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
84화.
“시끄러! 밥을 처먹었으면 밥값을 해야 될 거 아니야! 움직여, 돼지 햄스터!”
“하하핫, 달려야죠! 달려야하구 말구요! 저를 말이라고 생각해주세요츄!”
에D츄는 헛웃음을 뱉으며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역시 대화보다는 주먹이 가까운 법이다.
‘그래도 덩치가 커서 그런지 승차감은 좋네.’
그 속도는 시즌3의 코커스보다 빨랐지만, 워낙 덩치가 크고 등이 넓어 안정감이 있었다.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등 뒤에 드러누워 잠을 자도 괜찮을 정도였다.
세현은 기름 많이 먹는 자동차 한 대 뽑았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슬슬 자바워키 잡을 준비를 해야지.’
이번 목적지는 23층에 위치한 반군 거점이었다.
이곳과 24층에서 반군 세력을 규합해 25층에서 자바워키를 쓰러뜨릴 준비를 하는 게 메인 퀘스트의 흐름이다.
세현이 할 일은 미리 23층, 24층 메인 퀘스트에서 선점할 수 있는 것들을 독식하는 것. 그 이후에 길드원들이 최대한 빠르게 25층까지 오를 수 있게 돕는 일이었다.
자바워키는 거의 시즌 보스에 준하는 전투력을 가졌기에 혼자만의 힘으로 놈을 쓰러뜨리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어느 정도 스펙을 맞춰야 하기에 메인 퀘스트를 진행하는 도중에 레벨링을 하는 것 또한 필수였다.
‘기간은…… 일단 두 달 정도 잡으면 되려나?’
세현이 잡은 타임 리미트는 두 달.
말이야 쉽지만 두 달 동안 이 모든 일을 해결하려면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란다.
하지만, 세현은 무리를 해서라도 이 모든 걸 해낼 심산이었다.
‘미리미리 준비 해 둬야지.’
최근 있었던 검은 로브 사건이나 블루울프와의 신경전 같은 변수가 존재하는 한 조금이라도 빨리 힘을 키워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선 자신도, 길드도 더더욱 빠르게 메인 퀘스트를 돌파해야 했다.
‘23층부턴 보상이란 보상은 싹 쓸어 먹는다.’
Level 32. 체셔캣
반군 기지에 도착한 후, 세현은 그들을 도와 일대 카드 병사들의 요새를 습격하며 메인 퀘스트를 진행했다.
주간 회의가 있는 날을 제외하고는 거의 풀로 사냥과 메인 퀘스트를 병행하는 강행군이 2주간이나 이어졌다.
그 즈음이 되자, 서큐버스 군단 멤버들도 하나둘씩 엿 같은 험프티 덤프티의 퀘스트를 뚫고 23층에 진입했다.
하지만, 세현의 마음은 조금도 편해지지 않았다. 23층에 서큐버스 군단을 제외한 다른 상위권 길드들이 진출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예측했던 기간보다 한참 앞선 시점이다.
세현은 아파트의 흐름이 자신과 전생과 다르게 흘러간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게다가 24층은 험프티 덤프티 퀘스트 같이 까다로운 내용 없이 카드 병사를 학살하는 것이 메인 퀘스트 내용의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전투력이라면 차고 넘치는 상위권 길드들은 메인 퀘스트 따위 금방 치고 올라올게 분명했다.
이대로 흘러간다면 자바워키를 처음으로 잡는 게 서큐버스 군단이 될 거라는 장담을 할 수 없었다.
‘초조해 봐야 소용없어. 일단 23층부터 뚫는다. 아슬아슬하긴 하지만, 해 볼 만해.’
세현은 일단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했다. 23층의 최초 클리어를 시도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현재 세현의 레벨은 62.
24층의 적정 레벨인 100에는 한참 모자라지만, 나름 믿는 구석이 있기에 충분히 해 볼 만하다 판단했다.
‘화이트 비숍만 잘 지켜 주면 충분히 해 볼 만해.’
얼마 전, 화이트 폰 하나를 30레벨을 만들어 화이트 비숍으로 진급시켰다.
블랙 비숍과 달리 화이트 비숍은 아군의 치료와 버프를 위주로 스킬셋이 갖춰져 있었다.
힐량이 어지간한 상위 클래스 힐러 못지않게 나와 줘 탱커 역할을 맡은 에.D.츄와 궁합이 잘 맞았다.
탱커가 힐을 받으며 어그로를 끌고, 근거리 딜러가 좌우에서 적들을 흔들며, 원거리 딜러들이 안정적으로 딜링을 하는 형태. 이는 세현이 생각했던 이상적인 파티의 모습 그 자체였다.
여기에 백설희와 세이메이도 그동안 꽤 성장을 이뤘기에 세현의 생각엔 충분히 할 만한 도전이라 판단했다.
준비를 마친 세현 일행은 곧장 메인 던전에 입장했다.
“여기서부터 앞이 잘 안 보이니까 조심해요.”
23층 최종 던전의 이름은 <환각의 숲>.
늪지대로 이뤄진 숲 전체에 짙은 보랏빛 안개가 꼈고 환각나방이나 버섯인간 같은 중독 공격을 하는 몬스터들이 넘쳐 나는 곳이다.
늪에 잘못 발을 디디면 슬로우 디버프가 걸리며 머드맨들이 발목을 붙잡아 끌고 들어간다. 거기에 잘못해서 독에 중독이라도 되면 엄청난 데미지가 들어온다.
게다가 몬스터들의 패턴과 스킬이 전체적으로 까다롭고 스펙도 낮은 편이 아니다. 잠깐만 방심하면 순식간에 입주자의 목숨이 날아가는 난이도가 있는 던전이었다.
‘여기서는 오른쪽으로 붙어서 나방 둥지를 먼저 공략한다. 머드맨이 뒤에서 오니까 늪 근처에서 일단 유인해서 먼저 처리하고…….’
세현은 천천히 준비했던 공략들을 수행하며 던전의 안쪽으로 향했다.
완벽히는 아니지만 던전의 지형지물과 몬스터 구성을 어느 정도 기억하는 것이 큰 도움이 됐다.
이 정보를 기반으로 몬스터를 하나씩 유인한 후, 세이메이가 포박술로 발을 묶고 집중공격을 퍼부어 하나씩 끊어 냈다. 다소 시간이 걸리지만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방법이었다.
‘최대한 조심해서 천천히 전진한다.’
공략이 예상보다도 순조롭게 풀렸지만, 세현은 조금도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이곳에서 지난번의 ‘검은 로브’ 사건 같은 변수가 생기면 이번에야 말로 목숨을 보장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4~5시간이 지날 무렵, 세현 일행은 해골 조각이 새겨진 거대한 보라색 문 앞에 도달할 수 있었다.
두말할 것도 없이 23층의 보스룸에 도달한 것이었다.
세현은 침을 꿀꺽 삼키며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설희 씨, 세이메이, 제 어깨 붙잡아요.”
“넵!”
“알겠습니다, 주군!”
두 사람은 세현의 요구에 순순히 따랐다.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저번처럼 설희만 보스룸 안으로 워프되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함이란 걸 알았다.
세 사람은 소환수들 사이를 지나가 보스룸 문고리 위에 손을 동시에 올렸다. 그러자 언제 나와 같이 팝업창 하나가 출력됐다.
[#. 보스룸 / 체셔캣과 춤을]
- “Was it a cat I saw?”
그는 머리밖에 없어 머리를 벨 수 없습니다.
적정 레벨: 100
적정 인원: 5~10인
클리어 보상: 타이틀 ‘그림자를 잡은 자’
- 민첩+1
#. 입장 인원수에 따라 보스의 난이도가 조정됩니다.
[입장하기]
입장하기를 누르자, 세 사람의 몸이 동시에 안으로 전송됐다.
“후우, 이번에는 별 탈 없이 들어왔네.”
세현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말하자 설희가 힘내라는 듯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빙긋 웃어 줬다.
그러자 옆에서 지켜보던 세이메이가 두 사람 사이로 몸을 스윽 밀어 넣더니 세현의 손을 꼭 붙잡고 말했다.
“주, 주군! 이곳엔 어떤 요괴가 잠들어 있습니까?”
“어 그게…….”
세이메이의 말대로 이번 보스룸의 분위기는 독특했다. 어둠이 가득한 공간, 그 중심부에 검붉은 첨탑 수십 개가 들쭉날쭉 솟아 있었다.
세현은 손가락으로 그중에서도 가장 큰 첨탑의 정상을 가리켰다.
“저놈이 보스야.”
그곳에는 흰 눈과 이빨이 어둠 속에 둥둥 떠다니며 세현 일행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으스스한 보스의 모습에 설희와 세이메이가 동시에 침을 꿀꺽 삼켰다.
“츄우우우우!”
그 순간, 갑자기 에D츄가 경기를 일으키듯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온몸을 바들바들 떨었으며 오줌을 지려 바닥을 흥건히 적셨다.
“무서워요! 무서워요 쭈인님!”
그걸 본 순간, 세현은 본능적으로 뭔가 잘못됐음을 느꼈다.
“야 쥐새끼, 괜찮아? 갑자기 왜 그래.”
곧장 옆에 다가가 에D츄의 몸을 흔들었다. 하지만 에D츄는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고개를 처박고 짧은 앞발을 뻗어 허공을 가리켰다.
“츄…… 저 위에서 무서운 냄새가 난다츄!”
앞발의 끝에는 검은 공간 위에 둥둥 떠 있는 눈동자와 이빨이 보였다.
“저거?”
세현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대다 뭔가 생각난 듯 탄식했다.
“아 맞다… 너 쥐였지.”
에D츄가 아무리 코끼리만 해도 쥐일 뿐이다.
저 위에 있는 보스는 고양이 체셔캣. 쥐는 고양이에게 본능적으로 공포를 느끼기에 옴짝달싹 못하는 것이었다.
[#. 펫 / 야수의 왕 에.D.츄]
- 22층 메인 던전의 최종 보스, 자칭 야수의 왕. 강한 힘2을 가지고 있지만 어딘가 변태스럽고 음흉한 구석이 넘쳐 나는 이상한 햄스터.
▶ 상태 이상
1. 피어 - 쥐는 고양이에게 극심한 공포감을 느낍니다.
‘역시.’
혹시나 하는 마음에 <펫 상태창>를 켜 보자 에D츄가 피어 상태에 걸린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에D츄가 공포를 극복하지 못하는 한, 손가락 하나 까딱 못한다는 걸 의미했다.
“아… 제대로 망했네.”
세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 말인 즉은, 체셔캣을 메인 탱커 없이 잡아내야 한다는 걸 의미했다.
에D츄가 파티에 포함된 것을 가정하고 보스에 도전한 세현의 입장에서는 최악의 상황이다.
“에D츄. 이거 먹어라.”
“쭈, 주인님.”
곧장 상태 저항 포션을 꺼내 바들바들 떠는 에.D.츄의 입에 우겨 넣었다. 하지만 피어의 지속 시간이 조금 더 빨리 줄어들 뿐,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그때 캣타워 정상에서 중성적이고 음습한 목소리가 안개처럼 은은히 들려왔다.
<이히힛이힛, 쥐새끼가 있었구냐앙? 맛있겠는 거~얼?>
보스 체셔캣의 목소리가 허공에 울렸다.
놈은 노골적인 웃음소리를 흘리며 입술을 삐에로처럼 반월 모양으로 크게 찢었다.
그 모습 자체가 괴기스러운 광경을 연출해 등골이 오싹오싹해지는 느낌이 들 지경이었다.
‘제기랄,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선택지는 없었다. 세현이 블랙 나이츠나 화이트 나이츠에 작위 수여를 사용해 버티는 수뿐이었다.
하지만 이는 자칫 잘못하면 자충수가 될 수 있다.
작위 수여의 지속 시간은 10분밖에 안 되는데다 종료와 동시에 한동안 블랙 나이츠를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재 주력 소환수 중 하나인 블랙 나이츠를 잃는다면, 에D츄가 피어를 회복한다 해도 보스를 상대하는 건 불가능 해진다.
말 그대로 진퇴양난이었다.
<이힛이히힛 게임을 시작해 보자냥~!>
캣타워 정상의 어둠 속에서 호랑이 정도 크기의 체셔캣이 모습을 드러냈다.
짙은 보랏빛 털이 빽빽이 자라 있고 온몸에 검은 오오라를 뿜어내는, 해골 수십 개를 고양이 방울 대신 목에 달고 있는 기괴한 모습의 고양이였다.
놈은 혀를 길게 뻗어 해골을 핥더니 다시 어둠속으로 사뿐히 뛰어 스며들었다.
“조심해!”
콰드득-!
세현이 외치는 순간, 어둠 속에서 체셔캣이 벼락 같이 튀어나와 블랙 폰의 팔을 물어뜯었다.
소환수들이 반사적으로 놈에게 달려들자 놈은 다물었던 블랙폰의 팔을 퉤- 뱉어냈다.
<오히힛, 반응이 빠른 프렌즈들인데!?>
블랙폰의 잘린 팔 단면에서 검은 액체가 콸콸 쏟아졌다.
화이트 비숍이 즉각 치료를 시작해 블랙폰이 소환 해제되는 걸 막았고, 동시에 다른 소환수들이 체셔캣에게 공격을 시도했다.
하지만 놈은 이미 어둠속으로 몸을 감췄고 공격들은 허무히 허공을 가를 뿐이었다.
<오히힛! 반군 놈들은 약해 빠져서 재미없었는데, 오늘은 재미있겠다냥.>
어둠 속에 흰 눈과 이빨만이 웃음소리와 함께 떠다녔다.
세이메이와 화이트 폰들이 재차 공격을 시도했지만, 놈이 눈과 입을 닫는 것만으로도 원거리 투사체들은 허공을 통과해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이는 체셔캣의 주력 스킬인 ‘어둠 보행’이라는 스킬로, 사용자의 몸을 어둠속에 몸을 숨겨 이동할 수 있게 한다.
이 동안은 완전 무적이나 다름없는 상태이며, 이 때문에 데미지를 줄 수 있는 순간은 놈이 공격을 위해 몸을 드러내는 찰나의 순간뿐이다.
그 순간을 잘 노려 CC기를 건 후, 딜을 쏟아붓는 것이 체셔캣을 공략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하지만 놈은 기본적으로 암살자 타입의 보스. 짧은 순간에 엄청난 폭딜을 넣기에, 웬만한 입주자나 소환수로는 버텨낼 수가 없어서 한 타임을 벌어 줄 수 있는 탱커가 필수였다.
‘젠자아아아앙, 망할 놈의 쥐새끼 때문에 이게 뭔 개고생이야!’
세현은 욕지기를 속으로 삼키며 쉴 새 없이 몸을 움직여야 했다.
<오히히히! 죽어라 죽엉!>
전투가 지속되며 체셔캣은 어둠 보행을 이용해 계속 공격을 퍼부었다.
“주군! 지금입니다!”
세이메이가 놈의 움직임을 예측해 포박술을 몇 번 적중시킨 덕에 데미지를 조금 주긴 했지만, 세현 일행의 피해 또한 만만치 않았다.
놈의 HP를 고작 20%가량 뺀 시점에서 폰이 세 마리나 소환 해제됐기 때문이다.
체셔캣은 야금야금 세현 일행의 피를 말려 오고 있었다.
그러던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