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
81화.
Level 31. 야수왕의 정체
[입주자여, 내 힘이 필요한가?]
세현은 어설프게 추측만 하던 이 목소리의 주인을 이제는 알고 있다.
‘너, 크로노스지?’
본인을 과거로 돌아오게 한 장본인이자 죽게 만들었던 자, 시간의 신.
[잘 알고 있군.]
그는 세현이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게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이 장난질 당장 풀어.’
[미안하지만 이건 내가 벌인 일이 아니다. 숙주인 네가 나를 불렀기에 응답했을 뿐.]
‘그럼 저놈은 뭔데?!’
[글쎄…… 극도로 힘이 약화된 지금의 나로서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지금 네게 걸린 시간의 제약을 해제하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지. 어때? 내 힘을 한 번 더 빌리겠나?]
‘제기랄...’
힘을 빌리는 것에 대가가 있으리라는 걸 알기에, 그 때문에 죽음을 맞이했던 세현이기에 되도록 힘을 빌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가다간 설희가 죽을 것이 분명했다.
‘힘을, 눈앞의 개새끼에게 한 방 먹일 수 있게 힘을 빌려줘!’
[좋다.]
그 순간, 세현의 몸에서 금빛 오오라가 뿜어지며 붉은 전기가 공중으로 흩어졌다. 그러자 검은 로브가 놀란 듯 대꾸했다.
“호오, 입주자 주제에 내 권능을 깨트려?”
인간의 것이라 생각할 수 없는 기괴한 목소리로, 듣기만 해도 등골이 오싹해지는 음산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
세현과 소환수들은 그 즉시 앞으로 달려들어 그에게 있는 힘껏 양손검을 가로로 내질렀다.
까앙-!
하지만 세현의 검도, 소환수들의 공격도 허공에 떠 있는 무언가의 벽에 충돌한 것처럼 마찰음을 내며 막혀 버렸다.
‘제기랄, 단순한 몬스터가 아니야!’
순간 세현은 상대와 자신의 압도적인 전투력 차이를 실감했다. 이는 마치 50층에서 크로노스를 마주했을 때와 비슷한 감각이었다.
“죽어라.”
검은 로브는 손에서 붉은 구체를 생성해 냈다. 그것은 블랙홀처럼 엄청난 기세로 주변의 공기를 빨아들였고, 저걸 정면으로 맞으면 제아무리 세현이라 해도 확실히 죽는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때였다-.
“관리자 주제에 입주자의 인과율에 간섭하는 것이냐!”
“오홍홍홍홍! 반칙! 반치이익!”
허공에서 두 개의 목소리가 추가로 들려왔다.
그리고 두 줄기 섬광이 맹렬한 속도로 검은 로브에게 충돌했다.
“제기랄!”
검은 로브는 그 즉시 검은 연기로 변해 흩어져 버렸다.
“오랜만입니다용, 세현 군!”
“…….”
세현의 눈앞에 두 존재가 서 있었다.
한쪽은 입주 시험의 담당자였던 관리인 커플러, 또 한 명은 ‘선택의 신전’에서 클래스를 부여해 줬던 해골 팔의 관리장 헬시안이었다.
세현은 이를 악물고 그들이 관리인이라는 것도 잊은 채 악에 받쳐 외쳤다.
“이거, 어떻게 된 거야?”
“오홍홍홍. 미안해요, 세현 군! 누군가가 세현 군을 노리고 있는 모양이네용. 아직 누가 공격을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관리인으로서 최선을 다하려 달려왔답니당!”
“사과하지, 입주자여. 이번 일에 대해선 철저히 조사를 약속하겠다.”
두 관리인이 없었다면 세현은 어쩌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을 위안으로 삼기에는 보스룸 너머에 있는 백설희의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됐고, 빨리 보스룸 문 열어! 저 안에 사람 있으니까.”
세현의 다그침에 두 관리인은 순순히 보스룸 앞으로 다가갔다.
그들이 석문 위에 손을 얹고 뭔가의 주문을 외우자 푸른빛이 잠시 주변에 생겨났다. 하지만 그 기세는 오래가지 못하고 사그라들었고 그 위로 팝업창이 여러 개 띄워졌다.
[#. 경고! 권한이 제한된 구역입니다. 입장이 불가능합니다.]
이에 커플러는 민망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오홍홍, 미안한데용 세현 군! 이 문, 저희 힘으로도 열리지가 않는데용?”
“너 관리인이잖아. 이런 문제는 당연히 해결해 줘야 하는 것 아니야?”
“맞는 말이긴 한데, 이 보스룸은 다른 관리인이 권한을 가지고 있어서용.”
“그럼 설희 씨가 죽을 때까지 그냥 기다려라?”
“기도라도 하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네용! 데헷~★”
커플러도 무안했는지 혀를 내밀며 자신의 머리를 꽁- 소리가 나도록 쥐어박았다.
세현은 그 모습에 더더욱 화가 치밀었지만, 실랑이를 해 봐야 얻는 것이 없기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생각했다.
일단 그 첫 번째 방법, 무작정 들이대기.
세현은 괴성을 내지르며 앞으로 달려가 보스룸의 석문에 공격을 가했다.
까앙-! 까앙-!
“으아아아아!”
스파크가 튀며 손이 튕겨 나갔지만 세현은 손을 멈추지 않고 계속 검을 내리찍었다.
“그런 짓은 소용없다.”
그를 지켜보던 헬시안이 세현을 애처로운 듯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세현은 멈추지 않았다.
검을 쥔 손아귀에 피가 터져 바닥에 피가 뚝뚝 떨어졌다. 이에 소환수들도 달라붙어 보스룸의 석문을 두드렸지만,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그만하세용, 세현 군. 이성적으로 상황을 판단하자구용. 이런 방법으론 설희 씨를 구할 수 없어용~!”
손바닥이 거의 걸레짝이 되어 갈 때 즈음, 그 모습을 걱정스러운 듯 바라보던 커플러가 세현의 팔을 붙잡아 말렸다. 그러자 세현은 죽일 듯한 눈빛으로 노려보며 외쳤다.
“죽기 싫으면 놔, 이 개새끼야.”
“옛~날에도 말씀드린 적 있지만, 저는 원래 개이기 때문에 그 말은 욕이 아니랍니다. 오홍홍! 여튼, 하려던 말은 이게 아니라용. 세현 씨를 안으로 들여보내는 건 불가능해도, 약간의 도움 정도는 드릴 수 있을 것 같아서용.”
“어떤 도움이야, 빨리 말해.”
“보스룸의 권한을 조작해서, 내부로 아이템 전송이 가능하도록 해 볼게용.”
“아이템?”
“물약이나, 뭐 힘이 세지게 하는 소모품이라든가 그런 거 있잖아용. 그걸 마스터키로 전송하는거죵!”
이는 완벽한 해결책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대안이 없기에 세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커플러와 헬시안이 다시 한 번 보스룸 문에 푸른기운을 흘려보냈고, 그 위로 팝업창이 출력됐다.
[#. 보스룸 내부로 ‘아이템 전송’ 기능을 일부 해방시킵니다.]
“후우~ 이제 안으로 아이템 전송이 가능해졌어용. 한 번 해 보세용~.”
커플러가 땀을 뻘뻘 흘리며 말하자, 세현은 그 즉시 인벤토리를 열었다.
일단 처음으론 자신에게 남아 있는 포션과 소모형 마법 스크롤을 모조리 선택한 후 백설희에게 전송했다.
[선택한 13종의 아이템을 ‘백설희’ 님께 전송했습니다.]
그러자 마스터키가 전송 성공을 알려왔다.
이걸로 보스룸을 클리어할 수 있을 리가 없지만, 적어도 시간을 벌어 줄 수는 있을 것이다.
‘이것도 있다.’
또 인벤토리를 뒤지던 중, 마지막 한 알만 남은 ‘고승의 염주’를 발견했다. 일시적으로 사용자의 능력을 폭발적으로 증가시키기에 이 또한 도움이 되리라.
세현은 이것까지 전송한 후, 다급히 마스터키를 이용해 설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허세현: 설희 씨, 아이템 보냈으니까 빨리 받아요.]
[‘백설희’ 님이 아이템을 수령했습니다.]
메시지를 보내고 10초쯤 지났을까, 설희가 아이템을 받은 것이 알림으로 전해졌다.
‘아직 살아있다!’
세현은 당장에 한숨을 돌렸다. 아이템을 받았다는 건 백설희가 살아있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답장이 오지 않는 걸로 봐서 내부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간다는 걸 추측하게 했다.
세현은 다시 인벤토리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머리를 굴렸다.
일단 시간이야 벌었겠지만, 이것만으로 백설희가 이번 보스를 혼자 클리어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다른 방법, 다른 방법을 찾아야 된다.’
현재 세현이 할 수 있는 행동을 아이템을 전송해 주는 것 뿐이었다.
A급 입주자가 거의 50레벨 차이가 나는 보스와 싸워 이길 수 있게 만드는 아이템.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지만 세현은 마지막까지 희망의 끈을 놓을 생각이 없었다.
‘제기랄, 이제 남은 거라곤 재료 아이템밖에 없는 거냐!’
거의 모든 소모품을 백설희에게 보내 줬기에 인벤토리에 남은 건 거의 재료 아이템들뿐이다. 이런 급박한 상황에 재료 아이템 따위가 도움이 될 리가 없었다.
‘어라?’
인벤토리의 스크롤을 위 아래로 움직이던 그때, 불현듯 한 가지 생각이 스치듯 떠올랐다.
‘있다! 방법이!’
답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튀어나왔다.
† † †
30분 전.
미로의 끝에 위치한, 축구장만 한 크기의 사각형 공간의 보스룸 내부.
백설희가 두꺼운 석문을 두드리며 애처로운 목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세, 세현 씨? 세이메이 씨?”
분명 조금 전까지 함께 있었던 세현과 세이메이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이대로 간다면 꼼짝 없이 혼자 보스전을 치러야 할 상황이었다.
그렇게 허둥대며 한 2~3분 지났을까. 보스룸이 천천히 어두워지더니 완전히 어둠으로 가득 찼다.
“…….”
설희는 긴장감에 몸을 가늘게 떨며 침을 꿀꺽 삼켰다.
그나마 백설희씩이나 됐기에 이 정도 긴장으로 끝이지, 보통의 사람이라면 이 시점에서 소리나 꽥꽥 질러 대는 게 다일 것이다.
그때였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마이크를 통해 들려오는 것처럼 공간 전체에 울려 퍼졌다.
<오호홋, 나의 진정한 모습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낮에는 성실한 설치류! 밤에는 모두의 구세주! 사람들은 나를 이렇게 부른다.>
어린아이의 목소리와 동물의 울음소리가 묘하게 섞인, 귀여운 음성이었다.
귀여운 포효와 함께 보스룸에 다시 불이 번쩍 들어왔다.
“세계 최고의 야수왕! 에.D.츄라고!!!”
“어, 어라? 저건…….”
설희는 눈앞에 있는 보스의 정체를 확인하고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팔등으로 비비적거렸다.
‘야수의 왕’이라는 거창한 타이틀이 달린 것치고는 눈앞에 서 있는 보스 몬스터의 비주얼이…….
“귀, 귀여워!”
아주 귀여웠다.
22층의 보스는 대놓고 패러디를 했다고 느껴질 정도로, 인터넷에서 짤방으로 한창 떠돌았던 변태 햄스터 캐릭터를 꼭 닮았다.
단지 그 크기를 코끼리 수준으로 키워 놓고 오른쪽 눈에 커다란 해적 안대를 착용했다는 것 정도였다.
놈은 두 다리로 땅을 딛고 선 채 설희를 노려보고 있었다.
“귀엽다니 실례다-츄! 이 몸은 야수의 왕, 에.D.츄다!”
“에, 에B츄가 아니라?”
설희는 자신이 기억하던 변태 햄스터의 이름을 대자 거대 햄스터는 버럭 화를 내며 외쳤다.
“나는 그런 허접한 이름이 아니다츄! 이 몸의 미들 네임은 세계 최고의 해적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D의 의지를 잇는 야수왕의 D다 츄!”
“어, 그 해적왕이라는 게 혹시 해적 만화에 나오는 골드.D.로…….”
“삐빅! 그 이상 말하면 저작권법 위배다츄!”
거대 햄스터는 목에 걸린 호루라기를 크게 불며 설희를 지적했다.
“자, 이 몸의 공격을 받아 봐라츄!”
그 말을 끝으로 에D츄가 설희를 향해 직선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커다란 덩치 때문에 느릴 거라 생각했지만, 실제 에D츄의 속도는 설희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느, 늦었다!’
에D츄의 커다란 몸뚱이가 눈앞으로 날아들었다.
몸을 비틀어 피해 볼까 싶었지만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결국 점멸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콰아아아아앙-!
속도를 받은 햄스터의 몸은 그대로 보스룸 벽면에 충돌했고, 굉음과 함께 벽면에 커다란 크레이터가 생겼다.
‘저걸 맞았다면 죽었을 거야.’
설희는 호흡을 가다듬고 침착히 에D츄의 다음 공격을 기다렸다.
허세현과 세이메이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 거기에 상대는 귀여운 외모를 가진 것과 어울리지 않게 꽤 강한 듯했다.
‘내 레벨 수준으로는 못 이겨.’
솔직히 말하자면 이길 확률 따윈 0% 가까이 수렴했다. 스스로도 그것을 확실히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끝까지 해 보는 거야.’
마음이 꺾여 자포자기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설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후, 자신이 펜싱 선수 시절에 강적들을 상대로 할 때 느꼈던 감각을 떠올렸다.
선수 시절 특유의 승부사 기질이 발동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