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
46화.
술자리는 전체적으로 지루했다. 계속 분위기는 은철을 위주로 돌아갔기에 이게 동창회인지, 연예인 팬 미팅인지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분위기가 지루한 탓일까? 윤병종이 세현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귓속말을 건넸다.
“야, 허세현. 우리 나가자.”
“어딜?”
“솔직히 지금 존나 재미없잖아. 나가서 우리 둘이서 마시자. 입주자들끼리 썰이나 좀 풀자고.”
“음…… 뭐 그러자.”
허세현 또한 지금 자리가 불편했기에 두 사람은 화장실을 가는 척하며 적당히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러곤 길거리에 있는 싸구려 포차에 자리를 잡고 소주를 한두 병씩 까기 시작했다.
“크으~ 그 김현 개새끼, 최은철 따까리 짓하던 새끼가 지금도 그 짓을 계속하잖아. 남자 새끼가 쪽팔리지도 않나?”
“야야, 적당히 마셔라, 윤병종.”
“오늘 같은 날 마셔야지, 인마. 너, 허세현 인마. 난 너가 입주자 한다 그래서 깜짝 놀랐다 인마…… 하도 성격이 독한 새~끼라서 임용 붙었을 줄 알았더니. 왜 입주자 하고 있냐?”
“남 아픈 데 그만 찔러라.”
말은 이렇게 하지만 세현은 윤병종이 자신을 측은히 여겨 이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쇄끼, 기죽지 마라. 이 윤병종이. 이 행님이 잘나가서 너 캐리해 줄게 인마!”
“그래, 고맙다.”
“야, 이 행님이 선물 하나 주께.”
윤병종은 마스터키를 열어 조작했다. 그러자 주황색 빛이 살짝 일며 세현에게 메시지 하나가 출력됐다.
[‘윤병종’ 님이 아이템을 전송했습니다.]
인벤토리를 열어 보자 그 안에는 초심자들이 사용하기 적당한 아이템 여러 개가 들어와 있었다.
말이 좋아 초심자용 아이템이지, 그래도 렙제가 0~15까지 고루고루 섞여 있어 다 합치면 못해도 돈 백은 나올 수준이었다.
세현은 울컥하는 마음을 진정시켜야 했다.
큰 도움이 되는 수준의 아이템은 아니지만, 타인에게 이런 호의를 받아 본 것이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윤병종, 이거 그래도 돈 백 할 텐데 정말로 나 줘도 되냐?”
“야, 내가 한 입 가지고 두말하는 거 봤냐? 입주자 초장기에, 그것도 E급이면 너 존나 뺑이치고 있을 거 아냐. 그거 가지고 열심히 사냥해서 나중에 성공하면 갚아, 인마.”
“그래, 나중에 내가 꼭 갚는다.”
“꼭이다 이 새끼, 오늘 약속했어. 나중에 말 바뀌면 안 된다?”
“그래그래~!”
그 순간, 세현은 울컥하는 느낌이 들었다.
평생 뒤통수 맞고, 무시만 당했기에 타인에게 호의를 받는 것이 생소했기 때문이었다.
“고맙다, 윤병종.”
세현은 이 고마움을 언젠간 꼭 갚겠노라 다짐하며 술잔을 부딪쳤다.
† † †
“주군, 오셨습니까!”
이사를 마친 후, 아파트 8층 집으로 돌아오자 세이메이는 주인 기다리던 강아지처럼 달려 나와 꾸벅 인사를 건넸다.
“그동안 별일은 없었어?”
세현은 피식 웃으며 치킨 박스를 내밀었다.
세이메이는 감격스러운 얼굴로 그걸 받아 들며 대꾸했다.
“네! 공주님께서 전갈로 안부를 물어 오신 것 외에는 별다른 일은 없었습니다. 아, 그리고 왕궁 요리사가 만든 경단을 보내 주셨습니다.”
세이메이가 벚꽃 모양의 경단이 담긴 목함을 내밀었다.
세현은 하나를 집어 입으로 우물우물 씹었다. 은은한 꽃향기와 달착지근한 맛이 일품이어서 기분이 좋아지는 듯했다.
‘그건 그렇고, 이거 이미 하나 먹었구만…….’
갯수가 하나가 부족한 것이 세이메이가 참지 못하고 몰래 먹은 것 같았다.
경단 간의 간격을 재배치해서 티가 안 나게 한다고 한 모양이지만, 꽤 티가 나서 바로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세현은 남은 경단을 모두 세이메이에게 건네줬다.
“많이 먹어 둬, 한동안 바빠질 테니까”
“넵!”
세이메이는 신난 초등학생처럼 쪼르르 달려가 치킨 박스와 경단을 입에 넣었다.
체구도 큰 편이 아닌데 대체 어디로 저 많은 음식이 들어가는지 미스터리였다.
‘잘~먹네.’
살뜰하게 뼈를 발라 먹고, 치킨 무까지 맛깔나게 먹는 모습에 세현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잘 먹었습니다, 주군! 오늘 먹은 닭 요리는 저번보다 크기가 더 작아진 것 같군요.”
“뭐 치킨 작아지는 게 하루 이틀이어야지……”
대충 짐을 정리한 후, 둘은 승강의 방을 이용해 12층으로 올라갔다.
“다음 계획은 어떻게 되십니까, 주군?”
“메인 퀘스트 진행 속도는 슬슬 늦추고, 민들레 씨앗 레이드 준비할 거야.”
오늘부로 19층이 클리어된 지 꼭 86일이 지났다.
이는 2주 후면 아파트 정상에 놓인 민들레가 전 세계로 괴물이 담긴 ‘씨앗’을 날려 보낼 것이라는 걸 의미했다.
“그, 그게 뭡니까?”
“아, 거주자들은 잘 모르나?”
세이메이가 처음 듣는다는 반응을 보였기에 세현은 차근차근 설명을 해 줬다.
모든 얘길 들은 세이메이는 난처한 얼굴로 대꾸했다.
“아파트의 밖에서 전투가 벌어진다는 겁니까? 그럼 소인은 주군을 도울 수 없겠군요.”
“그렇지.”
세이메이는 기본적으로 아파트의 거주자다.
하지만 거대 보스는 아파트 외부에서 쏘아지는 민들레 씨앗에서 나온다.
이는 놈들을 아파트 밖에서 상대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고, 거주자인 세이메이는 여기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쉽군요. 주군과 함께할 수 없다니.”
세이메이는 아쉬운 듯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뭐,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일단 할 수 있는 걸 하자고.”
“알겠습니다…….”
Level 17. 하사신
12층에 도착한 세현은 곧장 자신이 기억하던 <석양의 추적자>가 있는 장소로 향했다.
이곳의 메인 퀘스트의 시작은 그 조건이 꽤 까다로운 편이었다.
무조건 <석양의 추적자>를 만나는 것으로 시작해야 하는데, 그 장소가 꽤 찾기 어려운 위치에 있다.
퀘스트를 진행하는 상위권 길드들은 경쟁자를 만들고 싶지 않아 이에 대한 정보를 풀지 않는다. 때문에 정보력이 없는 입주자는 시즌2 최초 클리어가 나올 때까지 메인 퀘스트 시작조차 못 해 보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세현은 이미 그 장소가 어딘지 훤히 알고 있다.
‘여기다. 여름사막의 오아시스.’
<여름사막의 오아시스>.
이는 사막에 있는 오아시스를 뜻하는 말로, 시간마다 변하는 신기루로 인해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는 게 매우 어려웠다.
게다가 이 ‘여름사막’이라 불리는 필드에는 몬스터가 득실대 어설픈 입주자는 감히 발을 들이지 못하는 장소였다.
하지만 세현은 신기루의 시간대 별 등장 패턴을 알고 있다. 오히려 이를 역으로 사용해 오아시스의 위치를 추적할 수 있는 것이었다.
“좋아. 슬슬 가 보자.”
“네, 주군!”
오아시스에 도착한 후, 블랙 나이츠와 두 마리의 폰을 소환시킴과 동시에 가면과 왕관을 장착했다.
세이메이는 한 손에 핸디 캠코더를 들고 세현의 모습을 촬영했다.
세현은 별안간 오아시스 안으로 풍덩 빠져들어 헤엄을 쳤다. 그리고 바닥에 놓인 기계식 스위치를 아래로 힘껏 잡아당겼다.
철컥-!
그러자 오아시스의 문이 안으로 빨려 들어가며 지하로 향하는 계단이 나타났다.
두 사람은 망설임 없이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샤아앗! 고, 공격!!”
마치 개미굴같이 만들어진 지하도에는 창과 방패로 중무장한 리자드맨이 등장했다.
보통 리자드맨의 레벨은 30~35 정도로, 한 개체의 전투력은 평범하지만 지능이 높아 집단 전투에 능하다.
세현 일행은 리자드맨들을 제거해 가며 지하도를 탐색했다. 자칫 잘못해서 길을 잃으면 곤란해지기에 쓸모없는 아이템을 적당히 바닥에 떨구며 앞으로 나아갔다.
“샤아아앗! 눼놈들 여긴 아무나 올 수 있는 고시 아늬다!”
한참 진행을 하던 중, 키가 다른 놈보다 1.5배 정도 큰 붉은색 리자드맨이 부하들을 이끌고 나타났다.
저놈은 이른바 <십부장>이라 불리는 개체.
놈이 있는 무리는 좀 더 전술적으로 움직일 뿐 아니라 능력치 버프가 있기에 각별한 주의를 요했다.
아마 전생의 세현이 저놈들을 혼자 사냥하려면 못해도 50레벨은 돼야 했을 것이다.
“샤아앗!! 고, 공겨어어억!”
십부장의 외치자 리자드맨들이 일제히 산개해 앞으로 내달렸다.
그 모습이 칼같이 일사불란해서 마치 잘 훈련된 군인들을 연상시켰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느리다 느려.’
세현이 씨익 입꼬리를 올리는 순간.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가장 앞에서 달려오던 리자드맨의 머리통이 수박처럼 터져 버렸다.
화이트 폰이 날린 화살이 머리에 명중한 탓이었다.
당황한 리자드맨들이 그제야 방패를 들어 올렸지만 이미 상황을 되돌리기엔 늦은 상태였다.
“주군, 가두겠습니다!”
리자드맨들의 뒤편에서 두 마리의 오니가 벌떡 솟아나 퇴로를 막았다.
촤아악-!
이후, 세이메이의 포박 주술이 날아가 리자드맨 한 마리의 몸을 옭아맸다.
앞에는 적, 뒤에는 오니 두 마리, 그리고 한가운데는 포박 주술의 사슬 때문에 움직임이 제약되는 상황.
리자드맨들은 패닉에 빠졌고 일순간 진형이 붕괴했다.
“샤아아앗! 다, 당황 마라롸!”
십부장이 리자드맨들을 진정시키려 하는 듯했지만 이미 늦은 상태였다.
콰드득-!
블랙 나이츠가 메뚜기처럼 펄쩍 뛰어올라 십부장의 머리에 백염의 송곳니를 박아 넣었다.
커다란 십부장의 몸이 그대로 세로로 갈라지며 허공에 피의 분수를 흩뿌렸다.
“샤아아아아아드! 사, 살뤄 줘!!”
블랙 나이츠가 놈들 사이를 폴짝폴짝 뛰며 정신없이 휘저었고, 그 사이로 블랙 폰이 뛰어들어 전투를 도왔다.
그리고 화이트 폰이 날리는 화살이 리자드맨들의 머리통을 하나씩 터뜨렸다.
‘좋아, 신상품 테스트나 해 보자.’
전투 도중, 세현이 기합을 내지르자 주변에 녹색 빛의 충격파가 퍼져 나갔다.
아이템 ‘잊혀진 왕의 왕관’에 있는 ‘왕의 함성’을 사용한 것이었다.
[왕의 함성이 발동됩니다! 아군의 이동속도가 일시적으로 30% 상승합니다.]
순간 녹색의 오오라가 아군의 몸에서 아지랑이처럼 피어 나가며 움직임이 눈에 띄게 빨라졌다.
소환수들은 입으로 ‘미쳤다.’라는 표현이 절로 튀어나올 정도로 압도적으로 리자드맨들을 찍어 눌렀다.
세현은 ‘왕의 함성’의 위력에 감탄했다.
‘이건 사냥이 아니라 학살이지.’
세현은 자울라눈 전투 이후 자신의 전투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했음을 느꼈다.
블랙 나이츠의 전투력이 이미 상식을 아득히 벗어난 범주인데다가 ‘잊혀진 왕의 왕관’이 내는 시너지 효과가 엄청났다.
어지간한 50~60레벨 입주자와 싸워도 이길 수 있을 거 같다는 오만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
“자, 세이메이. 슬슬 빠르게 가자.”
“네, 주군!”
전투력에 자신감을 가지게 된 세현은 대청소를 하듯 빠르게 지하도를 뚫어 나갔다.
세현 일행이 지나간 자리에는 몬스터들의 시체가 쌓였고, 이 과정에서 세현의 레벨도 슬슬 30고지를 바라보게 됐다.
“좋아, 여기다.”
이곳에 발을 들인지 1시간여가 지났을 무렵-.
막다른 벽, 세현은 그 위에 새겨진 문자들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더듬다가 어느 한 지점에서 멈췄다.
그러곤 손가락 끝을 통해 마나를 천천히 흘렸다.
콰과과!
그러자 막혀 있던 벽이 옆으로 열리며 그 자리에서 사람 몸채만 한 빛이 일렁였다.
이는 공간과 공간을 연결하는 포탈이었다.
“자, 들어가자.”
세현은 세이메이의 손을 붙잡고 거침없이 빛을 향해 뛰어들었다.
그 순간, 몸 전체가 푹 꺼지는 기분이 들었다.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감각, 두 사람은 실제로 지상을 향해 추락하고 있었다.
“꺄아아아악! 주, 주군!”
“세이메이, 시키가미 소환!”
세이메이가 급히 시키가미를 소환했고, 두 사람은 이에 몸을 싣고 가뿐히 착지할 수 있었다.
“후우……. 도착했다.”
포탈 너머에 펼쳐진 아공간은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웠다.
석양이 비추는 주홍빛 하늘, 그것이 끊임없이 펼쳐진 거울 바닥을 비추고 있었다.
현실에 있을 것이라 믿기 어려운, 말 그대로 꿈같은, 초현실적인 공간이었다.
“그대들의 정체를 밝혀라.”
공간 전체를 울리는 웅장한 목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