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
48화.
“우우웁!”
그러자 막내 양옆에 있던 멤버들이 팔을 뻗어 입을 턱 막아 버렸다.
“아아, 이걸 어쩐다.”
거듭된 회의와 연구에도 좋은 수가 나지 않자 스핀클러는 절망한 듯 고개를 숙인 채 머리를 벅벅 긁었다.
“오호호호홍, 고민이 많아 보이시네용 스핀쿨러 님~!”
그때, 연구실의 그림자에서 경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놀란 시드메이커들이 고개를 돌리자 두 개의 붉은 점이 빛을 내뿜고 있었다.
스핀쿨러는 태연한 얼굴로 한숨을 푹 내쉬며 그 목소리에 대꾸했다.
“너, 우릴 놀리러 온 거라면 목을 잡아 뽑을 거다.”
그러자 그림자 속에서 정장을 차려입은 달마시안 관리자, 커플러가 불쑥 솟아올랐다.
그는 언제나 그렇듯 자신의 큰 귀를 펄럭였고 오른손에는 프링X스 감자 칩을 들고 우걱우걱 씹어 먹고 있었다.
“음냥, 놀리다니용~ 저 같은 하급 관리자가 제가 위대한 시드메이커 스핀쿨러 님을 모독할 수야 있겠습니까용.”
“너스레 떨지 마, 자네가 ‘두 의지’ 님들과 얘기를 나눈 건 모두 알고 있어!”
얼마 전, 커플러는 관리인 총회에서 대놓고 ‘두 의지’의 부름을 받았다. 이건 커플러가 그녀들의 눈에 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체 커플러가 두 의지와 무슨 얘기를 했는지, 무엇을 말했는지는 모든 관리인들의 관심사였다. 신경을 안 쓸래야 안 쓸 수 없는 것이다.
“저는 그저 스핀쿨러 님이 이번 ‘씨앗’에 무엇을 실을지 고심하는 것 같기에 작은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아 찾아왔지용.”
“도움이라면?”
“그때 ‘두 의지’께서 제게 이번 씨앗에 관련해서 넌~지시한 내용이 있거든용.”
“그 말이 사실인가?”
순간 실눈 같던 스핀쿨러의 눈이 번쩍 뜨였다.
“감히 제가 스핀쿨러 님께 거짓말을 하겠습니까용.”
“그, 그럼 말해 보게. 어서!”
“아하하하, 물론 말씀드려야지용. 그 대신, 스핀쿨러 님께 좀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어용. 그걸 들어주실 수 있으실까용?”
“그게 뭔데?”
스핀쿨러의 질문에 커플러는 입을 벙긋거렸다.
다른 시드메이커들이 들을 수 없도록 음성이 아닌 사념으로 자신의 뜻을 전달한 것이었다.
“좋아, 네 정보로 두 의지께서 만족하신다면 흔쾌히 들어주지. 그 대신, 평가가 나쁘다면 네놈의 그 재수 없는 귀를 잡아 뽑을 거다!”
“아하하하, 틀림없이 만족하실 겁니당!”
“그래, 두 의지께서 원하는 괴수가 뭔가?”
커플러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자신의 오른손에 들린 프링X스 감자 칩을 보고 떠오른 생각을 외쳤다.
“두 의지께서 …OOOO… 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스핀쿨러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맴돌았다.
“에잉, 정말로 두 분께서 그런 주문을 했다고?”
“그렇다니깐용. 이거 완전 취향 저격이에용! 오홍홍홍!”
커플러는 이채를 띠며 즐겁다는 듯 대꾸했다.
Level 18. 막흐잔
13층에 위치한 4개의 도시, 그중 가장 크고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곳은 <가다메스>였다.
가다메스의 중심지에는 어지간한 호수보다 훨씬 거대한 담수호가 있었다.
이 담수호의 크기는 감히 바다라 칭해도 좋을 정도여서 시즌2 구간에 사용되는 식수의 30% 이상을 차지한다.
사막지대로 이뤄진 시즌2 구간에선 물은 귀한 재화이며, 가다메스는 이 물을 이용해 엄청난 부를 끌어모으고 있는 대도시였다.
다른 도시들 따위 감히 비교조차 불가능한 사막의 보석 같은 도시.
하지만 여느 아름다운 도시에도 슬럼이 있듯 이곳에도 어둠의 공간이 존재한다.
<막흐잔>.
이는 도시의 지하에 개미굴처럼 뻗어 있는 빈민굴을 뜻한다.
하지만 이곳의 인간들은 흔한 빈민들이 아니었다.
이들은 생존을 위해 무엇이든 했다.
돈을 받고 싸워 주는 용병 일이나 누군가가 필요로 하는 정보를 구해 오는 정보상의 역할까지.
그 때문에 막흐잔에는 시즌2 구간의 거의 모든 정보가 몰려들었다.
이들에게 정보를 구하거나 힘을 빌리기 위해, 수많은 세력이 이곳을 이용한다.
그렇기에 이 빈민굴에 보물 상자라는 뜻의 <막흐잔>이라는 거창한 이름이 붙었다.
그리고 오늘, 세현 일행 또한 ‘샤이탄을 섬기는 자’들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고양이 가면을 쓴 자가 보내서 왔슴다.”
“안으로 들어오슈.”
막흐잔의 안쪽에서 약속된 시간에 중간상을 접촉해 하사신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러자 안내역 한 명이 세현 일행을 골목 깊숙한 곳의 은밀한 장소로 안내했다.
마치 점쟁이의 집처럼 꾸며진, 원룸 정도 크기의 방.
안에는 휠체어에 앉은 노인이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커다란 파이프 담배를 입에 물곤 느긋한 미소로 두 사람을 반겼다.
“껄껄, 자네들이 석양의 추적자에 들어간 새로운 입주자인가? 처음 보는 얼굴이군.”
“거창해지는 건 됐고, 본론부터 갑시다.”
“성질이 급한 친구구만. 좋아, 어떤 정보가 필요한 겐가?”
“이교도들이 신전을 세워 샤이탄을 추종하고 있다고 들었어. 놈들이 어디 있는지 좀 알려 주었으면 하는데.”
“샤이탄을 섬기는 자들이라…… 장소를 알려 주는 건 당장에라도 할 수 있어, 하지만 그 안에 들어가는 건 쉽지 않을 거다.”
“알아, 보통은 결계를 쳐 놓겠지.”
“머리가 좀 돌아가는 친구구만.”
“방법은?”
이미 방법을 알고 있지만 퀘스트를 받기 위해 모른 척 질문을 던졌다.
“샤이탄의 결계를 깨기 위해서는 대천사 ‘지브릴’의 가르침이 담긴 물건이 필요하지. 문제는 그것도 꽤 난해한 위치에 있다는 거야…….”
“뜸들이지 말고 말하쇼.”
세현이 재촉하자 노인은 파이프 담배를 뻐끔 대며 뜸을 들이더니 천천히 말을 이었다.
“지브릴의 가르침은 가다메스의 담수호 아래, 숨겨진 지하 공간에 잠들어 있지.”
담수호 아래, 이건 은유적 표현이 아니었다. 실제 호수 바닥에 있는 지하 공동에 위치해 있다.
지브릴의 가르침이 담긴 물건은 신성한 물건이기에 가다메스에서도 찾기 어려운 곳에 모셔 놓은 것이다.
“그럼 이만.”
세현은 새로 출력된 퀘스트를 수락한 후 방을 빠져나와 막흐잔을 가로질렀다.
“헤이 그쪽, 잠깐 멈춰 봐.”
그때, 누군가 갑자기 어깨를 잡아챘다.
고개를 돌리자 건장한 체격의 백인 남자와 몇 명의 입주자가 세현을 노려보고 있었다.
‘저 얼굴, 어디서 봤더라?’
세현은 잠시 기억을 더듬는 것으로 상대의 정체를 가까스로 떠올릴 수 있었다.
그의 이름은 ‘헨더슨’. 블루울프 3군의 대장이자 마상철과 함께 세현에게 돈을 뜯어내려 협박해 왔던 놈이었다.
‘제기랄. 로브를 쓰고 나왔어야 했는데.’
평소라면 세이메이와 세현, 둘다 로브를 쓰고 이동했을 터. 급하게 이동하다가 이를 깜빡 놓친 게 재수 없는 얼굴을 마주치게 한 것이었다.
“오랜만이야, 오랜만이야! 살아있었군, 미스터…… 어, 이름이…….”
“알아서 뭐하게.”
“아하하 까칠하네! 죽은 줄로만 알았는데 아직 살아 있었군!”
“꺼져. 가자, 세이메이.”
세현은 퉁명스레 대꾸했다.
그 당시 헨더슨은 소환수에게 당한 세현을 버리고 도망쳤다. 아마 그게 연기가 아니라 실제 상황이었다면 세현은 100% 죽었을 터. 그런 짓을 벌였던 쓰레기가 뻔뻔스럽게 말을 걸어오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세현이 그를 무시하며 앞으로 뚜벅뚜벅 걷고 있을 때, 헨더슨은 그를 따라 걸으며 계속 말을 이었다.
“오우 노노노~ 미스터 세현은 갚아야 할 빚이 있잖아. 잊었어, 6000만 원?”
“야, 꺼지라고 했다.”
“워어워어~ 아주 무서운데 미스터 세현? 이러다 싸움이라도 나겠어.”
“뭐, 니가 원하면 싸우던가.”
“워우~ 자신감이 대단하네. 근데 그거 알아? 아파트에선 E급 쓰레기는 말을 아껴야 오래 살아.”
헨더슨은 미소를 싹 지워 내며 세현의 마스터키가 달린 왼쪽 팔목을 잡아채며 말했다.
이는 명백한 협박의 의미였다.
이에 세현은 팔을 신경질적으로 빼내며 중지를 펼쳤다.
“까고 있네.”
헨더슨은 얼굴에 웃음기를 싹 빼며 대꾸했다.
“유, 정말 죽고 싶은 거야?”
“그럼 죽여 보던가.”
세현은 바닥에 침을 퉤 뱉더니 그의 동료와 함께 반대편으로 도망쳤다.
그 볼썽사나운 모습에 헨더슨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왓더…….”
그러던 중, 옆에 있던 블루울프들이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헨더슨, 이렇게 모욕을 당하고도 참을 생각이야?”
“뭘?”
“저놈, 돈 뜯어내고 그냥 묻어 버리자고.”
그들은 말없이 엄지손가락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이해한 헨더슨은 침을 꿀꺽 삼켰다.
“오우, 그래도 되나요?”
“저런 잡놈 처리하는 거야 일도 아니지. 그 대신…….”
“그 대신?”
“저놈한테 받아야 된다는 돈, 3등분하지.”
동료들은 조금 전 헨더슨이 6천만 원을 받아 내야 한다고 말한 캐치한 것이었다.
헨더슨은 쓰게 웃으며 대꾸했다.
“뭐 받아 낼 수만 있다면.”
“이런 일 하루 이틀 하는 것도 아니고. 좋아, 딜 성립이다.”
동료들은 당연히 받아 낼 수 있다는 반응이었다.
이들은 블루울프 내에서 온갖 더러운 일을 도맡아 하는, 2군의 ‘송곳니’ 팀에 소속된 자들. 조사단의 눈을 피해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그들에겐 일상이다.
입주자 한 놈에게 6천 만을 뜯어내는 것 정도야 대수로운 일도 아니었다.
“그럼 쫓아 보자고.”
그 직후, 블루울프들 중 한 명이 자신의 ‘냄새 맡기’ 스킬을 사용해 세현의 흔적을 쫓았다.
그렇게 10여 분을 달렸을 때 즈음.
코를 킁킁대며 추격에 앞장서던 동료가 잠시 자리에 멈추더니 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놈, 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거야?”
“왜 그럽니까?”
“냄새가 진해지는 주기를 보니, 일부러 우리가 쫓아오기를 기다리면서 움직이고 있어.”
“우리가 쫓아오길 기다려? 아주 간땡이가 부은 새끼구만.”
“어디 함정이라도 파 놨을지도 모르지. 어떻게 할 거야?”
헨더슨은 잠시 고민하다 싱긋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음~ 괜찮을 거예요. 그놈 아파트에, 마상철이랑 같은 기수로 들어온 놈이니까요.”
“3군의 마상철? 완전 초짜 놈이잖아. E급 주제에 뭔 수로 여기까지 기어 올라온 거야? 버스라도 탔나?”
“아마 그럴 겁니다.”
버스. 고레벨 입주자가 저레벨 입주자를 파티를 맺고 메인 퀘스트만 뚫으며 단기간에 승강의 방을 뚫어 주는 작업을 말한다.
하지만 버스를 타 봐야 그만큼 레벨링이나 경험이 따라 주지 않는다. 보통, 아파트에서 랭커를 노리는 입주자라면 절대 추천하지 않는 방법이다.
“버스를 탔다면 100% 개 호구 새끼지.”
이들은 세현을 버스를 탓을 것이라 단정 짓고 계속 추격했다.
세현의 흔적은 인적이 드문 막흐잔의 골목 안쪽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10여 분을 더 쫓았을 때, 주변에 사람이라곤 한 명도 보이지 않는 막다른 골목에서 세현과 그 일행을 찾아낼 수 있었다.
“워허, 어쩌나. 더 이상 도망도 못 치겠네.”
“야, 저 남자 새끼 재끼면 내가 여자랑 좀 놀아도 되냐?”
“뭐 그거야 마음대로 하십쇼.”
블루울프들은 뭐가 그리 신이 났는지 광소를 흘리며 포위망을 좁혀 왔다.
세현은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며 대꾸했다.
“아파트 돌아가는 꼬라지 봐라, 명색이 대형 길드원이라는 놈들이 쓰레기 짓이나 하고 있으니.”
“병신 새끼, 아파트에서 쓰레기는 니 같은 E급 놈들을 말하는 거다.”
“아, 그래? 그럼 E급 쓰레기 맛 좀 한 번 봐라.”
손가락을 딱 하고 튕기자 그들의 후방에 둘, 세현의 바로 옆에 두 개의 연기가 작게 소용돌이쳤다.
잠시 후 그 자리에는 네 명의 잔영이 나타났다.
셋은 검은색 몸을 가졌고, 하나는 흰색의 몸을 가진 인간형의 무언가였다.
“뭐, 뭐야? 몬스터?”
헨더슨은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직감했다.
세 마리의 검은색 몬스터, 저것을 자신이 몇 달 전에 상대해 본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단 한 마리가 그 당시 헨더슨이 상대하기 벅찰 정도로 강했고, 그 때문에 기절한 허세현을 버리고 도망쳤었다.
그런데 그때의 그 몬스터를 허세현이 소환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