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
72화.
“집안의 일이지만, 세현 공께는 말씀드리도록 하지요. 모쪼록 이 얘기는 본인만 알고 계시길 바랍니다.”
“오케이.”
벚꽃공주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와 나나기 누이는 어린 시절부터 친자매와 같이 각별한 사이였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 다 왕위 계승권이 있다는 게 문제였죠. 저와 누이의 집안은 왕을 배출하기 위해 피비린내 나는 왕위 쟁탈전을 벌였습니다.”
세현은 가만히 이야기를 들으며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던 중, 나나기 누이의 가문에서 보낸 암살자가 제 모친의 살해를 시도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사건으로 누이의 가문은 권력다툼의 승기를 잡을 생각이었겠지만, 오히려 이것이 실패로 돌아가며 멸문지족을 당했지요.”
“그래서 추방을 당했다?”
세현의 질문에 공주는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렇습니다. 사람의 운명이란 이렇게 기구한 것이지요.”
“흐음…… 독특한 인간이구만.”
벚꽃공주와 그 누구보다 각별한 자매 사이였지만, 가문들의 세력다툼 끝에 추방당한 비운의 공주.
그것이 앨리스의 정체인 것이었다.
[타이틀 ‘벚꽃국의 비밀을 알게 된 자’를 획득했습니다.]
-보상: 앨리스, 벚꽃공주 호감도 +2 / 지력+3
세현이 생각을 정리하는 도중, 마스터키가 타이틀 획득을 알려 왔다. 호감도에 지력까지 올려 주는 꽤 좋은 타이틀이었다.
‘흠, 썩 나쁘지 않은데.’
예상치 못한 보상에 만족하며 세현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대답 고마워, 공주. 나는 슬슬 돌아가 볼게.”
“잠깐 기다려 주십시오.”
“응?”
벚꽃공주는 방 뒤편에 놓인 수납장에서 손바닥 크기의 목갑을 꺼내, 흰 보자기로 그것을 감싸 세현에게 내밀었다.
“부탁이니 나나기 누이께 이것을 전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게 뭔데?”
“왕가의 보물입니다. 누이께서 하시는 일에 분명히 도움이 될 겁니다.”
‘오호라, 아직 끝이 아닌가 본데?’
세현은 아직 빨아먹을 게 남았다는 사실에 흡족한 미소가 절로 나왔다.
“그럼, 잘 전해 줄게.”
세현은 세이메이, 설희와 합류해 성을 빠져나왔다.
성의 큰 벚꽃나무 아래를 지나던 와중, 설희가 세현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세현 씨, 얘기는 잘되셨어요?”
“예, 생각보다 괜찮았어요.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 제가 다음에 밥 한 번 살 게요.”
“어, 꼭 그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바람도 쐬고 성 구경도 하고 저야 좋았죠.”
“아닙니다, 설희 공! 응당 사 달라고 하셔야죠. 상대의 성의를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닙니다!”
“어, 그런가요?”
두 사람이 주거니 받거니 떠드는 사이, 바람에 날아든 벚꽃 잎이 세 사람의 주변을 스치고 지나갔다.
세현이 크게 숨을 들이쉬자 향긋한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후아~ 여기서 잠깐 벚꽃이나 구경하다 갈까?”
“좋습니다, 주군! 맛있는 음식에 술 한잔하며 벚꽃을 보면 술맛이 좋겠군요.”
“저도 괜찮긴 한데, 세현 씨 바쁜 거 아니셨어요?”
“뭐 이 정도야 괜찮아요.”
세 사람은 근처의 상점가에 들려 먹을 음식과 술, 돗자리를 사 왔다.
세현을 알아본 병사들의 도움으로 꽤 좋은 목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사 온 음식들이 하나같이 맛있어서 술이 술술 들어갔다. 세 사람 모두 얼큰히 취해서 흩날리는 벚꽃을 만끽했다.
“내 인생에 벚꽃 놀이라는 것도 해 보는구만.”
세현이 돗자리에 드러누워 혼잣말을 중얼대자, 설희가 싱긋 웃으며 대꾸했다.
“세현 씨도 처음 해 보세요? 저도 이런 건 처음인데.”
“에엥? 설희 씨도요?”
“네, 예전에 금메달 딴 이후로 어딜 다니기가 좀 힘들던 시기가 있어서요.”
“뭐 연예인의 고충, 그런 거네요?”
“그, 그 정도까진 아니고요!”
세현이 띄워 주자 설희는 부끄러운 듯 손을 절레절레 흔들었다.
한때 연예인급 인기를 구사했던 설희였다. 세현이 가난에 허덕이는 탓에 이런 일상의 즐거움을 몰랐다면, 그녀는 유명세 때문에 밖에서 이런 즐거움을 느끼기 어려웠던 것이다.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삶을 살아왔지만 의외의 곳에서 접점을 찾았다.
“으아아아! 두 분이서만 얘기하지 마십쇼!”
얼큰히 취한 세이메이가 칭얼대며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아무래도 자신은 바깥세상을 모르다 보니 낄 수가 없어 심통이 난 모양이었다.
그러자 설희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세이메이의 등을 쓰다듬으며 잘 토닥여 줬다.
그렇게 서너 시간, 정신없이 먹고 마시자 세이메이가 완전히 술에 곯아떨어졌다.
“하암~ 오늘은 집에서 좀 쉬고, 22층은 내일 돌아가죠.”
세현은 세이메이를 등에 들쳐 메고 설희와 함께 사쿠라신을 걸었다.
달빛이 어스름하게 내리쬐는, 발소리만 들리는 조용한 골목길. 얼큰한 술기운에 이 길을 걷자니 괜히 감수성이 풍부해지는 것 같았다.
세현은 그 순간 평소 궁금했던 질문을 설희에게 툭 던졌다.
“설희 씨는 후회 안 하세요?”
“네, 어떤 후회요?”
“솔직히, 팔콘 같은 길드 가셨으면 돈 더 많이 벌었잖아요. 왠지 나 때문에 좀 꼬인 것 같아서.”
“에이, 그런 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팔콘 길드에 안 들어간 건 다른 이유가 있었어요.”
“그 이유가 뭔지 물어봐도 되요?”
“헤헤, 집안일이랑 관계가 있어서요.”
설희는 대답하기 곤란하다는 듯 말을 얼버무리며 다말을 돌렸다.
“……저, 지금 이 길드 너무 마음에 들어요.”
“음?”
“사카린 언니도 너무 좋은 사람이고, 세현 씨랑 같이 길드 활동할 수 있는 것도 너무 좋고요.”
“저랑 하는 게 어떤 점에서 좋은 건데요?”
“뭐랄까, 아, 이 사람은 뭘 하든 믿고 맡겨도 되겠다. 그런 느낌이 있었어요.”
“엥, 왜 그런 느낌이 드는데요?”
“헤헤, 말로는 설명이 잘 안되네요.”
순간 설희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그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았는지 고개를 작게 숙이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오래지 않아 집에 도착할 수 있었고, 세현은 세이메이를 방에 눕힌 후 설희에게 뒤를 부탁했다.
“잘 자요, 설희 씨.”
“헷, 세현 씨도요.”
방문을 닫고 나가려던 찰나, 설희가 세현을 향해 싱긋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순간 가슴이 울렁하는 기분과 함께 머리가 어지러웠다. 세현은 비틀비틀 방으로 돌아와 애써 이불을 깔고 자리에 누웠다.
“뭐야, 웬일로 잠이 다 안 오냐?”
물론 세현만 이런 기분을 느낀 건 아니었다.
설희는 세이메이에게 이불을 덮어 준 후 옆에 누웠다.
하지만, 누군가의 얼굴이 눈앞에서 아른거려 쉽게 잠이 오질 않았다.
‘빨리 자야지, 내일부터 또 바빠질 텐데.’
설희는 애써 아른거리는 얼굴을 지워 내며 겨우 잠에 들 수 있었다.
이날의 감정이 앞으로 얼마나 더 커지리라는 것도 모른 채 말이다.
† † †
다음 날, 세현 일행은 곧장 22층의 요새로 이동했다.
그리고 벚꽃공주에게 받은 목갑을 앨리스에게 건넸다.
설희와 세이메이에겐 잠시 밖에서 기다려 달라 부탁한 후, 세현이 앨리스를 독대했다.
“벚꽃공주가 주신 물건인데, 당신한테 도움이 될 거라고 말했어.”
“고, 공주께서 이 귀한 것을 제게……”
목갑을 받아 든 앨리스는 감격스러운 듯 목소리를 가늘게 떨더니 목갑을 품속에 꼬옥 끌어안았다.
눈에 몽글몽글 맺힌 투명한 액체가 그녀의 감정이 어떤 상태인지를 보여 줬다.
“감사합니다. 허세현 입주자여.”
그녀는 허리를 직각으로 숙여 인사를 건넸다.
“덕분에 이곳의 해방을 앞당길 수 있게 됐습니다.”
“아냐아냐, 뭘 이 정도 가지고.”
세현은 멋쩍은 마음에 콧잔등을 긁었다.
‘뭔가 애잔함이 있나 보네.’
앨리스가 보이는 감정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 자신의 배다른 동생에 대한 고마움 등이 뒤섞인 복잡한 것으로 느껴졌다.
입주자야 불과 몇 분이면 승강의 방을 통해 몇십 층 단위를 이동 할 수 있지만, 거주자들에게 8층과 22층은 하늘과 땅 만큼이나 멀게 느껴질 것이다.
게다가 앨리스가 벚꽃국에서 쫓겨난 비운의 공주이기에 저런 반응은 당연한 것이리라.
그녀는 눈에서 맺힌 액체를 한참을 쏟아 내더니, 붉게 충혈된 눈을 손등으로 닦아 냈다.
세현은 이를 말없이 기다렸고, 앨리스는 한참이 지나서야 감정을 갈무리 하고 고개를 들었다.
당당한 반군 지도자로 연출된 그녀이기에 방금 보여 준 약한 모습은 세현에게 작은 울림을 줬다.
“입주자님, 보답으로 이 물건을 드리겠습니다.”
앨리스는 목갑을 바닥에 내려놓고, 품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응? 이건……”
앨리스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작은 유리병에 담긴 커다란 씨앗 한 알이었다.
보라색 빛을 은은하게 발하는 것이 단순한 씨앗이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제가 벚꽃국을 떠나올 때 가져왔던 가문의 보물입니다.”
[#. 기타 아이템 / 야수의 씨앗]
- 특별한 주술이 새겨진 마법의 씨앗. 이걸 먹은 야수는 사용자에게 충성하는 ‘펫’이 된다. 맛이 아주 좋다고 한다.
▶ 추가 효과
- 길들여진 야수: 야수 타입 몬스터에게 씨앗을 먹일 경우 사용자에게 복종하는 펫으로 길들일 수 있습니다. 길들여진 야수는 레벨이 1로 초기화됩니다.
“오오.”
세현은 솔직하게 기쁜 얼굴을 해 보였다.
아파트에는 용병 시스템과 유사한 것으로 펫 시스템이 존재한다. 이를 통해 입주자는 누구나 1인의 용병과 1인의 펫을 거느릴 수 있다.
하지만 펫이라 해 봐야 종류가 한정적이기에 강아지나 토끼를 길들여 애완용으로 쓰는 것이 대부분이다.
펫들도 레벨링을 시킬 수는 있지만, 애초에 이런 동물들에게 대단한 전투력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입주자 입장에서의 펫은 ‘귀여움’이라는 요소를 제하면 투자 대비 효율이 너무 안 좋은 시스템이었다.
‘하지만, 이 씨앗이 있으면 얘기가 달라지지.’
이 씨앗을 먹이면 자신이 원하는 야수 타입 몬스터라면 뭐든 ‘펫’으로 만들 수 있다. 그렇다면 조건만 맞는다면 10층의 보스인 ‘오로치’ 같은 놈들을 길들일 수도 있다는 얘기였다.
‘응? 그러고 보니…….’
세현의 머릿속에 생각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앨리스, 이 씨앗을 자바워키에게 먹이면 안 되는 거야?”
혹시 ‘자바워키’를 이 씨앗으로 공략할 수 있을까 싶어 꺼낸 말이었다. 그게 가능하다면 메인 퀘스트 시간을 대폭 단축할 수 있으며, 강력한 마룡 자바워키를 펫으로 만드는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하지만 앨리스는 초연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합니다. 자바워키가 씨앗을 거들떠보지도 않을 뿐더러 놈의 몸에는 강력한 보호 마법들이 걸려 있으니까요.”
“역시 그런가.”
세현은 아쉬운 듯 침음을 흘리며 씨앗을 인벤토리에 넣었다.
‘쩝. 언젠간 써 먹을 데가 있겠지.’
이 씨앗을 사용해 펫을 만들려면 상대에게 씨앗을 먹일 수 있을 만큼 여유롭게 상대해야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다가 펫 자체의 성능이 쓸 만한 놈을 떠올려 보면, 시즌1 메인 보스인 오로치가 베스트였다.
하지만 이미 시즌1은 세현의 활약으로 완전히 종료됐고 이로 인해 오로치는 더 이상 아파트에서 만날 수 없는 존재가 됐다.
때문에 적어도 한동안은 이 씨앗을 쓸 만한 상대를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당장 전력의 상승을 바라는 세현의 입장에선 아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 이만 가 볼게, 앨리스.”
세현은 앨리스에게 작별 인사를 건넨 후, 반군 요새를 빠져나갔다.
요새 근처에 놓인 나무 벤치에 세이메이와 설희가 즐겁게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저 왔어요~ 뭐가 그리 재미있어요?”
“아 주군! 설희 공이 바깥세상에 대해 제게 알려 주고 있었습니다.”
“아아.”
세현은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자 설희가 눈을 마주치며 질문을 던졌다.
“이제 뭐 하실 거예요?”
“일단 레벨링부터 해야죠.”
“음, 메인 퀘스트는 진행 안 하고요?”
“그것도 좋지만, 저희 레벨이 조금 간당간당해서요.”
“그, 그런가요?”
“당연하죠. 다른 입주자들이 설희 씨랑 제 레벨 들으면 미쳤다고 할 걸요?”
현재 세현의 레벨은 45, 설희의 레벨은 39다.
시즌3 초반부 몬스터의 평균 레벨이 60~80 사이를 오가는 것을 고려했을 때, 사냥은커녕 도망 다니면서 목숨을 부지하는 것도 어려운 레벨이다.
두 사람의 클래스가 워낙 사기적인 데다가 세이메이라는 걸출한 용병이 있기에 그나마 사냥이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 난이도가 높아질 것을 계산하면 미리 레벨링을 해 놓는 게 좋았다.
“좋은 사냥터가 있으니까 걱정 마세요.”
“넵! 세현 씨만 믿을 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