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
92화.
한 명당 2억, 이 얘기가 사실이라면 서큐버스 군단이 이번 퀘스트에서 패배하면 최소 적게는 몇십 억, 많게는 몇백 억 단위의 손해를 감수하겠다는 얘기였다.
보통의 길드라면 감히 제시하지 못할, 파격을 넘어 미쳤다고 할 법한 조건이었다.
“저게 말이 되나?”
“그걸 우리한테 퍼 주면 댁들은 뭐가 남는데?”
웅성대던 입주자들 중 한 명이 질문을 던졌다.
핵심을 찌르는, 가장 중요하고도 단순한 질문이었다.
그 말대로 서큐버스 군단이 말한 내용대로 퍼 준다면 ‘블러디 티 로드’에서 승리해도 남는 게 없다.
아파트에서 남는 것 없이 장사를 벌이는 인간은 오직 사기꾼밖에 없기에 입주자들 입장에서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좋은 질문입니다!”
하지만 세현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내며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저희에게 남는 건 없습니다. 뭐 해 봐야 24층 최초 클리어 타이틀 정도 남겠네요. 하지만 저희는 3주라는 시간을 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시간적 우위를 기반으로 시즌3을 저희 길드가 가장 먼저 클리어할 생각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이곳에 모인 입주자들은 세현의 말을 모두 이해했다.
서큐버스 군단이 목표로 하는 것은 단순히 24층의 클리어가 아닌, 시즌3의 최초 클리어다. 그렇기에 모든 보상을 포기해도 최대한 빠르게 위로 올라가는 걸 우선시하는 것이었다.
‘성공만 한다면, 아니 성공 못 해도 이건 괜찮은 거래다.’
모든 입주자들의 머리에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이건 무조건 자신들이 이득을 보는, 꽃놀이패 같은 계약이었다.
“뭐 그래 좋아, 조건은 좋다고 치자. 하지만 우리가 당신들은 무슨 수로 팔콘을 이길 생각이지?”
“좋은 지적입니다.”
가장 앞에 앉은 중년 남성 입주자가 질문을 던졌다.
이에 세현은 싱긋 웃으며 대꾸했다.
“뭐 다 작전이 있습니다. 그리고 저희와 함께하시기로 계약하신다면 그 작전을 공개할 계획이구요.”
“솔직히 신뢰가 돼야지… 당신들이 팔콘을 이긴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중년 남자는 무례한 말을 내뱉었다.
세현은 그의 이방 수염을 몽창 뽑아 버리고 싶은 마음을 꾹꾹 참으며 대꾸했다.
“왜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서큐버스 군단은 시즌2도 최초로 클리어했는데요. ‘그’ 팔콘 길드를 제치고 말이죠.”
“그건 솔직히 이스칸다르의 깃발인가 뭔가 하는 그 아이템 덕분이었잖아?”
‘이 새끼가…….’
세현은 속으로 욕을 꾹꾹 집어삼켰다.
이스칸다르의 깃발.
정복왕의 군대를 일정 시간 소환하는 아이템.
고작 1회를 사용하는 것으로 사라지지만, 그 위력이 어마어마한 덕에 ‘샤이탄’ 공략에서 허세현이 사용했던 아이템이다.
샤이탄 공략의 경우 길드 채널을 통해 유튜브 영상이 공개됐기에, 모두가 ‘이스칸다르의 깃발’을 사용했던 것을 알고 있었다.
이곳의 입주자들은 그게 없었으면 시즌2 공략이 불가능했을 거라고 서큐버스 군단을 평가절하한 것이었다.
“뭐 저희 길드의 실력이 못미덥다면 지금 당장 길드의 막내인 저랑 한판 붙어 보시는 건 어떨까요?”
“뭔 웃기지도 않는 소릴… 나보고 E급 피래미랑 싸우라고?”
남자가 되도 않는 소리를 계속 짖어 대자, 세현은 슬쩍 미끼를 던졌다.
“아, 뭐 굳이 쫄리시면 안 해도 되요. 같이 일할 사이인데 괜히 망신 줘서 사이 틀어지면 저희만 손해니까요.”
“……이 새끼가 미쳤나?”
남자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에 세현이 능청스레 회의실 앞문을 열고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말했다.
“자자, 화내지 마시고 대련장으로 따라오세요.”
입주자들과 서큐버스 군단 관계자 전원이 관리사무소의 부속 시설인 대련장으로 향했다.
대회의실에서 도보로 약 3~4분 거리에 있는 대련실은 거의 1000평 정도 되는 넓이에 30m 정도 높이의 큰 천장을 가지고 있었다.
이곳은 입주자들이 간단히 자신의 스킬을 시험해 보는 데 주로 사용되는 편의 공간으로, 입주자들끼리 한판 붙어 보기에 딱 좋은 장소였다.
세현은 몸을 까딱거리며 스트레칭을 한 후, 소환수를 모두 소환해 가로로 가지런히 줄을 세웠다.
“자~ 그럼, 소환수 몇 명으로 상대해 드릴까요?”
“하? E급 주제에 여기저기서 띄워 줘서 거품 끼니까 아주 살판이 났구나.”
도발에 걸려든 중년의 남자 입주자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그의 마스터키는 녹색, 즉 B급 입주자였다. 어찌 보면 저런 자존심을 세우는 게 당연한 등급이었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등급 가지고 갑질하는 거 지긋지긋해 죽겠네.’
그렇기에 세현은 그를 더 철저히 짓밟을 생각이었다. 여태 보여 줬던 압도적인 실력과 실적에도 세현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누군가는 세현의 실력을 용병 세이메이 덕분이라고 하고, 또 누군가는 애초에 서큐버스 군단에 인맥이 있어 아이템을 빵빵하게 지원받은 덕분이라고 평가 절하했다.
이 기회에 그런 평가 절하돼 있는 자신의 이미지를 완전히 깨부술 필요가 있음을 느꼈다.
‘클래스 차이를 철저히 보여 주마.’
세현은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명색이 1:1 싸움인데 소환수를 쓰는 건 치사하니까 안 쓸게요, 입주자님.”
그러곤 자신의 소환수들을 모두 뒤로 물렸다.
“뭐? 이 미친 새끼가 허세 부리고 있네.”
“허세인지 아닌지는 확인해 보시면 될 것 같고, 졌다고 삐져서 약속 물리기 없습니다?”
세현은 새로 맞춘 ‘마사무네의 의지’와 ‘별운검’을 장착했다. 오라나이트로 만들어진 갑옷에서 빛이 뿜어지며, 기다란 별운검이 흉흉한 기운을 내뿜었다.
[패시브 스킬 ‘장수의 기질’이 활성화됩니다. 별운검의 공격력이 8티어 C+로 상승합니다.]
별운검을 거머쥐자 마스터키가 음성으로 패시브 스킬이 발동됨을 알렸다. 이로써 렙제 60의 무기 별운검은 8티어 C+급, 즉 80렙제 무기에 맞먹는 공격력을 가지게 됐다.
소환수를 굳이 사용할 생각은 없지만 소환해 놓은 것은 별운검의 추가 스킬인 ‘장수의 기질’과 ‘힘의 공유’를 사용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힘의 공유’를 사용합니다. 소환수 13명의 스테이터스 10%를 10분간 흡수합니다.]
순간 몸속에 형용할 수 없는 기운이 끓어 넘쳤다.
창을 열어 확인하자 거의 3~4배가량 스테이터스가 뻥튀기돼 있었다.
F급이던 시절,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고양감. 세현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빠르게 앞으로 내달렸다.
“그럼 갑니다!”
“미, 미친!”
생각 보다 빠른 세현의 속도에 중년 남자는 놀란 얼굴로 은빛 타워쉴드와 글라디우스를 급하게 꺼냈다.
그의 클래스는 ‘엘븐 가드’, B급 클래스에서 꽤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탱커 클래스였다.
타앙-!
별운검이 타워쉴드를 두드린 직후, 남자의 몸이 뒤로 세차게 밀려났다. 그 자리에 검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날 정도였다.
“자, 잠깐만!”
그는 당황한 듯 외치며 방패에서 노란 오오라를 뿜어냈다.
세현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다시 방패를 두드렸다.
타앙-! 탕-! 타당-!
별운검이 내리칠 때마다 느껴지는 둔탁한 충격에 남자는 머리가 울릴 지경이었다.
‘미친! 이게 무슨 공격이야!’
단순힌 방패로 공격을 막고 있는 게 아니었다.
중년 남자는 방패의 방어력을 단기간 비약적으로 강화시키는 스킬 ‘크로스 쉴드’까지 사용한 상태였지만 세현의 공격을 받아 내는 것에 버거움을 느끼고 있었다.
‘이게 E급 클래스라고? 사기 치지 말라고 해!’
어지간한 고 레벨 몬스터의 공격 따윈 가볍게 받아넘기던 그였기에 세현의 무식한 공격력과 속도에 당황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그의 PVP에 있어 기본 전략은 이른바 ‘니가와 플레이’.
공격을 계속 받아 내며 상대가 지칠 즈음, 빈틈을 찔러 역공을 가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허세현은 지쳐 빈틈이 생기기는커녕 한 방 한 방이 방패가 박살 날 것 같이 묵직했다.
중년 남자는 반격은커녕 현재의 자세를 유지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렇게 세현의 공격이 시작된 지 약 30여 초가 지났을 무렵-.
쨍그랑-!
방패를 감싸고 있던 노란 오오라가 유리가 박살나는 소리와 함께 흩어져 버렸다.
그 직후, 세현이 별운검을 수직으로 내리찍자 은색 타워쉴드가 찌그러지기 시작했다.
“이제 제대로 합니다.”
세현은 마치 광인처럼 미소 지으며 멈추지 않고 검을 반복해서 휘둘렀다.
쾅-!
망치로 못을 박듯.
쾅-!
두더지 잡기를 하듯.
반복되는 공격에 타워쉴드가 빠르게 망가지고 있었다.
“히이이익! 미, 미친 놈!!”
남자의 얼굴은 공포로 물들어 갔고, 그 감정이 절정에 달할 무렵-.
촤아아악-!
별운검이 타워실드를 반으로 거칠게 찢어 버렸다.
방패로 가렸던 중년 남자의 시야가 벌어지며 그 사이로 썩은 미소를 짓는 세현의 얼굴이 드러났다.
“이거 제가 이긴 것 같은데요?”
“사, 살려 줘! 네가 시키는 대로 뭐든지 할게!”
그는 엉덩방아를 찧더니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너무 심하게 했나?’
세현은 머쓱한 듯 머리를 긁적이며 그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방패값은 제가 물어 드릴게. 어쨌든 약속은 지키셔야 합니다.”
중년 남자는 손을 덜덜 떨며 세현의 손을 맞잡았다.
이건 단순히 힘을 인정하는 수준이 아닌, 겁에 질린 초식동물과 같은 태도였다.
‘별수 없지…….’
세현은 남자를 잡아 일으킨 후, 고개를 돌려 다른 입주자들을 향해 말했다.
“자, 이 정도면 저희의 실력은 어느 정도 입증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저희와 함께하실 분들은 지금부터 계약서를 나눠 드릴테니 여기에 사인해 주시면 됩니다.”
타이밍 좋게 설희와 사카린, 그리고 길드원 몇몇이 입주자들 사이로 끼어들어 계약서를 나눠줬다.
입주자들 대부분이 찝찝한 표정으로 계약서에 사인을 해서 넘겼다.
조금 전 상황 때문에 겁에 질려 사인을 하는 것 같았지만 뭐 어떠랴, 결과만 좋으면 되는 것을.
계약을 끝마친 후, 세현은 박수를 탁탁 치며 허공에 외쳤다.
“좋습니다. 사인해 주신 입주자 분들은 일단 대회의실에서 작전 브리핑을 오늘 들으시고 일주일 후 한 번, 그리고 퀘스트 시작 전날 한 번 이곳에 모여서 합을 맞추면 되겠습니다.”
이것이 시작이었다.
아파트 역사에 길이 남을 명전투, ‘블러드 티 로드 전투’의 서막이 오른 것이다.
† † †
일주일 후-.
관리사무소의 가장 넓은 대련장.
여기 모인 총 60여 명의 입주자들은 5~7명씩 그룹을 이뤄 뭔가 열띤 토론을 하고 있었다.
이는 일주일 후 있을 블러드 티 로드를 진행하기 위한 준비 작업으로, 조별로 퀘스트 도중 수행할 임무를 구체적으로 전달하는 자리였다.
서큐버스 군단 소속의 조장들이 임무를 전달하면, 조원들은 이에 대한 질문을 주고받으면서 의문점을 해소하고 임무를 숙지하는 방식이었다.
이 회의는 거의 반나절의 시간 동안 진행됐다.
시간이 흘러, 각 조별로 모든 임무 내용을 완벽히 숙지됐을 때 즈음-.
이번 퀘스트의 총책임을 떠맡게(?) 된 허세현이 크게 외쳤다.
“오늘 준비는 여기까지입니다. 작전 정보는 절대 외부에 유출하지 마시고, 일주일 동안 잊지 않도록 반복해서 숙지 부탁드리겠습니다. 혹시 궁금하신 점이 있다면 저나 사카린 길드장에게 연락 주세요. 수고하셨습니다.”
세현의 인사가 끝나자 입주자들은 삼삼오오 모여 대련장을 빠져나갔다.
“안녕히 가세요~.”
“다음 주에 봬요~.”
“비밀 엄수 부탁드리겠습니다.”
모든 길드원이 그들을 배웅하고 있는 와중, 세현은 한숨을 푹 내쉬며 그들의 뒷모습을 지긋이 바라봤다.
‘뭐, 비밀이라고 말해 봐야 외부에 100% 새어나가겠지.’
여기 모인 입주자들에게 비밀을 엄수해 달라고 했지만, 분명 상대 진영의 귀에 이쪽의 정보가 흘러들어 갈 확률이 높았다.
애초에 자금이라곤 썩어 나는 팔콘이기에 입주자 한둘을 돈으로 구워삶는 것은 일도 아닐 것이다.
‘뭐 알려지면 알려진 대로 상관없지만.’
세현이 비릿한 웃음을 짓고 있는 와중, 사카린이 다가와 옆구리를 슬쩍 찌르며 말했다.
“허세현, 잠깐 나 좀 따로 보자.”
두 사람은 강당 구석에 놓인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사카린은 그곳에 놓인 철제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요염한 눈빛으로 세현을 노려봤다.
“다른 입주자들은 이제 다 포섭된 것 같은데. ‘그놈들’ 어떻게 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