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
77화.
“자, 그럼 일단. 이 잉크가 뭐길래 간이고 쓸개고 다 줄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는지 말해 봐, 타투이스트 양반.”
“으음…… 정확히 감정은 해 봐야겠지만, 뿜어내는 빛과 색으로 봤을 때 이 잉크는 엄청난 마력 농도를 가진 것 같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평생 타투이스트로 살아오며 뛰어난 마법 잉크를 봤지만, 이정도 수준의 물건을 보는 건 처음입니다.”
“이걸로 스티그마를 새기면 어떻게 되는데?”
“엄청난 힘을 얻게 될 겁니다. 거의 장비 하나를 더 장착한다고 생각하면 될 겁니다.”
그 말을 들은 세현 일행은 모두 놀란 얼굴을 했다.
“오오~ 이거 대단한 물건이구만!”
“그래서 말입니다, 입주자님……”
“뜸들이지 말고 말해.”
“이 잉크를 조금만 나눠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부탁입니다! 그러면 제 모든 기술을 총동원해 최상급 스티그마를 새겨 드리겠습니다.”
“얼마나 필요한데?”
“10%… 아니 5% 정도면 충분합니다.”
“뭐, 좋아.”
세현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수락의 뜻을 전했다. 어차피 스티그마를 이 타투이스트에게 받아야 한다면, 마사무네와 그랬던 것처럼 친분을 쌓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판단이 든 것이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타투이스트는 세상을 다 얻은 듯 기쁜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그러곤 스포이드로 세현의 잉크를 조금 뽑아 작은 시약병으로 옮겨 담았다.
한 방울이라도 흘릴세라 손을 벌벌 떠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타투이스트’의 호감도가 상승합니다.]
순간 메시지가 출력되자 세현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혹시나 해서 잉크를 보여 줬던게 답이었군.’
거주자의 호감도에 따른 추가 이벤트를 많이 체험했기에, 지금의 투자가 앞으로 큰 이득으로 다가올 것이라는 걸 확신했다.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해 스티그마를 새겨 드리겠습니다.”
“남은 잉크로 스티그마를 몇 명분이나 새길 수 있을까?”
“3명까지는 넉넉히 될 겁니다.”
“3명이라…… 세이메이, 설희 씨! 셋 다 스티그마 하나씩 새기죠.”
“그래도 되요? 그 잉크 세현 씨 건데.”
“괜찮아요 괜찮아~ 나중에 잘되면 갚아요.”
세현은 설희를 어렵지 않게 설득했다. 그러자 타투이스트는 기다렸다는 듯 손을 비비며 말했다.
“자~ 각자 어떤 스티그마가 어울릴지 상담을 해 보지요. 세 분의 클래스와 스킬이 어떤지 말씀해 주시면 제가 가장 어울리는 형태로 스티그마를 짜 드리겠습니다.”
원래 타투이스트는 고객에게 자신이 짜 줄 수 있는 도안을 늘어놓고 선택하게 만드는 게 보통이다.
그런데 직접 상담하고 컨설팅까지 해 준다? 잉크를 넘겨준 것이 영향을 준게 분명했다.
세 사람은 천천히 자신의 스킬과 클래스의 특이점, 장점들을 타투이스트에게 설명했다. 타투이스트는 진지한 얼굴로 내용을 메모장에 빼곡히 적어 내려갔다.
“음, 일단 세이메이 씨는 소환수와 마법사의 중간쯤 되는 클래스군요. 지능 수치와 마나 재생량을 증폭시키는 스티그마를 새기면 될 것 같습니다. 백설희 씨는 다소 애매한 전투 스킬들을 보강할 스킬을 추가하는 게 좋겠군요.”
타투이스트는 감탄사가 나올 정도로 각자의 부족한 점들을 족집게처럼 집어냈다.
“세현님은 실로 엄청난 소환 능력을 가지고 계시군요. 흐음…….”
여태 프리스타일처럼 거침없이 말을 잇던 그가 세현의 스킬 구성을 듣고 고민하는 듯 턱을 쓰다듬었다.
“이건 솔직히 허세현 님이 선택하시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세현 님 본인의 전투력도 출중하지만, 소환수들도 막강하니 어떤 방식으로 스티그마를 새겨도 다 장점이 있을 겁니다.”
타투이스트가 역으로 질문을 던지자 세현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내가 카리스마라는 수치가 있는데, 이걸 증폭시키는 스티그마를 새길 수도 있나?”
“물론입니다.”
타투이스트는 세현이 내린 답이 마음에 들었다는 듯, 기꺼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작업을 시작하겠습니다.”
타투이스트는 곧장 작업을 시작했다.
세 사람 모두 스티그마의 위치가 조금씩 달랐다. 그의 말로는 어느 지점에 새기느냐에 따라 그 효율이 달라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예컨대 지능을 올릴 경우 두뇌와 가까운 목 뒤에, 체력을 올릴 경우 심장과 가까운 가슴에 새기면 스티그마가 효율적으로 작동한다는 논리였다.
[‘샤이탄의 잉크’를 재료로 ‘왕의 스티그마’가 새겨졌습니다.]
스티그마가 완성되는 순간, 마스터키 메시지가 들려왔다.
[#. 스티그마 / 왕의 스티그마]
-왕의 자격을 증명하는 스티그마, 최상급 잉크로 새겨져 다.
?부가 옵션
-증폭되는 카리스마: 사용자의 카리스마 스테이터스 x 2배.
-현재 카리스마 증가량: 1
세현은 스티그마의 옵션을 확인하며 입꼬리를 작게 올렸다.
‘아직은 별것 없지만, 카리스마를 키우면 도움이 되겠지.’
현재는 카리스마 스탯이 낮아 1밖에 안 올랐다. 하지만 이 패시브는 카리스마 수치가 오르면 오를수록 더 큰 위력을 발휘할 터였다.
이 스티그마는 당장에 큰 위력은 없지만 미래를 위한 장기 투자라 생각하기로 했다.
카리스마가 많이 오르면 소환수 스탯을 증폭시키는 ‘왕의 카리스마’와 엄청난 시너지를 기대할 수 있으리라.
잠시 후-.
“그럼 안녕히들 가십쇼! 또 스티그마가 필요하면 언제든 찾아오시고요.”
세현 일행은 타투이스트의 극진한 배웅을 받으며 작업실을 빠져나갔다.
† † †
세현은 다시 ‘험프티 덤프티’를 찾았다.
그는 반군과 여왕군이 종종 교전을 벌이는 접경 지역의 지하 동굴에 머물고 있었다.
개미굴 같이 복잡하고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고 거대한 동굴. 이곳은 일종의 암시장으로, 출신 성분에 상관없이 누구든 아이템과 정보들을 거래할 수 있는 장소다.
세현 일행은 험프티 덤프티를 만난 후, 근처 조용한 주점에 들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뇨로옹, 그래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해 보자고. 그쪽 형씨가 필요한 게 자바워키에 대한 정보라고 했지? 정확히 자바워키의 어떤 정보에 대한 건지 말을 해 줬으면 하는데.”
“자바워키를 죽일 수 있는 법을 알려 줘.”
“뇨로오오옹?”
그 말을 하는 순간, 험프티 덤프티가 마시던 맥주를 바닥에 흘리며 벌떡 일어났다.
“지, 진심이냐? 그건 반란이다, 반란!”
“애초에 반군 소속인데 당연한 거 아니냐?”
“뇨로옹! 멍청한 놈!”
그러곤 손가락으로 자신의 입을 가리며 ‘쉬잇-’ 하는 소리를 냈다.
“자바워키가 어떤 놈인지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거냐?”
“그러니까…… 그걸 물으러 온 거잖-.”
험프티 덤프티는 세현의 말을 끊으며 제멋대로 설명을 시작했다.
“놈은 해츨링 중 최상급만 선별해, 왕국 최고 성직자들의 축복을 받아 만들어진 역대 최고, 최강의 괴물이야! 당신이 아무리 재주가 있어도 놈을 상대하는 건 자살 행위다 뇨로옹!”
‘아오 이 설명충 새끼.’
세현은 짜증을 꾹꾹 눌러 담으며 차분히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너를 찾았지. 당신, 정보라면 둘째가라면 서럽다며? 자바워키의 약점 정도야 알고 있을 것 아니야?”
“하하, 그렇지! 정보 하면 이 험프티 덤프티 님이시지.”
험프티 덤프티는 약간 들뜬 듯 경쾌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자바워키의 약점은 있다! 하지만 이 정보는 왕국에서도 몇 명밖에 모르는 아주 비~밀스러운 이야기야. 내 쪽은 목숨을 내놓고 하는 얘기니만큼 그에 상응하는 돈이나 아이템, 정보를 가져와 줘야겠어.”
그 말이 끝나는 순간 세현의 눈앞에 팝업창 하나가 출력 됐다.
[#. 메인 퀘스트 / 정보상의 조건]
-험프티 덤프티는 자바워키의 비밀을 알려주는 대신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요구하고 있다.
적정 레벨: 90
클리어 조건: 거주자 ‘험프티 덤프티’의 만족도 수치 100% 달성.
‘아. 짜증나는 퀘스트가 나왔구나.’
세현은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 퀘스트는 험프티 덤프티가 만족할 때까지 돈, 아이템, 정보들을 줘야 한다.
돈이나 아이템으로 만족도를 충족시키는 데 거의 천문학적인 금액이 들어간다. 하지만 험프티 덤프티의 ‘정보상’이라는 속성을 반영한 것인지, 상대적으로 정보를 주는 것은 만족도의 상승 폭이 꽤 컸다.
때문에 아파트 내부의 이런저런 숨겨진 정보를 수집해 전달하는 것이 이 퀘스트를 그나마 수월하게 공략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애초에 정보를 모아 클리어하라는 쪽으로 설계가 된 퀘스트다.
때문에 정보 수집에 유리한 대형 길드들이 상대적으로 이 퀘스트를 클리어하는 데 유리한 고지를 선점했었다.
‘그래 봤자 세 달은 족히 걸리겠지만 말이야.’
이 퀘스트의 난이도 덕에 험프티 덤프티는 입주자들 사이에서 [쓰레기 계란]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악명이 높았다.
‘일단 기억나는 정보 몇 개부터 풀어 볼까.’
세현은 미래의 정보를 알기에 기본적으로 그에게 제공할 만한 정보가 꽤 있었다.
“이 지하동굴의 대장장이와 여관 주인은 연애 중이야. 앨리스의 요새 동쪽 숲에서 자주 데이트를 한다더군.”
“오오 그래? 그거 참 흥미로운 얘기군 그놈을 협박…… 아니 그놈과 협상할 때 그 정보를 이용하면 좋겠어.”
[험프티 덤프티의 만족도가 3%를 달성했습니다.]
“시즌1과 시즌2 구간에서는 거주자들끼리 연합을 맺으려는 움직임이 있어. 내가 그 중간 다리 역할을 했지.”
“거주자들간의 연합이라? 그거 참 이상한 일이군.”
[험프티 덤프티의 만족도가 20% 달성됐습니다.]
[험프티 덤프티의 만족도가 35% 달성됐습니다.]
‘제기랄, 이걸로도 턱도 없네. 썩을 계란 자식.’
세현이 기억하는, 또 새로 알아낸 정보를 거의 1시간여에 걸쳐 다 털어놨다.
그럼에도 험프티 덤프티의 만족도는 겨우 35%를 조금 넘는 수준이었다.
나머지를 채우기 위해서는 쓸 만하다 싶은 아이템을 주거나 또 다른 정보를 수집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먹히려나?’
잠시 고민하던 중, 세현은 비장의 한 수를 꺼내기로 했다.
“앨리스의 정체를 알려주는 건 어때?”
“뇨로옹, 그거 흥미로운데 들어 보고 쓸 만한 정보다 싶으면 받도록 하지.”
‘오호라, 이거 봐라?’
다른 정보들에 비해 험프티 덤프티의 반응이 유난히 도드라졌다.
원더랜드에 벼락처럼 나타나 하트여왕에 대적해 성공적으로 반군 세력을 조직해 낸 불세출의 여인. 그런 존재의 정보가 귀하지 않으면 이상한 것이리라.
“앨리스는, 아파트 하층에 있는 벚꽃국의 왕족중 한 명으로…….”
앨리스에 대한 정보를 줄줄 늘어놓자 세이메이가 미간을 찌푸린 채 세현을 쳐다봤다. 세현은 애써 무시하며 앨리스에 대한 정보를 모두 늘어놓았다.
“뇨로옹……! 그, 그 정보는!”
험프티 덤프티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마스터키가 메시지를 출력했다.
[험프티 덤프티의 만족도가 100% 달성됐습니다.]
[메인 퀘스트 ‘정보상의 조건’이 클리어 됐습니다.]
한 번에 메인 퀘스트 조건이 달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