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
90화.
“아니 그게 아니라, 아름답다는 말이 외모 평가를 하려거나 그런 뜻으로 말한 건…….”
세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뭐, 좋은 뜻으로 알아듣겠습니다, 세현 공.”
마사무네는 어색한 미소를 짓더니 망치를 주워 다시 모루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대장간의 열기 때문인지, 아니면 조금 전 세현의 헛소리 때문인지 그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아… 미치겠네.’
잠시 어색한 정적이 흐르는 와중, 변태 쥐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츄츄츄츄! 이 분위기 뭡니까츄?”
이에 모두 헛기침만 하며 눈치를 줬다. 하지만 눈치라고는 시베리아 벌판에 묻어 놓고 온 것 같은 에D츄는 음흉한 웃음소리를 내며 말을 이었다.
“에D츄 알고 있어요, 그거 아닙니까아~ 사랑의 고백?!”
“사랑의 고백 같은 소리하고 있네.”
세현이 놈의 이마에 주먹을 날리자, 에D츄가 한 손으로 이를 여유 있게 막아 내더니 손가락을 흔들며 비웃음을 날렸다.
“츄츄츄! 쭈인님의 이마 꽁- 공격 따윈 이미 다 파악했다구욧.”
“아오! 이 망할 놈의 쥐새끼가!!”
곧장 소환수 넷을 소환해, 에D츄의 발을 하나씩 붙잡게 했다.
“야, 놓치지 말고 꽉 잡고 있어.”
“히이이익! 쭈인님!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쭈인님!”
세현은 사악한 표정을 지으며 에D츄의 겨드랑이로 손가락을 가져갔다.
“갸아아아아아아악! 히이이익! 살려츄!!”
겨우 1분여간 겨드랑이를 간질인 것뿐인데, 에D츄는 거의 발광을 할 정도로 괴로워했다.
세현은 그제야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에D츄를 놓아줬다.
“다음부터 또 헛소리하면 더 심한 걸로 간다.”
“악마야…… 쭈인님은 악마인데츄.”
소란을 부리고 있는 사이 마사무네는 작업을 완료했고, 그동안 제작한 장비를 세현에게 선보였다.
“세현 공, 다 완성됐습니다. 그동안 제작한 장비들이니 한 번 확인해 보시지요.”
그녀가 먼저 내민 것은 세현의 요청으로 제작된 세 벌의 방어구였다.
검은색과 붉은색이 교차된, 가벼운 인상의 일본풍 갑옷이었다. 세현이 줬던 오라나이트를 섞은 것인지 군데군데 빛이 뿜어져 SF풍의 기묘한 느낌을 풍기기도 했다.
[#. 세트 방어구 / 마사무네의 두 번째 의지]
- 전설적인 대장장이 삼작 마사무네의 실력이 발휘된 방어구 세트. 기존의 방어구 ‘마사무네의 의지’의 단점을 개량해 만든 후속작. 방어구로서의 뛰어난 성능뿐 아니라 음양사들의 조언을 받아 생존에 특화된 마법 효과를 부여했다.
등급: 레어
방어력: 7티어 A+
착용 레벨: 60
세트 효과:
- 올스탯+5
- 물리 / 마법 데미지 감소 10%
- 최후의 불꽃(패시브): 사용자의 HP가 2% 미만일 때 10초간 무적 효과 부여. (최후의 불꽃 누적 2회 발동 시 방어구 세트 파괴.)
‘바라던 것 이상으로 나왔네.’
세현이 따로 요청한 세 벌의 방어구 세트는 본인과 설희, 세이메이가 사용할 물건이었다.
일단 ‘생존 우선’에 중점을 두고 제작해 달라 요청했는데, 죽기 직전 10초간 무적 상태가 되는 ‘최후의 불꽃’ 옵션은 이 요청에 딱 들어맞았다.
위기 상황에 도주할 시간을 벌어 줄 뿐 아니라, 무적을 이용해 도박수를 던져 볼 수도 있는,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옵션이다.
“고마워, 마사무네 선생. 딱 내가 바라던 방어구야.”
세현이 흡족한 미소와 함께 엄지손가락을 올리자 마사무네는 그에 화답하듯 웃으며 다음 장비를 꺼냈다.
“이건 세현 공이 쓰실 검입니다.”
붉은색 검신에, 고풍스러운 금빛 조각들이 세밀하게 새겨진 검이었다.
[#. 양손검 / 별운검]
- 직접 전투와 지휘, 두 용도로 모두 사용할 수 있는 검. 정교하게 새겨진 화려한 장식이 눈을 즐겁게 해 준다.
등급: 에픽(B)
공격력: 4티어 F- ~ 11티어 S+
착용 레벨: 60
세트 효과:
- 장수의 기질(패시브): 자신이 소환한 소환수 숫자에 따라 검의 공격력이 상승합니다.
(#. 소환수 20체 소환시 최대치 달성.)
- 힘의 공유(액티브 / 쿨 타임 3시간): 소환수들이 가진 전체 스테이터스의 10%를 10분간 흡수합니다.
“……이게 말이 돼?”
말도 안 되는 옵션에 세현은 어안이 벙벙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여태 사용해 오던 칠지도의 경우, 소환수를 일시적으로 강화시키는 데 그 효과가 집중된 무기였다.
세현의 직업이 소환사다. 그렇기에 소환수를 강화시키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건네받은 ‘별운검’은 이런 상식을 완전히 뒤집는 무기였다.
‘소환수의 숫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내 본신이 강해진다.’
소환수의 숫자가 많으면 무기의 공격력이 강해지는 ‘장수의 기질’.
소환수 20명을 채울 경우 최대 11티어 S+급, 즉 110레벨 대 최상급 무기의 공격력을 낼 수 있는 사기적인 무기였다.
아무리 소환사라 해도 저 정도 숫자의 소환수를 거느릴 수 없는 게 보통이기에 있으나 마나 한 옵션이겠지만, 세현은 이미 소환수의 숫자가 10명을 넘었다.
이 정도라면 못해도 8~9티어 스펙은 충분히 뽑아낼 수 있다.
거기에 소환수의 능력치를 일시적으로 흡수할 수 있는 ‘힘의 공유’. 안 그래도 사기적인 스펙의 소환수들의 스텟을 10%씩 흡수할 수 있다면, 세현은 일시적으로 괴물 같은 수준의 스텟을 가질 수 있을 터였다.
이는 세현에게 딱 맞는 전용 아이템이나 다름없었다.
“마음에 드십니까, 세현 공?”
“당연하지. 솔직히 말하자면 이런 아이템을 그냥 받아도 괜찮을까 싶을 정도야.”
“세현 공이 주신 재료가 훌륭했을 따름입니다.”
나머지 장비들의 수준도 준수했다. 기존에 쓰던 장비와 병행한다면 충분히 모든 소환수를 적당히 무장시킬 수 있는 정도였다.
에D츄에게는 안장과 주요 부위를 가릴 수 있는 펫 전용 방어구도 착용시켜 줬다.
“오오! 에D츄의 장비도 있는 겁니까아!”
코끼리만 한 햄스터가 갑옷을 덧대 입으니 그 꼴이 우스꽝스러웠지만, 에D츄 본인은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으니 세현은 대충 넘어가기로 했다.
“고생했어, 마사무네 선생. 그건 그렇고 저번에 왕실에서 주문했다던 물건들은 다 만들어서 넘긴 거야?”
“안 그래도 그 얘기를 드릴까 했습니다. 최근 성 근처에 병사를 모집한다는 벽보가 잔뜩 붙어 있더군요. 아마도 그들이 쓰게 될 무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마사무네는 잠시 뭔가를 더 말하려는 듯 머뭇거리며 천천히 입을 다시 열었다.
“제가 만든 무기들은 보통의 물건들이 아니었습니다.”
“정확히 무슨 뜻이야?”
“무기의 성능이나 속성들이 오로치 급의 대요괴, 어쩌면 그 이상의 존재를 쓰러뜨리기 위한 무기들로 제조됐습니다.”
“이상의 존재라면, 입주자나 관리인 같은?”
마사무네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벚꽃공주가 준비하고 있는 군대는 뭔가 강대한 존재와 싸울 준비를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내 일만으로도 골머리가 아픈데 이건 대체 뭔 일이냐…….’
세현은 관자놀이를 손으로 꾹꾹 누르며 정신을 최대한 안정시켰다.
“뭐 한동안은 지켜보자고. 아직까지 전부 추측뿐이잖아? 마사무네 선생도 요즘 너무 과로해서 예민해진 것뿐일지도 모르지.”
“부디 그랬으면 좋겠군요.”
“내가 한 번 공주를 직접 만나 볼게.”
세현은 대장간을 빠져나간 직후, 벚꽃공주를 만나 보기 위해 잠시 왕궁을 찾았다.
“죄송합니다, 나리! 한동안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공주님의 명령이 있었습니다.”
“젠장.”
병사들은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하며 세현을 들여보내지 않았다.
확실히 수상한 냄새가 풍겼지만 뾰족한 수가 없기에 세현은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아, 피곤해 죽겠는데 그냥 돌아가서 쉬어야 겠-.’
그때였다.
“오, 자네! 오랜만일세!”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콧수염을 근사하게 기른 아랍권 남성과 그를 따르는 십여 명의 병사들이 눈에 들어왔다.
“살라웃?”
“아하하하, 기억하고 있구만! 이런 곳에서 은인을 마주치게 되다니 굉장한 우연이군!”
그는 시즌2 구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거주자였다. 마지막에 세현이 그와 벚꽃공주의 교역을 터 준 것으로 관련 퀘스트를 마무리했었다.
“당신이 여긴 무슨 일인데?”
“하하, 공주님과 만나 긴밀히 할 얘기가 있어서 왔다네. 그건 그렇고 자네! 아주 귀여운 애완동물이 생겼군!”
그는 에D츄를 쳐다보며 자연스럽게 말을 돌렸다.
“애완동물 관련해서는 우리 왕국에 전문가들이 많이 있으니 나중에 한 번 찾아오게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걸세.”
“아니 그러니까 여기 무슨 일로 왔냐는…….”
“이크크, 시간이 늦었군! 지금 좀 바빠서 그러니 다음에 봅세.”
그는 계속 말을 돌리다 황급히 자리를 떠 버렸다.
연기가 너무 어색해서, 아무리 둔감한 인간이라고 해도 살라웃 왕자가 뭔가를 숨긴다는 걸 대놓고 느낄 정도였다.
‘확실히 뭔가 있어.’
F급이던 시절, 클리어가 끝난 시즌에서 거주자들이 이렇게 활동하는 것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들은 그저 제자리에서 퀘스트를 발행하고 입주자들을 다음 구간으로 인도하는, 그저 조금 정교한 NPC같은 존재였을 뿐.
하지만 지금의 거주자들은 완벽히 살아 있는 존재처럼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것이 세현이 과거로 돌아온 탓인지, 다른 외부 요인 때문인지 판단할 수 없었지만 뭔가의 거대한 변화가 이뤄지고 있다는 걸 느끼게 했다.
검은 로브의 공격. 시즌1~2구간의 거주자들의 수상한 움직임. 이상하게 빠르게 상층으로 진격하는 상위권 길드들까지.
여러 정보가 머리에 혼재되며 세현은 머리가 터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 일단 좀 쉬자.’
세현은 이틀 후, 앨리스 진형 길드들과 있을 회의까지 8층 집에서 푹 쉬면서 생각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 † †
“야, 문 열어!!”
평온해야 할 아침, 신경질적인 외침이 집에서 자고 있던 세현을 깨웠다.
“아으, 누구야 이 시간에.”
고민으로 잠을 설친 세현은 부스스한 눈을 비비며 현관으로 터덜터덜 걸어가 문을 열었다.
그러자 눈앞에는 익숙한 얼굴의 여성이 세현을 노려보고 있었다.
“엥? 사, 사카린 씨. 여긴 어쩐 일로?”
“엥은 무슨 엥이야, 내가 한 말 기억 안 나? 놀러 간다고 했잖아.”
“이잉?”
“설마 이제 와서 그냥 한 말이었다든지 하는 헛소리하려는 건 아니지?”
사카린은 손을 꺾어 빠드득- 하는 소리를 내며 싱긋 웃어 보였다.
세현은 짜증 가득했던 얼굴을 순식간에 미소로 바꾸며 대꾸했다.
“하하, 그럴 리가.”
그러자 사카린은 옆에 들고 있던 비닐 봉투 하나를 툭 던지며 말했다.
“배고프니까 밥 좀 주라.”
“이건 뭔데요.”
비닐봉지를 열어 안을 들여다보자 이것저것 족보 없이 막 주워 담은 것 같은 식재료들이 잔뜩 담겨 있었다.
“알아서 맛있게 해 줘.”
“……이 인간이.”
“다른 애들은 내가 깨울 테니까, 다 같이 아침 먹자구!”
사카린은 세이메이와 설희가 자고 있는 방문을 힘차게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꺄아아악!”
안에서 뭔가 요란스러운 소음이 들려왔지만, 세현은 그러거나 말거나 조리대 쪽으로 좀비처럼 비틀비틀 걸어갔다.
“젠장, 간신히 잠들었는데.”
세현은 투덜대면서도 스마트폰으로 조리법을 보면서 양 손으로 재료를 차근차근 썰어 나갔다.
“평안한 아침입니다, 주군.”
“세현 씨 좋은 아침……이네요. 세수만 하고 바로 도와드릴게요.”
잠시 후, 사카린에게 등짝 스매싱을 맞으며 설희와 사카린이 방에서 빠져나왔다.
“저는, 쥐새끼 공의 밥을 챙기겠습니다, 설희 공….”
“그럼 제가 세현 씨 도울게요.”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업무를 분담했다.
설희가 바로 앞치마를 하고 세현의 옆으로와 함께 아침을 준비했다.
된장찌개나 생선 구이 같은, 전형적인 아침상 음식들이 설희의 도움으로 하나둘씩 완성됐다.
이후 에D츄의 밥을 주고 온 세이메이가 그릇에 담긴 음식들을 식탁으로 옮기고, 수저를 놓고 컵에 물을 따르는 등 잡일을 보조했다.
그렇게 요란한 30여분이 지나자, 어느새 식탁 위에는 근사한 아침상이 차려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