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
37화.
하릴없이 거실을 두리번거리던 중.
‘저 문양이 유난히 많이 보이네.’
카펫에도, 커튼에도, 심지어는 베개까지도.
노인의 방안에는 붉은색으로 수놓아진 뱀의 문양이 유난히 많이 보였다.
“할아버지, 저 붉은 뱀 문양은 뭡니까?”
혹시라도 퀘스트와 관련이 있을까 싶어 미리 질문을 던졌다.
“저희 가문의 문양입니다. 모두 뿔뿔이 흩어져 있지만, 저희 가문 사람이라면 누구든 붉은 뱀 문양을 옷에 새겨 두지요.”
“으음, 그렇군요…….”
준비가 끝나고, 세 사람은 정류장으로 돌아가 사막왕도마뱀을 섭외했다.
라이더들은 하나같이 ‘샌드웜 지옥’ 근처에는 죽어도 안 간다고 손사래를 쳤지만, 돈을 더 얹어 주고 샌드웜 지옥에서 2km 떨어진 장소에서 내려 걸어 들어가는 걸로 합의를 봤다.
† † †
“여서 내리슈, 여기서 북쪽으로 2km만 걸어가면 관문이 있을 거유. 거기서 경비병들한테 허가증 넘기고 들어가면 되니께.”
세 사람을 내려 준 후, 라이더는 서둘러 돌아갔다.
혹시라도 샌드웜에 공격당할까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자, 그럼 걸어갑시다.”
세현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폰 셋을 미리 소환하고 노인을 따라 북쪽으로 쭉 걸어갔다.
20분쯤 걸었을까, 가파른 바위 협곡 아래에 관문 하나가 보였다.
수십 명의 병사가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
“거기 멈춰, 여기는 출입 금지구역이다. 죽고 싶지 않으면 빨리 돌아가.”
그들 중 하나가 걸어 나와 손을 펼쳐 세현을 막았다.
오른쪽 눈에 큰 상처가 난 30대 초중반 즈음의 남자, 혼자만 복장이 다른 걸로 보아 수문장쯤 되는 모양이었다.
“여, 여기 영주님께 받은 허가장이 있습니다.”
“아아 이거 참……”
노인은 기다렸다는 듯 품속에서 허가증을 꺼내 내밀었다.
수문장은 곤란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며 세현을 향해 이리 오라는 듯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세현이 가까이 걸어가자 그는 귀에 노인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보아하니 입주자인 것 같은데, 여긴 왜 들어가려고 하나? 여긴 열이 들어가면 아홉은 죽네.”
“저 노인 분 사정이 딱하잖아요.”
“딱하다고 죽으러 들어가? 아휴 영주님도 참, 이렇게 허가증을 막 내주시면 어떻게 하나……”
“응? 허가증을 막 내줘요?”
“저 노인네 손녀가 실종된 건 알겠지? 영주님이 그 아이를 꽤 아꼈었는데, 실종되고 노인네가 발광을 해 대니 영주님 딴엔 나름 배려를 해 준거지.”
순간, 세현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아하……. 이 퀘스트가 그렇게 연결될 수 있다 그거지?’
세현은 그제야 이 퀘스트가 어떻게 연결될지 대강 머릿속에서 그려졌다. 그리고 이게 단순히 여기서 끝나는 퀘스트가 아니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앞에 샌드웜 퀸이 있는 거 알지? 그러니까 되도록이면 들어가지 말고……”
“나으리! 안 됩니다요! 저는 꼭 들어가야 합니다. 여기서 손녀를 꼭 찾아야만 합니다요!”
수문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노인이 그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지며 애걸복걸했다. 다른 병사가 그를 회유해 보려 했지만 막무가내였다.
결국 수문장은 졌다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노인과 세현 일행을 안으로 들여보냈다.
“제발 부탁이니까 살아서만 돌아오게나. 당신들 죽으면 여러 사람 피곤해지니까.”
“알겠습니다~!”
세현은 적당히 손을 흔들며 샌드웜 지옥으로 향했다.
† † †
1km가량의 바위 협곡을 빠져나가자 이번엔 모래언덕이 겹겹이 펼쳐진 세상이 나왔다.
인간이나 동물의 것으로 보이는 뼈와 샌드웜 알이 겹겹이 쌓여 있어 을씨년스러운 풍경이 연출됐다.
이에 세이메이가 미간을 작게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주군. 이곳에서 여러 기운들이 느껴집니다.”
“맞아, 여긴 지렁이들이 드글드글하거든.”
세현은 전투태세를 취하며 말을 이었다.
“할아버지,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어떻게라니? 그게 무슨…….”
“여기 구경하려고 온 건 아닐 거 아냐. 정확히 뭘 할 건데?”
“……샌드웜 퀸이라는 괴물을 찾아갈 생각입니다.”
“으잉? 노, 농담하는 거지?”
노인의 말에 세현이 놀라 대꾸했다.
“그놈은 먹잇감을 튼튼한 실로 칭칭 감아 싱싱한 상태로 보관한다고 합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손녀도 아직 구할 수 있을 겁니다!”
“하아, 진심?”
세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게 거짓말은 아니다. 하지만 샌드웜 퀸의 먹이를 훔친다는 건, 곧 샌드웜 퀸이랑 한판 붙겠다는 말이다.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
“입주자께서는 오시지 않아도 됩니다. 저 혼자서라도 갈 생각이니까요.”
노인은 혼자 겁도 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노인네가 되면 다들 왜 저렇게 고집을 부리는지 몰라.”
세현은 어깨를 으쓱하고 몇 미터 떨어진 체 그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3분쯤 지났을까.
콰과과과과-!
멀리서 작은 모래 먼지가 일어나며 세현 일행을 향해 빠르게 다가왔다.
“1시, 6시 각각 한 마리!”
명령을 내리자 블랙 폰 두 명이 신속히 움직이며 세이메이와 노인의 곁으로 달라붙었다.
그 순간.
“끼에에엑!”
“주군!”
엄청난 포효와 함께 거대한 지렁이, 샌드웜이 모래를 뚫고 튀어나왔다.
세이메이가 포박술을 사용해 놈들의 몸을 재빨리 묶었다. 블랙 폰들은 기다렸다는 듯 장창 ‘백염의 송곳니’를 세로로 휘둘렀다.
콰드득-!
놈들의 몸통이 세로로 갈라졌고 녹색 피와 냄새나는 내장이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세현은 세이메이와 눈을 맞추며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세이메이, 계속 나올 테니까 템포 맞춰서 천천히 가자.”
“예!”
세현 일행은 최대한 안전하게 앞으로 조금씩 나아갔다.
두 마리의 폰이 앞뒤로 조금 떨어진 상태로 걸어가며 샌드웜의 어그로를 끌고, 화이트 폰과 세이메이는 안쪽에서 그들을 보조했다.
기본적으로 노인을 최대한 안전하게 지키는 것에 모든 역량이 집중됐다.
‘이거 퀘스트 분위기가 점점 요상해지는데.’
세현은 불길함을 느꼈다.
처음에는 그냥 이곳에서 샌드웜이나 몇 마리 잡으라 할 줄 알았다. 하지만 노인의 행동은 이곳에서 등장하는 최악의 몬스터로 모두를 인도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외줄 타기를 하듯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길 1시간여.
모래언덕 저 멀리 거대한 둥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곳엔 수많은 사람들과 동물들이 거미줄에 걸린 곤충 마냥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저거 족히 수백은 되겠는데.’
퀸을 지키는 샌드웜들은 먹잇감을 통째로 삼킨 후 체내의 마비 독으로 기절시켜 둥지에 모으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마비된 생물들은 신체 대사량이 극단적으로 줄어들어 약 한 달을 싱싱한 상태로 살아 있게 된다.
둥지는 여왕의 냉장고나 다름없는 셈이다.
“소, 손녀가 저곳에 있을 겁니다!”
둥지의 지옥 같은 모습을 본 노인이 홀린 듯 앞으로 달려 나갔다. 세현은 그의 뒷덜미를 낚아채 끌어당긴 후 다그치듯 외쳤다.
“당신 미쳤어? 지금 이대로 튀어 나가면 그냥 개죽음이야.”
“하, 하지만!”
“저~기 바위 위에서 잠깐만 기다려 봐.”
“아, 알겠습니다.”
노인은 세현이 가리킨 커다란 바위 위로 기어올랐다.
세현은 모래 바닥에 주저앉아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 이렇게 되면 샌드웜 퀸을 잡아야 되잖아.”
“왜 그러십니까, 주군?”
세이메이가 되묻자 세현은 손가락으로 둥지 너머를 가리켰다.
“저기에 존-나 센 놈이 있어.”
“역시 그렇군요. 저도 강대한 기운을 느끼고 있긴 했습니다만.”
“그런데 저 할배가 원하는 대로 하면 저놈을 100% 자극하게 될 것 같거든.”
“아마도 그렇게 되겠지요.”
“그래서, 그냥 튈까 고민 중이야.”
오로치도 잡은 세현이지만, 이번만큼은 스트레스가 컸다.
땅속에 있는 샌드웜을 사냥하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으음~ 머리를 맞대면 좋은 생각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랬으면 좋겠다. 이번 퀘스트는 뚫으려면 꼼수를 좀 써야 돼.”
두 사람은 지금 처한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지 잠시 논의했다.
만족스럽진 않았지만 나름 궁여지책이라고 할 만한 작전이 나왔고, 이를 실행하기로 금방 합의를 볼 수 있었다.
“좋은 생각인 것 같습니다, 주군.”
“그 좋긴 무슨, 내 말 똑바로 기억해. 작전 실패하면 바로 도망치는 거다. 알겠지?”
“넵!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세이메이가 손을 움직이자 꼭 사람만 한 크기의 종이 인형들이 땅 위에 소환됐다.
이것들은 ‘시키가미’라 불리는 소환수의 일종으로, 전투력은 거의 없지만 적은 마나로 소환이 가능해 여러모로 활용이 가능했다.
“시키가미, 모두 흩어져라!”
명령을 받은 종이 인형들은 둥지를 향해 일제히 내달렸다.
잠시 후, 그들의 뒤로 모래 바람이 일어나며 종이 인형들을 쫓았다.
세이메이가 다시 손을 움직이자 인형들은 더 관심을 끌려는 듯 폴짝폴짝 뛰기 시작했다.
“쿠어어어!”
그러자 약이 바짝 오른 샌드웜들이 모래를 뚫고 올라와 시키가미들의 몸을 낚아챘다.
“지금이다!”
콰득-!!
그 순간, 수십 발의 화살이 시키가미와 그를 집어삼킨 샌드웜들의 몸을 닭꼬치인 양 꿰어 버렸다.
이 화살을 발사한 것은 세현의 화이트 폰이었다.
“좋아. 이 페이스로 가자.”
마치 낚시를 보는 것 같은 과정.
이를 몇 번 반복하자 언덕 위에는 샌드웜의 시체가 겹겹이 쌓여 그 피가 모래를 적셨다.
샌드웜의 고약한 피비린내가 퍼져 나갔고 이것은 여왕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쿠구구구궁-!
격렬한 지진과 함께 모래가 개미지옥처럼 아래로 빨려 들어갔다.
“주군!”
“뒤로 물러서!”
잠시 후.
<꾸어어어어어어어어어!>
고막이 울릴 정도의 포효와 함께 모래 속에서 거대한 샌드웜이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그 어떤 동물에도 비견할 수 없는, 흡사 건물 하나가 통째로 뛰어오른 것 같은 악마적인 크기의 괴물.
놈의 머리 위로는 커다란 메시지 박스가 출력됐다.
[#. 보스 몬스터 / 샌드웜 퀸]
- 샌드웜의 여왕, 빠른 번식력과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녀가 사는 땅에 함부로 발을 들였다간 목숨을 잃게 된다.
등급: 유니크(C)
레벨: 45
HP / MP: 11000 / 7000
“아, 징글징글하다.”
세현이 퀸의 거대한 몸뚱이를 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 직후, 놈은 주둥이를 힘껏 벌리고 땅으로 추락했다.
세현은 곧장 작전 개시를 선언했다.
“지금이다!”
그 순간, 세이메이가 손을 움직이자 옆에서 6~7m 크기의 거대한 요괴 두 마리가 샌드웜 퀸의 착지점에 소환됐다.
이놈들은 ‘오니’라 불리는 요괴로, 특별한 스킬은 없지만 완력 하나만큼은 대단했다..
“퀸이 모래 속으로 못 들어가게 막아!!”
두 오니가 양팔을 크게 벌려 샌드웜을 막아섰다.
“두어어억!”
오니들은 악에 받친 괴성을 내지르며 퀸의 몸뚱이를 막아냈다.
그렇게 2~3초를 버티자 수십 갈래의 사슬이 날아들어 놈의 몸을 칭칭 감았다.
“주군! 잡았습니다!”
이는 세이메이의 주특기 중 하나인 포박술이었다.
하지만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사슬은 당장이라도 끊어질 듯 흔들렸다.
세이메이가 가진 마나를 사슬에 한계까지 불어넣자 악다문 이빨 사이로 피가 배어나올 정도였다.
“오케이, 조금만 버텨!”
그 순간, 두 마리의 블랙 폰과 허세현이 사슬을 타고 위로 빠르게 내달렸다.
“끼에에에엑!”
위기를 감지한 새끼 샌드웜들이 사슬 쪽으로 뛰어올랐다.
하지만, 이내 화이트 폰이 날린 화살 수십 발이 놈들을 꼬치로 만들었다.
여왕과의 거리는 점점 좁혀지고 있었다.
“머리의 숨구멍을 노려!”
세현의 외침과 동시에 앞서던 블랙 폰 한 마리가 놈의 등을 향해 뛰어올랐다.
그리고 한가운데 위치한 사람 머리통만 한 구멍에 창을 있는 힘껏 쑤셔 박았다.
이것은 숨구멍, 고래와 같이 샌드웜이 호흡을 할 때 사용 하는 기관이었다.
콰드드득-!
녹색 피가 공중으로 치솟으며 숨구멍이 크게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