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
91화.
“잘 먹겠습니다!”
네 사람이 모두 식탁에 빙 둘러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팔팔 끓인 된장찌개와 생선 구이, 소시지 볶음과 바삭바삭한 김까지. 화려함은 없지만 만든 사람의 정성이 느껴지는 따듯한 밥상이었다.
“아, 소시지 맛있네! 된장찌개도!”
“그거 세현 씨가 끓였어요.”
“올~ 허세현 요리 잘하네? 나한테 장가올래?”
“하아… 헛소리 그만하고 밥이나 드세요.”
다들 만족스러운 얼굴로 밥과 반찬을 씹어 삼켰다.
그러던 중, 세현이 질문 하나를 툭 던졌다.
“사카린 길드장, 정말 여긴 왜 왔어요?”
이 질문에 사카린은 입을 다람쥐처럼 우물대면서도 뭔가 서운했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뭘 또 물어봐, 내가 놀러 온다고 했잖아.”
“그렇다고 이런 아침부터 놀러 오진 않거든요?”
“왜 자꾸 따져! 나 같은 미인이 놀러 왔는데 보통 좋아해야 정상 아니냐?”
“저기… 본인 입으로 미인이라고 말하는 거 안 민망해요?”
“사실이니까 그렇게 말하지.”
사카린은 뻔뻔하게 대꾸하며 소시지를 입으로 가져가 우물댔다.
세현은 못마땅한 얼굴로 그녀를 지긋이 쳐다봤다. 그러자 사카린이 한숨을 푹 쉬며 젓가락을 식탁에 탁-소리가 나게 내려놓고 대꾸했다.
“알았다 알았어. 너랑 내일 회의 관련해서 미리 의논도 좀 하려고 온 거다. 이제 됐냐?”
“그런 논의는 부길드장이랑 해야 되는 거 아닙니까?”
“메디아가 자긴 사냥이나 하고 있을 테니까 너랑 의논하라더라.”
“저 이 길드 막내 맞죠?”
“막내인 게 무슨 상관이야, 일은 능력 있는 놈이 하는 거지.”
“하아……”
세현이 한숨을 푹 내쉬자 사카린이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조, 좋게 생각해. 그~만큼 길드원들이 다들 네 능력을 믿는다는 소리 아니겠어? 그리고 또 알아? 이렇게 되다가 네가 나중에 차기 길드장이라도 될지!”
“아오, 그런 무서운 소리 하지도 마세요. 길드장 시켜 줘도 하기 싫거든요?”
식사가 끝난 후, 네 사람은 커피와 차를 한 잔씩 하며 잡담을 나눴다.
차를 거의 다 마실 때 즈음, 설희가 자리를 정리하며 일어났다.
“뒷정리는 저랑 세이메이 씨가 같이 할 테니까 두 분은 얘기 나누세요.”
설희의 배려 덕에 사카린과 허세현은 방으로 들어가 조용히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자자, 내일 계획부터 말해 봐.”
“아니 길드장 이 양반이… 방금 찾아왔으면서 무슨 계획을 찾아요.”
“어, 없어? 생각해 둔 게 있을 줄 알았지.”
“애초에 그런 건 길드장이 생각해 둬야 하는 거 아닙니까?”
“뭐 꼬우면 네가 길드장 해도 되는데.”
“안 해요.”
“농담은 좀 받아 주라….”
세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하아…… 일단 내일 회의 목표부터 정해야죠. 일단 저희가 ‘블러디 티 로드’ 퀘스트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필요한 조건들을 적을 테니까 같이 생각합시다.”
세현은 메모장과 볼펜을 꺼내든 후, 회의를 진행했다.
방식은 간단했다. 세현이 전체적인 방향성을 잡으면 사카린은 그 디테일에 대해 계속 피드백을 주는 것, 이게 전부였다.
“이 부분은 이렇게 하는 게 낫지 않나?”
“그것보단 이게 나을 걸요? 거래하려면 설득부터 해야죠.”
“아하, 그렇네!”
의견이 갈리는 부분에서는 말이 종종 길어지기도 했지만, 이야기는 대체로 좋은 방향으로 정리되고 있었다.
‘역시 사카린은 사카린이네.’
세현은 기존에 자신이 생각해 놓은 방안에 사카린이 내놓는 의견들을 꽤 많이 반영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산전수전을 겪어 온 그녀이기에 그 경험이 꽤 유용하게 쓰이는 것이리라.
“그럼 내일 회의는 이런 방향으로 진행하죠. 고생하셨어요.”
장장 2시간에 걸친 회의 끝에 두 사람은 만족할 만한 결론을 도출했다.
이것만으로 ‘블러드 티 로드’에서의 승리는 장담 못 하지만, 적어도 내일 회의에서 주도권은 확실히 가져갈 수 있으리라.
“하아. 좀 쉬어야지.”
세현은 침대에 발라당 드러누웠다. 간만에 머리를 쓴 탓에 관자놀이가 지끈댔다.
“그럼 나도 좀 쉬어야지.”
그러자 사카린도 침대 옆에 벌렁 드러누웠다. 이에 세현은 주둥이를 삐죽 내밀며 비아냥대듯 말했다.
“길드장, 슬슬 집에 안 갑니까?”
“왜? 오늘 놀다 간다고 했잖아.”
“에휴…….”
세현은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켜 구석에 켜켜이 쌓아 둔 이불을 펴 침대 아래에 펼친 후 그 위에 다시 드러누웠다.
“그럼 난 한숨 잘게요.”
“뭐야, 왜 굳이 멀쩡한 침대 두고 바닥에 가서 자는데?”
사카린은 바닥으로 따라 내려와 세현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아아! 하지 마요.”
“이것 봐라~ 막내 주제에 길드장한테 아주 정색을 하네, 정색을!”
세현이 정색하자 그녀는 재미있다는 듯 킥킥 웃음 지으며 이번엔 옆구리를 간지럽혔다.
“아아아아!”
겨드랑이와, 목을 꼬물꼬물 공략해 오는 그녀의 흰 손가락에 세현은 경기를 일으키며 몸을 데굴데굴 굴렀다.
사카린은 재미가 들렸는지 양다리로 허리를 감싸 도망치지 못하게 한 후, 본격적으로 간지럼을 태웠다.
“무, 무슨 일이세요?!”
그때, 드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문 너머로 설희와 세이메이가 놀란 얼굴로 두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불과 함께 사카린과 엉켜있던 허세현이 벌떡 일어나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아니 이게 그게 아니라! 오해하지 마세요 설희 씨! 이거 사카린, 아니 길드장이 장난치다가-”
그러자 이번엔 등 뒤에서 사카린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세현…. 조금 전 일들은 모두 장난이라 그거야? 나는 진심이었는데?”
“에에엥?! 무슨 헛소리에요!”
고개를 돌리자, 주저앉아 눈시울을 붉히는 사카린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세현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죄, 죄송해요!”
“어디 가십니까, 설희 공?”
얼굴이 새빨개진 설희가 집을 빠져나갔다.
세이메이는 영문을 모르겠다는듯 고개를 갸우뚱했고, 사카린은 그제야 연기를 멈추고 폭소를 터뜨렸다.
“아하하하! 웃겨 죽겠네!”
“아오, 이게 웃겨요?”
“아 미안미안, 설희한테는 내가 잘 말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
사카린은 한참을 더 웃더니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한 10분쯤 지났을 무렵, 설희와 함께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죄송해요, 세현 씨. 제가 오해를 했네요.”
“아뇨… 설희 씨가 사과할 건 아니죠.”
세현은 사카린을 째려보며 말했다.
“누가 이상한 장난만 안 쳤으면….”
“흠흠! 아 말을 많~이 했더니 배가 고프네.”
사카린은 괜히 헛기침하며 딴청을 피웠다. 이에 세현은 한숨을 푹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럼 점심은 길드장이 준비해요.”
“에엥? 내가 왜?”
“하라고요.”
세현이 다시 한 번 눈을 가늘게 떠서 째려보자 사카린은 머쓱한지 머리를 긁적이며 대꾸했다.
“아하하, 그래. 점심은 내가 할 테니까 다들 푹 쉬어라!”
“맛있게 해야 될 겁니다.”
세현은 그대로 등을 돌려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사카린은 입술을 핥은 후, 피식 미소지으며 읊조렸다.
“허세현 저거 보기보다 성깔 있네.”
† † †
관리사무소 내부에 있는 입주자 전용 대회의실, 오늘 이곳에는 시즌3 메인 퀘스트-[블러디 티 로드]에 참가하는 앨리스 진영의 입주자들이 모여있었다.
인종구성은 한국인이 제일 많았지만 중국, 미국, 유럽 등지에서 온 입주자도 반 정도는 됐다.
“네, 어서 오세요~ 앞자리부터 채워 앉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커피 필요하신가요?”
길드원들은 대회의실에 들어오는 참가자들에게 미리 준비한 커피와 차, 다과 등을 건네주며 친절히 그들을 맞이했다.
서큐버스 군단은 그들과 손을 잡아야 하는 입장이기에 최대한 호의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놓는 게 유리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와중, 세현은 회의실 앞쪽 단상에 서서 자신이 메모해 놓은 내용을 눈으로 읽으며 회의실 상황을 곁눈질로 체크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참석률은 괜찮은 편이네.’
현재까지 참석자는 약 40여 명. 앨리스 진영의 인원이 120명까지 늘어난 걸 고려했을 때, 세 명 중 한 명은 참석한 수준이다.
잠시 후, 예정된 시간이 되자 세현은 헛기침을 하는 것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자, 슬슬 회의를 시작하죠. 일단 먼 곳까지 와 주신 입주자 분들에게 먼저 감사의 인사드리겠습니다. 오늘 회의 진행을 맡은 허세현이라고 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였음에도 잠시간 정적이 맴돌았다.
“오오오오오!”
그때 뒤에서 사카린이 환호성과 함께 열성적인 박수로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입주자들은 얼떨결에 박수를 따라 쳤고, 세현은 비로소 상쾌한 마음으로 회의를 시작할 수 있었다.
“저희가 여러분을 이곳에 모이게 한 이유는 다음에 있을 메인 퀘스트 ‘블러디 티 로드’에서 함께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여기 계신 분들 대부분이 레벨 100 근처의 랭커 분들이시기에 아마 저희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세현의 말대로 벌써 24층에 진입했다는 것은 버스를 탄 게 아니고서야 꽤 상위 랭커라는 것을 의미했다.
천천히 얘기를 잇던 중, 앞자리에 앉은 남성 입주자 하나가 손을 번쩍 들더니 비아냥대듯 말했다.
“당신들, 진짜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쪽에 팔콘 길드가 붙었잖아요.”
순간 웅성거림이 커졌다.
그의 말대로 팔콘 길드가 반대 진영에 있다는 것은 좋지 않았다.
이 때문인지 지금 앨리스 진영에 있는 입주자들 중 상당수가 이번 ‘블러드 티 로드’ 퀘스트에서 패배가 당연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번 회차에서는 그냥 경험을 쌓고, 다음 회차에 클리어를 노리자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세현은 그렇게 팔자 좋은 소리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 되면 하트여왕 진영 길드들이랑 메인 퀘스트 진척도에서 최소 3주나 차이가 납니다. 그래도 괜찮으십니까?”
“하지만 별 대안이 없잖아. 우리가 팔콘을 이길 수 있어?”
“여기 계신 분들은 모두 랭커들이시지 않습니까. 너무 지레 겁먹고 계신 거 아닙니까?”
세현은 사실을 냉정하게 말함과 동시에 여기 있는 입주자들의 자존심을 살살 긁었다. 이 방법이 그들을 싸움에 본격적으로 끌어들이는 데 유리할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겁을 먹긴 누가 겁을 먹어. 단순히 상대방 쪽수가 무서운 것뿐이야! 못해도 2~3배는 될 텐데 그걸 우리가 무슨 수로 이겨?”
발끈한 입주자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한 마디를 던졌다.
세현은 이를 기다렸다는 듯 집게손가락으로 자신의 이마를 톡톡 두드리며 씨익 미소 지었다.
“이길 수 있습니다.”
“무슨 헛소리야! 우리가 그딴 소리 들으려고 여기까지 온 줄 알아?”
“저한테 그 쪽수를 이길 작전이 있다고요. 간단한 약속만 해 준다면 그 작전을 알려드릴 용의가 있습니다.”
“어떤 약속?”
“이번 전투에서 저희 길드의 오더를 최대한 따라 주신다는 약속이 필요합니다.”
이 말을 던지는 순간, 입주자들은 다시 한 번 발끈해서 소리쳤다.
“누가 누구의 오더를 들어!”
“이딴 헛소리 하려고 부른 거야? 난 돌아간다!”
심지어는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을 빠져나가려는 사람도 있었다.
쾅-!
“아직 얘기 안 끝났습니다.”
이때 세현이 단상을 한 손으로 세게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저희와 함께해 주시면 24층 보스전에서 얻는 모든 보상을 여기 계신 입주자 분들에게 공평하게 나눠 드리겠습니다.”
“……이게 무슨 미친 소리야?”
잠시 회의실에 침묵이 맴돌았다.
이에 세현은 빔 스크린을 이용해 앞에 작은 도표를 출력했다. 그러곤 그 도표들을 보며 천천히 말을 시작했다.
“말 그대로 모든 보상을 나눠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퀘스트를 클리어한 직후에는 24층 레이드 파티에 이번에 저희에게 협력해 주신 입주자 모두를 포함시켜 함께 보스 공략에 나설 생각이며 이 보상도 모두 나눠 드리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순간, 입주자들이 웅성거렸다. 서큐버스 군단이 제시한 조건이 꽤 파격적이기 때문이었다.
그 반응을 본 세현은 옅게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또 있습니다. 만약 열심히 저희를 도와서 싸워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블러디 티 로드’에서 패배한다면 한 명당 2억씩 위로금을 챙겨 드릴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