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
56화.
Level 21. 사카린의 제안
[어제 오후 3시, 민들레 씨앗이 착지한 24개 지점의 괴수들이 오늘 새벽 2시경에 모두 소탕됐다는 소식입니다.]
[각국 정부는 피해 상황을 추산하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집계된 사망자는 2만여 명으로 추산되고 있으며…….]
[가장 먼저 괴수를 퇴치한 것은 남북한 입주자들의 연합이었으며, 이들은 전투가 시작된 지 1시간 30여 분만에 괴수를 퇴치하는 대기록을 세웠습니다.]
[괴수 퇴치에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인기 유튜버이자 입주자인 ‘사카린’ 씨가 이끄는 ‘서큐버스 군단’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대통령은 무공훈장 수여를 검토하고 있으며…….]
다음 날, 전 세계 언론은 민들레 씨앗에 대한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세현은 아파트 8층에 위치한 집에 드러누워 스마트폰을 이용해 하루 종일 언론을 관찰했다.
‘역시, 내 얘기랑 팔콘 놈이랑 노동당의 마찰은 쏙 빠져 있군.’
실제로 보스를 쓰러뜨린 것은 브레이브킹, 즉 허세현이다. 하지만 모든 여론은 사카린을 영웅으로 띄우고 있었다. 여러 정치적 이유가 뒤섞여 누군가 여론을 만들고 있는 것이리라.
‘뭐 어차피 꼬리가 더 길어지면 잡히겠지만, 아쉽긴 하구만.’
세현은 어제의 전투 영상을 캠코더로 촬영했지만, 세상에 공개하는 것은 미루기로 했다.
정체도 밝혀지지 않은 수상쩍은 유튜버가 최고 랭크의 입주자들을 제치고 거대 괴수에게 결정타를 먹였다?
이런 소문이 떠돌았다간 그 후폭풍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우 답답해. 얼른 자리를 잡아야 좀 편하게 지내지.”
잠시 후, 세현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붉은 왕관과 반 가면을 장착했다. 그러자 세이메이가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주군. 저도 준비하면 되겠습니까?”
“아냐아냐, 혼자 할일이 있으니까 좀 쉬고 있어.”
세이메이는 실망한 듯 한숨을 푹 내쉬며 자리에 다소곳이 앉았다. 세현은 미안한 마음에 코를 긁적이며 몰래 집을 빠져 나왔고, 40여 분쯤을 내달렸다.
이전이라면 마차를 타고 이동해야겠지만, 레벨이 오른 덕에 발로 내달리는 것도 그닥 큰 차이가 없었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앞에는 음산한 기운을 내뿜는 늪지대 숲이 펼쳐져 있었다. 안개가 자욱이 껴 잇는 것이 당장에라도 귀신이 튀어나올 것 같은 분위기의 숲이다.
세현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숲의 안쪽으로 빠르게 뛰어 들어갔다.
잠시 후 안쪽에서 벼락을 맞은 듯 새까맣게 타 버린 나무가 보였고, 세현은 거기서 발을 멈췄다.
“왔습니다.”
세현이 혼자 중얼대자, 나무 뒤에서 누군가 터벅터벅 걸어 나왔다.
“3분 늦었잖아.”
“오다가 차가 막혀서~.”
“뛰어오는 거 다 봤거든?”
비단결 같은 보랏빛 머리를 가진 고양이상의 미녀 사카린이었다.
[백설희: 저기, 세현 씨. 길드장님이 잠깐 얼굴 좀 보자고 하시는데 괜찮아요.]
그녀는 설희를 통해 세현에게 오늘 다시 만날 것을 요청했다. 조심스럽긴 하지만 서큐버스 군단과 좋은 관계를 만들고 싶었기에 이를 수락한 것이다.
“여기 이거 받으세요.”
“으잉? 그건 뭔데?”
“선물요.”
세현은 망설임 없이 그녀에게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온 사방이 화려한 보석으로 장식된, 다이아몬드 패키지였다.
“이걸 왜 나한테 주는데?”
이 상자는 어제 세현이 보스를 쓰러뜨려 얻은 아이템이다. 거대 괴수를 쓰러뜨리고 얻은 것이니만큼, 희귀한 물건이다.
“원래 약속은 그쪽이 팔콘 대신 보스 잡게 해 준다는 거였잖슴까. 그걸 가로챘으니까 드리는 거예요.”
“흠……”
그 말대로 어제 세현이 할 일은 그저 조선노동당과 팔콘 사이에 분쟁을 만드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예상과 다르게 흘러갔고 그 때문에 허세현이 직접 개입하게 됐다.
애초에 했던 약속, ‘서큐버스 군단’이 거대 괴수를 잡게 만들겠다는 약속은 지키지 못한 것이다. 세현이 이걸 넘기는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사카린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절레절레 저으며 대꾸했다.
“남이 해 놓은 밥상에 숟가락만 얹는 건 취미가 아니라서.”
“꼭 받아 주셨으면 했는데……”
물론, 이 말은 뻥이다.
그것도 아주 개~~뻥이다.
겉으론 아쉬운 척했지만 세현은 1등 복권을 되찾은 듯 기쁜 기분이 들었다.
엉덩이라도 흔들고 싶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최대한 냉정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럼 뭐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럼 볼일은 여기서 끝이니까 가 봐도 되죠?”
“잠깐.”
서둘러 돌아가려던 와중 사카린이 어깨를 잡아 멈췄다.
“대신 부탁 하나만 들어줬으면 좋겠는데.”
“음, 말씀하세요.”
“우리 길드에 가입해라.”
“그건 좀 곤란한데요. 아직은 길드 활동을 할 생각이 없어서.”
길드 활동을 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자신의 정보를 아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아직 혼자 살아남을 정도의 힘이 없다 생각하기에 세현은 길드에 가입하는 것은 시기상조라 생각했다.
“그 말은, 나중에는 생각이 바뀔 수도 있다 그거지?”
“뭐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죠.”
“그럼 부탁을 바꾸지. 시즌2 <아라비안나이트>가 종료되는 시점까지 동맹을 맺자.”
“오, 동맹?”
전혀 예상치 못한 제안에 세현은 놀라 대꾸했다. 그러자 사카린은 정갈한 목소리로 답변했다.
“시즌2 최초 클리어를 노리고 있거든. 하지만, 아직 전력도 부족하고 정말 쓸 만한 길드원은 구하기 힘들어.”
“흐으으음……”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세현의 목표는 팔콘의 시즌2 최초 클리어에 고춧가루를 뿌리는 것. 어차피 그걸 노린다면, 차라리 서큐버스 군단을 밀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저를 귀찮게 안 하고 자율성을 보장한다면 생각은 해 보죠.”
“딱 좋아, 그게 딱 우리 길드의 방향이거든.”
사카린이 오른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세현은 그를 맞잡고 가볍게 흔들었다.
브레이브킹과 서큐버스 군단, 두 세력의 계약이 성립된 것이었다.
“그럼 다음에 설희를 통해서 연락하지, 또 보자고.”
사카린은 흡족한 듯 미소 지으며 숲을 빠져나갔다.
그녀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후, 세현은 혀를 날름대며 군침을 삼켰다.
“좋아, 그럼 이거나 한 번 까 볼까.”
당장 다이아몬드 패키지를 열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세현은 망설임 없이 상자의 잠금장치를 해제한 후, 열어젖혔다. 그러자 상자 안에서 무지갯빛 섬광이 뿜어지며 메시지가 출력됐다.
[다이아몬드 패키지의 아이템 1종이 허세현 님의 인벤토리로 들어왔습니다.]
메시지가 들려온 직후, 세현은 그 즉시 인벤토리를 확인했다.
“에픽급!!”
[#. 소모성 아이템 / 이스칸다르의 깃발 ]
- 정복왕 이스칸다르의 깃발. 이것을 이용해 단 한 번, 그의 군대를 소환할 수 있다.
등급: 에픽(B)
레벨 제한: 없음
▶추가 옵션
- 집단군(1회 제한): 세계를 호령한 이스칸다르의 군대를 소환합니다. 군대가 임무를 끝마치면 깃발은 파괴됩니다.
상자에서 나온 것은 유니크급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에픽급 아이템이었다.
이스칸다르의 깃발.
에픽급 아이템이지만 1회성 소모 아이템이었다. 전생에 7년 동안 아파트에서 활동했던 세현조차 듣도 보도 못 한 아이템.
어떻게 써야 할지 아직은 딱히 감이 오지 않았다.
“뭐…… 어쨌든 에픽급이니까 쓸 만하겠지.”
세현은 입맛을 쩝 다시며 인벤토리를 닫아야 했다.
† † †
다음 날, 세현은 시즌2 메인 퀘스트를 재 하기 위해 <석양의 추적자>의 은신처를 바로 찾았다.
금빛 석양이 내리쬐는, 거울 같은 투명한 바닥이 끝도 없이 펼쳐진 아공간.
하사신은 이곳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은 채로 세현을 맞이했다.
“고생했네, 이교도 신전을 파괴한 일은 들었어,”
그녀는 그간 퀘스트의 성과를 칭찬했다. 세현은 콧잔등을 긁으며 다음 퀘스트를 위한 대화를 유도했다.
“샤이탄을 빨리 만나고 싶은데. 대장 나리, 더 할 일은 없어?”
“안 그래도 중요한 임무가 있지.”
“음…….”
하사신은 기다렸다는 듯, 고양이 반가면 아래로 드러난 입꼬리를 올렸다.
“<혼혈의 흑기사 안타르>에 대해 들어 본 적 있나?”
“이야기 정도는, 사자를 맨손으로 때려잡은 소년 영웅이라지?”
안타르, 시즌2를 진행하는 내내 거주자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쉽게 들을 수 있는 이름이다.
어린 시절 맨손으로 사자를 때려잡았다는 무용담이 그를 유명하게 만들어 준 모양이다.
어떤 루트를 타면 시즌2에도 만날 수 있다는 것 같지만, 전생의 메인 퀘스트에서는 만나 보지 못했다.
“그는, 우리 단원이라네.”
“오, 지금은 어디 있는데?”
이는 처음 알게 된 정보였다.
“샤이탄의 오른팔 격인 ‘뱀의 왕 자하크’를 기습하는 임무에 투입됐지. 하지만 거기서 돌아오지 못했다네.”
“소년 영웅이 임무에 실패해서 죽었다?”
하사신은 씁쓸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곳에 잡혀 고문 받고 있다는 첩보를 얻었네.”
“음, 그러니까 내가 그 사람을 구출해 달라, 그건가?”
“쉽지 않을 거야. 뱀의 왕 자하크는 다른 이교도들과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강한 자라네. 그 ‘안타르’도 당할 정도라면 두 말할 것도 없지. 하지만, 결심이 선다면 말해 주게. 그러면 우리 단원들 10명을 붙여 주도록 하지.”
그 말이 끝나는 순간, 세현의 눈앞에 퀘스트 알림 박스가 출력됐다.
[#. 메인 퀘스트 / 흑기사 안타르 ]
- 석양의 추적자 단원 10인과 함께 뱀의 왕 자하크의 대뢰옥에 갇혀 있는 혼혈기사 안타르를 구출해라.
▶ 퀘스트 보상
1. 타이틀: ‘대뢰옥의 파해자’.
민첩 +3
2. 퀘스트 클리어 수준에 따라 추가 보상 발생.
[수락하기]
퀘스트 클리어 수준에 따라 추가 보상 발생. 세현은 여기서 말하는 ‘퀘스트 클리어 수준’이 뭔지 알고 있었다.
이번 퀘스트에 함께 하는 10인의 단원. 이들을 포함해 죄수를 한 명이라도 더 살리면 그에 따른 추가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것 같았다.
‘최대한 많이 살리면 된다?’
세현은 잠시 턱을 쓰다듬다 수락하기 버튼을 터치했다.
“좋아, 그 임무 내가 할게.”
“고맙네, 약속한 대로 최정예 요원 10명을 자네에게 붙여 주지.”
그 말이 끝나자 바닥에서 10개의 그림자가 일어나더니 사람의 형태로 변했다. 시미터에 터번을 두른 그들은 세현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며 인사를 했다.
“이번 임무, 잘 부탁합니다.”
“함께 샤이탄의 야욕을 분쇄시키세!”
대다수가 20~30대 나이쯤 되 보이는 병사들이었다.
앳된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넓은 어깨와 무수히 많은 흉터가 그들의 노련함을 말해 주고 있었다.
세현은 그들과 가볍게 악수를 하며 인사를 나눈 후, 곧장 대뢰옥이 있는 층으로 향했다.
대뢰옥 입구에 도착하자, 간간히 세현을 알아본 입주자들이 웅성거렸다.
“저거 브레이브킹인가 그 사람 아니냐?”
“뭐야, 벌써 시즌2 메인 퀘스트를 여기까지 진행했다고? 속도 너무 빠른데.”
“대형 길드에서 밀어주고 있다잖냐.”
이미 세현의 영상 조회수의 총합은 8천만 뷰를 넘었다. 간간히 알아보는 사람이 없다면, 오히려 이상한 것이리라.
“그쪽 브레이브킹 맞죠!”
그때, 누군가 세현을 불러 세웠다,
여성 입주자 둘이었는데 한 명은 큰 키에 시원시원한 인상, 한쪽은 작은 키에 얼굴을 앞머리로 가린 다소 내성적인 느낌이었다.
키 큰 쪽이 자기 등 뒤에 숨은 작은 쪽을 앞으로 떠밀며 말했다.
“야야, 너 이분 팬이라며. 같이 사진이라도 찍어. 인스타에 올려야지!”
“어…… 어어…….”
강제로 밀려나온 작은 쪽이 덜덜 떠는 목소리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긴장한 모습이 괜히 귀엽게 느껴졌다.
“브, 브, 브레이브킹 님, 저 팬인데. 세, 셀카 한 장만 같이 찍어 주실 수 있으신가요?”
“뭐 그 정도야.”
세현은 흔쾌히 함께 사진을 찍어 줬다. 어차피 가면도 쓰고 있겠다 팬 관리 차원에서 괜찮겠다 싶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사진을 찍은 여성은 개운하게 웃으며 연신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때 옆에서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