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
50화.
“됐습니다, 주군.”
모든 준비를 끝낸 두 사람은 천천히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러자 양옆에서 작은 횃불이 어스름히 불을 밝히며 내부를 비췄다.
지하 공간 내부는 10m 정도 폭으로 만들어졌는데 양옆으로 아랍 전사들을 연상시키는 커다란 석회암 석상이 촘촘히 배치돼 있었다.
그렇게 통로를 따라 앞으로 20m쯤 걸었을 무렵이었다.
딸깍-.
“어라?”
세현의 발아래가 훅 주저앉으며 뭔가의 버튼이 작동됐다. 그러자 석상이 눈에서 시뻘건 빛이 뿜더니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귀찮은 걸 깨운 모양인데.”
세현은 곧장 소환수 넷을 소환했다.
소환수들은 호쾌하게 석상들을 박살 내며 빠르게 전진했다.
석상들 또한 개체 하나 하나가 30레벨 중간급의 몹이었지만, 지금의 세현에게는 그저 걸리적거리는 돌덩이일 뿐이었다.
호쾌한 속도로 석상들을 박살 내며 돌진하길 20분여, 지하 유적이 끝나는 지점에는 금빛으로 치장된 보물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상자를 열자 그 안에는 양피지를 겹겹이 엮어 만든 책 한 권과 붉은 끈으로 묶인 스크롤이 놓여 있었다.
세현은 책과 스크롤을 한 손으로 들고 상태 창을 열었다.
[#.퀘스트 아이템 / 지브릴의 가르침]
- 대천사 지브릴의 가르침이 적혀있는 신성한 책. 사악한 힘을 물리칠 수 있는 기운이 담겨 있다.
[#.퀘스트 아이템 / 마법: 천사의 날개]
- 천사의 권능을 사용해 사용자를 <가마네스>로 날려 보낸다. 1회 사용 시 스크롤은 파괴된다.
책의 이름은 <지브릴의 가르침>.
이번 퀘스트 목표 지점인 ‘이교도’의 사원에 들어가기 위해 꼭 필요한 아이템이었다.
세현은 한숨 돌렸다는 듯 평온한 얼굴로 그것을 인벤토리에 집어넣은 후, <마법: 천사의 날개> 스크롤을 한 손으로 집고 머리를 긁적였다.
“그 두루마리는 무엇입니까?”
“이걸 쓰면 바로 <가마네스>로 순간 이동할 수 있어.”
“오호, 편리한 물건이군요.”
스크롤은 입주자가 빠르게 이곳을 나갈 수 있게 편의 제공 차원에서 배치된 아이템이었다.
‘으음, 이걸 굳이 여기서 쓸 필요가 있나?’
세현은 잠시 고민했다.
“세이메이, 미안한데 옷 다시 갈아입어. 들어왔던 길로 빠져나가자.”
“네? 갑자기 무슨-.”
“이 스크롤, 언젠간 쓸 일이 생길 것 같아서 말이야.”
텔레포트 스크롤은 비싸다. 최상위권 길드들도 기껏해야 비상용 몇 개를 만드는 게 다일 정도였다.
딱히 위험도 없는 상황에서 이걸 쓰기보다는 비상용으로 가지고 있는 게 낫다는 판단에 내린 결정이었다.
“알겠습니다.”
세이메이는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였고, 두 사람은 들어왔던 방법 그대로 담수호를 빠져나왔다.
도중에 순찰 중인 경비들에게 들킬 뻔했지만, 세이메이가 시키가미를 미끼로 사용해 별 탈 없이 벗어날 수 있었다.
이다음엔 지체 없이 이교도들의 신전으로 향했다.
† † †
황량한 밤의 사막.
보이는 거라곤 커다란 선인장 몇 개와 돌덩이가 전부인 모래 위.
그 위에서 지브릴의 가르침을 펼쳐 적힌 문장을 천천히 읽어 나갔다.
“대천사 지브릴, 그의 힘이 악한 자들의 힘을 걷어 내리라.”
책이 금빛으로 빛나더니 한 줄기 섬광을 허공으로 쏘아 올렸다.
잠시 후, 섬광이 벼락처럼 바닥에 내리쳤고 뭔가가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그러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던 자리에 한눈에 다 들어오지도 않을 크기의 거대한 신전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브릴의 가르침이 샤이탄의 힘을 걷어 냅니다!]
[이교도의 신전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징그럽게도 크네, 아니 징그럽고 크다고 해야 하나?’
이교도의 신전은 어지간한 현대식 타워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어마어마한 크기를 자랑했다.
게다가 생긴 것이 독특했다.
마치 남자의 중요한 물건을 연상시키게 해서 이를 만든 놈의 디자인 센스를 의심하게 했다.
세현과 세이메이는 200m가량 떨어진 바위 뒤에 몸을 숨긴 채 신전을 관찰했다.
“조장님. 결계가 해제됐습니다!”
“뭐해! 신관님께 빨리 보고 드리고 무슨 일인지 알아봐!!”
입구 쪽, 수십 명의 문지기가 결계가 해체된 것에 놀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세현은 소환수들을 불러낸 후, 세이메이에게 작게 읊조렸다.
“빠르게 돌파하자.”
“네. 주군.”
그 순간, 다섯 개의 그림자가 모래를 허공으로 튀기며 신전의 입구를 향해 총알처럼 달려들었다.
“누, 누구냐!”
이에 놀란 문지기 하나가 소리쳤고, 그 직후.
콰득-!
블랙 나이츠가 내뻗은 창이 놈의 몸통을 꿰뚫었다.
“공격해!”
문지기들은 곧장 반격을 시도했다.
하지만 상대의 압도적인 무력에 채 3분도 버티지 못하고 모조리 몰살당하고 말았다.
시체와 피로 난장판이 된 입구.
허세현은 시체 중 하나의 주머니에 손을 넣고 뒤적거리더니 열쇠 꾸러미를 꺼냈다.
문지기 조장이 가지고 있던 걸 빼앗은 것으로, 신전 내부의 곳곳을 열 수 있을 터였다.
세현은 곧장 입구로 다가가 [입구]라고 쓰인 열쇠를 꽂아 돌렸다.
철컥-!
그러자 열쇠가 걸리는 소리와 함께 메시지 박스 하나가 눈앞에 출력됐다.
[#. 인스턴트 던전 / 이교도의 신전]
- 대마신 샤이탄을 섬기는 이교도들의 신전, 이 일대에 있는 신전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적정 레벨: 40
적정 인원: 10~15인
#. 경고: 던전 내부에 몬스터의 숫자가 많아 최소 10인 이상 파티 플레이를 권장합니다. 입장하시겠습니까?
[입장하기]
최소 10인 이상 던전, 이 말인 즉은 이 안에 최소한 10인분의 몬스터가 있을 거라는 얘기였다.
현재 세현의 레벨은 32.
보통의 32레벨 입주자라면 이 메시지 박스를 보는 순간 몸서리를 치며 물러날 터였다.
하지만 세현은 도리어 흡족하다는 듯 미소 지으며 입맛을 다셨다.
“몬스터가 많으면 오히려 땡큐지.”
수락하기 버튼을 누르는 순간, 신전의 거대한 돌문이 옆으로 천천히 밀려났다.
안으로 몇 걸음 들어가자 온통 보랏빛이 가득한, 음산한 분위기의 신전 내부가 펼쳐졌다.
“침입자다! 제거해라!”
멀리서 기괴한 나무 가면을 쓴 이교도들이 로브를 펄럭이며 세현과 세이메이를 향해 달려왔다.
던전 초입에 막 들어왔는데 그 숫자가 얼핏 수백은 넘어 보였다.
세현은 이채를 띄며 즐거운 듯 웃음소리를 뱉었다.
“좋아! 이 정도는 나와 줘야 나도 신이 나지!”
잠시 후, 소환수들과 이교도들이 충돌했고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것은 규칙적으로 들려오며 죽음이 음악으로 변했고, 신전 전체에 빠르게 퍼져 나가며 이교도들에게 죽음을 전파했다.
† † †
[작위 수여를 사용합니다.]
[허세현 님이 ‘블랙 나이츠’의 힘을 흡수합니다.]
신전에 발을 들인 지 한나절이 지났을 무렵,
세현과 세이메이는 신전의 정상층에서 한창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샤이탄 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타오를 것이다!!”
붉은 로브를 두르고 나무 가면을 쓴 작은 체구의 남자.
그는 양팔에서 붉은 구체를 기관총 마냥 쉴 새 없이 쏘아 댔다. 그걸 피할 때마다 뒤쪽에 놓인 것들이 지우개로 지우듯 사라졌다.
이런 무지막지한 공격을 퍼붓는 놈은 이교도의 신전의 보스 <대신관 자파>.
놈은 강력한 요술을 쓸 뿐 아니라 샤이탄의 자손들이라 할 수 있는 하급 마신 지니를 셋이나 부린다.
문제는 이 지니들의 위력 하나하나가 어지간한 중간 보스급이라 떨쳐 내는 것이 만만치 않다는 것.
세이메이와 폰 클래스의 소환수 셋이 지니들을 상대했고, 오직 작위 수여로 블랙 나이츠의 힘을 흡수한 허세현만이 자파의 본체를 노리고 있었다.
‘역시 대형 던전이라 보스도 만만치가 않구만!’
자파는 멀리서는 붉은 광선을 뿜어내며, 세현이 가까이 다가가면 자신과 지니들의 위치를 바꿔치기하는 요술로 위기를 탈출했다.
생명력은 극단적으로 낮지만 빠른 기동성과 공격력으로 적을 유린하는 전형적인 히트&런 타입의 보스였다.
마음 같아선 소환수를 몽땅 동원해 놈을 찢고 싶지만 자칫 잘못하면 세이메이가 위험해질 수 있었다.
술래잡기 같은 전투는 5분이 넘도록 계속됐다.
“아, 이러다가 작위 수여 풀리겠네.”
세현은 뭔가 결심한 듯 제자리에 멈췄다.
더 이상 시간을 끌었다가 작위 수여가 해제되면 죽도 밥도 안 될 것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방어구 세트 ‘요괴왕의 장막’의 스킬 ‘요괴왕의 불꽃’을 펼쳐 흰 불꽃이 전신을 감싸게 했다.
“으아아아아아!”
세현은 이를 악물고 앞으로 정직하게 내달렸다.
대신관 자파는 이게 웬 떡이냐 싶었는지 광기 어린 웃음을 뱉으며 붉은 섬광을 전방으로 퍼부었다.
“멍청한 것, 샤이탄 님의 곁으로 가거라!”
하지만 그의 예측과 다르게 세현의 몸에서 일어난 오로치의 흰 불꽃이 붉은 섬광을 공중에서 그대로 증발시켜 버렸다.
“이 무슨?!”
자파는 이에 화들짝 놀라며 램프를 꺼내 들었다.
지니와 몸을 바꿔치기할 심산이었다.
“아아악!”
그 순간, 세현의 입에서 나온 외침이 충격파를 터뜨리며 육체를 가속했다.
자파가 램프를 문지르기도 전에, 세현은 손에 든 창을 놓고 놈에게 쏜살같이 태클을 걸어 램프를 날려 보냈다.
이후 두 사람은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고, 세현은 재빨리 놈의 몸 위에 올라타 마운트 포지션을 선점했다.
“더러운 몸뚱이 치워라!”
자파의 눈에서 붉은 섬광이 뿜어졌다.
하지만 세현의 몸을 감싼 오로치의 화염이 그것을 순식간에 태워 버렸다.
“이제 끝이야.”
빠악-!
세현의 주먹이 놈의 얼굴에 정직하게 내리꽂혔다.
Level 20. 민들레 씨앗 레이드
[인스턴트 던전 ‘이교도의 신전’을 클리어했습니다.]
[퀘스트 ‘대마신의 추종자’를 클리어했습니다.]
[허세현 님의 레벨이 36이 됐습니다.]
퀘스트 종료 메시지와 함께 세현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애초에 자신이 민들레 씨앗 레이드 참가까지 목표로 했던 35레벨을 시간 내에 넘겼기 때문이었다.
‘소환수 경험치도 분배해야지.’
세현은 ‘경험의 관리자’를 실행시켰다.
[경험치를 부여할 소환수를 선택해 주세요.]
1. 화이트 폰A / 레벨 23
2. 블랙 폰B / 레벨 24
3. 블랙 나이츠 / 레벨 17
4. 블랙 폰C / 레벨 9
‘일단 23레벨 화이트 폰을 먼저 키우고, 레벨 평균치를 어느 정도 맞춰 줘야지.’
세현은 두 폰에게 경험치를 투자했다.
[화이트 폰A / 레벨23 > 레벨25)(이)가 됐습니다.]
[블랙 폰C / 레벨9 > 레벨14(이)가 됐습니다.]
화이트 폰을 먼저 키워 화이트 나이츠로 진급시킬 생각이었다. 거기다 새로 소환한 블랙 폰이 레벨이 너무 낮아 전투에도 도움이 될 정도로 밸런스를 맞춘 것이었다.
‘슬슬 골치가 아파지는구만.’
레벨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자 세현은 자신의 클래스 ‘브레이브킹’의 장단점을 몸소 체감하고 있었다.
소환수들의 위력이 대단하기에 성능 자체는 훌륭하다. 하지만 소환수 하나하나의 성장을 디테일하게 관리해야 하는데다 장비에 들어가는 돈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소환수 넷에 세이메이까지 합치면 다섯 명.
지금의 세현은 다른 입주자보다 못해도 5배의 자금이 있어야 ‘브레이브킹’이라는 클래스의 온전한 화력을 끌어낼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당연히 자금 관리에도 철저해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 통장에 있는 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