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
87화.
세현이 서 있는 곳은 한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정도로 거대한 녹차밭이었다.
“차밭을 지켜라! 노예들이 도망치면 사살해도 좋다!”
“매드해터 님에게 지금 상황을 보고해라!”
차밭이라고 하면 보통 평온하고 목가적인 분위기를 떠올리기 쉽지만 지금 이곳은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카드 병사들과 세현 일행이 쉴 새 없이 전투를 벌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24층의 콘셉트는 하트여왕의 심복인 ‘매드해터’가 대규모 차밭을 조성해, 자신이 납치한 수인족들을 이곳에서 노비로 부리고 있다는 설정이다.
이 녹차밭에서 생산되는 양질의 홍차는 매드해터가 본인의 ‘티파티’로 즐기거나 왕궁에 들어갈 뿐만 아니라, 아파트 내 곳곳에 수출돼 원더랜드를 유지하는 자금줄로 사용되고 있다.
세현이 받은 서브 퀘스트 [차농장 해방]은 차밭을 습격해, 노예들을 해방시키고 적의 자금줄을 끊는다는 배경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
문제는 이곳이 전략적 요충지이니 만큼, 하트여왕 쪽도 만반의 준비를 해 놨다는 것이다.
카드 병사들의 수준이 높을 뿐 아니라, 하트여왕 쪽에 붙어 앞잡이 노릇을 하는 수인족들도 있었다.
‘하여간 일제 시절 때도 그렇고, 뭐든 변절한 놈들이 더 악질이라니까.’
세현 일행은 차밭의 노비들을 해방시킴과 동시에 카드 병사들을 차근차근 쓰러뜨려 나갔다.
“입주자님을 돕자!”
“이건 혁명이다!”
“무기를 들어!”
그러면 차밭에서 혹사당하고 있던 노예들이 카드 병사의 무기를 빼앗아 세현 일행을 도왔다.
이렇게 농장 3~4개를 해방시킬 때 즈음, 세현은 목표하던 두 마리의 폰을 일주일 만에 50레벨까지 올릴 수 있었다.
[‘블랙 폰’을 ‘블랙 룩’으로 진급(프로모션)시킵니다.]
[‘화이트 폰’을 ‘화이트 룩’으로 진급(프로모션)시킵니다.
전직을 완료시키자 두 폰의 키가 거의 두 배 이상 커졌고, 온몸에 성벽을 연상시키는 두터운 중갑옷이 장착됐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모 히어로 영화의 녹색 거인이 생각나는 외모였다.
세현은 소환수 상태창을 열어 두 소환수의 능력을 찬찬히 뜯어봤다.
[#. 소환수 / 화이트 룩]
- 브레이브킹 군단의 방패가 되어 주는 중전사. 높은 힘과 체력으로 적을 밀어붙인다. 마법 방어에 특화됐다.
- 레벨: 1
- HP / MP: 1000 / 700
- 힘(53) / 민첩(63) / 지능(51) / 체력(93)
▶ 패시브 스킬
- 백색의 성벽
(1) 마법 공격 데미지 30% 감소.
(2) 모든 치료 효과 150% 증폭.
- 백색의 충신: 왕이 데미지를 입을 경우 데미지의 50%를 대신 흡수.
▶ 액티브 스킬
- 캐슬링 (MP 100% 소모): 사용 즉시 킹과 자신의 위치를 뒤바꿔 킹을 위기에서 구해 냅니다.
- 캐슬 차징 (MP 150 소모): 전방으로 힘차게 돌진하여 적을 밀쳐 냅니다.
[#. 소환수 / 블랙 룩]
- 브레이브킹 군단의 방패가 되어 주는 중전사. 높은 힘과 체력으로 적을 밀어붙인다. 물리 방어에 특화됐다.
- 레벨: 1
- HP / MP: 1100 / 600
- 힘(63) / 민첩(63) / 지능(41) / 체력(97)
▶ 패시브 스킬
- 흑색의 성벽
(1) 물리 공격 데미지 20% 감소.
(2) 모든 치료 효과 150% 증폭.
- 흑색의 충신: 왕이 데미지를 입을 경우 데미지의 50%를 대신 흡수.
▶ 액티브 스킬
- 캐슬링 (MP 100% 소모): 사용 즉시 킹과 자신의 위치를 뒤바꿔 킹을 위기에서 구해 냅니다.
- 캐슬 차징 (MP 150 소모): 전방으로 힘차게 돌진하여 적을 밀쳐 냅니다.
‘하나는 마법 방어, 하나는 물리 방어 특화에 왕을 보호하는 데 최적화된 클래스라 그거군.’
두 룩이 가진 성능은 비슷했으며 스킬 구성 대부분이 방어에 치중돼 있는 탱커 타입이었다.
에D츄와 비교하자면 스펙은 떨어지지만, 유사시에는 ‘킹’, 즉 허세현 본인을 구출하는 데 특화된 것이 특징이었다.
세현은 경험의 관리자에 남은 경험치를 모두 털어 넣어 두 소환수의 레벨을 각각 13, 11로 상승시켰다.
“쭈인님! 이 두 놈은 뭡니까츄?”
“내 소환수. 앞으로 너랑 같이 전방에서 탱킹을 할 거니까 잘 봐 두라고.”
“츄? 이 두 녀석이 저랑 같은 일을 한다구요? 어이~ 나를 부를 땐 에D츄 선배라고 불러라 이 녀석들! 싸움이라면 내가 하나부터 열까지 잘 알려 줄 테니까!”
에D츄는 괜히 입으로 ‘슉슉’하는 소리를 내며 허공에 앞발을 휘둘렀다.
자기 딴에는 센 척하고 싶은 모양이지만, 앞다리가 짧아 그 모습은 애처롭다 못해 깜찍했다.
“풉!”
“귀, 귀여워…….”
세이메이와 설희는 그 모습이 귀여운지 웃었고, 세현은 한숨을 푹 내쉬며 어깨를 으쓱했다.
“에D츄, 선배 놀이 하는 것도 좋은데 슬슬 피곤하니까 돌아가자.”
“옙, 쭈인님!”
녹차밭을 빠져나가려던 와중, 별안간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다가오는 걸 발견했다.
세현은 눈을 찌푸린 채 그들을 노려봤다.
‘뭐야 저거?’
그들은 입주자였다. 그것도 세현과는 악연으로 엮인 블루울프 길드원들이었다.
대략 20명 내외의 무리였는데 개중에는 세현에게 굴욕적인 패배를 당했던 모히칸 머리, 라자드도 있었다.
그는 세현을 보는 순간 흠칫 놀라며 다른 길드원들의 뒤로 숨어들었다.
“워워~ 해치지 않으니까 쫄지 마, 형씨.”
“이 새끼까!”
“너 방금 뭐라고했냐? 이 사기꾼 새끼가.”
세현이 피식 웃으며 대꾸하자 다른 블루울프들이 노골적으로 적개심을 드러냈다.
“나서지 마라.”
그러자 가장 앞에 서있던 40대 중반 즈음의 마치 야수같은 인상을 지닌 남자가 팔을 뻗어 모두를 제지했다.
‘저놈은…….’
그의 이름은 김건, 블루울프의 길드장이자 본인 스스로가 ‘블루울프’라는 별명을 지닌 A급 입주자였다.
그는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자네가 서큐버스 군단에 새로 들어왔다는 그 친구군? 화려하게 한탕 하셨던데, 뒷감당을 어찌하려고 하시나?”
“뒷감당은 무슨, 먼저 시비턴건 니들이잖아?”
세현이 중지를 뻗으며 말하자, 김건이가 미간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이 친구…… 인기도 많고, 혈기도 넘치는 건 알겠는데. 아직 최상층에 조사단이 없다는 건 알고 있는 거지?”
아직 24층에는 조사단이 진출하지 않았다.
이 말은 최상층에서 어떤 사고가 벌어진다 해도 자세한 조사가 불가능하다는 얘기, 김건은 은근히 세현을 협박하고 있었다.
“뭐 어느 길드가 조사단 없다고 일 벌릴 정도로 양아치는 아니라고 믿어야죠.”
“너, 그런 태도로 살면 아파트에서 오래는 못 버틸 거다.”
“아이고~ 천하의 블루울프가 걱정까지 해 주시네. 영광입니다.”
이 말을 끝으로 두 무리는 서로 반대편으로 걸어가며 교차했다.
‘저놈은……?’
그런 와중, 세현의 눈에 한 사람이 눈에 밟혔다.
건달같이 생긴 30대 후반의 남성, 그는 입주 시험에서부터 세현과 악연으로 얽힌 사채업자 마상철이었다.
고작해야 C급 클래스에다가 세현과 같은 날에 입주자가 된 그가 벌써 24층에 와 있다는 것은 세현에게 위화감을 줬다.
블루울프들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후, 세현 일행은 길을 위쪽에서 내려다 볼 수 있는 바위 뒤편에 몸을 숨기고 앉아 잠시 휴식을 취했다.
현재 상황에 대해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대체 뭔 일이 벌어지는 거야?’
세현의 예측이 맞았다면 상위권 길드들이 24층에 도착하려면 적어도 2~3주는 더 있어야 가능했다.
아무리 ‘하트여왕’ 쪽 루트를 탄다고 해도 어차피 험프티 덤프티 퀘스트는 동일하게 진행해야 하기에 벌써 24층에 올라온다는 건 물리적으로 어려웠다.
게다가 24층에 보이는 건 블루울프뿐만이 아니었다.
팔콘 길드는 물론이거니와, 적어도 상위권 길드원 5~6개가 길을 따라 이동하는 모습이 포착됐다.
분명 무언가의 변수가 개입해, 상황을 급속히 바꿔 놓은 상황이었다.
‘이대로면 위험해.’
세현은 일단 사카린에게 메시지를 보내, 길드원들이 험프티 덤프티 퀘스트를 통과할 수 있도록 정보를 더 풀었다.
서큐버스 군단의 실력이라면 빠르면 며칠 내로 24층에 도착할 수 있을 터였다.
“설희 씨, 세이메이. 일단 승강의 방으로 돌아가죠.”
둘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모두 느끼고 있기 때문이었다. 24층의 활동은 서큐버스 군단 길드원들이 도착한 후에 해도 늦지 않았다.
“쭈인님, 아직 더 싸울 수 있는데츄!”
“시끄러.”
에D츄가 못내 아쉬워하는 눈치였지만, 세현이 옆구리를 꼬집자 군말 없이 동의했다.
‘조용히 빠져나간다.’
최대한 눈에 띄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세현은 소환수를 모두 소환 해제했다.
하지만 여전히 문제는 있었다.
펫이나 용병의 경우는 소환 해제가 불가능하기에, 어떻게든 함께 목적지로 향해야 한다.
세이메이야 함께 다니면 그만이지만, 에D츄의 경우는 덩치가 워낙 컸기에 들키지 않게 움직이는 게 불가능에 가까웠다.
세현은 최대한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 가며 인적이 드문 루트로 이동했다.
하지만 상황은 세현의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어, 뭐야 저거? 브레이브킹인가 뭔가 하는 그 간나 새끼 아니네?”
“대장 동무, 옆에 쥐새끼도 같이 있음메.”
황색과 붉은색으로 페인팅 된 전투복 차림의 10여 명의 입주자들, 그들은 북한 소속의 조선노동당 길드원들이었다.
“괜히 시비 털지 말고 갈 길 가라.”
세현은 손을 휘휘 저으며 대꾸했지만, 오히려 이런 행동은 그들을 자극했다.
“어디서 남조선 아새끼덜이 이래라 저래라네?”
“저거 손모가지를 꺾어 버리라.”
그들이 앞으로 달려들자, 세현은 씨익 미소 지으며 캠코더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
‘안 그래도 룩의 능력을 실험해 보고 싶었는데 잘됐어.’
유튜브 영상용이 아닌, 그들을 때려눕히는 것이 정당방위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한 일종의 보험이었다.
“쭈인님! 제가 갑니다!”
에D츄가 앞으로 나서 시간을 버는 사이, 세현은 두 룩을 포함한 모든 소환수를 꺼냈다.
“뭐, 뭐네 이건! 무슨 소환수 숫자가 이래 많네!”
순식간에 그 수가 10명을 넘어가며 도리어 노동당 입주자들이 궁지에 몰린 꼴이 돼 버렸다.
“그럼 천천히 가 보자고.”
세현이 손가락을 딱 하고 부딪히자 나이트들의 장비를 대신 착용한 블랙, 화이트 룩이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자, 북조선 동포 형님들. 내가 아~주 친절한 사람이라서 형들한테 먼저 기회를 줄게. 이 소환수 둘을 10분 내로 쓰러뜨려 봐, 그럼 순순히 보내 줄게.”
“이게 무슨 말을 하는 거네?”
세현의 도발에 발끈한 입주자들은 자신만만하게 두 룩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처참했다.
“뭐, 뭐네 이건!”
“대장 동무! 소환수가 죽지를 않슴메! 어쩝니까?”
아무리 공격을 퍼부어도, 두 마리의 룩은 마치 거대한 성벽이라도 되는 양 꼼짝도 하지 않았다.
세현의 컨트롤도 대단할 것이 없었다. 스킬이 날아올 때는 화이트 룩을, 물리 공격이 날아올 때는 블랙 룩을 앞으로 내보내는 식으로 위치를 스왑해 주는 게 다였다.
간혹 두 룩의 HP가 50%가량까지 떨어질 때도 있었지만, 그때면 화이트 비숍이 힐을 쏟아부어 금세 HP를 가득 채웠다.
‘10레벨 대에 이 정도 성능이면, 앞으로 탱킹 걱정은 할 필요도 없겠어.’
최근 에D츄가 탱커 역할을 도맡긴 했지만, 모든 적을 커버하기에는 탱커의 수가 부족했다.
하지만 두 소환수의 합류로 앞으로 펼칠 수 있는 전술의 폭이 한층 넓어졌다는 걸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
이렇게 지루한 전투가 계속되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