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
93화.
“그놈들이 누군데요.”
퉁명스럽게 대꾸하자 사카린은 꼬았던 다리를 풀며 한마디를 보탰다.
“조선노동당 놈들 말이야.”
오늘은 사카린이 전투복 차림이 아니라 스커트를 입은 탓에 다리 사이로 뭔가 스쳐 보였다. 이에 세현은 애써 고개를 돌리며 천천히 대꾸했다.
“흠흠, 지금까지 참가 신청한 인원이 전부 어떻게 되죠?”
“한 시간 전에 확인해 본 수치로는 하트여왕 진영이 총 382명, 우리 앨리스 진영이 총 363명. 얼핏 비슷하지만 우리 쪽은 167명이나 조선노동당 놈들이야.”
지난 일주일간 양 진영의 숫자는 얼추 비슷하게 맞춰졌다.
문제는 하트여왕 진영에 ‘팔콘’과 ‘블루울프’가 있다는 것,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아군 진영에 통제 불가능한 ‘조선노동당’ 길드가 있다는 것이다.
“뭐, 알아서 할 테니까 적당히 맡겨 두세요.”
“괜찮은 거 맞지? 괜히 잘못 엮여서 빨갱이니 뭐니 소리 안 듣게 해라.”
“아 걱정 말라니깐요.”
세현은 설렁설렁 손을 흔들며 방을 빠져나갔다.
‘살짝 여지를 좀 줘 볼까.’
그러곤 혼잣말을 중얼대더니 마스터키로 메시지 하나를 보냈다.
[허세현: 신한철 간나 새끼! 지금 메시지 받을 수 있냐?]
Level 35. 차밭의 전쟁
바쁜 일주일이 지나고 결전의 날이 왔다.
24층 최대 규모의 차밭 ‘아삼’에는 끝없이 펼쳐진 푸른 차밭과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한 하늘이 입주자들을 반기고 있었다.
허세현과 서큐버스 군단 멤버들은 앨리스 진영의 스타팅 지점에서 몸을 풀고 있었다.
‘조사단도 왔군.’
차밭 곳곳에 검은색과 흰색이 교차된, 경찰복을 연상시키는 중갑옷 차림의 입주자들이 배치돼 있었다.
얼핏 보기에도 거진 300~400명은 족히 되는 규모였다.
그들이 배치된 목적은 간단하다. 전투 과정에서 입주자들이 죽지 않게 하는 것.
이번 퀘스트의 특성상 전투가 이뤄지기에 부상을 피하는 것은 불가피하지만, 최소한 살인이나 일방적 학살이 일어나는 것은 막겠다는 것이 조사단의 방침이었다.
그들은 이번 싸움에서 입주자가 항복 선언을 하거나 전투 불가 상태로 판단되면 빠르게 개입해 해당 입주자를 전장 밖으로 이탈시키는 임무를 맡았다.
“후우, 난리도 아니네, 난리도 아니야.”
5~10명씩 조 단위로 서 있는 서큐버스 군단 진영의 끝 쪽. 그곳엔 에D츄의 등에 올라탄 세현이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전장을 살피고 있었다.
그의 말을 듣던 설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꾸했다.
“그러게요. 제가 올림픽 나갈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요.”
실제로 이번 퀘스트에 대한 세상의 관심은 올림픽 따위와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뜨거웠다.
[24층 메인 퀘스트! 세계 상위권 길드 대격돌.]
[아파트 입주자들의 주도권을 건 한판 승부!]
[조선노동당 vs 팔콘 사실상 2파전! 다크호스 ‘서큐버스 군단!’]
이미 일주일 전부터, TV, 인터넷 뉴스, 유튜브, 각종 커뮤니티에서는 이번 퀘스트에 대한 내용으로 들끓었다.
심지어 서큐버스 군단에 전화나 메일로 인터뷰 요청이 들어온 것만 100건이 넘어갈 정도였다.
[아, 안 한다니까요! 인터뷰 안 해요!]
한동안 한가한 시간을 보냈던 영상편집자 신지영은 혼자 이런 문제들에 대응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일주일을 보내야 했다.
이런 반응이 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이번 퀘스트에서 격돌하는 입주자들은 모두 세계 정상급의 실력자들이다.
그들이 두 세력으로 나뉘어 대결한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일반인들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한 빅 이벤트였다.
하지만 이건 일반인의 시선일 뿐. 이번 메인 퀘스트는 그렇게 단순히 얘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현재의 세상은 강력한 입주자 하나가 국가의 전략 병기 취급을 받고 있다.
그렇기에 이 블러디 티 로드 전투의 결과가 어떻게 나느냐, 입주자 개개인이 어떤 모습을 보여 주며 활약하느냐는 직간접적으로 세계의 판도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었다.
그 사실을 모두 알고 있기에, 언론, 정치, 군사계는 오늘 전투의 결과에 모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상황이었다.
[곧 메인 퀘스트 ‘블러디 티 로드’가 시작됩니다.]
[10… 9… 8…]
잠시 후, 허공에 아나운서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입주자들은 긴장된 얼굴로 각자에게 익숙한 방법으로 전투를 준비했다.
“좋아, 다들 작전대로 간다!”
사카린은 각 조를 이끌고 있는 길드원들에게 당부의 말을 잊지 않았다.
[전투 시작합니다!]
시작을 알리는 메시지와 함께, 허공에 불꽃 몇 발이 쏘아 올려졌다. 입주자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앞으로 총알처럼 튀어 나갔다.
“움직여!”
사카린에 외침에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산개했다.
일단 3개 조가 시작 지점에서 가까운 거점으로 향했고 나머지 7개조는 접전 지역이 될 중심부 거점으로 향했다.
서큐버스 군단 통제하에 있는 인원들이 움직이자 같은 앨리스 진영의 다른 입주자들은 이들을 따랐다.
하지만 앨리스 진영에서 가장 큰 무리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보이고 있었다.
“팔콘 놈들을 절단 내 버리자!”
“김정권 동무를 따르라!”
“최은철 역도 놈의 모가지를 꺾어 버립세다!”
조선노동당.
그들은 거점 점령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불에 뛰어드는 나방처럼 무작정 앞으로 맹렬히 돌진했다.
‘와, 설마 설마 했는데 진짜로 저렇게 되네. 쟤들 단세포냐?’
세현은 자신이 한 행동이 만들어 낸 결과를 보며 솔직히 감탄했다.
[야 신한철, 팔콘에서 이번 전투에서 실수를 가장해서 김정권을 암살한다는 소문이 돌더라~ 아아 이게 어디서 나온 말은 아니고 그냥 소문이야 소문, 어디 가서 절~대로 말하지 마라? 말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이 말을 전달한 것은 일전에 시비가 붙었던 조선노동당의 신한철이었다.
세현은 그에게 팔콘이 김정권을 암살할 것이라는 거짓 정보를 흘렸다.
물론 이걸 전한 후, 주고받은 메시지를 삭제하고 스티그마로 신한철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오는 것을 틀어막아 뒤처리까지 깔끔히 해 버렸다.
북한의 영웅, 김정권을 암살한다는 뜬소문.
명확한 근거도, 제대로 된 출처도 없지만 이 말이 입에서 입으로 유령처럼 떠돌게 된 것만으로도 세현이 원하는 결과를 도출해 낼 수 있었다.
지난 민들레 씨앗 레이드 후, 팔콘 길드와 조선노동당의 감정이 격해진 것이 아주 큰 도움이 됐다.
이번 전투에서 조선노동당은 팔콘에 선제공격을 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린 모양이었다.
‘김정권인가 뭔가 하는 놈도 진짜 더럽게 단세포네.’
평소에 김정권이 다혈질에 자존심이 센 놈이라고 얘기를 들어왔기에 던진, 되면 좋아 아니면 말고 식의 도박수였다.
세현이 바라던 건 조선노동당이 팔콘을 적당히 견제하며 자신들의 작전을 수행하는 데 도움이 되는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은 대놓고 최은철을 박살 내겠다느니, 절단을 내겠다느니, 앞뒤 안 가리고 흥분해서 달려들고 있었다.
저리되면 분명 어그로라는 어그로는 조선노동당에게 몽땅 쏠릴게 분명했다. 세현이 도박수가 보기 좋게 성공한 것이었다.
‘대가리가 멍청하면 길드원 전체가 고생하지.’
조선노동당의 입주자 숫자나 퀄리티는 팔콘과 비벼도 크게 뒤쳐지지 않을 정도로 강했다.
물론 여러 가지 정치적 상황이나 대외 평판이 나빠 길드 랭크 10위권에서 머물고 있지만, 이번 전투에서는 ‘미친개들’다운 모습을 보여 주리라 기대했다.
세현은 씨익 웃으며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 말했다.
“설희 씨, 에D츄한테 신속의 찬가 좀 부탁드려요.”
“네!”
허리를 잡고 앉아 있던 설희가 입을 작게 열어 고운 음색을 흘려보냈다.
“츄우우우! 몸이 가벼워진다츄! 모두 꽉 잡아라츄!”
그러자 에D츄의 몸에 바람의 기운이 맴돌며 움직임이 더더욱 가속했다. 바람을 세차게 가르며 코끼리만 한 햄스터가 차밭의 오른편으로 크게 우회해서 돌진했다.
차밭의 중심부를 넘어갈 즈음, 세현은 두 소환수를 소환했다. 블랙 룩, 화이트 룩이었다.
바닥에 착지한 두 소환수는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빠르게 흩어졌다.
“좋아, 준비 끝났으니까 제일 가까운 길목으로 움직여!”
세현은 왼쪽 발, 오른쪽 발로 안장을 툭툭 두드리는 것으로 에D츄의 돌진 방향을 컨트롤하며 움직였다.
잠시 후, 중앙 거점 중 한 곳으로 향하는 길목에 도착했고, 세현은 모든 소환수를 꺼내 길목을 막고 길드원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허세현: 4번 거점 길목 막고 있으니까 최대한 빨리 점령.]
거점을 점령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거점 중심부에 세워진 거대 석탑 아래에서 입주자들이 서 있으면 된다.
그러면 석탑 주변으로 빛의 테두리가 시계방향으로 회전하며 원형으로 생겨나는데, 이게 완전한 원을 이루면 거점을 점령하게 된다.
석탑 아래 서 있는 입주자 숫자가 많아지면 점령 속도가 더 빨라지며, 그 숫자에 따라 최소 5분에서 최대 30분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
적 입주자가 원안에 들어와 있을 경우 그만큼 속도가 느려지기 때문에 원 안에서 최대한 많은 인원이 들어가야 거점을 점령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많은 인원을 거점 안에 집어넣는 게 능사는 아니었다.
석탑 아래에 들어갈 경우 스텟이 20%가량 하락되는 디버프에 걸리기에, 모든 입주자가 안에 들어가면 전투에서 속수무책으로 밀린다.
이 ‘블러디 티 로드’ 퀘스트는 석탑 아래에 들어갈 인원과 원 밖에서 적을 견제하는 인원의 적절한 밸런스를 맞추는 것이 최대의 관건이었다.
“자, 여기서 시간 좀 벌어 보자.”
세현은 4번 거점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자리를 잡았다.
에D츄가 가장 앞에 나서고, 세이메이는 사역마들을 소환하고, 설희가 광역 버프를 사용해 모두의 스테이터스를 증폭시켰다.
“여기서 딱 15분만 버티면 됩니다.”
잠시 후, 저지대에서 이쪽을 향해 빠르게 올라오는 한 무리의 입주자들이 보였다.
흰색과 금색이 뒤섞인 베이스에 독수리 문양이 크게 새겨진 중갑옷을 입은 자들, ‘팔콘’의 입주자들이었다.
“저것들 빨리도 왔네.”
세현이 자리 잡은 이곳은 앨리스 진영의 스타팅 포인트와 더 가깝다.
그런데 팔콘 길드원들이 벌써 도착했다는 것은, 저 무리가 퀘스트 시작과 동시에 바로 이곳으로 달린 별동대라는 것을 의미했다.
“거기 너, 죽기 싫으면 비켜!”
팔콘 길드의 가장 앞 열에 선 입주자의 입에서 귀에 익은 얍삽한 목소리의 외침이 들려왔다.
“어라 저놈……”
모히칸 머리에 마른 체형, 얍삽한 느낌의 얼굴.
스스로를 최은철의 오른팔을 자처하지만 실상은 따까리 역할을 하고 있는 구더기 같은 인간. 몇 달 전, 동창회에서 만났던 ‘김현’이었다.
“저 새끼, 안 그래도 한 번 줘 패고 싶었는데 마침 잘됐네.”
세현은 마치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미소 지으며 별운검을 앞으로 겨눴다.
[패시브 스킬 ‘장수의 기질’이 활성화 됩니다. 별운검의 공격력이 8티어 C+로 상승합니다.]
두 세력 간의 거리가 100m 이내로 가까워질 무렵, 김현또한 세현을 알아봤는지 기분 나쁜 웃음을 터뜨리며 외쳤다.
“야~ 허세현이 아니야? 이 좆밥쇄끼, 너 요즘 잘나간다며?”
“언제부터 친했다고 좆밥 타령이야, 찌질한 새끼가.”
세현은 김현을 향해 뛰어올랐다.
“야~ 기세 좋은데?”
김현은 두 자루의 검을 그대로 내질렀다. 자신이 밀릴 리 없다는 자신감에서 나온 액션이다.
실제로 그의 속도와 스펙은 세현의 것을 훨씬 상회하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자만은 좋지 않은 결과를 불러온다.
파앙-!
“어라?”
세현은 쿠자이의 발을 이용해 공중을 박차고 한 번 더 뛰어올랐다. 두 자루의 검이 허공을 허무히 가르며 순간 완벽한 빈틈이 발생했다.
그 찰나의 순간, 시간이 느려지는 듯한 감각과 함께 김현의 눈동자가 세현이 있는 오른쪽으로 돌았다.
‘미친…….’
사악한 미소를 지은 세현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