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
26화.
<이히히히히힛!!>
동굴 근처에서 붉은 빛이 뿜어지며 요사스러운 웃음소리가 숲 전체에 울려 퍼졌다.
“자, 모두 준비해라! 이제 곧 요괴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백귀야행’이 봉인에서 풀려납니다!!]
세이메이의 외침이 무섭게, 동굴 입구에서 요괴들이 물밀듯 쏟아져 나왔다.
빙결 계열 마법을 사용하는 설녀.
강한 체력과 재생력을 지닌, 오우거에 버금가는 근접 전투력을 가진 오니.
전격 계열 마법과 근접 전투력을 고루 갖춘 커다란 코를 가진 괴물 텐구.
시체를 집어삼키며 점점 강해지는 아귀까지.
백귀야행의 봉인은 실로 요괴 종합 선물 세트라고 할 수 있을 구성의 몬스터들을 쏟아 냈다.
“속박의 술!”
음양사들이 일제히 주문을 외자 미리 설치해 놓은 술법 함정이 발동됐다.
그러자 바닥에 새겨진 술식과 부적에서 쇠사슬이 뻗어 나와 근방의 요괴들을 칭칭 감아 버렸다.
“화염의 술!”
그렇게 발목을 묶은 후, 음양사들은 손에서 화염을 뿜어내 놈들을 태워 버렸다.
대단한 위력이었지만, 요괴의 숫자가 너무 많은 탓에 놈들은 타 버린 요괴들의 시체를 뚫고 계속 밀려오고 있었다.
“설희 씨, 우리도 가죠. 버프 발동시켜 주시고요.”
“넵! 물론이죠.”
세현은 폰 두 마리를 소환시켰다.
백설희는 입을 열어 아름다운 노랫소리를 흘려보내 버프를 발동시켰다.
이는 팬텀싱어의 주력 스킬 중 하나인 <용기의 하모니>.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10분간 일대 아군들의 힘 스테이터스를 7%가량 상승시켜 주는 광역 버프 스킬이다.
다대다 전투에서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기에 팬텀싱어의 밥줄이라 할 수 있는 스킬 중 하나였다.
“음양사들이 커버 안 되는 쪽부터 먼저! 3시, 6시, 설희 씨는 9시 방향으로!”
“넵!”
버프를 받은 두 소환수와 설희가 세현의 오더에 맞춰 뛰쳐나갔다.
“오른쪽으로 돌아서 뒤잡아요! 강한 놈부터 끊어야 수월해져요!”
우선 타깃으로는 텐구, 오니 같은 강한 개체들을 먼저 노렸다. 놈들을 우선적으로 제거하면 음양사들이 보다 수월한 전투가 가능해지기 때문이었다.
‘기대한 것보다도 훨씬 잘하는데?’
설희는 금메달리스트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게 잘 싸워 줬다.
스펙 자체는 블랙 폰보다 조금 떨어지는 듯했지만, 몬스터의 패턴을 잘 파악하고 그 사각을 파고드는 전투 센스가 발군이었다.
그 덕분에 예상한 것보다 빠르게 텐구와 오니를 잘라 낼 수 있었다.
애초에 적정 레벨 25의 퀘스트에서 겨우 10레벨짜리 입주자가 활약을 한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다.
“부적이 부족합니다! 기도 다 떨어져 갑니다!”
“설녀의 빙결 마법을 막아!”
“아귀를 못 붙게 막아! 한 명이라도 먹혔다간 끝장이다!”
그렇게 백귀야행 전투는 몇 시간씩을 거듭해서 이어졌다.
‘……이거 깨라고 만들어 놓긴 한 거야?’
그 난이도가 워낙 극악한 탓에, 세현은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F급 클래스였다면 40, 아니 50레벨에 여길 왔어도 클리어가 어렵겠다는 예감이 들 정도였다.
[허세현 님의 레벨이 15(으)로 올랐습니다.]
[허세현 님이 신규 스킬 ‘작위 수여’를 획득했습니다.]
[‘경험의 관리’에 경험치가 3254 쌓였습니다!]
잠시 후, 세현이 레벨 업을 하며 메시지들이 출력됐다.
세현은 그때마다 [소환수 상태 창]을 열어 ‘경험의 관리’로 소환수들에게 경험치를 쏟아부었다.
[‘블랙 폰’의 레벨을 15(으)로 올렸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요괴들의 저항이 점차 거세졌기 때문에, 당장 전투에서 조금이라도 더 도움이 되기 위함이었다.
죽은 음양사의 숫자가 20을 넘고, 죽인 요괴의 숫자가 거진 100마리를 넘어갈 즈음.
쿠구구구!!
갑자기 땅이 격렬히 흔들렸다.
“준비해라! 곧 누라리횬이 나올 거다!”
세이메이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외쳤다.
<요히요히힛!!>
그 순간, 노인의 웃음소리와 함께 푸른 섬광 하나가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그것은 지상을 향해 몇 개의 푸른 불꽃을 흩날렸다.
“끄아아아악!”
이를 피하지 못한 음양사 세 명이 순식간에 재가 돼 버렸다.
<요히히, 인간들! 나랑 차나 한잔할까?>
뒤통수가 길게 자라난, 일본 전통 의상을 입은 노인이 경박스러운 웃음소리를 내뿜고 있었다.
세현은 그를 올려다보며 쓰게 미소 지었다.
“본게임 시작이군.”
[# 보스 몬스터 / 누라리횬]
- 백귀야행의 총대장 누라리횬. 녹차를 좋아한다. 뻔뻔한 성격의 할아버지 요괴.
등급: 유니크
레벨: 25
생명력 / 마나: 7500 / 7000
누리리횬은 히든 퀘스트의 최종 보스다운 무식한 스펙을 가지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놈을 상대하는 게 허세현 혼자가 아닌 수십 명의 음양사와 백설희가 함께한다는 것이었다.
<오효횻 녹차! 녹차를 대령해라!!>
누라리횬은 몸을 둥글게 말아 폴짝폴짝 뛰어다니며 떨어질 때마다 음양사들의 목을 비틀고, 입으로 머리를 터뜨렸다. 그 속도가 워낙 빨랐기에 번번이 피해가 누적됐다.
‘어렵겠는데.’
빠르게 음양사들의 숫자가 줄어들며 전세가 단번에 역전됐다.
압도적인 전투력을 보여 줬던 두 폰도 누라리횬의 속도를 쫓지 못해 고전하는 기색이었다.
위기 상황마다 생명력 포션을 사용해 소환 해제가 되는 건 막았지만 반격은커녕 이 상태를 유지하는 게 고작이었다.
빨리 타개책을 찾지 못한다면, 최악의 경우 퀘스트를 포기해야 할지도 모르는 수준이었다.
‘젠장, 겨우 여기서 발목 잡힐 생각 없다고!’
세현은 분한 마음에 이를 악물었다.
이 정도를 극복하지 못하면, 시즌 2까지 기어 올라가 팔콘길드에게 한 방 먹이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이리라.
포기라는 두 글자가 아른거렸지만, 최후의 최후까지 퀘스트 클리어 방법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 생각해라!’
설희와 두 폰이 시간을 끄는 사이. 세현은 남은 생명력 포션, 소환수의 상태, 음양사의 숫자 등 전체적인 상황을 꼼꼼히 체크하며 경우의 수를 떠올렸다.
‘신규 스킬!’
15레벨을 찍고 생긴 신규 스킬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곧장 상태 창을 열어 새로 생긴 스킬 리스트를 점검했다.
당장 쓸 만한 스킬 한두 개라도 나와 준다면 변수를 만들어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잠시 후, 스킬을 보던 세현의 눈이 어느 한 지점에서 멈췄다.
[(신규 스킬) 작위 수여]
- 지정한 대상에게 해당 소환수의 힘을 수여합니다.
효과: 지정한 대상 기존 스탯 + 블랙 폰 현재 스탯만큼의 수치 부여.
소모 마나: 현재 보유 마나의 90% 소모.
지속 시간: 10분
쿨 타임: 12시간
“이거다!”
얼굴에 자연스레 밝은 미소가 피었다.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이 내리쬐는 기분이 들었다.
세현은 오른편으로 고개를 돌려 숨을 가쁘게 내쉬는 백설희에게 소리쳤다.
Level 9. 총회
“설희 씨!”
“네?”
설희는 누라리횬의 공격을 받아 내기 바쁜 탓에 고개조차 제대로 돌리지 못했다.
“저 믿어요?”
“가, 갑자기 그건 왜요?!”
“좋은 방법이 떠올랐는데 설희 씨 도움이 좀 필요해서요.”
“아, 알아서 하세요!”
시간이 없기에 정수는 곧장 신규 스킬 작위 수여를 발동시켰다.
[‘작위 수여’를 사용합니다.]
[‘블랙 폰(15레벨)’이 백설희 님에게 힘을 이전합니다.]
그 순간, 누라리횬을 맞상대하던 블랙 폰이 연기처럼 흩어졌다. 블랙 폰에게 발을 날렸던 놈이 그대로 앞으로 떨어져 데굴데굴 굴렀다.
<오효효효효!! 데굴데굴!>
검은 연기는 그 즉시 백설희에게 날아가 엉겨 붙었다.
그것은 몸 위에서 빠르게 꾸물대더니 금세 갑옷의 형태로 변했다. 재규어를 연상시키는, 아름다운 유선형의 검은 갑옷이었다.
“이…이건…….”
갑작스러운 상황에 설희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스스로의 몸을 둘러봤다.
그때, 세현이 다급히 외쳤다.
“설희 씨, 조심!”
외침에 고개를 돌리자, 눈앞에 누라리횬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마 설희가 잠시 두리번거리는 사이 곧장 달려든 것이리라.
<오효횻! 빈틈!>
설희는 깜짝 놀라며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처음엔 상체를 뒤로 빼며 놈의 주먹을 피한 후, 검을 휘둘러 오른팔의 어깻죽지를 꿰뚫었다.
국가 대표 시절, 몇만 번이고 반복해 왔던 펜싱 동작이었다.
다만 이전과 다른 것은, 속도가 인간의 눈으로 쫓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빨랐다는 것이다.
콰득-!
<오효효, 이상……. 뭐, 뭐시야?>
바닥에 착지한 누라리횬의 오른 팔이 통째로 잘려 나갔다.
본인 스스로도 조금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세현 씨! 이 힘이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당장 박살 내 버려요!”
그 모습을 본 설희가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외쳤고 세현이 엄지손가락을 세우며 화답했다.
“흐아아압!”
짧고 간단한 기합과 함께, 그녀는 스텝을 밟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요히히? 빠, 빨라!>
손끝의 레이피어가 놈의 이마와 목덜미, 가슴을 빠르게 관통했다.
당황한 누라리횬은 온갖 술수를 부리며 저항해 봤지만, 몸의 상처만 계속 늘어날 뿐이었다.
“지금!”
완벽한 빈틈을 잡은 설희가 놈의 멱살을 붙잡아 몸을 바닥에 처박았다. 그리고 놈의 목에 레이피어를 빠르게 수십 차례 내리찍었다.
그 모습은 마치 빠르게 바느질을 하는 것 같았다.
공격이 끝난 후, 설희는 놈의 머리를 오른발로 힘차게 걷어찼다.
콰드득-!
<머리가, 머리가 똑!>
살이 찢기는 소리와 함께 누라리횬의 머리가 몸과 분리돼 공중에 떠올랐다. 사방으로 녹색 피가 흩뿌려졌고 잠시 후 놈의 머리가 바닥에 추락했다.
모두가 멍한 얼굴로 그를 가만히 지켜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