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
79화.
‘지금 이놈이랑 정면 대결하는 건 자살 행위지.’
그렇기에 세현은 정공법이 아닌 ‘우회적인’ 방법으로 보스를 클리어할 생각이었다.
<이번 쇼는 트리플!!!>
<트리플로는 약했군! 하지만 기대하시라 스트레이트!!>
<이이이익! 백 스트레이트! 이번 쇼에서 저놈의 죽음을 화려하게 연출해 주지.>
<마, 마운틴!>
<플러쉬!!>
<풀 하우스!!!>
<포 카드!!!!>
세현 일행이 한 개 라운드를 돌파할 때마다 새로운 BGM이 흘러나왔다. 아이돌 음악, 트로트, 락과 힙합, 그리고 심지어는 판소리까지. 기회가 된다면 이 스테이지를 만든 놈을 찾아가 한 방 먹여 주고 싶을 정도였다.
<젠장 젠장! 저놈들, 손장난 치는 거 아니야? 왜 저렇게 강해!!>
이 방의 보스, 스페이드 에이스 ‘다윗’또한 초조한 듯 외쳤다. 그에게 남은 족보가 점점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었다.
‘슬슬 타이밍을 잡아야겠군.’
하지만 세현 또한 슬슬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라운드를 거듭하며 족보가 오를 때마다 병사들의 전투력이 수직상승하며 버거워지고 있었다.
‘현실적으로 생각했을 때 스트레이트 플러쉬 정도에서 멈춰야겠네.’
그럼에도 세현은 아슬아슬한 선까지 버티며 ‘우회 전략’을 아껴 둘 생각이었다. 이 보스전 ‘죽음과 명예와 힘의 스페이드킹’은 난이도가 어려운 만큼 경험치 또한 꽤 쏠쏠하게 주기 때문이었다.
<다, 다음 선수! 스트레이트 플러쉬!>
그 즉시 괴악한 음악이 BGM으로 흘러나왔다. 그러곤 콜로세움의 사방에 뚫린 구멍에서 스페이스 카드 4, 5, 6, 7, 8이 튀어나와 박자를 맞춘 묘한 움직임으로 전열을 갖췄다.
놈들의 몸에서 시뻘건 오오라가 피어올랐다. 팔랑크스 ‘스트레이트 플러쉬’가 발동된 것이다.
세현은 백설희와 세이메이를 바라보며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설희 씨, 세이메이. 내가 끝낼 테니까 5분만 버텨 줘요, 혹시 위험할 것 같으면 바로 도망치고.”
“네에?”
“그게 무슨 말이십니까, 주군?”
설희와 세이메이가 당황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설명할 시간이 없어요.”
세현은 마땅한 대꾸도 없이 화이트 나이츠에게 ‘작위 수여’를 사용했다. 온몸에 아름다운 백색 중갑옷이 생겨나며 바람 같은 기운이 깃들어 몸을 가볍게 했다. 그러곤 남은 소환수들에게 ‘방어 태세’를 지시한 후 기합을 내지르며 앞으로 내달렸다.
육체를 짧은 순간 가속하는 ‘영광의 가속’ 버프가 발동되며 안 그래도 빠른 세현의 몸이 흰색 선을 그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목적지는 두말할 것도 없이 콜로세움 중앙 단상에 서 있는 스페이드 킹 ‘다윗’.
<이이이익!>
놈은 세현의 접근을 눈치채자 노골적으로 불쾌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이 엔터테인먼트의 진정한 묘미를 모르는 놈! 규칙 위반이다! 영업정지!>
놈은 신화 속 다윗이 그랬듯 바닥에 놓인 슬링을 뱅글뱅글 돌리더니 사람 머리통만 한 돌을 힘껏 내던졌다.
촤아악-!
공기를 찢는 파열음과 함께 돌덩이가 대포알 같은 기세로 일직선으로 날아든다. 세현은 두 눈으로 그걸 똑똑히 바라봤다. 등골이 오싹해지며 온몸이 저릿해지는 죽음의 감각이 느껴졌다.
‘정면으로 맞으면 즉사다.’
돌덩이가 충돌하기 직전, 세현의 몸이 번쩍 하며 빛을 내뿜으며 사라지더니 1~2m정도 거리 앞에서 다시 나타났다.
화이트 나이츠의 이동기 ‘블링크’를 사용한 것이다.
콰앙-!
“아아악!!”
세현의 등 쪽에서 폭발음과 함께 카드 병사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뒤로 날아간 돌덩이가 애먼 카드 병사들의 몸을 꿰뚫어 박살낸 탓이었다.
핵심 카드 병사 몇이 죽는 것으로 팔랑크스 ‘스트레이트 플러쉬’는 단숨에 해체됐다.
‘좋아. 이걸로 10분은 벌었다.’
세현은 애초에 돌덩이가 팔랑크스를 향해 날아가도록 의도하고 달리는 방향을 잡았다. 쉽게 흥분하는 성격의 스페이드킹은 보기 좋게 미끼를 물은 것이다.
남은 건 저 놈이 다음 패를 꺼내 들기 전에 달려들어 처리하는 것이다.
<히이이익! 이건 규칙 위반! 규칙 위반이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스페이드킹이 경악하며 다시 슬링을 돌렸지만 이미 늦었다.
“싸움에 규칙 위반이 어디 있어!”
영광의 가속을 사용한 세현의 몸은 가공할 속도로 창을 내뻗어 킹의 어깨를 찔렀다.
콰득-!
<끄어어어억!>
그는 돌리고 있던 슬링을 놓침과 동시에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세현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카드 한복판에 새겨진 스페이드킹의 얼굴에 창을 쑤셔 넣었다.
콰득, 콰득, 콰득, 콰득.
놈의 HP는 금세 줄어들어 보스라는 이름이 무색하게도 간단히 쓰러졌다.
[보스전을 클리어했습니다!]
라운드 진행을 무시하고 스페이드 킹을 먼저 쓰러뜨리는 것, 이것이 이번 보스전을 쉽게 공략할 수 있는 세현의 ‘우회 전략’이었다. 아마 놈이 ‘백 스트레이트 플러쉬’나 ‘로얄 스트레이트 플러쉬’를 발동시켰다면, 지금의 세현은 죽었다 깨어나도 이길 수 없었을 것이다.
“자, 장군님이 돌아가셨다!”
“히이이익, 살려줘!”
킹의 죽음과 동시에 관중석에 앉아 있던 카드 병사들은 패닉에 빠져 도망쳤고, 어느새 콜로세움 안에는 세현 일행만 남아 있게 됐다.
“어… 세현 씨. 이게 끝인가요?”
“네네~!”
설희가 당황스럽다는 듯 묻자 세현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상황이 정리되고 잠시 후, 단상 아래에 놓인 문으로 들어가 사슬로 칭칭 감겨 있는 검은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검은 오오라를 뿜어내는 불길한 느낌의 노란 검날이 담겨 있었다. 이것이 마검 크로우의 마지막 재료 [까마귀 부리]였다.
세현은 인벤토리에서 나머지 두 개의 부품을 꺼내 들었다. [까마귀 날개]이라 불리는 검 받침과 [까마귀 다리]라 불리는 손잡이. 각각의 재료를 붙잡아 결합시키자 ‘딸깍-’하는 소리가 나며 메시지가 출력됐다.
[‘마검 크로우’가 완성됐습니다.]
까마귀를 한 마리를 그대로 형상화시킨 마검. 공격력은 낮지만 대부분의 신성 마법, 축복 등을 파괴하는 데 아주 효과적인 검이었다.
이는 자바워키를 상대할 때뿐 아니라, 시즌3 전반의 적들을 상대하고 하트여왕 본인을 제거할 때도 꼭 필요한 아이템이다.
세현은 한 건 해결했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인벤토리에 크로우를 집어넣었다.
‘앨리스에게 가자.’
이후 세현 일행은 일단 앨리스의 요새로 향했다. 그리고 그동안 있던 일들을 짧게 정리해 알렸다.
“대단하시군요, 마검 크로우를 완성하시다니. 반군이 몇 년이나 시도했지만 해내지 못했던 일을…….”
그녀의 얼굴엔 씁쓸함과 기쁨이 함께했다.
크로우를 완성시킨 것은 기쁘지만 자신들이 해내지 못한 일을, 세현이 간단히 해낸 것에 대한 허무함 때문이리라.
“이제 천천히 하트여왕의 영지로 진군해야겠군요. 이게 필요하실 겁니다.”
“이건?”
앨리스는 품에서 티켓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22층 메인 던전의 입장권입니다.”
[#. 입장권 / 무시무시한 야수가 사는 미로]
- 22층 메인 던전 ‘무시무시한 야수가 사는 미로’에 입장할 수 있는 입장권이다.
세현은 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이상한데, 원래 여기서 입장권을 줬던가?’
기억이 맞는다면 다음 퀘스트는 마검 크로우를 이용해 결계를 뚫고 들어가 22층 내의 하트여왕 군대의 잔존 세력을 격퇴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재료를 하나씩 차근차근 모아 22층의 입장권을 제작하는 흐름이다.
그런데 이런 과정은 모두 생략되고, 앨리스가 대뜸 입장권부터 내밀고 있다. 단순히 앨리스의 호감도가 높아서 퀘스트 동선이 바뀐 것이라면 좋겠지만, 왠지 모르게 찝찝한 마음이 들었다.
“앨리스, 이 입장권을 갑자기 주는 이유라도 있는 거야?”
“……그건.”
잠시간의 정적, 세현은 앨리스의 표정과 침묵에서 그녀가 뭔가를 말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인지했다.
그녀가 잠시의 망설임 끝에 입을 열려던 순간-.
파직-!
[사용자의 접근 권한이 차단된 정보를 열람을 시도했습니다. 관리자 권한으로 차단됩니다.]
순간 귀를 찢는 듯한 노이즈음과 함께, 앨리스의 앞에 팝업창 여러 개가 출력됐다 사라졌다. 세현은 난생 처음 겪어보는 일이기에 당황해 살짝 뒤로 물러났다.
잠시 후, 팝업창이 모두 사라졌다. 그러자 앨리스는 언제 그랬냐는 듯 해맑은 표정을 해보이며 말을 이었다.
“이유가 있겠습니까? 허세현 님이 서둘러 23층에 도착하길 바랄 뿐입니다.”
그녀의 말투에서 ‘서둘러’ 부분이 억양이 유난히 드셌다.
“나는 그 ‘서둘러’ 가야 되는 이유가 뭔지 알고 싶다는 거야.”
[관리자 권한으로 차단됩니다.]
다시 한 번 노이즈와 함께 팝업이 출력됐다.
그러자 앨리스는 조금의 미동도 없이 계속 같은 말을 반복했다.
“이유가 있겠습니까? 허세현 님이 서둘러 23층에 도착하길 바랄 뿐입니다.”
계속 질문을 던져도 그녀는 고장 난 인형처럼 같은 말을 반복할 뿐이었다.
“이거 뭐야?”
세현은 확신할 수 있었다.
분명, 22층 메인 던전에 뭔가가 있다는 것을 말이다.
세현은 하는 수 없이 요새를 빠져나왔다.
‘찝찝하다.’
메인 던전을 안 갈 수도 없는 노릇이지만 마냥 들어가기도 찜찜한 상태였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22층 메인 던전의 난이도가 낮기에 곧장 클리어를 해 버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세현은 최소한의 대비는 해둘 필요성을 느꼈다.
‘세현은 일단 소모품을 구입한 후, 8층 거점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하기로 결정했다.
지금 와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메인 던전에 진입하기 전, 충분한 소모품을 확보하고 최고의 컨디션인 상태에서 들어가는 것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Level 30. 만반의 준비
세현은 일단 마켓으로 달려가 각종 소모품을 구입했다. 유사시에 사용할 수 있는 마법 스크롤, 버프용 포션 등등.
‘이 정도면 거의 전쟁 준비하는 수준이네.’
레이드나 길드 전쟁을 할 때와 비슷한 수준으로 중무장을 했다. 적어도 소모품이 부족해 낭패에 빠질 일은 없을 것이다.
사실 22층 메인던전은 아파트 전체를 통틀어도 난이도가 낮은 편에 속하기에 이 정도 까지 대비를 할 필요는 없다.
다만 이번에 겪은 사건이 워낙 불길했기에 만반의 준비를 해 두자는 차원이었다.
“세현 씨, 돌아가는 길에 세이메이 씨 드릴 먹거리도 조금 사 가죠?”
쇼핑을 마치고 적당히 돌아가려던 찰나, 설희가 먼저 말을 꺼냈다.
‘하긴 세이메이 녀석, 먹을 거 안 사 가면 삐지겠지.’
세이메이는 세현이 밖에 나갔다 올 때마다 먹을 걸 사오는 것에 항상 기대하는 모습이었다. 어쩌다 한 번 빠뜨릴 때면 직접 티는 안내지만, 표정에 ‘아쉽다’라고 써 있는 게 대놓고 보일 정도였다.
“네. 마트라도 좀 다녀오죠.”
두 사람은 관리사무소 내에 위치한 입주자 전용 대형 마트로 향했다.
꽤 시설이 좋은데다가 세금을 깎아 줘 다른 마트보다 약 10%가량 싸게 물건을 구입할 수 있어, 사실상 아파트에서 활동을 하지 않는 F급 입주자들 중 이곳 대형마트만 따로 이용하는 인원들이 있을 정도였다.
“이거랑 이거, 이거 담으면 되겠네요.”
마트에 들어서자마자 카트를 뽑아 꺼내 달달한 음식들 위주로 골라 담았다. 딸기 쉬폰 케잌, 초콜릿, 마카롱, 머랭 쿠키 등등……. 보는 것만으로도 혀가 녹아내릴 것 같은 단 음식의 향연.
이걸 보면 어린아이처럼 좋아할 세이메이의 모습이 떠올라 괜스레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러던 중-.
“설희 씨?”
설희가 한곳을 응시하며 멍하니 서 있기에 불렀지만, 듣지 못했는지 반응이 없었다.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설희의 시선 끝에는 헤어 드라이기가 놓여 있었다.
‘아, 우리 집에 저런 거 없었지.’
지금 세현의 8층 집에는 원래 자취방에서 쓰던 물건들을 대강 채워 놓은 상태였다.
본인 기준에서야 불편할 게 없지만, 생각해 보니 설희나 세이메이가 쓸 만한 물건들이 많이 부족했다.
예를 들자면 헤어드라이어가 그랬다. 세현이야 머리가 짧아 대충 수건으로 닦고 말리면 됐지만, 세이메이나 설희의 경우 그동안 많이 불편했을 게 분명했다.
이런 사소한 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아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