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
74화.
강제로 소환 해제를 한 탓에 3분간 소환 불가라는 페널티가 붙었지만 차라리 이쪽이 나았다. 블랙 폰 정도야 죽어도 금방 복구가 되지만 블랙 비숍의 경우는 세현의 입장에서도 꽤 타격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 정도야 계산 범위 안이지.’
생각보다 상대의 전투력이 강하긴 했지만, 세현은 아직 마음의 여유를 잃지 않았다.
오히려 적당히 난이도가 있는 싸움에 피가 끓어오르는 느낌마저 들 지경이었다.
‘피의 광전사가 끝나면 확실히 밟아 놓는다.’
작전은 간단했다.
놈의 ‘피의 광전사’ 버프가 끝난 후, ‘작위 수여’를 사용해 역으로 놈을 밟아 놓는다.
이 작전을 실행하기 위해선 세현은 시간을 벌 필요가 있었다.
첫 번째 방법으로 자율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화이트 나이츠와 블랙 나이츠를 ‘왕의 명령’을 사용해 직접 컨트롤했다.
그 덕분에 소환수들의 공격이 한층 변칙적으로 변했고, 모히칸의 전투 호흡을 조금씩이나마 늦출 수 있었다.
그 다음으론 멀리 떨어진 거리에 화이트 폰을 추가로 소환해 원거리에서 지원 사격을 날렸다.
딱히 유효타를 먹일 만한 데미지는 아니었지만, 상대를 귀찮기 하기엔 충분했다.
“별것도 아닌 놈이 모기 새끼처럼 귀찮게 하는구나!”
“뭐래~ 모기 말라리아가 얼마나 무서운데.”
도발에 약이 오른 모히칸이 소환수들은 제쳐놓고 곧장 세현에게 달려들었다.
세현이 아슬아슬하게 그의 공격을 피해 내면, 그 때마다 두 나이츠가 놈의 등을 노리고 공격을 퍼부었다.
아슬아슬한 술래잡기가 지속되며 어느덧 10분의 시간이 지났다,
그러자 붉게 달아올랐던 라자드의 몸은 허공으로 수증기를 뿜어내며 원래대로 돌아왔다.
피의 광전사가 종료된 것이다.
“좋아, 이제 내 차례지?”
세현은 블랙 나이츠에게 곧장 작위 수여를 사용했다.
검은 중갑옷이 전신을 감쌌다. 전신에서 뿜어지는 기운은, 조금 전 세현의 것과 전혀 다른 흉흉한 위압감을 뿜어냈다.
“뭐, 뭐야 저건?”
그 모습을 본 블루울프 길드원들은 놀라 웅성댔다.
세현은 여유 만만한 얼굴로 씨익 웃으며 인벤토리에서 ‘고승의 염주’ 한 알을 꺼내 들었다.
시즌2 최종장, 샤이탄과의 전투에서 사용하고 단 두 알밖에 남지 않은 귀한 물건이었다.
‘여기서 쓰긴 조금 아깝지만, 기회가 될 때 제대로 밟아 줘야지.’
입으로 고승의 염주를 털어 넣고 이빨로 까득-소리가 나게 깨물었다.
[‘사리 삼키기’를 사용합니다. 3분간 허세현 님의 모든 스테이터스가 150% 상승합니다.]
한약재 같은 쓴맛이 올라오며 전신에 힘이 스며드는 것이 느껴졌다.
“한번 죽도록 맞아 봐라.”
세현이 리프 어택을 사용하자 몸이 로켓처럼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그 후폭풍에 일대의 입주자들의 머리카락이 폭풍 속에 있는 듯 휘날렸다.
끝도 없이 상승한 세현의 몸뚱이는 마치 운석과 같은 기세로 모히칸 머리를 향해 추락했다.
“미, 미친! 저게 E급이라고?!”
라자드의 온몸이 오싹오싹해지고 등골이 서늘해져 온다.
허공에서 날아드는 세현의 모습이 마치 마왕이나 사신 같은, 인간이 아닌 존재의 것으로 보였다.
본능이 1초라도 빨리 자리를 피하라고 말했다.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하지만 전투에서 패배할 경우 자신이 겪을 수모와 치욕, 그리고 극도의 긴장감이 뒤섞여 몸이 완전히 굳어 버렸다.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검을 앞으로 내밀고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덜덜 떠는 것뿐이었다.
“아아아아아악!”
외마디 비명과 함께 폭발음이 울려 퍼졌다.
“아이고 미안. 잘못하다 실수로 사람 죽일 뻔했네.”
뒤로 발라당 나자빠진 라자드, 그의 앞에는 양손검을 바닥에 내리꽂은 세현이 사악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자리에는 커다란 크레이터가 움푹 파여 있었다. 아마도 저걸 정면으로 맞았다간 농담이 아니라 즉사, 최소한 반병신이 됐을 것이다.
겁에 질린 라자드의 바지 위에 노란 액체가 스며 나오며 연기를 모락모락 뿜어냈다.
소위 말하는 ‘지렸다.’라는 표현이 이럴 때 쓰는 것이리라.
“자, 이제 약속 지켜야지, 무릎 꿇고 사과하기로 했잖아?”
“이이이익……”
세현의 말에 블루울프들과 라자드는 침음을 흘렸다.
그들이 그린 그림은 만만한 E급 입주자 한 놈을 일방적으로 두드려 패서 자신들의 위상을 높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 역의 상황이 벌어진 데다가 모든 장면이 캠코더에 녹화됐다. 이 영상이 인터넷에 올라가기라도 한다면 블루울프는 조롱거리가 될 터였다.
“저 새끼 죽여 버려! 캠코더를 먼저 박살내!”
블루울프들이 동시에 앞으로 달려들었다. 1:1은 패배했지만 자신들의 숫자가 많기에 내린 판단일 것이다.
‘뻔한 수를 쓰는구만.’
세현은 이런 상황을 이미 예측했고, 준비해 둔 플랜대로 행동했다.
“세이메이, 막아!”
“네, 주군!”
순간 거구의 오니 두 마리와 시키가미들이 벌떡 솟아나 블루울프들을 막았다.
“이랴!”
세현 일행은 그사이, 코커스에 올라타 내달리기 시작했다.
블루울프들 또한 오니와 시키가미를 쓰러뜨리고 코커스를 타고 뒤를 추격했지만, 이미 벌어진 거리를 좁히는 것은 쉽지 않았다.
블루울프들은 원거리 공격을 사용해 견제를 했지만 흔들리는 코커스 위에서 빠르게 움직이는 상대를 맞추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뿐만 아니라 세이메이의 시키가미들이 블루울프를 계속 견제하며 거리를 좁히지 못하도록 막았다.
그렇게 추격전이 이어지길 몇 시간, 세현 일행은 앨리스의 요새에 금세 도착할 수 있었다.
“제기라아알!”
블루울프들은 추격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요새 안은 거주자들 때문에 함부로 입주자들을 공격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온라인 RPG 게임에서 마을에서 PK를 하면 경비병이 와서 플레이어를 공격하는 것과 비슷한 원리다.
“머저리들.”
세현은 코커스를 탄 채 블루울프들에게 중지를 펼친 후, 유유히 요새 반대편으로 사라졌다.
† † †
“하아, 집이다…….”
“고생하셨습니다, 주군, 설희 공.”
“세이메이 씨도 고생하셨어요.”
블루울프를 떨쳐 낸 직후, 세현 일행이 곧장 8층의 집으로 이동했다.
“설희 씨, 세이메이. 전 마당에서 잠깐 일 좀 볼 테니까 먼저 씻으세요.”
두 사람이 씻는 동안, 세현은 캠코더의 영상을 확인했다. 볼썽사나운 블루울프들의 모습이 제대로 찍혀 있었다.
특히 놈이 세현의 앞에서 오줌을 지리는 장면은 당사자인 세현조차 통쾌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이거 유튜브에 바로 올리면 대박일 텐데.’
마음 같아선 이영상 그대로 유튜브에 뿌려 버리고 싶었지만, 지금의 세현은 길드에 소속된 몸이다.
일단은 영상을 스마트폰으로 옮긴 후 사카린에게 검토받기 위해 전송했다.
[사카린 씨, 이 영상 유튜브에 올려도 됩니까?]
그렇게 한 10분쯤 지났을 무렵 사카린에게 답장이 왔다.
[아하하하! 뭐야 이거, 재미있는데? 올려 올려! 조회수 엄청 나오겠네.]
별생각이 없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쿨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사카린은 도리어 재미있다는 반응이었다.
세현은 영상을 신지수에게 전송해 유튜브에 업로드해 달라고 부탁했다.
아직 시즌2 샤이탄 레이드 등 많은 영상 작업이 밀려 있기에 적어도 1~2주는 있어야 영상이 업데이트될 것이다.
세이메이와 백설희가 샤워를 마친 후 세현도 몸을 씻고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고 잘 준비를 마쳤다.
“안녕히 주무세요, 세현 씨.”
“주군. 좋은 밤 되소서.”
“설희 씨도 주무세요, 세이메이 너도 잘 자고.”
큰 방에는 백설희와 세이메이가, 작은 방에는 세현이 자리를 잡고 잠에 들었다.
며칠간의 강행군 때문인지 금방 눈이 감겼다.
† † †
그렇게 몇 시간을 잤을까?
“아우, 오줌 마려.”
세현은 갑자기 몰려오는 소변 욕구에 눈을 떴다.
창문 너머로 달빛이 은은히 내리쬐는 것이 지금이 한밤중이라는 것을 알렸다.
화장실에서 대충 소변을 보고 다시 잠에 들려던 찰나, 누군가의 목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그건 마당 쪽에서 들려오는 설희가 누군가와 전화 통화를 하고 있는 목소리였다.
‘이 새벽에 누구랑?’
궁금한 마음에 소리가 잘 들리는 위치를 찾아 몰래 그 내용을 엿들었다.
“응, 엄마. 사채업자들이 또 왔다고? 이번 달 이자는 보냈잖아요. 그런데 왜 또?”
“원금부터 갚아 달라고요? 그러면 동생 등록금은 어쩌라고요. 대학은 안 보내요?”
“아니 걔가 무슨 죄가 있어요. 애초에 빚진 건 엄마 아빠잖아요.”
통화 내용을 엿듣자니 사채업자들이 빚 독촉 건으로 집에 들이닥친 모양이었다.
듣자 하니 부모라는 작자들은 설희가 동생의 대학 등록금으로 빼 둔 돈까지 사채업자에게 넘길 모양이었다.
‘부모도 잘못 만나면 골치 아프겠어.’
세현은 애초에 고아였기에 부모라는 존재가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저런 부모라면 굳이 없어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잠시 후 통화가 끝날 무렵, 세현은 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갔다.
“어, 세현 씨?”
설희가 놀란 얼굴로 말했다.
세현은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엿들으려던 건 아닌데.”
두 사람은 마당에 서서 작은 목소리로 얘기를 나눴다. 백설희의 집안 상황과 심정이 어떤지 대충이나마 알 수 있게 됐다.
23억이라는 경악할 수준의 빚더미에 앉은 백설희 집안은 설희의 수입으로 겨우 이자만 갚으며 버틴다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한동안 잠잠하던 사채업자들이 최근 가족을 압박해 온다는 모양이다.
추측하건데 최근 설희가 언론에 종종 오르내리자 돈 냄새를 맡고 달려드는 게 아닐까 싶었다.
‘이거 혹시, 나 때문에 이렇게 된 건가?’
세현은 약간은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자신이 아는 미래가 맞는다면 백설희는 상위권 길드에 스카우트된 후 불과 몇 년 만에 모든 빚을 갚는다.
하지만 과거로 돌아온 그녀는 대형 길드에 들어가지 못했다. 아니 들어가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어쩌면 3년, 5년, 아니 10년이 지나도 빚을 다 갚지 못할지도 모른다.
‘이거 찝찝하네.’
세현은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앞가림을 하는 게 우선이었다.
“설희 씨, 미안해요. 팔콘 길드에 들어갔으면 이럴 일 없었을 텐데.”
“네에~? 그게 어떻게 세현 씨 탓이에요. 제가 싫어서 거절한 일인데요.”
설희는 조금도 세현을 원망하지 않는 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그 빚, 제가 금방 다 갚을 수 있게 해 드릴 게요. 나만 믿어요.”
“에이~ 제 빚을 왜 세현 씨가 걱정해요.”
설희는 한사코 세현의 말을 거절했다.
세현은 그 모습에서 전직 금메달리스트다운 책임감과 자긍심을 느꼈다.
“그래도 힘들면 꼭 얘기해요, 도와줄 테니까.”
“넵! 말만이라도 감사해요!”
설희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옆으로 살짝 비틀었다. 입은 웃고 있지만 왠지 모르게 얼굴에서 슬픈 느낌이 들었다.
세현은 침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주무세요. 내일부터 또 미친 듯이 달려야죠.”
“넵!”
두 사람은 다시 잠을 청하러 방으로 들어갔다.
‘빚이라. 빚이라…….’
어떻게 해야 설희가 빚을 갚을 수 있을지 잠시 고민했다.
계산기를 두드려도 세현이 20억이 넘는 빚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세현 또한 소환수의 숫자가 늘어나는 만큼 지출도 늘어날 것이기에 돈을 한 푼이라도 더 긁어모아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도 백설희의 딱한 사정을 보고 그냥 넘기기 어려웠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게 맞는 건가?’
최초의 세현은 오로지 복수만을 목표로 삼고 아파트를 올랐다.
하지만 백설희와 사카린 그리고 얼마 전 동창회에서 만난 윤병종까지….
자연스레 사람들을 만나고, 그에 따른 부수적인 목표들이 하나씩 생겼다.
평생을 외롭고 고독한, 왕따나 다름없는 삶을 살아왔기에 그들과의 관계를 그냥 흘려보내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젠장, 답도 없네. 일단 눈앞의 일만 생각하자,’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따라와 머릿속이 개미가 기어 다니는 것처럼 복잡해졌다.
세현은 잡념을 떨치기 위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억지로 잠을 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