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
80화.
“저기, 설희 씨.”
“핫!”
어깨를 두드리자, 설희가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헤어 드라이기, 마음에 드는 걸로 하나 골라요. 그리고 필요한 물건 있으면 또 골라요. 제가 살 테니까 가격 신경쓰지 마시고.”
“아니에요, 아니에요! 그래서 쳐다보고 있던 거 아니에요. 전~혀 신경 안 쓰셔도 되요.”
설희는 연신 고개를 저었지만, 세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놓인 헤어 드라이어 중 가장 비싼 걸 카트에 집어넣었다.
“그럼 제가 써야 되니까 사죠 뭐.”
“그, 그럼 차라리 이걸로 하세요, 그 브랜드 건 가격만 비싸고 성능도 애매하거든요.”
그제야 설희는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기 시작했다. 세현은 이런 방식으로 두 사람에게 필요할 법한 물건을 가득 담았다.
‘전자레인지도 사자.’
‘조리 기구를 사 놓으면 가끔 직접 요리를 해 먹는 것도 괜찮겠네. 세이메이가 좋아하겠지.’
‘냉장고를 사면, 기본적인 조미료나 식재료도 있어야지.’
이것저것 얘기를 나누며 물건을 고르는 건 꽤 재미있었다.
설희는 물건을 살 때 꽤 이것저것 조건을 따져 사는 타입이었고 거기에서 세현도 배우는 점이 있었다. 맨날 인터넷 최저가만 장바구니에 집어넣던 자신을 반성하게 되는 것이었다.
“자~ 이 정도면 다 산 것 같네요. 이거 배송도 되죠?”
“네네, 물론입니다. F급 입주자로 이뤄진 배달 기사 분들이 오늘 가실 겁니다.”
이것저것 사다 보니 500만 원 돈이 훨씬 넘었다. 하지만 애초에 두 사람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언젠간 필요한 물건이기에 별 대수롭게 생각되진 않았다.
“슬슬 돌아가죠.”
두 사람은 곧장 8층 집으로 돌아갔다.
“주군, 오셨습니까!”
그러자 세이메이는 문 밖에 나와 잔뜩 기대한 얼굴로 두 사람을 반겼다.
“음식은, 음식은 없는 겁니까?”
“아~맞다. 내가 깜빡했지 뭐야.”
세현은 장난을 치려고 설희에게 눈빛을 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자 밝았던 세이메이의 얼굴에 실망감이 가득 드리웠다.
그때였다.
“물건 도착했습니다.”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택배 기사같이 차려입은 입주자 너덧 명이 보였다. 마트에서 보낸 물건들이 도착한 것이었다.
모두 F급 입주자들로, 아파트에서 활동하는 대신 외부의 물건을 내부로 배달하는 배달부의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었다.
“자~ 어디다 놓아 드릴까요?”
“아, 냉장고는 여기 두세요. 그 장롱은 작은 방에 두시고…….”
세현과 설희가 말하자 배달부들은 빠르고 정확하게 물건들을 방 안에 배치했다. F급이라 해도 기본적으로 입주자이기에 무거운 가구들도 어렵지 않게 배치할 수 있는 것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이거라도 한 잔씩 드세요.”
배달부들이 돌아가려던 찰나, 설희가 마트에서 사 왔던 음료수와 수건을 나눠줬다. 그들은 흡족한 미소와 함께 음료를 들이켰다.
그러던 중, 배달부 한 명이 세현에게로 슬쩍 시선을 보내며 말을 걸어왔다.
“저기, 혹시 두 분…… 허세현, 백설희 입주자님들 아니십니까?”
“아, 네. 맞는데요.”
“와~ 대박! 이렇게 유명한 분들을 여기서 뵙네요. 정말 두 분 팬입니다. 괜찮으시다면 악수 한 번만 해 주셔도 되겠습니까?”
그는 연예인이라도 본 듯한 반응을 보이며 손을 내밀었다. 세현은 친절한 미소와 함께 악수를 받아 줬다. 거기에 더해 함께 셀카까지 찍어 줬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무시했겠지만, F급인 그들에게서 과거의 자신이 보이는 것 같아 한 행동이었다.
“항상 응원하겠습니다! 화이팅!”
악수를 받은 배달부는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선 그대로 돌아갔다.
세현은 기지개를 켜며 세이메이와 설희에게 말했다.
“자, 이제 각자 짐정리 좀 하죠.”
세 사람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쌓아 뒀던 옷이나 마트에서 구입한 식재료들을 새로운 수납공간에 정리했다.
그렇게 한참을 정리하고 나니, 이제야 제법 사람 사는 집 같은 분위기가 풍겨 왔다.
정리가 대충 끝나고, 잠시 멍을 때리고 있던 중이었다.
꼬르륵-!
위가 요동치는 소리에 세현은 냉장고를 슥 바라보며 말했다.
“요리라도 해 볼까?”
“오 주군, 혹시 직접 요리도 해 주시는겁니까?”
‘요리’라는 단어에 세이메이가 두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세현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요리라, 요리이……. 까짓 거 뭐 해 볼까. 잠깐만 기다려 봐.”
세현은 잠시 냉장고 속 식료품들을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요리에 취미는 없지만, 여느 자취생이 그렇듯 필살기 하나쯤은 있었다. 어쩜 그거라면 세이메이를 만족 시킬 자신이 있었다.
세현은 조리대로 향해 필요한 재료들을 냉장고에서 꺼내 늘어놓았다.
‘버터, 김치, 김, 깡통 햄이랑, 밥은 3분 밥으로 전자레인지에 돌리고, 모짜렐라 치즈도 있군.’
그러곤 재료들을 도마에 올려 능숙한 솜씨로 썰었다. 이후엔 후라이팬에 기름을 친 후, 재료들을 털어 넣었다.
치이이익-!
손목 스냅으로 팬을 흔들자 기분 좋은 소리와 함께, 재료들이 익어 갔다.
그 후에 밥을 볶아 내며 설탕, 간장 등으로 간을 맞추고 치즈, 으깬 김, 깨를 뿌리니 꽤 먹음직한 김치 볶음밥이 완성됐다. 라면을 제외하면 세현이 유일하게 할 줄 아는 음식이었다.
세현은 이를 접시에 예쁘게 담아 식탁에 올려놓고 수저를 세팅했다.
“자, 한 번 먹어 봐.”
“마, 마쉿숩니다, 주군!”
“요리 잘하시네요, 세현 씨.”
결과는 대 호평이었다.
세이메이는 허겁지겁 숟갈을 움직이며 볶음밥을 입으로 가져갔다. 아무리 그녀라 해도 저 정도 리액션이 나오는 거라면 꽤 맛이 괜찮다는 뜻이리라.
‘잘 먹어 주니까 기분 좋네.’
의식하지 않았음에도 세현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자신이 만든 음식을 남이 맛있게 먹어 준다는 경험이 주는 쾌감이 꽤 기분이 좋았다.
‘나중에 시간이 나면 다른 요리도 시도해 봐야겠어.’
식사가 끝난 후, 세현은 싱크대에 쌓인 설거지를 해치우기 위해 고무장갑을 꼈다. 그러자 설희가 세현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헤헤, 요리는 세현 씨가 했으니까 설거지는 제가 할게요.”
“내가 해도 되는데요.”
“음, 그럼 같이 할까요?”
딱히 거절할 명분도 없기에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쌓인 설거지를 시작했다. 세이메이도 자신이 거들겠다며 나섰지만, 설거지를 할 줄 알 리가 없기에 그냥 먼저 씻으라고 보냈다.
설거지를 하던 중, 세현은 정적을 깨기 위해 한마디를 던졌다.
“설희 씨, 요즘 집 문제는 괜찮아요?”
“네? 그럼요! 세현 씨 덕분에 벌이가 괜찮아져서 빚도 차근차근 잘 갚고 있어요.”
말은 씩씩하게 했지만, 설희의 얼굴엔 순간 그림자가 드리웠다.
빚이 20억 있는 집의 상황이 괜찮을 리가 없다. 동생 대학 문제, 빚 독촉으로 머리가 복잡할 게 분명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설희 씨 그 문제, 반년 내로 해결할 수 있도록 제가 최선을 다할게요.”
세현은 이 문제에 대해 청사진을 이미 그려 놓은 상태였다. 그건 시즌3의 클리어를 반년 내로 끝냄과 동시에, 설희의 빚을 완전히 탕감할 수 있는 계획이었다.
“말만으로도 고마워요. 그래도 세현 씨가 신경 쓰실 일은 아니니까 걱정마세요, 헤헷….”
설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지 않다는 의지를 느꼈지만, 세현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자신의 환생으로 현재가 바뀌고 있고, 설희는 그런 측면에서 피해자나 다름없다. 어떻게든 그녀의 문제만큼은 해결해 주리라 마음을 먹은 상태였다.
“신세 아니에요. 설희 씨 없으면 나도 여기까지 못 왔어요.”
“…….”
고개를 돌리자 설희의 기다란 속눈썹 끝에 투명한 액체가 그렁그렁 맺혀 있는 게 보였다.
‘어, 어라? 내가 말실수 했나.’
세현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애써 정면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설희 씨?”
그러던 중, 자신의 옆구리에 뭔가 부드러운 감촉이 와 닿는 것을 느꼈다.
“으, 으응?”
고개를 돌리자 세현의 허리를 작게 잡고, 얼굴을 파묻은 설희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미안해요, 잠깐만 이러고 있을게요.”
“어… 음… 네.”
세현은 어쩔 줄 몰라 한참을 우물쭈물 대다가 가만히 설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 †
다음 날, 22층 메인 던전 안,
“주군! 이번 던전은 아주 재미있습니다!”
“그러게요. 무슨 놀이동산에 온 것 같아요.”
평소라면 몬스터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겠지만 지금 세현 일행의 분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도 즐거웠다.
아니, 심지어는 던전을 진행하는 중간에 돗자리를 깔고 차를 마시는 여유를 부리기까지 했다.
이번 메인 던전의 컨셉은 미로 탈출.
마치 산림욕장을 연상시키는 숲 한가운데 있는 미로는 중간 중간 함정이나 통통한 쥐의 모습을 한 수인들이 등장했다.
이번에도 토실토실한 쥐 수인 열댓 마리가 세현 일행의 앞을 막아섰다.
“찍-찍찍! 이, 이 숲은 못 지나간다!”
“죽기 싫으면 들어가라~!”
“히이이익! 수, 숲의 주인님께 보고해야 된다 찍!”
세현이 심드렁한 얼굴로 바닥을 두드리자, 쥐 수인들은 혼비백산해서 도망갔다.
이곳의 쥐 수인들은 겁이 많고 전투 능력도 동레벨의 다른 몬스터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다. 이 던전의 난이도는 시즌3의 다른 곳에 비해 매우 낮아 미로나 함정에 헤매지만 않으면 누구든 쉽게 돌파할 수 있는 던전이다.
심지어 보스도 그닥 어렵지 않아 오히려 ‘입장권’을 만드는 게 더 난이도가 높다는 평가가 있을 정도였다.
‘뭐야, 괜한 걱정이었나?’
순조롭게 일이 진행되자 세현의 긴장이 살짝 풀어졌다.
이틀 전, 이상한 메시지 창이 출력돼 만반의 준비를 한 것이 허무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불과 몇 시간 만에 세 사람은 보스룸 문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끼가 잔뜩 낀 돌문에 손을 얹자 언제나와 같이 팝업창이 출력됐다.
[#. 보스룸 / 야수의 왕!!!]
-‘야수의 왕!!!’이 이 미로의 끝을 지키고 있다. 말이 왕이지 별로 대단할 것도 없는 동물이니 그를 쓰러뜨리고 미로를 탈출하자.
적정 레벨: 75
적정 인원: 1~2명
[입장하기]
“자, 그럼 입장합니다?”
“넵!”
“알겠습니다, 주군!”
세현은 아무런 고민 없이 [입장하기] 버튼을 눌렀다. 동시에 세 사람의 시야가 빛으로 물들었다. 이제 보스룸 안으로 모두 전송될 터였다.
‘어?!’
순간 주변이 슬로우 모션처럼 재생되며 회색의 풍경으로 변했다.
<미안하지만 당신은 나랑 조금만 기다려 줘야겠어요.>
머릿속에 사념이 들려옴과 동시에 검은 로브를 쓴 존재가 눈앞에 나타났다. 그는 손을 뻗어 세현에게 붉은 전기를 뿜어냈다.
파직-!
그것이 몸에 닿는 순간, 스파크가 격렬히 튀며 온몸이 쩌릿쩌릿해졌다.
‘끄아아아악!’
엄청난 고통과 함께 눈앞에 여러 개의 팝업창이 출력됐다.
[#. 권한 오류: 허세현 님은 입장할 수 없습니다!]
[#. 치명적 오류! ]
[#. 권한 오류! 입장 불가!]
‘이게 뭔데 시X!’
급작스러운 상황에 절로 욕이 나왔지만, 입이 생각처럼 움직여 주지 않았다.
아니, 시간이 완전히 정지한 듯 온몸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당장에라도 무기를 뻗어 검은 로브를 박살내고 싶었지만, 무력감이 전신에 맴돌았다.
<답답해도 조금만 더 기다리시죠, 보스룸 안에 있는 저 계집이 죽을 때까지만 말이에요.>
‘백설희?’
그 말을 듣는 순간, 망치로 머리를 두드려 맞는 기분이 들었다. 조금 전까지 시야 안에 있던 백설희가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보스룸 안에 있는 건가!’
검은 로브의 말에서 추측하건대 설희는 보스룸 안에 홀로 전송된 모양이었다.
‘아무리 22층 보스가 별것 없다고 해도 설희 씨 혼자는 절대 못 이겨.’
마음이 급해졌지만 온몸은 여전히 쇠사슬에 묶인 듯 움직이지 않았다. 아파트에서 7년이 넘는 시간을 보냈지만 단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상황.
터질 것 같은 분노가 세현의 내면에 끓어올랐다.
‘씨발씨발씨발씨발!!!’
그리고 그때-.
[시간의 봉인이 깨어납니다.]
가슴에서 무언가 뜨거워지는 기운과 함께 다른 사념이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