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
76화.
도시 한가운데 바벨탑처럼 솟은 이질적인 회색 건물. 전 세계에서 기업 평가 1~3위를 오가는 초대형 기업 ‘한성’의 본사였다.
이곳의 옥상, 한성 그룹을 이끄는 최진형 회장의 개인 집무실은 커다란 검은색 문 앞에 두 마리의 사자 조각상이 세워져 있었다.
사람들은 이곳을 우스갯소리로 ‘지옥문’이라고 불렀다. 저 문 너머로 불려 들어간 사람은 누구나 지옥을 맛보게 된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최은철, 날 이렇게 실망시킬 거냐?”
“죄송합니다, 아버님.”
천하의 최은철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회장에게 고개 숙여 사죄의 뜻을 전했다.
“이번에 메인 퀘스트를 뺏기면서 우리 회사 시총이 얼마나 떨어졌는지 알아? 무려 40조다, 40조! 이 따위로 하면 내가 호락호락 그룹을 물려줄 것 같아?”
“…….”
팔콘 길드가 시즌2 최종장을 서큐버스 군단에 빼앗긴 것은 한성 그룹 입장에선 치명상이었다.
단 하루 만에 주가 13%가 하락했고, 사람들의 기대 심리가 떨어졌다.
여태 팔콘 길드를 앞세워 기업 가치를 부풀리고 수많은 미래 사업에서 독점적 위치를 선점했던 한성 그룹 입장에서 이번 사건은 비상사태였다.
게다가 이는 차기 회장 후보들이자 최은철의 경쟁자인 호철과 한철에겐 좋은 기회였다.
‘제기랄……’
은철은 뒤에서 웃고 있을 두 형의 얼굴을 떠올리자 부아가 치미는 것 같았다.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이번 시즌에는 첫 클리어를 가져오겠습니다.”
“이번 한 번만 믿으마, 이번에도 실패한다면 그룹의 방향성을 어쩔 수 없이 재검토해야 될 거야.”
은철은 회장에게 다음 시즌의 승리를 약속하는 것으로 지옥문을 다시 넘어올 수 있었다. 티는 안 냈지만 일그러진 미간과 붉게 달아오른 얼굴은 그가 어떤 감정 상태인지 알려 주고 있었다.
은철은 그 즉시 스마트폰을 꺼내 단축 번호 0번으로 전화를 걸었다.
[네, 길드장님.]
상대는 대기라고 하고 있었던 듯 신호음 한 번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화를 받았다.
“전 길드원 강당에 소집해, 앞으로 길드 운영 방향에 대해서 연설할 거다.”
[알겠습니다. 최대한 신속히 준비하겠습니다.]
곧장 전화가 끊어졌고, 은철은 커다란 임원 전용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그 과정에서 수행원 몇 명이 은철을 배웅하려 했으나 손사래를 쳐서 모두 물리쳤다.
엘리베이터가 하강을 시작할 무렵, 은철은 벽면에 기대 생각에 잠겼다.
저번 주에 있었던 시즌2 최종장 레이드 실패가 머릿속을 악몽처럼 맴돌았다.
“허세현…….”
특히 충격이었던 건 대학 시절 은철의 동기였던 허세현이 서큐버스 군단에 소속돼 있었다는 것이다.
집안에서 망나니 취급을 당하던 은철이, 아버지의 백으로 겨우겨우 기어들어 간 명문 대학의 체육학과 시절.
은철이 기억하던 허세현은 패배자 혹은 낙오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고아 출신에, 임용고시에 패스해 체육 선생이 되겠다는 얘기나 하던 시시한 놈.
그런 놈이 동창회에서 별안간 입주자가 됐다고 할 때 조금 놀라긴 했지만, 겨우 E급 클래스이기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새끼가 거기서 그렇게 뒤통수를 칠 줄이야.”
허세현은 서큐버스 군단에 소속돼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정체가 은철이 신규 인력으로 스카우트하려 했던 ‘브레이브킹’이라는 것까지 밝혔다.
제삼자의 입장에서는 이게 뭐 대단한 일이냐 생각하겠지만, 자존심 센 은철의 입장에선 이중 삼중으로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이 새끼, 자근자근 밟아 주마.”
은철은 입꼬리를 올리며 작게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때였다-.
덜컹!
순간 엘리베이터가 흔들리며 천장의 불이 나갔다.
“뭐야?!”
은철은 곧장 엘리베이터의 비상벨을 눌렀지만, 건너편에서는 아무런 대꾸도 들려오지 않았다.
안 그래도 회장에게 닦여 더러웠던 기분이 더욱 강해졌다.
<그 더러운 기분, 내가 도와주면 조금 나아질지도 모르겠네요?>
그때 은철의 머릿속으로 사념이 흘러들어 왔다.
아파트 안에서 마스터키가 전해 오는 것과 비슷하지만, 중성적이고 사무적인 아나운서의 음성이 아닌 얇고 간악한 남성의 목소리 톤이었다.
“누구냐.”
은철은 그 즉시 인벤토리에서 아이템을 소환해 전투태세를 취했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한 존재가 앞으로 스르륵 나타났다. 검은 정장에 흰색 기괴한 광대 가면을 쓴 존재였다.
은철은 살짝 놀란 듯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나더니 자신의 무기를 내려놓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입니까.”
눈앞의 광대 가면은 은철의 입주 시험의 감독관이었던 관리인 ‘캐롤’이었다. 이후로도 아파트 내에서 가끔 마주칠 기회가 있었기에 얼굴과 이름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다른 게 아니라 은철 씨가 굉~장히 곤란한 상황에 처한 것 같아서요.>
<그래서 한 가지 제안을 드리려고 왔습니다만……. 틀림없이 만족할 만한 내용일 겁니다.>
캐롤은 자신이 준비한 말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은철은 그 얘기를 가만히 듣고 있다 고개를 작게 끄덕이는 것으로 긍정의 뜻을 전했다.
캐롤은 흡족한 얼굴로 오른손을 내밀어 은철과 악수를 나눴다.
<자, 그럼 계약의 스티그마를 새기죠.>
† † †
“뇨로오오옹! 거의 다 왔다! 이번엔 진짜 타투이스트를 만날 수 있으니까 조금만 힘들 내라고!”
“허억… 허억……. 이번에도 못 찾으면 정말 알 깨 버릴 줄 알아!!”
세현은 험프티 덤프티에게 버럭 화를 냈다.
그도 그럴 것이 세현 일행은 지난 이틀간, 타투이스트를 찾는다는 명목으로 수 없이 많은 곳을 다녀야 했다.
당연히 그때마다 전투가 벌어졌고, 계속되는 전투로 인한 피로감에 짜증이 극에 달했다.
‘이 퀘스트, 난이도가 이렇게 높았나?’
험프티 덤프티와 거래를 트고, 타투이스트를 만나기 위해 필수로 진행해야 하는 퀘스트 ‘정보 계약’. 이는 메인 퀘스트인 것을 감안해도 꽤나 까다로웠다.
일단 타투이스트가 항상 같은 장소에 있는 게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이 퀘스트를 돕는 험프티 덤프티 또한 그가 출몰하는 장소들을 10곳을 알고 있는 것뿐, 그가 제시하는 장소를 플레이어는 일일이 돌아다니며 찾아야 한다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벌써 이틀간 8곳을 찾았으니, 이제 나머지 두 곳 중 한 곳에서 타투이스트가 나올 확률이 높았다.
문제는 타투이스트가 있는 장소 모두가 던전 내부 같은 몬스터가 밀집한 지역이라 전투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험프티 덤프티의 HP가 ‘유리 조각’이라 표현해도 과장이 아닐 정도로 낮아, 전투 간에도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만 했다.
이번에 도착한 곳은 22층 북쪽에 위치한 각양각색의 꽃들이 피어 있는 거대한 숲이었다.
이곳은 인간의 상체에 꿀벌의 하체를 가진 수인족이 끝도 없이 쏟아져 험프티 덤프티를 지키느라 갖은 고생을 해야만 했다.
‘제발, 제발 이번에 나와라!’
세현의 간절한 기도가 먹힌 것일까? 숲의 안쪽에 찾은 통나무 집 굴뚝에선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었다.
그걸 본 험프티 덤프티는 헛기침을 하며 자랑하듯 외쳤다.
“하하. 찾았다! 타투이스트가 저기 있는 모양이구만!”
마치 제가 모든 일을 다 한 양 거들먹대는 모습에 세현은 험프티 덤프티의 옆구리를 한 대 걷어차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그랬다간 배에서 노른자가 터져 나오고 퀘스트에 실패가 될 터. 이 지옥 같은 뺑뺑이 작업을 또 하고 싶진 않기 때문이었다.
오두막집을 열고 들어갔다. 그러자-.
“누구슈?”
전신에 문신이 새까맣게 뒤덮인 스킨헤드의 남성이 심드렁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는 엎드려 있는 버섯 인간의 등짝에 빨간 멜빵바지에 빵모자를 쓴 배관공 캐릭터의 타투를 새기고 있었다.
‘저거…… 슈퍼X리오 아니야?’
버섯 등짝에 슈퍼X리오 문신. 그 기괴한 광경에 세현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아마 인간이 몸에 악마의 형상을 문신으로 새기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리라.
“뇨로옹~ 타투이스트 양반, 아직도 나를 기억 못하는 건가? 벌써 열 번도 더 온 것 같은데 이 정도면 슬슬 단골손님 반열에 올려 달라고.”
험프티 덤프티가 서운한 듯 하소연하자 타투이스트는 손을 절레절레 저었다.
“아 싫으면 오질 말던가. 내가 단골 타령하는 놈치고 진상 아닌놈을 못 봤어.”
“쳇…… 뭐 그럼 됐고. 이 옆에 있는 입주자들이랑 계약할 거니까 준비해 주쇼.”
“알겠수다.”
세현 일행은 버섯 인간의 타투가 끝날 때까지 작업실 구석의 소파에 쪼르르 앉아 기다려야 했다.
“뇨로롱! 나 험프티 덤프티가 말이야. 정보 하면 나! 나 하면 정보란 말이야! 허세현 당신, 운 좋은 줄 알라고.”
옆에서 험프티 덤프티가 쉴 새 없이 제 자랑을 늘어놓았지만, 세현은 듣는 둥 마는 둥 눈앞에 떠다니는 먼지 개수를 세며 시간을 때웠다.
잠시 후 버섯 인간은 슈퍼x리오 문신이 만족스러웠는지 미소 가득한 얼굴로 돌아갔다.
“험프티 덤프티, 무슨 스티그마를 새길 거요?”
“그야 언제나와 같은 계약의 문신! 계약 당사자 간에 거짓 정보를 알려 줄 경우, 바지에 똥을 싸게 되는 계약으로 하지!”
‘어이, 내 계약 의사는 안 묻는 거냐?’
바지에 똥을 싼다 하니 황당한 조건이었지만, 그저 거짓말을 안 하면 되는데다 괜히 힘을 빼고 싶지 않아 세현은 입을 꾹 다물었다.
설희와 세이메이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세현은 괜히 헛기침을 하며 의도적으로 시선을 피했다.
“자, 그럼 시술 들어갑니다.”
타투이스트는 금고에서 붉은색 잉크를 꺼내 오더니 그걸로 험프티 덤프티, 허세현, 백설희 셋의 손목에 동그란 형태의 문신을 새겼다.
문신이 빛을 내뿜으며 쓰라린 감각이 느껴지더니 별안간 마스터키가 음성을 전해 왔다.
[‘정보 계약’ 퀘스트를 클리어했습니다.]
[타이틀 ‘하기 어려운 타투’를 획득했습니다. 민첩+2]
[허세현 님이 ‘험프티 덤프티’와 ‘정보의 스티그마’로 계약을 맺었습니다.
#. 계약 내용:
- 두 당사자는 정보를 교환하는 계약 관계로 맺어진다.
- 상대에게 거짓 정보를 알려 줄 시, 그 자리에서 바지에 똥을 싸게 된다.]
‘왜 하필이면 똥이냐고……’
세현은 마지막 한 줄이 남기는 찝찝한 여운을 털어 내려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뇨로옹, 이걸로 계약 성공이다! 나는 앞으로 여기에 머물 테니까 쓸 만한 정보를 얻으면 언제든 가지고 와라. 아, 그리고 우리의 관계는 다른 거주자들에게 절~대로 알리면 안 된다는 거 명심해.”
험프티 덤프티는 저 말을 남기고 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조급증이라도 있는 듯, 정신없는 모습이었다.
[지금부터 ‘험프티 덤프티’의 위치가 지도에 표시됩니다.]
‘좋아, 잘 마킹돼 있네.’
세현은 마스터키의 ‘지도’기능을 실행시켰다. 그러자 험프티 덤프티의 얼굴을 화살표 모양으로 축소한 아이콘이 지도의 한 지점을 가리키고 있었다.
앞으로 저곳에서 수다쟁이 달걀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쪽 입주자 양반은 안 돌아가쇼?”
고개를 돌리자 타투이스트가 노골적으로 미간을 찌푸린 채 손을 휘휘 젓고 있었다.
귀찮으니 빨리 돌아가라는 메시지였다.
‘온 김에 이것도 써야지.’
그때, 세현은 인벤토리에서 작은 플라스크 하나를 꺼냈다. 그 안에는 보라색 빛을 은은하게 내뿜는 잉크가 담겨 있었다. 사카린에게 전해 받았던 ‘샤이탄의 잉크’였다.
세현이 이것을 꺼내자 심드렁했던 타투이스트의 얼굴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놀라움으로 가득했다.
“다…당신 그, 그거 어디서 난 잉크요?”
“알아서 뭐하게. 빨리 가 줬으면 하는 것 같은데, 바로 갈 테니까 걱정 마.”
퉁명스레 대꾸하며 나가려 시늉하자 타투이스크는 별안간 세현의 어깨를 붙잡고 타이르듯 말했다.
“아하하하. 빨리 가 줬으면 한다니요! 입주자님 같은 귀~한 손님에게 제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타투이스트가 극도로 저자세로 나오자, 세현은 못이기는 척 다시 소파에 앉았다. 협상에서 우위를 점했으니 이제 밀고 당기기로 상대에게 최대한 뽕을 뽑아낼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