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
53화.
거대 프링X스는 계속해서 허공으로 감자 칩을 쏟아 냈고 프링X스 인간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났다.
우스꽝스러운 비주얼과 다르게 프링X스 거인은 수천 명의 입주자를 상대로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팔콘 길드, 출전합니다!”
흰색과 황금빛으로 만들어진, 고결한 느낌의 갑옷을 입은 중전사가 함성과 함께 앞으로 달렸다.
그는 양팔로 거대한 양손검을 휘둘러 녹색 프링X스 거인의 다리를 두드렸다.
콰앙-!
이 일격에 다리에서 금빛 이펙트가 터지며, 거인이 휘청거렸다.
“밀어붙여!”
계속 함성을 내지르며 분위기를 리드하는 S급 클래스 <센츄리온>. 그는 한성 그룹의 후계자이자 팔콘 길드의 최은철이었다.
은철의 공격은 일종의 신호탄이 되었고, 팔콘 길드가 속한 3대대가 전방으로 나서며 괴수를 밀어붙일 기세를 만들었다.
그 시각 반대편-.
“감자 칩따위 그냥 찢어발겨 버려!”
보랏빛 갑옷을 입고 양팔로 사슬낫을 쉴 새 없이 휘두르는 여성.
서큐버스 군단의 길드장이자 S급 클래스 <나이트 스토커>인 사카린이었다.
그녀가 있는 8대대 또한 팔콘에 뒤지지 않게 괴수를 잘 막아 내고 있었다.
일단 남쪽은 두 길드를 중심으로 각각 한 마리의 거대 괴수를 마크하는 그림이 자연스레 형성됐다.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이 말이다.
† † †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DMZ 근방의 거대한 야산.
허세현은 흰색과 금색이 뒤섞인 갑옷 위에 독수리 문양이 크게 새겨진, 팔콘 길드를 연상시키는 갑옷을 입고 있었다.
그러곤 풀숲에 적당히 몸을 감춘 채 망원경으로 레이드의 상황을 관찰했다.
그 옆에 대기 중인 소환수 4명도 특별한 장비를 장착했는데, 둘은 세현과 마찬가지로 팔콘 길드와 유사한 갑옷을, 나머지 둘은 조선노동당의 상징색인 황색과 붉은색으로 만들어진 갑옷을 입고 있었다.
모두 가면을 쓰고 있기에 제삼자가 보기엔 소환수라 생각하기 어려울 터였다.
세현이 이러고 있는 건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 ‘입주자 보호조약’에 따라 입주자가 된 지 6개월 미만의 입주자는 레이드 참가가 원천적으로 금지된다.
현재 이곳에 있는 것 자체가 불법이기에 정체를 숨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두 번째. 입고 있는 의상들이 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 꼭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젠장, 왜 엉뚱한 놈이 나오는 거야.”
레이드를 관찰하던 세현은 입맛을 쓰게 다셨다.
세현의 기억이 맞다면 이번에 나와야 할 거대 괴수는 얼굴에 달린 수백 개의 눈에서 광선을 쏴 대는 ‘빅 헤드’.
하지만, 실제 나타난 괴수는 누가 봐도 ‘프링X스’를 연상시키는 괴상한 비주얼을 가진 놈이었다.
애초에 세현의 작전 목표는 간단했다. 서큐버스 군단이 팔콘을 제치고 레이드에서 가장 큰 공을 차지하는 것이다.
세현이 미래를 알고 있기에, 원래라면 이번에 등장했을 빅 헤드의 패턴을 완전히 알고 있기에, 이 정보를 기반으로 서큐버스 군단이 이번 레이드를 독식하는 그림을 그렸다.
이걸 계기로 세현은 서큐버스 군단과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그들을 성장시켜 팔콘을 견제할 세력으로 성장시킬 계획이었다.
하지만 애초에 다른 거대 괴수가 나와 버리는 탓에 시작부터 꼬여 버렸다.
세현이 작전이 성공한다 해도 서큐버스 군단이 보스를 잡을 수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이거 자칫 잘못하면 죽도 밥도 안되겠는데.”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면 사카린은 허세현이 자신을 배신했다 생각할 것이다. 그럼 설희도 위험해질 뿐 아니라 서큐버스 군단도 적으로 돌리게 된다.
사면초가의 상황, 세현은 어떻게든 지금의 난국을 타개해야 했다.
“젠자아아아앙.”
전전긍긍하며 시간만 보내고 있을 때, 배후에서 익숙한 음성이 귀를 간지럽혔다.
<안녕하세요오오오옹!>
“히이익!”
기별도 없이 나타난 ‘그 존재’에 세현은 놀라 뒤로 나자빠졌다.
달마시안 상의에 정장을 입은 수인, 세현의 입주 시험을 담당했던 관리인 ‘커플러’였다.
그는 프링X스 통을 들고 감자 칩을 우적대며 넉살좋게 말을 던졌다.
“허세현 군, 오랜만입니다용! 보아하니 일이 생각하신 대로 안 풀리나 보네용?”
“무슨 일인데요?”
세현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오홍홍, 너무 긴장하지 마세용. 저는 허세현 님을 도와드리러 왔거든용!”
“도움?”
“제가 재미있자고 거대 괴수를 조금 바꿔 봤는데, 그것 때문에 세현 군 곤란하게 했네용. 마이 미스테이크~니깐, 도움을 좀 드려야 형평성에 맞을 것 같아서용.”
‘뭐야 이놈.’
세현은 큰 위화감을 느꼈다.
커플러가 하는 말들이, 세현이 과거로 돌아왔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듯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커플러는 제멋대로 혼자 말을 이어갔다.
“자~ 저 프링X스 괴수의 약점을 알려 드릴게용! 이게 아주 치~명적인 약점이거든용. 오홍홍, 제가 저 괴물 디자인에 참가했기 때문에 아주 확실한 정보랍니당?”
커플러는 자신이 먹고 있던 프링X스의 통을 뒤집어 탁탁 두드렸다.
아무래도 감자 칩을 모두 집어먹은 모양이었다.
“뭔가 대가를 지불해야 되는 겁니까?”
침착하게 대꾸했지만, 세현은 그의 말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관리자의 임무는 아파트의 생태계를 유지하고 최대한 공정한 플레이가 이뤄지게 하는 것. 그런 관리자가 자신에게 일종의 특혜를 주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일전에 ‘헬시안’이라는 장급 관리자가 마스터키의 색을 바꿔 준 적이 있지만 이번에는 그 스케일이 달랐다.
입주자 수백, 수천 명과 군대가 동원돼야 퇴치 가능한 거대 괴수.
그런 몬스터를 지금의 세현이 쓰러뜨릴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이었다.
“아뇽~ 대가는 무슨. 아까 말씀드렸잖아용. 제가 ‘재미있자고’ 벌인 일에 세현 군이 피해를 입은 것 같아서 찾아온 거에용. 세현 군이 잘 못하면 저도 실적이 떨어지거든용!”
“실적?”
“우후후 여기서부턴 노코멘트~ 세현 님에게는 자세히 알려드릴 수 없는 관리자들의 세계가 있답니당.”
커플러는 귀를 펄럭이더니 손가락을 딱-소리가 나게 부딪혔다.
그러자 세현의 머릿속에 주마등이 스치듯 여러 가지 이미지가 영상의 형태로 떠올랐다.
이 영상엔 프링X스 괴수의 약점과 각 페이즈 별 행동 패턴들을 모두 파악할 수 있는 정보가 담겨 있었다.
“허어억!”
영상이 끝나는 순간, 세현은 땀을 줄줄 흘리며 숨을 가쁘게 내쉬었다.
“자, 그럼 좋은 성과 있길 바랄게용, 허세현 군! 저는 이만 뿅!”
“아 저기!”
질문을 던지려는 순간, 커플러의 몸이 그림자 속으로 쑥 꺼져 버렸다.
세현은 멍한 얼굴로 그가 사라진 바닥을 내려다보다 천천히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일단,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자리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 † †
“전진! 전진해! 탱커들 바싹 붙어서 놈의 발을 묶는다!!”
전투가 시작된 지 4시간이 지났을 무렵.
녹색의 거대 프링X스 괴수들의 HP는 이미 절반 아래로 떨어진 상태였다.
어쩐 일인지 놈들은 더 이상 감자 칩을 내뿜지도 않고 몸을 웅크린 채 입주자들의 공격을 받아 낼 뿐이었다.
이때가 기회라고 생각한 팔콘 길드는 놈들을 더더욱 밀어붙였다.
현재까지 백여 명의 사상자가 나오긴 했지만, 모두가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분위기가 이렇게 되자, 전방에서 한참 전투를 하던 최은철이 뒤로 슬쩍 물러났다.
그러곤 자신의 심복 중 하나인 김현에게 다가가 넌지시 귓속말을 건넸다.
“김현, 슬슬 가 보도록 해. 금방 상부 명령이 떨어질 테니까.”
“알겠습니다.”
김현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팔콘 병력 중 자신의 휘하에 인원 20여 명을 분리해, 노란색 프링X스가 있는 방향으로 이동했다.
그들이 전선에 들어서자 한창 전투 중이던 6-10대대 입주자들이 그들을 길을 막아섰다.
“팔콘 길드! 여긴 우리 구역입니다! 대체 여긴 왜 온 겁니까!”
“우리가 여유가 있어서 말이야~. 이쪽으로 파견 보내라는 상부 명령이 있었거든, 못 믿겠으면 폰 열어 봐, 메시지 와 있을 테니까.”
김현이 어깨를 으쓱하며 능청스레 대꾸했다.
입주자 몇 명이 부랴부랴 품속에 넣어 뒀던 스마트폰을 꺼냈다.
[본부: (긴급)1-5조 전력 잉여분 발생, 일부 병력 6-10조로 재배치 명령.]
정말로 메시지가 와 있는 것이 확인되자 입주자들이 못마땅한 표정을 해 보였다.
자신들이 사냥하던 괴수에 팔콘 길드가 끼어들면 차후 기여도에 따라 보상을 나눌 때, 이들에게 우선순위가 돌아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관리 사무소의 기여도 시스템 자체가 꼼꼼하지 않은 것을 이용해 일종의 꼼수를 부리는 것이다.
“제기랄…… 우리가 다 한 걸 숟가락 얹으려 드는 거냐?”
“아우 말이 좀 심하시네.”
뻔히 숟가락을 얹으려 드는 김현과 그 일당에 길을 터 줄 수밖에 없었다.
김현은 그들을 놀리듯 손을 설렁설렁 흔들며 앞으로 걸어갔다.
“꼬우면 니들도 금수저 물고 태어나세요.”
“더러운 한성 그룹 따까리 새끼들.”
그의 등 뒤로 입주자들이 저주의 욕을 내뱉었다.
명분은 ‘팔콘 길드에 전력이 남는다.’지만, 실제로는 그들 뒤의 한성 그룹이 윗대가리들에게 돈 칠을 했기 때문에 난 명령이라는 걸 삼척동자도 알았다.
이런 수법을 쓰면 다른 길드들은 정말 압도적인 성과를 올리지 않는 한 팔 콘길드 이상의 기여도를 획득하기 어렵다.
최은철과 팔콘, 이들이 세계 랭킹 1위로 있는 건 실제 실력이 뛰어난 것도 있지만 한성 그룹을 뒤에 두고 있는 배경이 한몫을 했다.
30여 분쯤이 더 지나고, 남측에 내려온 두 프링X스 괴수들의 HP가 30%쯤 될 무렵, 놈들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후우우우웁! 후우우우우우웁!>>
마치 똥이라도 마려운 듯 신음하던 놈들이 일순간 포효가 터져 나왔다.
<감자. 대탈출입니다용~!!>
주변에 엄청난 충격파가 터져 나왔고, 방어 태세로 일관하던 놈들이 동시에 어디론가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 방향은 북한의 조선노동당이 전투를 벌이고 있는, 붉은 프링X스가 있는 방향이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입주자들은 그 모습을 멍한 얼굴로 바라봤고, 최은철은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뭐해! 저놈 쫓아가!!”
모든 입주자가 부랴부랴 뒤를 따라 달렸다. 이로 인해 진영이 흐트러졌고 일대는 대혼란에 빠졌다.
북측과 거리는 코앞이라 해도 과장이 아닐 정도로 가까워졌고, 그 한가운데는 세 마리의 프링X스가 서 있었다.
그중 가장 큰 붉은 프링X스는 자신의 앞에 선 두 놈의 머리 뚜껑에 팔을 힘껏 박아 넣었다.
<감자힘이 솟아나용!>
그러자 놈들의 몸에서 흰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하나의 거대한 프링X스 괴물로 합쳐졌다.
얼굴의 마스코트는 마치 악마와 같은 모습으로 변했고, 양팔에선 붉은색, 노란색 촉수가 뻗어 나왔다.
[#. (민들레 씨앗) 괴수 / 킹 오브 프링X스 ]
- 프링X스 3형제가 합체해 궁극의 감자왕으로 재탄생했다.
등급: 필드 괴수
레벨: 140
생명력 / 마나: 3000000 / 160000
“……제기랄. 여태 우리 뭐한 거냐?”
30%까지 줄어들었던 놈의 HP는 다시 차오르더니 전투 시작 전보다 오히려 2~3배 뻥튀기 돼 버렸다.
그걸 지켜보던 입주자들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잠시 후, 놈은 양팔을 힘껏 들어 올려 포효했다.
<대홍단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