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
31화.
Level 11. 백염의 오로치
벚꽃성 아래 놓인 거대한 벚꽃 나무.
50m가 넘는 나무가 벚꽃을 눈처럼 뿜어내는 광경은 보는 사람의 마음을 녹이기에 충분했다.
세현은 그런 벚꽃 나무 아래를 똥이라도 씹은 듯 불쾌한 얼굴로 걷고 있었다.
“으으으, 머리야……. 어제 너무 달렸나.”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탁탁 두드렸다.
어젯밤, 백설희와 진탕 술을 퍼마신 덕분에 숙취가 온 탓이었다.
‘뭐, 그래도 재미있었으니 됐지.’
반나절이라는 피 같은 시간을 날렸지만, 세현의 마음은 오히려 충만해졌다. 이렇게 누군가와 술을 마시고 회포를 푸는 것 자체가 오랜만이기 때문이었다.
F급 입주자로 아득바득 살아왔던 허세현의 삶, 거기엔 일말의 여유라곤 없었다.
그렇기에 어제 같은 경험은 아주 각별한 것이었다.
“좋아, 신나게 놀았으니 이젠 달리자고.”
짝-!
손바닥으로 두 뺨을 탁탁 두드렸다. 얼얼한 느낌과 함께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멈추시오, 입주자. 무슨 용무로 찾아왔는지 밝히시오!”
벚꽃성 정문으로 다가가자 일본풍 갑옷의 병사 둘이 앞을 막아섰다.
세현은 양팔을 들어 올리며 사람 좋은 얼굴로 대꾸했다.
“공주님이 용~맹한 입주자를 찾고 있다면서요. 그게 바로 접니다.”
실제로 사쿠라신의 곳곳에는 벚꽃공주가 용맹한 입주자를 찾고 있다는 벽보가 붙어 있었다. 그걸 보고 성을 찾아가는 것이 메인 퀘스트의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흠, 뭐 그렇다면 몸수색을 하겠소. 성안에는 무기를 들고 들어갈 수 없소.”
“네네, 마음~껏 하세요.”
안전상의 이유로 입주자는 무기를 장착한 상태로 성내로 들어갈 수 없다.
세현은 양팔을 벌려 그들이 편하게 몸수색을 할 수 있게 도왔다.
그러던 중, 병사들은 세현의 허리춤에 달린 검집을 보고 흠칫 놀랐다.
“입주자 양반, 이 무기는 뭡니까?”
“아, 그거요? 삼작 마사무네 선생이 만들어 준 겁니다.”
천연덕스레 대꾸하자 병사는 화들짝 놀라며 되물었다.
“마, 마사무네 선생이? 당신 뭐 하는 사람입니까?”
그들은 대충 몸수색을 끝내고, 세현을 안으로 들여보냈다.
‘이 반응은 언제 봐도 재미있단 말이야.’
이는 벚꽃성에 들어갈 때 마사무네가 제작한 무기를 가지고 가면 벌어지는 일종의 이벤트였다.
원래라면 공주를 만나기 위해 안에서 귀찮은 과정을 몇 번 더 거쳐야 하지만, 마사무네의 장비를 소유한 자는 그 과정을 생략할 수 있었다.
그만큼 마사무네라는 존재의 명성은 시즌1 구간에서 대단한 것이었다.
“따라오시지요.”
성 내부로 들어가자 안내역 병사 한 명이 세현을 안쪽으로 안내했다.
‘여긴 언제 와도 눈 돌아가게 화려하단 말이야.’
벚꽃성이라는 이름에 어울리게 곳곳에 벚꽃 문양이 새겨진 화려한 성의 내부가 세현을 반겼다. 마치 한 폭의 그림 위를 직접 걷는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였다.
성 내부의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가자 그 끝에서 거대한 문이 나타났다.
병사는 문을 두드리며 정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공주님, 벽보를 보고 온 입주자 한 분을 모시고 왔습니다.”
“들라 해라.”
드르륵-!
안으로 들어서자 작은 체구의 소녀가 세현을 맞이했다.
분홍빛 머리카락과 눈동자, 말 그대로 여신이나 꽃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소녀였다.
그녀의 이름은 <벚꽃공주>, 3~10층 구간으로 이뤄진 시즌1 구간 전체를 다스리는 어린 군주였다.
“당신은 어쩐 일로 이곳을 찾으셨는지요.”
“허세현이라 합니다. 용기 있는 입주자를 찾으신다 들었습니다.”
세현은 단도직입적으로 목적을 말했다. 그러자 공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허세현 공, 당신은 입주자이시지요?”
“네.”
“백염의 오로치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으시겠지요?”
“물론입니다.”
작게 끄덕였다.
여기서 모른다고 대답하면 벚꽃공주가 오로치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해 주지만, 세현은 이미 알고 있기에 넘겨 버린 것이다.
“봉인에서 풀려난 재앙, 저희 벚꽃국을 멸망시킬 뻔했던 백염의 오로치는 ‘최은철’ 공과 그분의 동료들에 의해 봉인됐습니다. 하지만…….”
‘기분 더럽네.’
각 시즌을 최초로 클리어한 자는 아파트의 역사가 된다. 그렇기에 백염의 오로치를 최초 클리어한 최은철과 팔콘 길드는 벚꽃국에서는 전설 속 영웅처럼 취급되는 것이다.
아파트의 규칙 때문에 벚꽃공주의 입에서 저놈의 이름이 나오는 거겠지만, 괜히 속이 뒤틀리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퀘스트를 받아야 하기에 지금은 입을 꾹 다물고 공주의 말을 경청했다.
“최근 오로치의 봉인에 균열이 생겼습니다. 만약 놈이 다시 풀려난다면 벚꽃국은 또다시 위험에 빠지겠지요.”
공주는 잠시 말을 쉬는 틈에 세현은 결연한 목소리로 한마디를 던졌다.
“그런 일이라면 제가 돕겠습니다.”
“진심이십니까? 아주 위험한 일이 될 겁니다.”
벚꽃공주가 격양된 목소리로 외치자 세현의 눈앞에 메시지 박스 하나가 출력됐다.
[#. 애프터 메인 퀘스트 / 벚꽃공주의 소원(1/4)]
- 백염의 오로치를 가둔 봉인이 약해지고 있다. 벚꽃공주를 도와 다시 봉인을 강화시켜 오로치를 막아야 한다.
적정 레벨: 30
▶ 보상: 타이틀 ‘오로치를 다시 봉인한’
- 체력: +5
[수락하기]
세현은 망설임 없이 수락하기 버튼을 터치했다. 그러자 벚꽃공주는 감격한 얼굴로 걸어 나와 세현의 손을 꼭 붙잡았다.
“감사합니다, 용감한 입주자여.”
손등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살결의 촉감.
인형같이 예쁜 얼굴을 바로 앞에서 마주하자니 심장에 안 좋았다.
세현은 애써 시선을 피하며 다음 말을 이었다.
“감사는 됐고, 일단 뭐부터 할지 말해 주세요.”
“봉인을 강화하기 위해선 왕궁의 지하에 있는 아마테라스의 미궁의 시련을 이겨내고 ‘삼신기’를 가져와야만 합니다.”
삼신기. 쿠사나기의 검, 야타의 거울. 야사카니의 곡옥까지 세 개의 비보를 뜻하는 단어다.
애프터 퀘스트 <벚꽃공주의 소원>은 왕궁 지하의 아마테라스의 미궁에서 세 개의 비보를 모으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 시련의 난이도가 꽤 되기에, 어중이떠중이 입주자들은 이 단계에서 꽤 고전하는 게 보통의 흐름이다.
“허세현 공을 미궁으로 안내하거라.”
“네!”
옆에 대기 중이던 병사가 세현을 곧장 안내했다.
그를 따라 지하로 이동하자 부적이 덕지덕지 덧붙은 철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 옛날엔 여기 뚫느라 정말 개고생했지.’
<아마테라스의 미궁>.
3~10층에 위치한 던전 중, 10층의 오로치전을 제외하면 가장 난이도가 높은 곳이다.
세현은 씨익 미소 지으며 철문을 밀고 들어갔다. 그러자 가파른 바위산 아래로 거대한 미궁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하늘에선 직경 3m가량의 아마테라스의 태양이 미궁 전체로 고르게 빛을 내뿜어 내부를 한낮처럼 밝히고 있었다.
“여긴 엄청나게 위험한 곳이니까 조심하슈. 혹시 빠져나오고 싶다면 이걸 쓰고.”
안내역으로 따라왔던 병사가 걱정스러운 듯 말하며 작은 깃털 하나를 건넸다.
이른바 <귀환의 깃털>이라 불리는 아이템으로 이를 손으로 꺾으면 사용자를 미궁 밖으로 탈출시켜 주는 능력이 있다. 잘만 활용하면 어지간한 위험 상황도 쉽게 탈출할 수 있는 물건이다.
“고마워요.”
“조심하쇼, 쩝……. 꼭 당신만 한 아들이 있어서 마음이 편치 않구만.”
“아아 걱정마세요.”
세현은 병사의 등을 떠밀어 문 밖으로 내쫓았다.
“그럼 또 한 판 시작해 보실까아~!”
일단 붉은 왕관과 가면을 장착하고 액션 캠코더의 녹화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내자 작은 소용돌이가 치며 세 명의 폰이 바로 소환됐다.
“자 아마테라스의 미궁을 딱, 5일 내로 돌파해 보자고.”
† † †
아파트의 5층, 인적이 드문 던전으로 향하는 초입.
이곳의 바위 절벽 뒤에 검은 옷의 남자 네 명이 따개비처럼 다닥다닥 붙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들은 얼마 전 허세현에게 탈탈 털려 유튜브에 얼굴이 뿌려진 노상강도 집단 <스마일단>이었다.
“오늘은 진짜 아무도 안 오나?”
“표강철, 어쩔 거냐? 우리 정말 조진 거 아녀?”
“진짜 이 짓 때려치우고 차라리 공무원 시험이라도 볼까.”
“야, 너 같은 빡대가리가 무슨 공무원 시험이냐.”
“이 새끼, 왜 디테일하게 시비냐?”
표강철 일행의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세현에게 신상이 털린 후, 적극적으로 강도질을 하기 어려워진 탓이었다.
이들은 어쩔 수 없이 애용해 왔던 이매망량의 숲 근방을 버리고, 다른 장소에서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
“그만 좀 찡찡대 새끼들아! 왜 또 지랄이야. 왜 왜 왜!”
“그야 브레이브킹이란 놈 때문에 뺑이 쳤으니까 그렇지. 너는 억울하지도 않냐?”
실제로 스마일단은 꽤 고생을 겪었다.
일단 그동안 애용했던 스마일 가면도 동물 가면으로 바꿨으며, 등장할 때 치던 대사도 바꾸고 새로 바꾼 대사에 맞춰 합을 맞추느라 꽤 애를 먹었다.
“그깟 유튜브 영상, 어차피 시간 지나면 다 잊혀져! 원래 사업이라는 게 잘될 때도 있고 안 될 때도 있고 그런 거지 호들갑은…….”
네 사람이 옥신각신하며 떠들고 있던 와중이었다.
“야, 닥쳐 봐, 저기 한 놈 온다.”
일행 중 하나가 손가락으로 한 방향을 가리켰다.
고개를 돌리자 정말 사람 하나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큰 덩치에 순하게 생긴, 호구 느낌이 진-하게 나는 남자였다. 그런 주제에 몸에 걸친 액세서리나 장비들은 척 보기에도 호화스러웠다.
“저거 돈 냄새가 풀풀 풍기는데?”
“그런데 저번처럼 강한 놈인 거 아니야? 장비를 저렇게 처발랐는데…….”
“야, 척 보면 모르냐? 어디 돈 많은 집 자식이 할 일 없어서 아파트 기어들어 온 거잖아. 목에 칼 들이밀고 겁 좀 주면 눈물 콧물 질질 흘리면서 아이템 전부 토할 거다.”
“저번에도 그랬다가 털렸잖아.”
“그런 일이 흔한 줄 아냐? 그땐 정말 개똥 밟은 거고. 아니면 요번 달 쫄쫄 굶던지.”
“하긴…….”
표강철의 감은 대체로 잘 맞기에 동료들은 적당히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게다가 요 몇 주간 소득이 거의 없기에 지금은 찬밥 더운 밥 가릴 때가 아니었다.
“야, 가자.”
강철의 명령을 신호로 전원이 동시에 아래로 뛰어내렸다.
지상에 착지함과 동시에 전원이 호구남을 순식간에 에워싸고 무기를 겨눴다.
“거기 멈춰!!”
“긴말 안 한다, 가진 거 다 내놔.”
하지만 네 사람의 기대와 다르게, 호구남은 전혀 당황한 기색 없이 대꾸했다.
“아우~ 드디어 찾았네. 니들이 그 브레이브킹인지 뭔가 하는 놈한테 털린 네 명 맞지?”
‘어라, 이 새끼 호구가 아닌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표강철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허세 부리는 거야, 아니면 진짜로 한 가닥 하는 놈인 거야?’
위화감이 들었지만, 강철의 머리에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한동안 강도질을 못 한 탓에 주머니가 텅텅 비었기 때문이었다.
“야! 제껴!”
외침을 신호로 네 명이 동시에 무기를 휘둘렀다.
“뭐야?”
“어, 어디 갔어 씨발!”
그 순간,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호구남이 눈앞에서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끄아아아아악!”
그 직후, 네 명이 동시에 앞 이빨이 박살나며 공중으로 날아갔다.
그들은 피가 줄줄 흐르는 입술을 부여잡고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호구남은 앞으로 저벅저벅 다가와 강철의 멱살을 붙잡아 번쩍 들어 올렸다.
“맞네 맞아, 유튜브에 나왔던 놈들! 네가 표강철 맞지?”
“케헤헥……. 누, 누구십니까? 왜 이런 짓을.”
“왜? 조금 전에 니들이 먼저 공격했잖아.”
“그, 그렇긴 하지만.”
구구절절 맞는 말이기에 강철은 별다른 대꾸를 하지 못했다.
“그건 그렇다 치고. 내가 팔콘 길드 인사팀장 ‘정요셉’이라고 하거든?”
“파, 팔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