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
45화.
“여보세요.”
[야, 너 허세현이냐?]
“누구?”
[하, 이 쇄끼~ 형님 목소리도 잊었냐. 나 윤병종이다, 새꺄.]
“아. 오랜만이다, 윤병종. 웬일이냐?”
윤병종, 대학교 시절 학회장을 하던 녀석이다.
병종은 곰 같은 덩치와 외모와 다르게 꽤 사근사근한 성격이었는데.
공부와 실기에만 매달리며 아싸나 다름없이 지냈던 세현에게 유일하게 들이대던 녀석이었다.
그 당시 학식이니 김밥천국이니 하는 곳에서 간간히 밥도 사 줬던, 세현에게는 나름 긍정적인 이미지로 남은 놈이었다.
[이번에 우리 과 동기 동창회 하잖아. 너 연락 받았냐?]
“어, 아니?”
[짜식, 그럴 줄 알았다. 그럼 이번에 와라. 얼굴 한번 보자. 이번에 최은철도 올 거야, 대박이지?]
“아 그게 내가 요즘 조금 바쁜…….”
적당히 거절하려던 찰나, 윤병종이 말을 가로챘다.
[야! 나는 안 바쁜 줄 아냐? 나도 요즘 입주자 생활하느라 바빠 죽겠다! 2년 만인데 얼굴이나 좀 비추고 가, 친구 좋다는 게 뭐냐.]
“음……”
[카톡으로 위치랑 시간 보내 놓을 테니까 꼭 와라! 꼭이다!! 안 오면 배신이야!]
병종은 일방적으로 말을 퍼붓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세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씨, 이거 곤란하게 됐네.”
애초에 사람들과 떠들썩하게 어울리는 걸 좋아하는 타입도 아니다.
거기에 싫어하는, 아니 증오하는 최은철을 만나야 한다는 사실이 껄끄러웠다.
‘어떻게 할까아……’
† † †
“야! 마셔!!!”
“위하여!”
바로 다음 날 저녁.
대학 동창회가 꽤 근사한 고급 중화 레스토랑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야씨, 대학 동기가 회장님 아들이니까 진짜 좋네.”
“야야, 회장님 아들이 뭐냐! 최은철 길드장님이지, 최은철 길드장!”
이곳은 한성 그룹의 음식 계열사에서 운영하는 고급 레스토랑 체인 중 하나였다. 동창들을 제외하곤 식당에 아무도 없는 걸로 보아 최은철이 이곳을 통째로 빌린 모양이었다.
“야야, 허세현. 오랜만에 만났는데 똥 씹은 표정 하지 말고 마셔 마셔!”
최고급 코스 요리를 앞에 두고, 불독같이 생긴 윤병종이 구석 자리에 앉은 세현에게 연거푸 술을 따랐다.
그는 여태 있던 얘기들을 떠들어댔는데, 아파트 입주 시험에 합격해 최근에는 D급 입주자로 활약한다는 모양이었다.
그의 왼쪽 팔목에 주황색 팔찌가 이를 증명하고 있었다.
‘조금 더운데.’
술이 한두 잔 들어가자 몸이 후끈해진 세현은 무심코 걸치고 있던 외투를 벗어 의자에 걸쳐놓았다.
그러자- 윤병종이 놀란 듯 눈을 둥그렇게 뜨며 말했다.
“야, 허세현. 너도 입주자였냐?”
‘아차……’
세현은 그제야 자신의 왼쪽 팔목에 붉은색 팔찌, 마스터키가 채워져 있다는 것을 자각했다.
“뭐, 살길이 막막해서 일 찾다 보니까 그리 됐어.”
“야! 진작 말하지 그랬냐. 그럼 이 형님이 물심양면으로 도와줬을 텐데!!”
“그러게 말이다.”
“하하, 뭐 어쨌든 잘 됐다! 앞으로 아파트에서 서로 도울 일 있으면 서로 돕고 살자.”
윤병종은 자신이 아는 아파트의 지식과 팁들을 세현에게 쏟아냈다.
당연히 다 알고 있는 내용이기에 피곤하긴 했지만,
그래도 좋은 마음에서 말해 주는 것이기에 세현은 이를 가만히 들어줬다.
그때, 등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고 꼴값을 해요 꼴값을. 윤병종, 너는 무슨 주황색 주제에 뭘 안다고 설치냐.”
“아, 김현? 너도 오랜만이다!”
짧은 모히칸 머리에 건들거리는 인상의 남자.
그는 세현과 병종의 의자에 팔을 하나씩 걸친 채 느끼한 얼굴로 둘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보란 듯 자신의 왼쪽 소매를 걷어 그 위로 녹색 마스터키가 드러나게 보였다.
‘이 새끼, 최은철한테 딱 달라 붙어 다니던 그…….’
김현의 얼굴을 보는 순간 세현의 미간이 반사적으로 찌푸려졌다.
이놈은 대학 시절부터 권력의 냄새를 맡고 최은철의 옆에 붙어 다니던 찰거머리 같은 놈이었다.
현재는 클래스 복권에서 B급에 당첨되어 ‘팔콘’ 길드에서 한 자리를 하고 있다는 모양이다.
전생의 세현이 죽기 전, 이놈도 팔콘 길드원들 사이에 섞여 있던 것이 똑똑히 기억했다.
죽이고 싶은 상대다.
“그건 그렇고 허세현, 너는 대학교 다닐 때 임용시험 본다고 그러지 않았냐? 입주자 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네.”
“시험이 그렇게 쉽게 안 되더라고.”
“아이고~ 그래도 그렇지 조금 더 해 보지 그랬냐. 너도 알겠지만 아파트에서 E급 클래스 가지고 제대로 먹고 살기 어려워요~ 못해도 D급은 돼야 대기업 애들이랑 비벼 보지.”
김현의 말은 명백히 E급인 허세현을 깔보는 시비조의 말이었다.
‘너는 내가 살생부에 꼭 적어 둔다.’
세현은 치미는 분노를 억누르고 가까스로 말을 이었다.
“하하, 그치. 너랑 병종이가 많이 도와주면 어떻게 안 되겠냐?”
“안 돼 안 돼, 내가 신이어도 D급 이하는 구제가 안 돼요.”
김현이 그 말을 꺼내는 순간이었다.
“야, 김현. 혀 뽑아 버리기 전에 입 다물어라?”
시종일관 웃음으로 분위기를 띄우던 윤병종이 맹수 같은 얼굴로 김현을 노려봤다.
“새끼 존나 예민하네, 내가 뭐 구라라도 쳤냐? 아파트에서는 D급도 못 되면 그냥 잘돼 봐야 전투에서 반병신 돼서 국가유공자 되는 거야, 그게 팩트라고. 차라리 레벨 조금 올려서 능력치빨로 바깥에서 노가다나 뛰는 게 훨~씬 낫다니까.”
“이런 씨발 새끼가. 입 다물라고 했지.”
분노한 병종이 김현의 멱살을 잡아 위로 확 잡아챘다.
“와씨, 병종이 사람 치겠다? 근데 어쩌냐, 네가 나 쳐 봐야 안마 수준도 안 될 텐데.”
“김현, 너 허세현한테 당장 사과해라.”
순식간에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야, 둘 다 그만해! 동창회에서 무슨 짓하는 건데!”
“야야야, 그만해! 누가 쟤들 좀 말려 봐!”
모두가 둘을 뜯어말렸지만 애초에 초인이나 다름없는 게 입주자들이다. 보통의 인간일 뿐인 동창들이 두 사람을 말릴 수 있을 턱이 없었다.
그때, 식당 한편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이 사람 어디선가 봤었는데.’
검은 정장을 입고 건장한 체격에 안경을 꼈는데 세현은 왠지 모르게 익숙한 느낌에 그를 빤히 쳐다봤다.
그러다 한순간 팟 하고 기억이 떠올랐다.
‘아, 저놈! 그때 백설희 씨한테 치근덕대던 그놈이군.’
정요셉, 팔콘길드의 인사팀 팀장인 그는 김현과 윤병종 사이에 끼어들어 둘을 제지했다.
“두 분 다 그만하시죠.”
윤병종은 콧김을 씩씩 내뿜으면서도 적당히 물러났지만, 김현은 노골적으로 불쾌한 감정을 표출했다.
“야, 네가 뭐라고 날 막냐? 새끼가 레벨 좀 올랐다고 살살 기어오르네.”
“길드장님 명령입니다. 지금 곧 도착하시니 입 닥치고 자리에 앉아 계시죠.”
정요셉이 말을 뱉는 순간, 김현의 얼굴이 똥 씹은 듯 굳어졌다.
“이 새끼가 요즘 툭 하면 최은철 이름을 파네.”
“명령은 명령이지 않습니까.”
“하, 참. 씨발 새끼 너 많이 컸다.”
“욕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길드장’이라는 단어 앞에 어쩔 수 없다는 듯 툴툴대며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게다가 정요셉이 김현보다 능력도, 레벨도 더 높기에 은근히 눈치를 보는 것도 있었다. 김현이 내세울 거라곤 최은철의 친구라는 점뿐이었다.
“미안하다, 허세현. 내가 이러자고 동창회 부른 거 아닌데.”
“신경 쓰지 마라.”
이후 몇십 분간 동창회는 잠시 어색한 침묵에 빠졌다. 다들 푸드 파이터 시합이라도 하듯 눈앞에 있는 음식과 술을 먹는 데 전념할 뿐이었다.
그러던 중, 똥 씹은 표정으로 앉아 있던 김현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전화 받았습니다. 네, 네, 알겠습니다.”
그는 전화를 끊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입을 열었다.
“최은철 길드장님……. 아니, 은철이 지금 올라온댄다. 내가 마중나갈 테니까 들어올 때 눈치껏 호들갑 좀 떨어 봐.”
그건 부탁이 아닌 명령이었다.
불쾌할 법도 하지만 누구 하나 토를 다는 사람은 없었다.
같은 대학 동창생이지만, 최은철은 한성 그룹의 후계자 중 하나인데다가 세계 최고급의 입주자다.
모두가 본능적으로 최은철이 다른 계급의 인간이라는 것을 알았다.
“얘들아. 은철 길드장님 오셨다!”
김현이 들어온 후 최은철이 이어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그러자 식당 직원들이 일제히 은철을 향해 직각 인사를 건넸다.
그 박력 있는 광경에 동창생들은 주눅이 들었는지 엉거주춤 일어나 최은철에게 한둘씩 인사를 건넸다. 심지어 어떤 놈은 고개를 살짝 숙이는 놈도 있었다.
“으, 은철아.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그러자 최은철은 사람 좋은 웃음을 해 보이며 동창생들을 맞이했다.
“아우 우리끼리 무슨 인사야. 다들 앉아 앉아.”
이후 모임은 뻔하게 흘러갔다.
“은철아, 요즘 엄청 바쁘지 않냐? 너 20층 공략 준비 중이라는 소문이 있던데.”
“네가 내 동창이어서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몰라, 진짜 틈만 나면 네 자랑하고 다닌다니깐?”
“여-윽시 최은철! 한국의 자랑, 아니 세계의 자랑 아니냐?”
“하하. 다들 고맙다.”
동창생들은 눈 뜨고 보기 민망할 정도로 은철의 뒤를 핥았다. 잘 보여 두면 콩고물이라도 떨어질까 싶어 다들 저렇게 필사적인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병종이 한쪽 눈썹을 추켜세우며 작게 읊조렸다.
“에휴, 벨도 없는 새끼들…… 같은 동창생들끼리 저러고 싶나?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세현아?”
“뭐, 돈도 가오도 최은철이보다 없긴 하지.”
“쇄끼~ 사람 할 말 없게 만드네.”
이렇게 구석에서 구시렁대고 있을 때, 멀리 앉아 있던 최은철이 병종과 세현 쪽으로 다가왔다.
“둘 다 오랜만이다. 너희 이름이?”
최은철이 잠시 머뭇거리자 윤병종이 핀잔을 던지듯 대꾸했다.
“야, 아무리 바빠도 동창생 이름은 좀 기억해라. 나는 윤병종, 얘는 허세현.”
“하하하, 미안 미안. 그건 그렇고, 두 사람 다 아파트에서 입주자로 활동하고 있나 보네?”
“아 그치.”
“그럼, 나중에 우리 길드 건물 놀러 와라. 남는 아이템 필요하면 줄 테니까.”
세현과 병종의 마스터키를 보고 인사치레 겸 던진 말인 듯했다.
두 사람의 마스터키 색을 확인하는 순간 묘하게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이 재수 없었지만 세현은 그러려니 하며 넘겼다.
“길드장님.”
“응?”
그때, 정요셉이 이 최은철에게 말을 걸었다.
“그 브레이브킹이라는 입주자가 또 영상을 올렸습니다.”
“……알겠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최은철과 허세현의 표정이 움찔했다.
‘저 새끼들 정말 집요하네.’
세현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느낌이 들었지만, 최대한 평상심을 잃지 않고 표정을 관리했다.
최은철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다들 잠깐만 놀고 있어. 볼일 좀 보고 올게.”
그러곤 정요셉과 함께 테이블에서 약 5~6m 떨어진 위치로 이동했다.
은철의 시야는 정요셉의 손에 들린 스마트폰에 고정됐다. 세현은 최대한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오로치 사냥 영상이구만, 저거 나름 자신작이지.’
작게 들리는 소리로 추측하건대 시즌 1, 오로치 전투에서 찍었던 영상인 모양이었다.
곁눈질로 보자 최은철은 뭔가가 탐탁지 않은 듯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오로치를 쓰러뜨린 거지요? 메인 퀘스트는 분명 오로치를 봉인하고 끝일 텐데…….”
“그것까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시즌1 메인 퀘스트가 더 이상 플레이가 안 되는 거랑 이거랑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일전에 경매장에 올라온 ‘요괴왕의 장막’도 이놈이 제작했다는 것 같고요.”
“하나 마나 한 얘기 그만하고 확실한 정보 가져와요. 근시일 내에 우리 쪽으로 끌어들이던지, 아니면 쳐내든지 해야 되니까.”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조사를 해 보니 상위권 길드들 소속은 아닌 것 같은…….”
“장난합니까? 상위권 길드 새끼들이 숨겨 놓은 카드면 어떤 일이 벌어질 줄 알고요?”
그들의 얘기를 엿듣는 순간, 세현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내가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긴 한가 보네.’
최은철에게 자신을 신경 쓴다 하니 괜히 기분이 좋아졌기 때문이었다.
얘기를 끝낸 최은철은 자리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