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
78화.
Level 29. 마검 크로우
‘나이스!’
예상치 못한 행운에 퀘스트가 단번에 종료됐다. 그러자 험프티 덤프티는 다음 대사를 이어갔다.
“앨리스가 그런 배경을 가진 인물이라면 어쩌면 반군의 혁명은 성공할지도 모르겠군. 그러면 확실히 한 다리를 걸쳐 두는 게 미래를 위해서라도 좋겠지…….”
아무래도 세현이 알려 준 정보가 자신에게도 꽤 유용하게 쓰일 것이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좋아, 자바워키를 잡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지! 그 대신 혁명에 성공하면 나를 잊지 말아 달라고.”
“물론.”
세현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험프티 덤프티는 기본적으로 이익이 되면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는 박쥐같은 캐릭터다.
여태 하트여왕의 힘이 압도적이었기에 그녀의 밑에서 일했지만, 조금 전 세현의 말을 듣는 것으로 반군이 혁명이 성공할 확률도 있다 판단한 모양이었다.
“뇨로옹, 자바워키를 쓰러뜨리기 위해선 먼저 놈의 몸에 둘러진 축복을 제거해야 된다. 그걸 위해선 저주받은 검 ‘크로우’가 필요하지.”
저주받은 마검 <크로우>. 이는 시즌3을 클리어하기 위한 필수 아이템이다.
검의 능력 자체는 별것 없지만 각종 축복을 파괴할 수 있는 권능이 담겨 있다. 시즌3에서 자바워키를 잡거나 수호 마법, 신성력 따위를 사용하는 적을 상대할 때 아주 유용하다.
[#. 메인 퀘스트 / 저주받은 검]
-자바워키에게 걸린 축복을 깨부수기 위해 저주받은 검 ‘크로우’를 제작해야 한다.
적정 레벨: 95
보상: 타이틀 ‘저주받은 검을 깨운 자’.
- 민첩+2, 체력+2
[수락하기]
세현이 수락하기 버튼을 누르자 다음 메시지가 곧장 출력됐다.
[‘험프티 덤프티’가 ‘크로우의 조각’을 얻을 수 있는 위치를 지도에 표시해 줬습니다.]
† † †
지난 5일간, 22층의 동부와 남부에 위치한 2개의 요새를 공략했다. 또한 이곳에서 마검 크로우의 재료 [까마귀 날개], [까마귀 다리]을 획득했다.
물론 그 과정이 순탄치는 않았다. 하트여왕의 입장에서는 생명줄이나 다름없는 ‘자바워키’의 약점이 있는 곳이기에 난이도가 상당했고, 공략에 꽤 어려움이 있었다.
거의 물약을 쏟아붓다시피 해서 겨우겨우 공략에 성공했고, 결국 마지막 요새 하나만을 남기게 됐다.
“으으으, 엄청 춥네.”
“그래도 준비를 단단히 해 놔서 다행이네요.”
마지막 요새는 22층 최북단에 위치해 있었다. 이곳은 고지대에 위치해 1년 내내 눈이 쌓여 있었는데 이 때문에 ‘얼음 성채’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얼음 성채는 전투 난이도도 난이도지만 가는 과정 자체의 험난함으로도 악명이 높았다.
세현 일행과 요새의 거리가 1km이내로 가까워질 무렵, 요새 외곽에서 카드 병사들의 외침이 들려왔다.
“적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요새를 지켜야 한다! 공격해!”
카드 병사들은 일제히 화살을 퍼붓자 화살이 눈보라와 함께 하늘을 가득 메웠다. 세현은 미리 준비한 라운드 실드를 앞으로 내밀고 천천히 전진하는 전략을 사용했다.
투둑! 쿵! 콰득-!
화살이 방패를 계속 두드리며 온몸이 흔들렸다.
그걸 이겨내며 요새 근처에 도달했을 때, 라운드 실드는 차라리 고슴도치라고 부르는 게 나을 정도로 변해 있었다.
세현은 미리 준비해 온 폭발 마법 스크롤을 찢어 요새 정문에 붙였다.
“개막식에는 축포가 필수지.”
잠시 후, 스크롤이 붉은 빛을 발하다 정점에 달했을 무렵.
콰아아아앙-!
엄청난 폭발과 함께 요새 정문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버렸다.
“정문이 뚫렸다! 막아!!”
카드 병사들이 다급히 달려 나와 입구를 틀어막았다.
세현과 세이메이는 일제히 모든 소환수를 불러냈고, 백설희는 아름다운 노래로 아군 전체에 버프 효과를 발동시켰다.
“이대로 밀고 갑시다.”
이젠 전략이라고 할 게 없었다. 소환수를 앞세운, 무식한 단순 돌파로 카드 병사들을 밀어냈다.
그들은 어떻게든 성문에 돌입하는 것을 막으려 했지만, 기본적인 스펙에서 너무 차이가 났다. 세현은 스티그마를 새긴 후, 자신의 소환수들이 강해진 것을 쉽게 체감할 수 있었다.
‘이 정도면 어디 가서 꿀리진 않겠네.’
불과 40~50레벨 수준에 불과한 소환수들은 70레벨이 넘는 카드 병사들을 가볍게 찢어발기고 있었다. 특히 블랙 나이츠의 경우, 리프 어택 한 번에 카드 병사 네댓 명이 동시에 찢길 정도로 발군의 위력을 자랑했다.
“성문이 뚫렸다! 막아!”
“2차 저지선을 만들어!”
세현 일행은 그야말로 파죽지세의 기세로 요새의 관문을 하나씩 돌파해 나갔다.
“히이이익! 살려 줘어!”
“5번 관문이 뚫렸다! 6번대 나와!”
6번, 7번, 8번-.
관문을 돌파하며 요새 심층부로 갈수록 카드 병사들의 숫자는 점차 올라갔다.
이 과정이 반복되고 9번 관문에 들어섰을 때, 일반 카드 중 가장 강한 9번 카드들이 세현 일행을 원형으로 둘러쌌다.
9번 카드답게 좋은 움직임이었지만, 막상 전투가 시작되자 세현의 소환수들은 놈들을 채 1시간도 걸리지 않아 싹 쓸어버렸다.
“가, 가까이 오지 마!”
9번째 관문, 마지막 남은 한 명의 병사가 허공에 창을 휘두르며 외쳤다. 놈은 애써 의연한 척했지만 손과 발을 달달 떠는 것이 애처로웠다.
‘뭐 불쌍하긴 하지만 몬스터는 몬스터니까.’
세현이 그렇게 마무리 하려는 찰나-.
“세현 씨. 잠깐만요.”
백설희가 세현을 제지하며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마지막 남은 카드 병사, 제가 1:1로 상대해 봐도 될까요?”
“응? 갑자기 왜요.”
백설희의 현재 레벨은 46, 반면 9번 카드 병사의 레벨은 90 전후다. 설희가 아무리 A클래스라지만 일반 상식대로라면 1:1 싸움은 피하는 게 보통이다.
“새로 얻은 스킬의 성능을 제대로 시험해 볼 기회가 필요해요.”
아무래도 설희는 ‘스티그마’로 얻은 신규 스킬을 시험해 보고 싶은 모양이었다.
‘흐음 과연…… 여태 제대로 활용해 볼 기회가 없긴 했지.’
지난 두 개의 요새 공략에서 주로 전투를 담당한 건 세현과 소환수들이었다. 나머지 두 사람은 이를 거의 보조하는 느낌으로 전투를 진행했다. 명색이 펜싱 금메달리스트인 설희의 입장에선 손이 근질거렸으리라.
세현은 마치 대견한 자식을 보는 듯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설희 씨 하고 싶은 대로 해요.”
“헤헤, 고마워요 세현 씨.”
설희는 해바라기 같이 웃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는 무슨. 혹시 위험해지면 바로 뛰어들 겁니다.”
“넵!”
얘기가 끝남과 동시에 설희의 밝은 얼굴이 일순간 전사의 차가운 얼굴로 변모했다. 그리고 입을 작게 열어 가늘고 아름다운 소프라노 톤의 목소리로 노래를 흥얼거렸다. ‘팬텀싱어’의 주특기인 노래로 스스로에게 버프를 발동시키기 위함이었다.
[백설희 님이 ‘용기의 찬가’의 효과를 본인에게 집중합니다. 이 효과는 10분 간 적용됩니다.]
[모든 능력치가 20% 상승합니다.]
모든 버프 효과를 자신에게 집중시키자 전신에 붉은 오오라가 솟구쳤다.
설희는 레이피어를 앞으로 살짝 내밀며 동시에 자세를 낮게 해 전투태세를 취했다.
잠시 후-.
팟-!
바닥의 흙이 튀기며 설희의 몸이 일순간 사라졌다.
“뭐, 뭐야!”
정면에 서 있던 카드 병사가 놀라 허둥댔고, 설희의 몸은 순간 3-4m에 달하는 거리를 도약해 그의 코앞에서 번쩍 나타났다.
이는 세현의 소환수 ‘화이트 나이츠’가 가진 <블링크>의 상위 호환격의 스킬인 <점멸>이었다.
콰득-!
점멸의 가공할 속도를 고스란히 담은 레이피어가 9번 카드 병사의 몸을 꿰뚫었다. 그 자리에 주먹만 한 구멍이 남았고, 구멍 안에서 푸른 피가 콸콸 쏟아졌다.
“커허헉!”
9번 카드 병사는 비명을 지름과 동시에 몸을 비틀어 창을 휘둘렀다.
부웅-!
그러곤 자세를 다시 잡더니 창을 매섭고 정확하게 세 번을 찌르며 전진했다.
하지만, 백설희의 몸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또 잠시 후-.
콰득-!
파열음과 함께 9번 병사의 몸에 구멍 하나가 추가되며 재차 비명이 들린다.
“아아악!”
콰득-!
“크하하학!!!”
콰드드득-!
비명이 반복해서 들릴 때마다 그의 몸에는 구멍이 하나씩 늘어나며 피를 쏟아 냈다.
그 개수가 10개를 넘었을 때, 9번 카드 병사가 비틀대더니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고 곧장 재가 되어 공중으로 흩어졌다.
고작 40레벨 중반의 백설희가 90레벨이 넘는 몬스터를 이긴 것이었다.
“후우우우우.”
백설희는 지친 얼굴로 이마의 땀방울을 닦아 냈다. 세현은 그 모습을 안쓰러운 얼굴로 바라봤다.
‘체력 소모가 엄청났겠지.’
점멸 자체의 성능은 사기적이지만 그에 필요한 마나와 정신력을 감당하기 어려울 터였다. 현재의 40레벨 중턱의 백설희가 점멸을 자유롭게 활용하기에는 아직 부담이 클 것이다.
“잘했어요, 설희 씨.”
“설희 공, 정말 멋진 전투였습니다!”
세현은 마나와 생명력을 동시에 회복시킬 수 있는 최상급 포션을 설희에게 내밀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그러자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세이메이 또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설희는 운동 후 이온음료를 마시듯 시원하게 포션을 들이켠 후, 숨을 고르더니 미소를 띠우며 대꾸했다.
“너무 띄워 주지 마세요. 겨우 한 명 상대하는데 이 꼴인 걸요.”
“90레벨이 넘는 몬스터를 잡은 것 자체가 엄청난 거죠.”
“응? 하지만 세현 씨는 이 요새를 혼자서 쓸어버리셨잖아요.”
설희는 납득되지 않는 듯 고개를 옆으로 까딱거렸다.
“아, 그런가…….”
세현은 자신의 대단함을 새삼 자각하며,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잠시 후, 마지막 관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요새의 최심부에는 10이라는 숫자가 대문짝만하게 새겨진 거대한 검은색 나무문이 있었다. 세현이 한숨을 푹 내쉬며 문에 손을 가져다 대자 눈앞에 팝업창이 출력됐다.
[#. 보스룸 / ‘죽음과 명예와 힘의 스페이드킹’]
-카드 병사들이 궁극의 전투 기술을 담은 팔랑크스 방진을 펼친 채 침입자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설픈 실력으로 안에 들어간다면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건 죽음뿐입니다.
적정 레벨: 100
권장 인원: 5
등장 보스:
-죽음과 명예와 힘의 스페이드 킹 ‘다윗’.
-카드 병사.
※ 권장 인원에 미달되는 인원으로 입장시 보스의 능력치가 소폭 하락합니다.
[입장하기]
입장하기 버튼을 터치하자, 나무문이 열리며 그 너머에 콜로세움과 유사한 느낌의 거대한 원형 공간이 펼쳐졌다.
그 중앙에 놓인 단상에는 몸통에 스페이드 A가 새겨진 거대한 카드 병사가 마이크를 붙잡고 떠들어대고 있었다.
<안녕하냐 관중 놈들! 오늘은 나, 스페이드 킹 ‘다윗’이 네놈들에게 짜릿한 메가톤 하이퍼 그레이트 쇼킹한 죽음의 배틀쇼를 선사해 주마!>
“다윗! 더 스페이드킹!”
“더 스페이드킹! 다윗!!”
그의 말에 사방을 새까맣게 메운 카드 병사들이 우레와 같은 함성이 일제히 쏟아 낸다. 이런 상황을 수도 없이 겪어본 세현의 입장에서도 어느 정도 위압감이 느껴지는 광경이었다.
<자, 첫 번째 선수 ‘투페어’ 입자앙!>
콜로세움 사방에 뚫린 구멍에서 각각 다른 로고를 가진 9번 카드, 8번 카드가 짝을 지어 나왔다. 그들은 보통의 9번 카드 병사와 달리 몸에 붉은 오오라가 맴돌았다.
저것은 카드 병사만이 가질 수 있는 특성 ‘팔랑크스’라는 것의 효과다.
카드 병사들이 카드 족보에 맞춰 진형을 형성할 경우 버프를 받는다. 원페어에서 시작해 스페이드 로열 스트레이드 플러시까지.
카드 조합에 따라 만들어진 족보의 수준에 따라 버프의 수준도 우주와 땅만큼이나 격차가 있다.
이번 보스 ‘죽음과 명예와 힘의 스페이드킹’은 콜로세움 내부에 ‘원페어’부터 시작해 단계적으로 하나씩 올라가 ‘스페이드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시’까지의 팔랑크스를 들여보내 매 라운드를 클리어해야 하는 콘셉트였다.
때문에 초반부의 난이도는 다른 보스에 비해 싱겁기 그지없지만, 극후반에는 경악할 수준으로 난이도가 높아지는 특성을 가졌다.
‘지금 이놈이랑 정면 대결하는 건 자살 행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