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
82화.
‘일단, 시간을 버는 게 우선이다.’
설희는 일단 최대한 시간을 끄는 것으로 전략을 짰다. 그렇게 시간을 벌면서 에D츄의 패턴을 학습하고, 파훼법을 찾아낼 생각이었다.
‘점멸 사용을 최대한 자제해야 해.’
지금 설희에겐 스티그마를 통해 얻은, 점멸이라는 확실한 회피 스킬이 있다.
하지만 점멸은 이를 한 번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정신력과 마나에 엄청난 소모를 가져온다. 장기전이 예상되는 지금, 이걸 난사하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가장 익숙한 방법으로!’
설희는 우선 버프를 발동시켜 본인의 이동속도를 최대한으로 증폭시킨 후, 펜싱을 할 때의 낮은 전투 자세를 취했다.
“우후훗! 꽤 하는 놈이다츄! 하지만, 야수의 왕은 멈추지 않는다츄!!!”
에D츄가 다시 설희를 향해 맹렬한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설희는 두 눈을 똑바로 뜬 채 그 모습을 끝까지 관찰했다.
‘확실히 빠르긴 하지만, 샤이탄이나 다른 보스들에 비해 움직임이 단조로워.’
그리고 몸통 박치기가 날아오는 그 찰나의 순간-.
‘르트레뜨!’
선수 시절, 몇만 번이고 반복했을 펜싱 스텝을 사용해 직선으로 날아오는 햄스터의 몸을 피해 냈다.
콰아앙-!
“츄우우우 머, 머리를 꽁했다 츄- 야수의 왕의 체면이…….”
다시 한 번 에D츄는 보스룸 벽에 머리를 박았고, 그 충격 때문인지 놈의 머리에서는 혹이 나며 HP도 조금 줄어 있었다.
심지어는 그게 창피했는지 울먹이기까지 했다.
설희는 그 모습에 ‘귀여워’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고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바, 받아라 입주자!”
분노한 에D츄는 계속해서 공격을 감행했다.
직선으로 달려와 몸을 날릴 뿐인 몸통 박치기, 그 패턴이 눈에 익자 설희는 제법 여유롭게 피할 수 있게 됐다.
그때마다 에D츄의 머리에 혹의 개수가 늘어났고, HP도 서서히 줄어갔다.
콰앙-!
“야수왕 박치기!”
콰앙-!
“야수왕 자이언트 어택!”
콰앙-!
“롤링 어택!”
에D츄는 계속 다른 기술명을 외치며 공격을 해 왔지만, 모두 똑같은 패턴의 몸통 박치기뿐이었다.
물론 아직 HP도 많이 남은 데다, 패턴이 단순할 뿐 위력 자체는 굉장하기에 조금도 긴장의 끈을 풀 수는 없었다.
그렇게 한 10분쯤 지났을까. 마스터키가 진동하며 눈앞에 팝업창 하나가 출력됐다.
[허세현: 설희 씨, 아이템 보냈으니까 빨리 받아요.]
[허세현: 지금 보스룸에 들어갈 수가 없어요. 방법을 찾고 있으니까 최대한 버텨 주세요.]
‘세현 씨?’
[‘허세현’ 님이 보낸 아이템을 받았습니다.]
설희는 막다른 동굴에서 한 줄기 빛을 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즉시 인벤토리를 열자, 추가로 들어온 아이템들이 확인됐다. 각종 버프를 주는 엘릭서와 포션들이었다.
설희는 틈을 봐서 엘릭서들을 마셔 능력을 최대한 증폭시켰다. 덕분에 보다 쉽게 에D츄의 공격을 피할 수 있게 됐고, 마나 포션을 이용해 위급한 순간에 점멸을 사용할 여유 정도는 생겼다.
일정 시간 능력을 증폭시켜 주는 ‘고승의 염주’도 인벤토리에 들어왔는데, 아직 먹진 않았지만 급한 순간에 큰 도움이 될 듯 보였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에D츄를 쓰러뜨릴 수는 없었다.
설희는 기회를 잡아 놈의 몸에 검을 몇 번 찔러 넣었지만, 워낙 스펙 차이가 크기에 거의 데미지를 줄 수 없었다.
한 번은 스텝이 꼬여 놈의 꼬리 끝에 살짝 맞았는데 이때 HP의 50%가량이 단번에 날아갔다.
‘고승의 염주를 쓴다고 해도 정면 대결은 불가능해.’
세현의 도움으로 상황이 나아지긴 했지만, 근본적인 해결은 되지 못한 것이다.
그렇게 또 시간이 하염없이 흐르고 있을 와중.
다시 한 번 세현의 메시지가 눈앞에 출력됐다.
[허세현: 설희 씨, 내 말대로 한 번 해 봐요. 성공만 한다면 설희 씨가 보스를 쓰러트릴 수 있어요. 일단 아이템부터 받으세요.]
[‘허세현’ 님이 보낸 아이템을 받았습니다.]
설희의 인벤토리에 전혀 예상치 못한 아이템이 들어와 있었다.
‘어, 이건?’
[#. 기타 아이템 / 야수의 씨앗]
- 특별한 주술이 새겨진 마법의 씨앗, 이걸 먹은 야수는 사용자에게 충성하는 ‘펫’이 된다. 맛이 아주 좋다고 한다.
▶ 추가 효과
충성 서약: 야수 타입 몬스터에게 씨앗을 먹일 경우 사용자에게 복종하는 펫으로 길들일 수 있습니다.
이 씨앗은 앨리스를 만날 때 세현이 받았던 물건이었다.
그 당시 정확한 용도를 물어보진 않았지만, 지금 설명을 보니 이걸 야수 몬스터에게 먹이면 펫으로 만들 수 있다는 모양이었다.
[허세현: 그 씨앗을 보스한테 먹여요. 그러면 쓰러뜨리지 않고도 클리어할 수 있을 거예요.]
평소의 설희라면 신세를 지는 게 싫어서라도 이 아이템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일단 목숨을 건지는 게 최우선이었다.
‘어떻게든 살아 나갈 거야!’
설희는 이를 악다물고 의지를 다졌다.
여기서 죽으면 허세현에게 신세만 지고 죽게 된다. 그것만큼은 죽는 것보다도 더 싫었다.
‘일단 계획부터 세워야 해.’
설희는 일단 에D츄에게 공격을 가하며 패턴을 더 면밀하게 파악했다.
놈이 발을 움직이는 타이밍, 입을 벌리는 시점, 습관, 속도와 거리까지. 하나라도 어긋나서 씨앗을 먹이는 데 실패하면 끝장이기에 그 어느 때보다도 신중의 신중을 기했다.
“지금이야.”
모든 계획이 끝났을 때, 설희는 ‘고승의 염주’를 목구멍으로 털어 넣었다.
염주의 효과가 발동되며 전신에 에너지가 넘쳤다.
“츄우우우우우! 간다 인간!”
그러는 사이, 다시 한 번 에D츄가 트럭 같은 기세로 달려들었다.
설희는 놈이 몸을 날리기 직전, 스텝을 밟아 옆으로 슬쩍 피해 냄과 동시에 검을 뻗어 왼쪽 뺨을 찔렀다.
“츄웃! 따갑다츄!”
그러자 작은 외침과 함께 놈의 입이 벌어졌고, 설희는 그 틈을 타 야수의 씨앗을 있는 힘껏 집어던졌다.
“우우우움? 이건 뭐냐츄?”
에D츄는 미간을 찌푸리며 노골적으로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그러더니 대뜸 자신의 목구멍으로 손을 넣어 씨앗을 꺼냈다.
순간 설희는 급한 마음에 아무 말이나 마구 뱉어 댔다.
“마, 맛있는 거니까 먹어!”
“맛있는 거라? 킁킁!”
에D츄는 야수의 씨앗에 코를 가져다 대고 킁킁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입에서 침을 흘리며 미소를 지었다.
“과~연! 고소한 냄새가 난다츄.”
“그치! 엄~청 맛있을 거야!”
설희가 계속 등을 떠밀자, 에D츄는 씨앗을 다시 입 안에 쏙 집어넣고 질겅질겅 씹었다.
“뇽뇽~ 해바라기 씨앗 맛이 난다츄!”
그러곤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씨앗을 목구멍으로 꿀꺽 삼켜 버렸다. 지극히 햄스터다운 행동이었다.
잠시 후-
“케에에엑-! 이 씨앗 뭐냐츄!”
에D츄는 갑자기 배를 깔고 바닥에 눕더니 등을 비비적댔다. 그 얼굴엔 왠지 모를 행복감이 느껴졌다.
“기분이! 기분이 좋아츄!”
잠시 후, 한참 꼼지락대던 에D츄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츄우우우우…….”
놈은 심각한 얼굴로 설희의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와 양 앞발을 크게 들어올렸다.
‘씨, 씨앗을 먹여도 안 되는 건가?!’
설희는 도망칠 준비를 하며 흠칫 몸을 뒤로 물렸다.
그러자 에D츄가 양 앞발을 내리찍었다.
“앞으로 쭈인님으로 모시겠습니다!”
“에엥? 쭈, 쭈인?”
그 순간, 설희에게 메시지와 함께 음성이 들려왔다.
[‘야수의 왕’ 에.D.츄가 백설희 님의 ‘펫’이 됐습니다.]
[축하합니다. 22층을 클리어했습니다! 이후로 22층에 도전하는 입주자들에게는 메인 던전의 난이도가 하락합니다.]
[백설희 님이 ‘22층을 최초 클리어한’ 타이틀을 획득했습니다.]
- 올 스탯: +3
[승강에 방에서 23층 엘리베이터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쭈인님! 앞으로 에D츄를 마구 다뤄 주세요!”
“응? 굳이 그럴 필요 까지는 없는-.”
“뭔~가요? 에D츄가 마음에 들지 않으신 건가요? 제가 가진 이 부드러운 털이, 이 짧고 통통한 발이 만져 보고 싶지 않으신가요?”
에D츄는 갑자기 드러누워 자신의 짧은 다리를 비비적거리며 햄스터 주제(?)에 요염한 포즈를 해 보였다.
당황한 설희는 얼굴이 사색이 되어선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뭐, 뭐야. 이 햄스터 이상해!’
그러자 에D츄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싫으신 건가요, 쭈인님? 사, 상처에요.”
그러곤 앞으로 슬금슬금 걸어와 짧은 앞발을 꼼지락대며 설희의 다리를 붙잡았다.
“꺄아악!”
설희는 놀라 뒤로 나자빠졌다.
“쭈인님! 저를 버리지 말아 주세요!
두 다리를 붙잡고 애원하는 코끼리만 한 햄스터, 그리고 뒤로 넘어진 채 몸부림치는 백설희.
묘하게 우스꽝스러운 광경이 연출됐다.
드르륵-!
그때, 뒤편 석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허세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설희 씨!”
세현은 재빨리 뛰어 들어와 에D츄의 이마에 주먹을 한 방 먹였다.
꽁-하는 소리와 함께, 에D츄는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나 맞은 부위를 두 손으로 감쌌다.
“아, 아파아아! 아프다츄!”
그 틈을 타 곁에 있던 세이메이가 설희를 부축해 일으켰다.
“고생하셨습니다, 설희 공. 22층의 메인 던전을 혼자 클리어하시다니, 대단하십니다.”
“아뇨, 세현 씨가 아니었다면….”
상황이 정리된 후, 세현 일행은 보스룸 한쪽에 둘러앉아 목을 축이며 휴식을 취했다.
“세현 씨, 저 햄스터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되죠?”
설희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에D츄가 자신의 펫으로 지정된 것이 꽤나 곤란한 모양이었다.
“그냥 키우시지 그래요? 생긴 건 저래도 명색이 보스 몬스터라 펫치고 꽤 쓸 만할 텐데요.”
“에, 에D츄의 생긴 게 어때서 그러는 거냐츄! 나처럼 섹시하고! 요염한 햄스터가 어디에 있다고!”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도중, 에D츄는 짧은 다리를 버둥대며 필사적으로 자신의 매력을 또 어필했다.
그를 본 설희의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그녀는 세현의 옆에 바싹 다가와 귓속말을 건넸다.
“저래서 좀…….”
“아, 공감합니다.”
애초에 에D츄의 모티브는 모 일본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변태 햄스터다.
귀엽고 영리하지만 원작의 변태 속성 또한 그대로 가져왔기에 부담스러운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다.
‘그렇다고 기껏 야수의 씨앗까지 써서 테이밍한 놈을 버릴 필요는 없지.’
세현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혹시 부담스러우시면 저한테 분양해 주세요.”
“네네! 저도 그게 마음이 편하겠어요.”
설희는 이 말을 기다렸다는 듯 거칠게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펫 기능 중 하나인 ‘분양’을 사용해 에D츄의 소유권을 세현에게 넘겼다.
[에.D.츄의 소유권이 허세현 님에게 넘어왔습니다.]
[마스터키에 ‘펫’ 기능창이 활성화 됩니다.]
“흑…… 인간에게 길들여진 것도 모자라 거부당하다니, 야수의 왕 에D츄는 슬픕니다츄.”
에D츄는 설희에게 거부당한 것이 꽤 충격이었는지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앉았다.
세이메이는 그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옆으로 다가가 등을 토닥여 주며 말했다.
“걱정 마시게 쥐 괴수. 세현 공은 아주 훌륭하신 주인이지. 맛있는 음식도 자주 사 주시거든.”
“으, 음식이라면?”
“치킨이라든지 케이크라든지?”
“치즈, 에D츄는 치즈가 좋아요!”
두 사람은 금방 공감대를 찾았는지 신나게 떠들기 시작했다.
‘코끼리만 한 햄스터 밥까지 챙기려면 허리가 휘겠군, 휘겠어.’
세현은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후, 펫 기능창을 실행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