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
52화.
일순간, 사카린과 허세현의 시선이 설희에게로 모였다.
“에엥?!”
그녀의 얼굴엔 진지함이 가득해 농담으로 던진 말이 아니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저놈을 보증해 줘? 나 농담하는 거 아니다. 저놈이 배신하면 진짜 죽일 수도 있어.”
“괜찮아요, 저분 믿을 만한 분이세요. 부탁드려요 사카린 길드장님.”
백설희는 그대로 무릎을 꿇고 않아 고개를 조아렸다.
사카린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을 이었다.
“이렇게까지 나오면 어쩔 수 없지, 일단 얘기나 좀 들어보자.”
세현은 곧장 자신의 작전을 주절주절 떠들었다. 그걸 듣고 있던 사카린의 표정이 점점 놀라움으로 변했다.
“그걸 나보고 믿으라고?”
“믿어서 손해 볼 건 없잖아요?”
사카린은 또 잠시 고민하다가 결심한 듯 무릎을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대신 조건이 하나 더 있어.”
“뭔데요.”
“네가 말한 그 작전, 그걸 실제로 수행할 만한 능력이 있는지 이 자리에서 증명해 줘야겠다.”
사카린은 대뜸 전투 자세를 취했다.
‘한판 붙어 보자 그거군.’
붉은 왕관, 허세현은 그게 무슨 뜻인지 곧장 이해했다.
“무기는 안 쓸 테니까 덤벼 봐.”
“좋습니다.”
속전속결로 가기로 결심했다.
사카린은 세현의 전투 스타일의 스승이라 할 수 있는 존재, 어설픈 잔재주는 통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었다.
세현은 4명의 소환수들을 일제히 모두 불러냈다.
“갑니다!”
기합을 내지르며 ‘왕의 함성’을 발동시켰다. 순간 30% 가속한 폰 3명의 맹수같이 달려들었다.
“아, 너 ‘브레이브킹’인가 하는 그놈이지! 유튜브에서 봤다.”
사카린은 입을 초승달같이 싱긋 웃으며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세 폰의 공격을 받아 냈다.
양쪽에서 들어온 블랙 폰의 한 손을 가로로 휘저어 보랏빛 불길을 뿜어내며 쳐냈고, 블랙 나이츠의 위에서 치고 들어온 점프 공격은 몸을 뒤로 살짝 빼는 것으로 피해 버렸다.
그 직후, 소환수들에게 찰나의 빈틈이 생겼을 때-.
사슬낫을 빠르게 사선으로 휘둘렀다.
촤악!
그 자리에 보라색 잔상이 남으며, 소환수들이 뒤로 튕겨져 나갔다.
‘역시, 이 정도는 해 줘야 사카린이지.’
단 한 방에 폰들의 생명력이 20% 이하로 떨어졌다. 그나마 블랙 나이츠가 공격을 피해 멀쩡한 상태였다.
이마저도 사카린이 적당히 힘 조절했다는 것을 알기에 세현은 씁쓸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세현은 일단 폰 소환을 모두 해체했다. 어설픈 전력을 활용해 봐야 씨알도 안 먹힌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소환수치고 쓸 만한 건 알겠는데, 겨우 그 정도로 조금 전 작전을 하자는 건 좀 아니지 않아?”
“걱정 마세요. 지금부터가 본 게임이니까.”
세현은 손가락을 딱- 소리 나게 튕겼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블랙 나이츠의 육체가 연기처럼 흩어져 세현의 몸에 달라붙어 검은 중갑옷을 덧씌웠다.
하체가 말의 다리처럼 변하고 머리는 붉은 술이 허리까지 늘어져 ‘블랙 나이츠’의 다른 버전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이는 ‘작위 수여’를 사용해 블랙 나이츠의 힘을 이식한 것이었다.
세현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여기서 쓰긴 좀 아깝지만…….’
인벤토리에서 고승의 염주를 소환해 잘라 낸 염주 한 알을 사탕처럼 입안으로 툭 던져 넣었다.
[고승의 염주를 삼켜 3분간 허세현 님의 모든 스테이터스가 150% 증폭됩니다.]
세현은 전신의 근육이 팽창하는 것을 느끼며 자신만만한 얼굴로 외쳤다.
“갑니다.”
순간 두꺼운 다리가 땅을 때리며 앞으로 총알처럼 튕겨 나갔다.
그와 동시에 ‘왕의 함성’을 발동시켰다.
작위 수여를 쓴 상태에선 자기 자신이 소환수이기도 하기에 이를 통해 육체를 가속시킬 수 있었다.
‘한 방으로 전부 보여 준다.’
순간 뿜어지는 엄청난 가속도에 세현은 자신의 의식마저 아득해짐을 느꼈다.
이를 악문 상태에서 최대한 집중을 유지하고 장창 ‘백염의 송곳니’를 앞으로 힘껏 뻗었다.
현재 자신이 선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상태, 이거라면 지금 최은철을 만난다 해도 한칼은 먹일 자신이 있었다.
콰아아앙-!
순간 굉음과 함께 숲 일대에 작은 폭발이 일어난 후, 그 일대를 연기가 자욱하게 뒤덮었다.
챙! 챙!! 채애앵!!
그 안에서 두 개의 그림자가 쉴 새 없이 움직이며 금속 마찰음을 내뿜었다.
3분여가 흐른 후, 연기가 서서히 걷힘과 동시에 마찰음도 잦아들었다.
“허억…… 허억……. 허억…….”
그 자리엔 허세현과 사카린이 대치하고 있었다.
세현의 얼굴엔 지친 기색이 역력했고 몸에는 상처가 가득했다.
그 반면, 손에 사슬낫을 든 사카린은 머리카락 끝이 살짝 잘려 나갔을 뿐, 여전히 쌩쌩해 보였다.
“아, 졌어요 졌어.”
세현은 자리에 주저앉아 항복 선언을 했다.
하지만 억울함은 없었다. 사카린은 압도적으로 강했고, 그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사카린이 빙긋 웃더니 사슬낫을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너, 별명이 ‘브레이브킹’이라고 했지? 동맹 제안, 받아 줄게.”
“엥? 이겨야 받아 준다면서요.”
“당신 레벨이 몇이야.”
“음……. 36이요.”
“36레벨?”
그 대답을 듣는 순간, 사카린이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하하! 진짜 이거 어이가 없네! 진짜 살다 살다 보니까 별 골 때리는 인간을 다 본다.”
“뭐가 그리 웃겨요?”
“36레벨짜리가 나한테 덤볐는데 그럼 웃기지, 안 웃겨?”
그녀는 ‘브레이브킹’이 등장했던 유튜브 영상을 모두 본 상태였다.
세현이 영상이 시작할 때마다 자신의 레벨을 밝혔기에 사카린도 그의 레벨이 30을 겨우 넘겼다는 걸 이미 알았다.
반면 사카린의 레벨은 90대 초반, 명실 공히 아파트 내에 현존하는 최강의 입주자 중 한 명이다.
그런 그녀에게 고작 30레벨을 막 넘은 입주자가 진심으로 싸우게 만들었다.
이건 ‘브레이브킹’이라는 존재가, 이미 아파트의 상식을 아득히 뛰어넘은 존재라는 걸 도리어 알려 주고 있었다.
한참 웃던 사카린은 붉은 왕관의 앞으로 뚜벅뚜벅 다가가 오른손을 뻗었다.
“그냥 당신이 마음에 들었어, 똘기가 넘치는 게 딱 내 취향이야.”
“어……. 네.”
붉은 왕관은 얼떨결에 자신의 목표를 달성해 어안이 벙벙해졌다.
† † †
다음 날, 아파트가 재앙을 흩뿌린 건 정확히 오후 세 시였다.
[경보! 경보! 아파트 정상에서 민들레 씨앗을 발사했습니다! 예측 추락 지점의 병력은 모두 전투를 준비합니다! 경보! 경보!]
[각 조의 대대장은 수시로 본부에 상황을 보고하길 바랍니다. 이상.]
[조선노동당 입주자들과 최대한 접근 자제할 것, 불필요한 무력 충돌 자제할 것!]
베이스캠프 일대엔 요란한 경보음이 들렸다.
그리고 스마트폰으로 입주자들에게 쉴 새 없이 본부의 알림 메시지가 전해졌다.
[민들레 씨앗 3기, DMZ 내 예상 착지 지점으로 강하 중! 씨앗 크기 각 A급 1기, B급 2기!]
군은 먼저 미사일 방어 시스템을 이용해 민들레 씨앗을 공략했다.
아이러니하게 북한의 핵미사일을 위해 구축했던 시스템이지만, 지금은 민들레 씨앗을 격추하는 것을 제1목표로 하고 있다.
[위치 특정 성공, 발사대 6기 요격미사일 발사!]
[48발 폭발 확인, 씨앗 요격 실패.]
[씨앗 상공 800km 진입!!]
[PAC-C 120발 발사!]
[폭발 확인, 씨앗 요격 실패!]
수백 발에 달하는 미사일이 발사됐지만 씨앗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에효, 군바리 새끼들이 하는 일이 그렇지 뭐.”
“씨발, 방금 하늘에서 얼마가 터진 거냐? 그거 우리한테나 주지.”
“몇조짜리 불꽃놀이 잘~ 봤습니다.”
입주자들은 애초에 군에 기대도 하지 않았다는 듯 빈정대고 있었다.
“입주자 전원, 씨앗 착지 직후 충격파에 대비해라!”
잠시 후, 구름을 뚫고 거대한 민들레 씨앗 세 개가 지상을 향해 다가왔다.
수 백발의 미사일을 퍼부었음에도 씨앗은 조금의 타격도 받지 않은 듯 보였다.
그것이 지상으로 떨어지는 순간, 온 세상을 집어삼킬 기세의 지진과 굉음이 일어났다.
연기가 일대를 집어삼켰고, 그 너머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꿈틀거렸다.
“연기부터 걷어 내!”
입주자 일부가 스킬로 바람을 일으켜 그 즉시 연기를 걷어 냈다.
그러자 세 개의 거대한 괴수가 그 위풍당당한 모습을 드러냈다.
“뭐, 뭐야 저건.”
세 괴수의 모습에 입주자들은 황당함에 신음을 흘렸다.
“저거 프링X스 아니냐?”
입주자들의 입에서 나온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DMZ 한가운데 서 있는, 수백 미터가 넘는 원통 몸뚱이의 괴물은 유명 감자 칩 과자의 그것을 꼭 닮아 있었다.
각각 빨간색, 녹색, 노란색.
즉 오리지널, 양파, 치즈 맛의 패키지를 닮았으며 원통 아래와 옆에 길쭉한 팔과 다리가 뻗어 있었다.
그중 오리지널이 제일 거대했고, 양파, 치즈 맛은 그의 3분의 2 정도 크기였다.
그들의 머리 위로 상태 창이 출력됐다.
[#. (민들레 씨앗) 괴수 / 프링X스 3형제]
- 민들레 씨앗에서 태어난 감자 칩 삼형제. 오리지널, 양파, 치즈 맛으로 이뤄져 있다.
#1. 오리지널 맛
등급: 영웅(S)
레벨: 110
생명력 / 마나: 1500000 / 60000
#2. 양파 맛
등급: 크로니클(A)
레벨: 90
생명력 / 마나: 800000 / 40000
#3. 치즈 맛
등급: 크로니클(A)
레벨: 90
생명력 / 마나: 800000 / 40000
<한 번 열면, 멈출 수 없어!!!>
원통 가운데 그려진 콧수염 마스코트가 입을 크게 벌려 즐거운 목소리로 외쳤다.
귀를 터질 것 같은 굉음에 입주자들은 귀를 틀어막고 얼굴을 찌푸렸다.
잠시 후, 가장 강한 빨간색이 북한 방향으로 이동했고 나머지 둘이 남쪽으로 움직였다.
놈들이 발을 내디딜 때마다 땅이 쿵쿵 울리며 진동했다.
[1-5대대는 양파 맛, 6-10대대는 치즈 맛! 각자 크게 둘로 나뉘어서 막는다! 저지선을 못 넘게 막아!]
전 부대의 지휘관 채널에 일제히 명령이 떨어졌다.
각 대대장이 이에 따라 혼란을 수습하고 애초의 작전대로 부대를 움직였다.
원거리 계통 스킬들이 멀리서 상체를 타격했고 근거리 딜러와 탱커들은 놈들의 다리에 바짝 붙어 움직임을 최대한 봉쇄했다.
프링X스들은 커다란 손으로 땅을 후려쳤다. 그때마다 탱커들이 퍽퍽 날아갔지만, 그들은 힐러들의 치료를 받고 바퀴벌레처럼 다시 달라붙어 놈의 어그로를 끌었다.
이렇게 전투가 고착화되자 프링X스 통 가운데 달린 얼굴이 화난 표정으로 붉게 변했다.
그러곤 머리 위에 얹어진 뚜껑이 뻥-! 하는 소리를 내며 허공으로 솟구쳤다.
<한 번 열면! 멈출 수 없어!!!>
잠시 후, 뚜껑이 열린 머리에서 수십 장의 감차 칩이 하늘로 솟구치더니 지상을 향해 빠르게 추락했다.
쾅-!
쾅-!
쾅-!
“아아아악!!”
“피해라!!”
감자 칩 폭격이 입주자들이 밀집한 지점을 타격하며 진형을 붕괴시켰다.
이 공격에 몇몇 어설픈 입주자들은 그대로 감자 칩에 눌려 목숨을 달리했다.
바닥에 충돌한 감자 칩은 폭발을 일으키며 여러 개의 조각으로 쪼개졌고, 그 직후 파편에서 뭉글뭉글 거품이 일어났다.
그것은 금방 사람 키 정도 크기의 작은 프링X스 몬스터로 변했다.
“한 번 열면 멈출 수 없어!”
“한 번 열면 멈출 수 없어!”
“한 번 열면 멈출 수 없어!”
순식간에 수백 마리의 프링X스 인간이 지상에 풀려나며 난전이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