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
66화.
“푸후훗!”
동글동글한 토끼 상의 얼굴에 흰 피부, 잠자리 안경을 낀 20대 초반의 여성 신지수.
그녀는 기사를 보는 순간, 모니터 앞에서 마시던 콜라를 내뿜었다.
“브, 브레이브킹이 서큐버스 군단 멤버라고?”
그동안 자신에게 일을 맡겨 오던 클라이언트 ‘브레이브킹’이 처음으로 정체를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그의 이름은 허세현이었다.
지영은 부랴부랴 모니터에 묻은 콜라를 닦고 안경을 고쳐 쓴 후, 허세현에 관련된 인터넷 기사를 모조리 찾아 읽기 시작했다.
“오오~ 이름이 허세현이었구나. 명문대 체육학과 졸업에, 뭐 생긴 건 기대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귀엽게 생겼구만.”
일약 스타가 된 허세현의 기사를 보고 있자니, 지영은 자신도 그에 한몫 보탠 것 같은 기분에 괜히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짜식이 말이야~ 누님 덕분에 성공했으면 막 미소년 한정판 피규어 같은 것도 선물로 떡! 하고 갖다 바쳐야 되는 거 아닌가!”
혼잣말로 외치고 있던 그때, 띵동- 하고 초인종이 울렸다.
“어, 피규어 왔나?”
지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현관문을 열어젖혔다.
반년 가까이 기다린, 해외 어딘가를 떠돌고 있던 한정판 피규어가 도착한 것이 아닐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기대는 이번에도 빗나갔다.
“이이잉?”
“안녕하세요. 그쪽이 신지영 씨 맞죠?”
눈앞에는 조금 전 모니터로 봤던 더벅머리 청년, 허세현이 싱긋 웃으며 지영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설상가상으로 그의 뒤에는 서큐버스 군단 길드장 사카린까지 서 있었다.
“브브브, 브레이브키잉?! 사카린!!”
지영은 놀라 뒤로 나자빠지며 목소리를 덜덜 떨었다.
“얘기 좀 하고 싶은데, 잠깐 들어가도 됩니까?”
“무무무, 물론이죠! 마실 거 가져올게요!”
지영이 작은 접이식 상을 거실에 펼쳤다.
사카린과 세현이 그 앞에 앉았고 그 위에 콜라와 프링X스 감자 칩이 올려졌다.
“죄송해요 지금 집에 있는 게 이것뿐이라….”
“아아, 신경 쓰지 마요. 감자 칩 좋아하니까.”
“으익~ 나는 프링X스 싫은데? 저번에 민들레 씨앗 레이드 기억 안 나냐? 이거 잡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이제 보기도 싫어.”
“사카린 씨?”
“넌 괜찮냐? 민들레 씨앗 레이드 이후로 프링X스는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올라오던데~.”
“하아…….”
사카린이 칭얼대자 세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죄송해요. 이분이 항상 좀 직설적으로 말하더라고요.”
“아뇨아뇨~ 그럴 수도 있죠.”
세현은 잠시 뺨을 긁적이다 품속에서 흰 봉투를 천천히 꺼내 앞으로 내밀었다.
“그동안 영상 잘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건 선물이에요.”
“이, 이게 뭔데요?”
“한 번 열어 보세요.”
“히익!”
지영은 얼떨떨한 얼굴로 봉투를 받아 열었다. 그 안에는 5만 원권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가, 감사합니다!”
지영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이며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저희 쪽에서 지영 씨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은데요.”
“제안요?”
세현과 지영, 두 사람이 말을 나누던 때-.
사카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지영의 어깨에 왼손을 얹고 빙긋 웃었다.
“너! 내 동료가 돼라!”
어느 유명 만화를 베낀 듯한 진부한 대사였다.
“동료…요?”
“서큐버스 군단 전속 영상 편집자가 되라는 얘기야! 연봉 잘 쳐 줄 테니까 같이 일하자고.”
사카린이 제멋대로 떠드는 사이, 세현은 서류 봉투 하나를 더 꺼내 테이블 위로 내밀었다.
계약서였다.
지영은 상황이 어찌 된지도 모른 채 얼떨떨한 마음으로 그걸 읽어 내렸다.
계약 내용은 간단했다.
신지영이 ‘서큐버스 군단’ 직원이 되어 영상 편집 업무, 유튜브 채널 관리 등의 일을 맡아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계약서를 읽어 내려가던 중, ‘연봉’이 적혀 있는 부분에서 지영은 숨이 턱 하고 막혔다.
“여, 연봉 2억!”
연봉 숫자가 자신이 회사에 다니던 시절 연봉에 0 하나가 더 찍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사카린이 재빨리 자신의 말을 이어나갔다.
“어때? 조건 괜찮지? 그리고 우리 길드 건물 근처에 방 하나 내줄 테니까 그리로 이사와.”
“아뇨, 갑작스럽게 말하시니까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는데요. 이거 뭐 다단계 그런 거예요?”
“아니! 그게 아니라!! 그게……. 웁… 웁!”
세현은 흥분한 사카린의 입을 틀어막고 차분히 입을 열었다.
“이 계약은 지영 씨 실력을 믿어서 하는 것도 있지만, 지영 씨의 안전을 위해서 하려는 겁니다.”
“안전이요?”
“신지영 씨, 예전에 팔콘 길드 인사팀장이 찾아왔다고 하셨죠?”
“네네, 그랬죠.”
“지영 씨가 제 영상 편집일을 계속하면 그런 일, 아니면 더한 일들이 생길 거예요. 상위권 길드 간에 경쟁은 점점 더 치열해질 테니까.”
지영은 긴장감에 침을 꿀꺽 삼켰다.
‘나 생각보다 엄청난 일에 휘말린 건가?!’
세현의 말인 즉은, 앞으로 길드 간의 경쟁이 심해지면 그 사이에서 신지영이 피해를 볼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얘기였다. 그러니까 차라리 자신들의 조직에 들어와 보호를 받으라는 얘기였다.
지영은 잠시 고민했다.
그러다 아동용 교육 영상을 만들던 시절의 자신을 떠올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 할게요!”
† † †
회색 구름이 세상을 집어삼킬 것 같은 기세로 빼곡히 흩어져 있는 공간.
구름 위에 달마시안 관리인, 커플러가 다리를 꼬고 앉아 혼자 체스를 두고 있었다.
“체에에크메이트다, 이 개자식아!”
“히이잉! 캐슬링, 캐슬링이라구용!”
그는 흰색 말과 검은 말을 번갈아 움직였고, 상대의 말을 잡을 때마다 환호하고 또 절망했다.
그때마다 목소리 톤이 다른 사람 마냥 달라져, 마치 두 사람이 체스를 두는 것 같이 보였다.
기물들이 하나하나 줄어들고 게임이 끝나 갈 즈음. 허공에 푸른빛이 뿜어지며 구름을 일순간에 흩어 버렸다.
그 여파에 체스 판에 올려진 기물들이 모두 쓰려졌고, 커플러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쩝 다시며 고개를 들어 말했다.
“어쩐 일이신가용, 헬시안 님.”
정면에 서 있는 것은 해골 팔에 흰 눈 같은 피부를 지닌 미인, 관리장 헬시안이었다.
그녀의 손에는 뼈와 살점을 엮어 만든 기괴한 도끼가 들려 있었다.
“네가 더 잘 알 텐데!”
헬시안은 조금의 고민도 없이 도끼를 휘둘렀다.
콰득-!
“히이이잉!”
커플러가 간발의 차이로 그를 피해 냈고, 도끼는 체스 판을 순두부처럼 썩둑 잘라 냈다.
갈라진 체스 판은 순식간에 썩더니 끈적이는 인간의 형태로 변형됐다.
이 도끼의 이름은 ‘헬’. 플래닛 트리의 곁가지로 자루를 만들고 독룡의 어금니로 도끼날을 만든 헬시안의 보구다.
날에 베인 적을 순식간에 썩게 만드는 권능을 가진 물건으로, 오로지 관리장 급만이 가질 수 있는 보구였다.
이걸 구태여 헬시안이 꺼냈다는 것은 지금 그녀가 커플러를 진심으로 상대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간발의 차로 살아난 커플러는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워워~ 헬시안 님, 왜 공격하는지 이유 정도는 말해 주셔야지용!”
“이유? 네가 이유를 모른다?”
이에 헬시안은 어이가 없다는 듯 혀를 차며 대꾸했다.
“네놈이 관리자 총회에서 나를 망신 준 것 까지는 참았다. 하지만, 시드메이커들에게 세치 혀를 놀려 아파트의 인과율을 비튼 것만큼은 용납할 수 없어. 규정에 따라 네놈을 처분한다.”
“아항~★ 그것 때문이었구낭. 하지만 재미있었잖아요! 프링X스 보스! 두 의지께서도 분명 재미있어 하셨을 걸용? 두 의지께서도 아무 말도 없으셨잖아용!”
커플러가 자신의 머리를 손등으로 꽁-! 하는 소리가 나게 두드리며 혀를 날름댔다.
“내가 두 분을 대신한다!”
이에 헬시안은 분노가 더욱 커졌는지, 거칠게 소리치며 앞으로 뛰어들었다.
“히익! 히잉-! 아힛~♥”
도끼를 휘두를 때마다 커플러는 입으로 괴상한 소리를 뱉으며 아슬아슬한 간격으로 피해 냈다.
이에 헬시안은 점점 더 빠르게 가속했고, 어느새 두 관리인의 전투는 이 공간에 소리와 잔상만을 남겼다.
“커플러 회피!”
“커플러 이스케이프!”
“커플러 러브러브 대탈출!”
“하아아아아!”
쫓고 쫓기는 싸움, 그 끝에서 헬시안의 도끼가 커플러의 미간을 정확히 내리찍었다.
콰드드드드득-!
“히이이이잉!”
푸른 피가 얼굴에서 줄줄 흘러내렸지만, 커플러는 괴상한 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아파요오오옹~! 그러니까 이 도끼, 회수하도록 할게용!”
도리어 양팔로 도끼 자루를 붙잡아 빼앗으려 하자 헬시안은 놀라 발로 커플러를 걷어찼다.
놈은 뒤로 날아가는 도중 낙법을 하며 제자리에 다시 서더니 손가락을 바늘처럼 변형해 피가 줄줄 흐르는 이마를 꿰매 버렸다.
“역시 관리장급다운 힘이에용! 겨우 한 방 맞았는데 짜릿짜릿하네용.”
“헬에 정면으로 맞고도 괜찮다고? 이 무슨……”
헬시안이 흠칫 놀라며 침음을 흘렸다.
양손 도끼 ‘헬’은 두 의지가 관리장급에게만 수여하는 전용 보구. 웬만한 관리인은 이 헬에 맞는 순간, 뼈도 못 추리고 죽는 게 보통이기 때문이었다.
“저번 관리자 총회에서 두 의지께 조금 특~별한 힘을 받았거든용.”
말을 뱉는 동안, 커플러의 몸이 검은 액체로 변하더니 거대한 형체의 무언가로 형체를 바꿨다.
그 끔찍한 것을 목격한 헬시안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네놈은 대체… 관리자 따위가 어떻게 이런 힘을!”
“두 의지께 드렸던 ‘한마디’가 마음에 들었는지 이런 힘을 주시더라구용.”
커플러는 순식간에 헬시안을 덮쳤다.
그 끔찍한 육체가 퍼붓는 파상 공세에 헬시안은 이를 악물고 저항했지만, 채 200초를 버티지 못했다.
헬시안은 볼품없이 드러누웠고, 커플러는 그녀를 제압하고 위로 올라타 사악한 미소를 흘렸다.
“제가 아파트의 인과율을 어겼다고 했지요, 헬시안 님?”
커플러는 자신의 기다란 손가락을 헬시안의 가슴 위쪽으로 쑥 찔러 넣었다.
“커허허헉!”
엄청난 격통과 함께, 헬시안의 머릿속에 짧은 영상이 재생됐다.
튜토리얼 구간의 <선택의 신전>에서 허세현과 헬시안이 마주 앉아 있었다.
영상 속 헬시안은 허세현에게 시약을 건네 마스터키의 색을 붉은색으로 물들였다. 이는 분명 아파트의 인과율을 어긴 행위였다.
이를 적발당할 경우, 아무리 관리장급이라 해도 중징계를 면할 수는 없었다.
그 직후 영상이 종료되었고 헬시안의 눈앞엔 다시 커플러의 역겨운 얼굴이 비춰 보였다.
“이런 짓을 해 놓고, 인과율을 얘기하실 처지는 아니지 않나요?”
“알고 있던 거냐.”
“그건 중요한 게 아니죵. 중요한 건 저도! 헬시안 님도! 인과율을 어긴 관리인이라는 거예용. 거기다 둘 다 허세현 군이랑 나름 연관이 있네요! 인연도 이런 인연이 또 없죠!”
“…….”
“그.래.서 말인데, 헬시안 님! 소인 커플러와 계약을 맺으실 생각은 없으신가용?”
“계약?”
“네, 계약이용! 저와 함께, 눈에 띄지 않게 허세현이 아파트 정상에 오를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거예용! 그 과정을 극~적으로 연출하면 두 의지께서도 분명 좋아하실 겁니당.”
“미쳤군, 인과율에 계속 간섭하자는 거냐? 그 정도라면 다른 관리인들이 가만히 있지…….”
“물론 견제가 있겠죵! 하지만 조~큼만 생각해 보세용, 헬시안 님. 요즘 아파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계시죵? 관리인들은 서로 실적 올리기에 바쁘고, 거주자들은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죵.”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최근 관리인들은 두 의지의 눈에 들어 자신의 힘과 영향력을 확장하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아파트의 인과율을 어기는 경우도 빈번히 있었지만, 워낙 음지에서 벌어지기에 모두가 이를 알 수는 없었다.
헬시안이 인과율의 법칙을 어기고 허세현에게 마스터키의 색상을 바꿔 준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거절하면 어떻게 할 거냐?”
“예에, 뭐 그러면 어쩔 수 없이 헬시안님을 이 자리에서 먹어 치워야지용.”
헬시안은 여기서 이 제안을 거절하면,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직감했다. 관리장인 그녀조차 두려울 만큼 눈앞의 존재가 가진 힘은 흉흉했다.
“제안을 받아들이겠다.”
“오홍홍홍! 잘 생각하셨어용! 그럼 바로 계약을 진행하자구용!!”
커플러의 가늘고 기다란 손가락 끝에서 선혈처럼 새빨간 빛이 뿜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