읊조렸다.
“추하군 추해.”
최은철은 가소롭지도 않다는 듯 콧방귀를 뀌며 남은 길드원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다 같이 점령한다.”
황금날개 전원이 거점 안으로 들어갔다. 인원수에 비례해 속도가 빨라지기에 점령에는 채 5분도 걸리지 않을 터였다.
거점의 원형 타일의 테두리를 따라 뿜어지는 하늘색 빛이 점점 줄어들고 붉은 빛이 점점 그 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그렇게 점령이 반쯤 진행됐을 무렵-.
[앨리스 진영이 하트여왕 진영의 2번 거점을 탈환했습니다!]
“뭐?!”
갑작스레 들려온 메시지에 은철이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2번 거점은 하트여왕 진영의 스타팅 지점에서 가장 가까운 장소다. 그곳이 탈환됐다는 것은 최후방에 앨리스 진영의 누군가가 습격을 해 왔다는 뜻이었다.
“정요셉 팀장! 무슨 일인지 당장 파악해!”
“어, 빠, 빨리 파악하겠습니다!!”
정요셉은 허둥지둥 마스터키를 조작해 2번 거점에 대기 중인 입주자들을 수소문했다.
최후방에 있던 입주자들이 팔콘 길드원이 아니기에 이를 파악하는 데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잠시 후 대답을 들은 정요셉은 뭔가 곤란한 듯 우물쭈물 대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그게 말입니다. 허세현이 후방 거점을 공격했다고 합니다!”
“무슨 헛소립니까! 그놈이 벌써 거기까지 가서 혼자 거점을 먹었다고요? 상식적으로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허세현은 조금 전까지 최은철에게 공격을 퍼붓다 무언가의 스킬을 사용해 사라졌다.
그때는 단순히 텔레포트나 은신 계통의 스킬을 썼을 거라 추측하고 최은철은 눈앞의 사카린을 치우는 데 전념했다.
허세현이 아무리 날고 기어 봤자 혼자서 뭔가를 할 수 있을 거라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이제 어떻게 할까요?”
“이런 씹…….”
은철의 초조함은 극에 달했다. 거점을 하나 빼앗긴 탓에 현재 거점을 점령해도 승리는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허세현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정확히 파악이 불가했기에 섣불리 움직이기도 어려웠다. 자칫 잘못했다간 어렵게 빼앗은 이 거점마저 탈환당할 가능성이 있었다.
사면초가, 외통수였다.
“정요셉 팀장, 2번 거점에서 가장 가까운 거점으로 근처에 있는 병력들 모두 보내요.”
“아 네!”
정요셉은 부랴부랴 마스터키로 메시지를 보냈다.
하지만 후방에 위치한 입주자 대부분이 비길드원이기에 빠른 연락이 되지 않아 속절없이 시간만 지날 뿐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
팔콘 길드는 믿을 수 없는, 최악의 결과를 맞이해야 했다.
[앨리스 진영이 하트여왕 진영의 1번 거점을 탈환했습니다!]
[앨리스 진영이 ‘블러디 티 로드’에서 승리했습니다.]
“으아아아아아아!!!”
차밭에 최은철의 분노 가득한 외침이 울려 퍼졌다.
† † †
앨리스 진영의 승리. 이건 여러모로 많은 파장을 가져왔다.
“야. 얘기 들었냐? 그 언론에서 떠들어대던 메인 퀘스트, 팔콘이랑 블루울프 있는 쪽이 졌다던데?”
“야, 그럼 북한 놈들한테 진거냐?”
“아니. 그것보다 서큐버스 군단한테 완전 처발렸다고 하더라.”
“그게 말이 되냐. 아무리 잘나 봐야 걔들 10명 조금 넘는 길드인데.”
“요즘 언론에서 엄청 띄워 준 허세현인가 하는 걔 있잖아, 걔가 엄청 활약했다는 모양인데? 뭐 조만간 유튜브에 하이라이트 영상 올릴 예정이라고 하니까 그거 보면 알겠지.”
민들레 씨앗 레이드. 시즌2 최초 클리어. 거기에 블러디 티 로드까지 패배하며 팔콘 길드의 명성은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팔콘의 스폰서인 한성 그룹의 주식은 폭락했고, 하루 만에 시가총액 10조에 달하는 돈이 날아가 버렸다.
당연히 팔콘 길드에는 긴급회의가 소집됐고, 여태 한성 그룹의 포켓머니를 받아 팔콘 길드를 노골적으로 밀어주던 언론들도 잠시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차마 패배한 길드를 대놓고 밀어주기 어려우니 입을 닫고 있겠다는 판단이리라.
반면, 서큐버스 군단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더욱 커졌다. 특히 이번 전투에서 두 개의 거점을 홀로 쟁취한 허세현에 대한 궁금증은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문제는 이 궁금증이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것이었다.
[E급 입주자 허세현 정말 E급이 맞을까?]
[아파트 전문가들, 허세현의 능력은 아파트 시스템상 불가능하다고 판단.]
[블루울프 측, ‘브레이브킹’ 허세현 사기꾼이라는 주장.]
[서큐버스 군단, 북한의 조선노동당과 관계가 있다는 소문 확인.]
이들은 허세현의 비정상적인 능력과 조선노동당에게 승리를 가져다 준 서큐버스 군단에게 의혹을 제기하고 있었다.
“한성 그룹이 언론사 여기저기 돈칠을 많~이도 했나 보네.”
서큐버스 군단 길드 건물의 휴게실.
세현은 의자에 앉아 스마트폰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결국 올게 왔다는 느낌인데…….”
서큐버스 군단이 북한과 결탁했다는 어이없는 주장은 어쩔 수 없다 쳐도 본인의 이야기는 언론 입장에서 충분히 의문을 제기할 만했다.
실제로 SSS급 클래스 ‘브레이브킹’의 능력은 사기적이었고, 이를 E급 클래스라고 우기는 건 억지였다.
그 동안은 아이템빨이니, 히든 퀘스트로 얻은 용병 세이메이 때문이니, 배후에 스폰이 있다느니 하는 뜬소문들이 완충제 역할을 해 줬지만 슬슬 약발이 떨어져 갔다.
애초에 아파트 내에서 E급 입주자는 F급을 제외하면 최하층민이고 절대로 주인공이 될 수 없는 계급이다.
세현은 슬슬 출구 전략을 시도할 때라고 생각했다.
그때 휴게실 문이 열렸다.
“와아~ 유명인이다.”
한 손에 프링X스 통을 들고 우적거리고 있는 동그란 안경을 쓴 아기자기한 인상의 여성. 서큐버스 군단 전속 영상 편집자 신지영이 세현을 멀뚱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프링X스 통을 앞으로 불쑥 내밀었고, 세현은 손을 뻗어 통 안의 감자 칩을 입으로 가져갔다.
“신지영 씨, 요즘 회사 생활은 어때요?”
“어휴~ 잡일만 하고 심심해 죽겠죠 뭐, 솔~직히 말하자면 브레이브킹 하이라이트 만들 때가 훨씬 더 재미있었어요. 뭐, 이렇게 고액 연봉을 받으면서 푸념하는 것도 웃기지만요.”
지영은 가감 없이 본심을 털어놓자 세현은 빙긋 웃으며 대꾸했다.
“그럼 잠깐 나 좀 도와줄래요?”
“네?”
“이게 그러니까…… 이렇게 할 생각인데.”
이야기를 들은 지영은 남은 프링X스를 몽땅 입에 털어 넣은 후 손을 탁탁 털며 말했다.
“오, 그거 재미있겠네요! 당장 촬영하죠!”
† † †
블러디 티 로드가 끝난 지 3일 후, 팔콘 길드의 대회의실.
이곳의 분위기는 무겁다 못해 숨 쉬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은 느낌이었다.
회의 테이블에는 팔콘 간부들과 블루울프의 길드장을 포함한 간부들이 동석했다.
이들은 고개를 푹 숙인 채 곁눈질로 최은철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현재 상황 보고하세요.”
정요셉이 제자리에서 일어나 덜덜 떠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그…… 언론사 쪽 푸시 해서 어떻게든 서큐버스 군단을 때리도록 하고 있습니다. 주로 조선노동당이랑 엮어서 이야기를 만들고 있는 모양인데 꽤 효과가 있는 것 같습니다.”
“효과가 좋다?”
최은철은 신경질적으로 스마트폰을 꺼내 던졌다.
“당신, 그 인터넷 기사에 달린 리플들 읽어보긴 했습니까? 그게 효과가 좋아 보여요? 한 번 당신 입으로 읽어보시죠.”
“……어 그게.”
“눈이 있으면 읽어보라고 이 새꺄.”
은철이 분노를 담아 낮게 읊조리자 겁에 질린 요셉이 이빨을 딱딱 부딪치며 리플을 천천히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