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
30화.
“죄송해요, 달리 마음에 둔 곳이 있어서요.”
“아니 우리보다 나은 곳이 어디 있다고 그럽니까. 예?”
설희는 요셉을 떨쳐 내려 걸음을 재촉했다. 그러곤 스마트폰을 꺼내더니 뭔가를 타이핑했다.
철저한 무시의 신호였다.
“이런 씨발 것이. 사람이 이렇게까지 하는데 개무시를 해?”
부하들 앞에서 톡톡히 망신을 당한 요셉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험악해진 분위기를 읽은 부하들은 슬금슬금 뒤로 발을 물렸다.
요셉은 양발에 힘을 줘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쿵-!
거대한 몸뚱이가 백설희의 맞은편에 떨어지며 흙먼지를 일으켰다.
“야, 백설희. 조금 유명하다고 눈에 뵈는 게 없냐?”
“이게 무슨 짓이에요?! 피하세요.”
“네가 나대도 괜찮은 건 바깥세상 얘기야. 여긴 우리가 법이고 질서거든? 편하게 살고 싶으면 순순히 따라와. 안 그럼 평생 따라다니면서 귀찮게 해 줄 테니까.”
요셉은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하지만, 그 손을 잡은 건 설희가 아니었다.
“대에에에박! 팔콘 길드원 아니세요? 엄청 유명하신 분들이잖아요! 저 팬이에요, 팔콘 길드 광팬!”
더벅머리에 능글맞게 입꼬리를 올린 20대 초반쯤의 남자.
그는 밝게 웃으며 요셉의 손을 힘차게 위아래로 흔들었다.
당황한 요셉은 ‘어, 어……’라는 말을 반복하며 그에 맞춰 손을 흔들었다.
“와, 진짜 팔콘 길드 뉴스에서 많이 봤어요. 이번에 19층도 공략에 성공하셨다면서요? 저도 팔콘 길드에 들 수는 없을까요? 정말 가입만 시켜 주시면 열심히 할 텐데. 어때요?”
“저, 저기 내가 지금 좀 바빠서 그런데-.”
요셉은 더벅머리 남자를 멈추려 했지만 그는 멈추지 않고 일방적인 대화를 이어갔다. 상대의 페이스에 넘어가 버린 것이었다.
“아 제가 E급 클래스밖에 안 되는데 실력은 자신 있거든요! 레벨도 10이 다 돼 가는데, 역시 안 되려나요?”
“우리 길드는 최소 C급 이상만 자격시험을 봐서 길드 가입을-.”
“아 역시 그렇겠죠?”
“그럼 나는 이만…….”
“잠깐만요! 셀카… 셀카 한 장 같이 찍어 주세요!”
분위기에 휘말린 요셉은 더벅머리 남자와 함께 사진까지 찍어 주고야 말았다.
“워후, 감사해요! 팔콘 길드랑 사진을 찍다니 인생 최고의 영광! 페북이랑 인스타에 자랑글 꼭 올릴게요! 팔콘 길드 파이팅! 항상 응원해요! 정요셉 팀장님 짱짱맨! 만수무강하세요!”
그는 과장된 인사를 건네더니 유유히 반대편으로 사라졌다. 요셉은 그제야 한숨 돌렸다는 듯 이마의 땀을 닦아냈다.
“하아, 정신없네. 이놈의 인기란.”
그때, 뒤에서 대기 중이던 인사팀원들이 요셉을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보며 되물었다.
“저기 팀장님, 백설희가 사라졌는데 괜찮습니까?”
“뭐? 어디 갔는데!”
“그게, 조금 전 얘기하시는 사이에 도망갔는데요.”
“미친, 니들은 그걸 구경만 하고 있었어?!”
“팀장님이 다 생각이 있으신 줄…….”
요셉의 얼굴이 활화산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으아아아아! 이 빡통 새끼들아!”
요셉은 팀원들의 멱살을 붙잡아다 그대로 바닥에 내리찍었다. 쿵-! 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거친 기세였다.
“뭐야, 싸움 난 건가?”
“저 사람들 팔콘 길드 인사팀 팀원들이라던데?”
“왜 저러는데?”
“난들 아냐? 우린 그냥 팝콘이나 먹으면 되지.”
광장에 모인 입주자들은 흥미롭다는 듯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 † †
사쿠라신의 골목길 안쪽에 위치한 음습한 술집의 가장 안쪽 자리 백설희가 앉아 사케를 홀짝이고 있었다.
잠시 후, 한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와 그녀의 바로 옆에 걸터앉았다.
“괜찮아요? 아까 보니 그것들 엄~청 끈질기던데.”
남자의 이름은 허세현. 조금 전 팔콘의 인사팀장 정요셉과 셀카를 찍었던 인물이다.
퀘스트 때문에 사쿠라신 근처를 지나다 팔콘 놈들이 백설희에게 집적거리는 걸 우연히 보고 도와준 것이었다.
설희는 아직도 긴장이 가시지 않았는지 목소리를 가늘게 떨며 대꾸했다.
“감사해요, 세현 씨.”
“에유 뭘~. 그냥 말 몇 마디 한 게 다인데요 뭘.”
광장에서 설희가 팔콘 놈들과 실랑이를 할 때, 세현에게 한 통의 메시지가 왔다.
[허세현: 내가 시선 돌릴테니까 적당히 봐서 도망가요. 첨부한 위치에 있는 술집에서 이따 만납시다.]
이후 허세현이 등장해 정요셉을 마크했고, 설희는 그 틈을 타 팔콘 인사팀에게서 도망칠 수 있었다.
“하여간 팔콘 놈들, 언플은 겁나 하면서 하는 짓은 뒷골목 건달이에요, 아주.”
세현은 분노한 듯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마음 같아선 정요셉의 턱을 날려 버리고 싶었지만,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조금 전 돌발 행동도 잘못했다간 찍힐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나마 정요셉이 어리바리한 놈이어서 다행이었다.
“후우……. 그러게요.”
설희는 심란한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자자, 너무 쳐지지 말고 일단 한잔해요.”
설희의 표정을 본 세현은 싱긋 입 꼬리를 올리며 술잔을 내밀었다. 그러곤 자신의 잔도 가득 채운 후 사케를 단번에 들이켰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요?”
“으음, 세현 씨 덕분에 잘 지냈죠.”
설희는 지난 일들을 천천히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동안 혼자 사냥한 것치곤 레벨도 꽤 올랐고, 장비도 적당히 갖춘 상태였다. 이는 세현이 팁이랍시고 알려 준 공략을 충실히 지켜 온 덕분이었다.
그녀의 현재 레벨은 13, 이번 달 내로 15를 찍는 것이 목표라 했다. 세현에게는 못 미치지만 이것도 굉장히 빠른 속도였다.
괜히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띄워졌다.
‘확실히 운동선수 출신이어서 그런지 기본적으로 착실하네.’
한 잔 두 잔 술이 오가고, 적당히 취기가 오를 무렵.
설희가 입술을 가늘게 떨며 주제를 바꿨다.
“세현 씨, 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뭘요?”
“저 팔콘 길드에 찍힌 것 같아서요. 그러고도 아파트에서 지낼 수 있을까요?”
단도직입적인 질문.
희망적으로 말할지, 솔직히 말할지 가늠하기 위해 턱을 쓰다듬으며 잠시 고민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어렵죠. 그놈들 엄청 악랄해요. 사람 괴롭히는 거 하나만큼은 정말 천재적인 재능이 있는 놈들이니까.”
“역시 그렇죠?”
설희의 눈이 붉게 충혈됐다.
세현은 머쓱한 마음에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차라리 그냥 팔콘에 들어가는 것도 나쁜 선택지는 아닌데. 그놈들 하는 짓은 양아치 같아도 눈 밖에 나는 짓만 안 하면 돈은 확실하게 주니까…….”
“아뇨, 팔콘 길드만큼은 절대 안 돼요.”
“왜요?”
“개인적인 이유라 말씀드리기는 좀…….”
“아, 곤란하시면 말 안 해 주셔도 되요.”
대답하는 설희의 목소리엔 울먹임과 함께 분노가 서려 있었다.
‘뭔가 사연이 있겠지;’
팔콘의 영향력, 그리고 배후에 있는 한성 그룹의 영향력이 워낙 대단하니 그것과 관련이 있겠거니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
“세현 씨, 혹시 길드 만드실 생각은 없어요? 만드시면 제가 길드에 가입…….”
“미안한데, 생각 없어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세현은 딱 잘라 말했다.
‘지금 그랬다간 둘 다 죽지.’
팔콘을 포함해서 다른 대형 길드가 백설희를 영입하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있는 상황이다.
이 시기에 그녀를 위해 길드를 만들고 설희를 영입한다?
차라리 폭탄을 배에 두르고 살아남기를 기다리는 게 낫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정 팔콘이 싫으시면 큰 길드에 들어가요. 규모가 있으면 놈들도 쉽게 못 건드리니까.”
“추천하실 만한 길드가 있어요?”
“음, 예를 들자면…….”
세현은 신음 소리를 내며 잠시 상념에 빠졌다. 머릿속에 여러 길드의 조건들이 떠올랐다 사라지고 있었다.
“아!”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다가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내며 말을 이었다.
“<서큐버스 군단> 어때요? 거기 길드장이 실력 좋아요. 들어가긴 힘들어도 적어도 팔콘이나 다른 놈들이 찝쩍대진 않을 겁니다.”
설희는 고민하는 듯 가늘고 기다란 손가락을 꼼지락대더니 세현에게 되물었다.
“같이 가입하실 생각은 없으세요?”
“어휴~ 안 돼요 안 돼. 제 마스터키 안 보여요? 걔들이 저 같은 E급을 뭘 믿고 받아 줘요? 게다가 거기는 여자만 뽑잖아요.”
“하지만 저보다 훨씬 강하잖아요.”
발군의 전투 센스와 강력한 소환수를 자유자재로 부리는 능력, 그것을 눈으로 목도한 백설희기에 팔찌색 따위는 별로 중요치 않다 생각했다.
“안 강해요, 안 강해. 그냥 다~ 운빨입니다.”
“네……. 그럼 세현 씨 말대로 할게요. <서큐버스 군단>에 지원할게요.”
“준비 잘하세요. 설희 씨 정도면 그쪽에서도 양팔 벌려 환영할 테지만.”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요.”
“고맙긴 무슨, 팩트로 말하는 거예요.”
설희는 그제야 기운을 조금 되찾는 듯 보였다.
“아, 혹시나 해서 말 하는데 제 능력에 관해서는 길드에도 절대 말하지 말아 줘요.”
세현이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가며 오버스럽게 쉿-하는 소리를 냈다.
“헤헤, 그럼요. 당연하죠.”
이에 설희는 피식 웃으며 미소 가득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리고 <서큐버스 군단> 들어가게 되면 저 잊지 말고요. 참고로 제가 거기 길드장님 팬이거든요. 나중에 꼭 사인 받아 줘요.”
“넵!”
설희는 근사한 미소를 지으며 흔쾌히 대꾸했다.
순간 머리가 살랑 흔들리며 은은한 라벤더 향이 세현의 코끝을 찡하게 간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