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
43화.
놈은 자신의 입에서 뿜어낸 보라색 연기를 기다란 창의 형태로 만들어 앞으로 집어 던졌다.
콰앙-!
그것이 충돌할 때마다 폭탄 터지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일대가 초토화됐다.
애꿎은 구울 수십만 고깃덩이가 됐지만, 놈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곤 광기 어린 웃음을 내뱉으며 창을 계속 내던졌다.
“아아아아악!”
처음엔 놈의 공격을 계속 피해 오던 사막 유령들이 하나둘씩 당하며 빠르게 숫자가 줄어들었다.
절망이 점차 더해 가는 상황.
자울라눈의 창과 구울들의 파상 공세, 이걸 이겨 낼 방법은 없어 보였다.
그때, 블랙 폰의 품에 안겨 있던 노인이 세현을 향해 외쳤다.
“이, 입주자님! 제게 방법이 있습니다!”
“빨리 말하쇼!”
“저, 저희 가문에는 사악한 마신들을 봉인하는데 사용됐던 가보가 대대로 내려져 왔습니다.”
그 순간 세현은 눈이 번쩍 뜨이는 느낌을 받았다.
‘아, 역시 다른 요소가 있구만.’
현재 퀘스트의 난이도는 말이 안 된다. 분명 숨겨진 공략법이 있을 터.
아마도 노인이 말하는 ‘가보’는 그런 요소 중 하나이리라.
“그게 어디 있는데요?!”
“저희 집, 지하에 있는 숨겨진 공간에 있습니다.”
“지금 거길 어떻게 가는데!”
순간 세현은 화가 치밀었다. 노인의 집이라면 이곳에서 빠르게 다녀온다 해도 30분은 족히 걸리는 거리다.
게다가 지금 이 공간은 인스턴트 던전이기에 세현이 빠져나가고 싶다고 빠져나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그때 세현의 곁에서 호통에 가까운 질문이 들려왔다.
“자네! 그 말이 진짜인가!”
고개를 돌리자 가면이 박살 난 사막 유령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오른쪽 눈에 상처가 새겨진, 샌드웜 지옥에서 수문장 일을 했던 남자였다.
“지, 진짜입니다! 한 번도 사용해 본 적은 없지만 저희 가문은 윗대에 훌륭한 요술사가 많았습니다. 그 가보는 분명 진짜입니다.”
노인의 말을 들은 남자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세현의 눈을 똑바로 마주한 채 말을 이었다.
“이대로 가면 우린 전멸일세. 지금 노인이 말한 그 물건이 우리의 희망이야.”
“희망이면 뭘 합니까! 난 여길 못 빠져나가는데!!”
“내가, 내가 그 램프를 가져올 테니 시간을 벌어 줄 수 있겠나?”
“예?”
“30분, 아니 20분만 시간을 벌어 준다면 내가 어떻게든 그 물건을 가지고 이곳으로 돌아오겠네.”
그 순간, 세현의 눈앞에 메시지 박스가 추가됐다.
[#. 메인 퀘스트 / 뱀과 술탄의 노래(3/3)에 새로운 조건이 추가됩니다.]
- (NEW) 사막 유령단장 ‘발리파 이븐 살라웃’이 ‘붉은 뱀의 램프’를 가지고 돌아올 때까지 20분을 버텨라.
남은 시간: 20분 00초
‘20분 버티기가 퀘스트 클리어 조건이라 그거지?’
상황을 파악한 세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외쳤다.
“발바닥에 불나게 갔다 와요! 세이메이!! 이 아저씨, 시키가미로 사형장 밖으로 넘겨줘!”
“알겠습니다, 주군!”
모든 일은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세이메이가 만든 제비 형태의 시키가미가 단장 ‘살라웃’을 싣고 사형장의 벽 위로 솟구쳤다.
† † †
“으아아아악!”
“구울들의 숫자가 너무 많아!”
“조금만, 조금만 더 버텨! 단장님이 곧 오실 거다!!”
사형장 내부의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허세현과 세이메이, 사막유령들은 죽을 각오로 전투를 이어갔지만 감히 ‘마신 자울라눈’에게 피해를 주지 못했다.
놈이 온몸에서 뿜어내는 보랏빛 연기는 자유자재로 변이했다.
어느 때는 거대한 창이 되고.
어느 때는 그물이.
어느 때는 거대한 코끼리가 되어 모두를 덮쳤다.
자울라눈과 구울들의 끊임없는 공세, 이로 인해 생명력 포션과 마나 포션은 바닥을 드러냈고 모두의 몸뚱이는 피범벅이 됐다.
‘제기랄, 작위 수여까지 썼는데 5분이나 남았나.’
세현은 이를 악물었다.
퀘스트 창에 남은 시간은 5분, 하지만 지금 상황으로 봐선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히든 카드였던 작위 수여를 쓰고도 이번만큼은 도무지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일시적으로 능력을 증폭시키는 고승의 염주도 이미 몇 개나 써 버린 상태였다.
그렇게 머리가 복잡한 와중, 시야의 사각에서 구울 한 마리가 세현에게 달려들었다.
“끼에에에에엑!!!”
“제기랄! 방심했……!”
미처 반응하지 못한 탓에 놈의 이빨이 오른쪽 어깨를 파고들었고, 주력 무기인 백염의 송곳니를 놓쳤다.
세현은 고통스러운 비명과 함께 몸부림을 쳤지만 구울은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놓아주질 않았다.
“주군!!!”
저 멀리 세이메이가 다급한 비명을 외쳤다.
하지만 본인에게 달라붙은 구울 무리와 자울라눈의 공격을 피하기도 버거운 상태, 도움을 바라는 것은 무리였다.
세현은 머리에 얹어진 왕관을 들어 구울의 얼굴에 반복적으로 내리쳤다.
“제길! 떨어……져! 이 거머리 같은, 새끼야!!”
그때였다.
촤아아악-!
진득한 파열음과 함께 놈의 머리통이 몸째 솟구치며 공중으로 흙빛 액체를 흩뿌렸다.
배후에서 나타난 블랙 폰이 창을 위로 찔러 놈을 떼어 낸 것이었다.
가까스로 위기에서 벗어난 세현은 숨을 가쁘게 내쉬며 생명력 포션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붉은 액체가 전신으로 온기를 전하며 상처 부위에서 스멀스멀 새살이 솟았다.
‘제기랄, 이제 포션도 끝이다.’
눈앞이 흐려지고 집중력도 바닥났다. 귀에는 허세현 스스로의 숨소리가 울렸다.
그때였다.
“주군!!!”
세이메이의 다급한 외침에 고개를 들자 보랏빛 창이 세현을 향해 돌진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너무 빠른 속도에 감히 피할 수가 없었다.
“제기- 커허헉!!”
보라색 창이 세현의 복부를 꿰뚫으며 붉은 피가 흩날렸다.
죽음의 감각이 새겨지며 흐려졌던 의식이 번뜩 깨어났다.
그 순간, 세현의 세계가 회색빛으로 변했다.
‘뭐, 뭐야?’
모든 세상이 제자리에 멈췄다.
하지만 세현의 의식만 여전히 생생히 깨어 있었고, 그사이 몇 줄기 사념이 머릿속으로 흘러들었다.
[시간의 봉인이 깨어납니다.]
[어때 지금, 내 힘이 필요하지 않나?]
‘제기랄…….’
사념의 존재가 말하는 힘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다.
곧 죽어도 그 힘을 사용하고 싶진 않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세현을 기다리는 건 죽음뿐.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네 망할 놈의 힘, 조금만 빌려줘.’
[좋다.]
그 말을 내뱉는 순간, 세상의 시간이 거꾸로 돌기 시작했다.
그 시간은 약 3~4초. 세현의 몸을 꿰뚫은 자울라눈의 창이 발사되기 직전으로 말이다.
[시간은 다시 흐른다.]
콰아아아앙-!
세현은 재빨리 몸을 옆으로 굴렸고, 자울라눈의 창은 뒤쪽에 처박혀 굉음을 내뿜었다.
[시간의 봉인이 조금씩 깨어납니다.]
정체불명의 메시지 알림까지 들렸지만, 일단은 당장은 이걸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하아…… 하아……. 정말로 죽었다 살아났네.’
당장의 위기는 벗어났지만 앞으로 남은 시간을 버텨 내는 것도 녹록치 않았기 때문이다.
“젠장 젠장 젠자아아아앙!”
세현은 이를 악물고 그렇게 몇십 초를 더 버텨냈다.
그러자, 마스터키가 메시지 하나를 전해 왔다.
[경험의 관리자가 저장할 수 있는 경험치의 최대량에 도달 했습니다. 소환수에게 경험치를 부여하세요.]
‘뭐야. 벌써?’
소환수의 경험치를 은행처럼 쌓아 두고 직접 투자할 수 있게 하는 ‘경험의 관리자’.
최대 저장 가능 경험치가 꽤 되는데도 구울을 워낙 많이 때려잡은 덕분에 벌써 가득 찬 모양이었다.
‘급한 대로 이거라도 하자.’
세현은 실오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경험의 관리자를 실행시켰다.
[경험치를 부여할 소환수를 선택해 주세요.]
1. 블랙 폰A / 레벨 28
2. 블랙 폰B / 레벨 24
3. 화이트 폰A / 레벨 23
거의 반사적으로 1번 소환수를 선택했다.
[블랙 폰A / 레벨 28에 경험치를 부여합니다. 원하는 수치를 선택해 주세요.]
‘생각할 시간 없으니까 몽땅 때려 박아!’
원래라면 세 소환수에 적당한 수준으로 경험치를 나눠 성장 수준을 균등히 맞춰 주는 게 가장 효율이 좋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시간이 없기에 1번 소환수에게 모든 경험치를 몰빵한 것이다.
[블랙 폰A / 레벨 28 > 레벨 29(이)가 됐습니다.]
[블랙 폰A / 레벨 29 > 레벨 30(이)가 됐습니다.]
곧이어 하나의 메시지가 추가로 들려왔다.
[‘블랙 폰A’의 레벨 30에 도달했습니다! 새로운 클래스 ‘블랙 나이츠’ or ‘블랙 비숍’으로 진급(프로모션)시킬 수 있습니다.]
[새로운 클래스로 진급 시 해당 소환수의 레벨은 1로 초기화됩니다.]
[진급(프로모션)시키겠습니까? YES / NO]
‘블랙 나이츠? 블랙 비숍?’
세현은 예상치 못한 새로운 상황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30레벨이 된 덕에 블랙 폰을 다른 클래스로 진급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이걸 어떻게 한다…….’
하지만 레벨이 1로 돌아간다는 설명이 마음에 걸렸다.
안 그래도 절망적인 상황에서 소환수 중 가장 강한 개체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된다?
그건 전멸을 의미했다.
양자택일의 선택을 내려야 하는 상황, 세현은 손톱을 까득 깨물며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아니야, 이대로 가면 어차피 전멸이야. 여기에 걸어 본다.’
그리고 빠르게 선택을 내렸다.
세현이 마스터키에 자기 의지를 전했다.
‘블랙 나이츠로 진급시켜!’
[‘블랙 폰A / 레벨 30’(이)가 ‘블랙 나이츠 / 레벨 1’로 진급했습니다!]
메시지가 들려옴과 동시에 블랙 폰의 몸에서 붉은 섬광이 뿜어내더니 작은 폭발을 일으켰다.
제 자리에서 붉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났고, 그 사이로 그림자 하나가 터벅터벅 걸어 나왔다.
말을 닮은 두꺼운 다리와 SF 슈트를 연상시키는 상체를 지닌 검은 몸의 전사였다.
그는 윤기 가득한 붉은 머리를 허리까지 길게 늘어트린 채 입김을 거칠게 뿜어냈다.
“어…….”
세현은 급히 소환수 상태 창을 열었다.
[#. 소환수 / 블랙 나이츠]
- 브레이브킹 군단의 히트맨 역할을 하는 검은 기사. 빠른 기동력과 공격력으로 적의 약점을 노린다.
- 레벨: 1
- HP / MP: 1900 / 900
- 힘(53) / 민첩(163) / 지능(31) / 체력(53)
▶ 패시브 스킬
- 기사도: 아군을 향해 움직일 때 이동속도가 10% 상승합니다.
▶ 액티브 스킬
- 리프어택 (소모 MP 80): 높게 뛰어올라 적을 공격합니다.
- 차징 (소모 MP 50): 앞으로 맹렬히 돌진해 적을 공격합니다.
‘뭐야 이 미친 스텟은.’
블랙 나이츠의 스테이터스는 1레벨 소환수의 것이라고 말할 범주를 한참 벗어나 있었다.
이 정도면 어지간한 중간 보스급 이상이나 되어야 볼 법한 수준이었다.
‘좋아, 이거라면 어떻게든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세현은 그 즉시 ‘왕의 명령’을 사용해 블랙 나이츠에게 공격 명령을 내렸다.
블랙 나이츠의 몸뚱이가 메뚜기라도 되는 양 공중으로 솟구쳤다.
그러곤 구울들이 좀비 떼처럼 한가득 모인 중심부로 추락했다.
콰아아아아앙!
지상에 충격파가 일어남과 동시에 구울들의 몸뚱이가 분쇄됐다.
블랙 나이츠는 족히 10m는 되는 크레이터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건, 괴물이다.’
세현은 경악했다. 블랙 나이츠의 능력이 자신이 상상했던 범주를 아득히 뛰어넘기 때문이었다.
‘이, 일단 레벨 업부터 시킨다.’
그 즉시 ‘경험의 관리자’를 열어, 조금 전 획득한 경험치를 몽땅 블랙 나이츠에 퍼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