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
21화.
“역시 최고가 되려면 메인 퀘스트를 먹어야 돼.”
세현은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11~20층 구간의 시즌2 메인 퀘스트 <아라비안나이트>는 현재 19층까지 클리어된 상황. 이미 여러 길드가 눈에 불을 번뜩이며 최초 클리어를 노리고 있다.
‘기억대로라면 팔콘이 시즌2 최종장을 클리어할 때까지 4개월 정도 남았어.’
앞으로 4개월, 세현은 이 시간 내에 팔콘 길드를 제치고 그들을 견제할 다른 길드를 찾아내야 한다. 또한 그를 위해서 몇 가지 변수를 만들어야 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변수가 하나 있다.
‘민들레씨앗 레이드!’
아파트는 각 층을 100일 내로 클리어하지 못하면 정상에 놓인 ‘민들레’가 전 세계로 거대 괴수의 씨앗을 날려 보낸다.
그렇다는 건 팔콘이 시즌2를 클리어하기 전에 1번은 민들레씨앗 레이드가 진행된다는 얘기다.
‘민들레씨앗 레이드에서 도박을 걸어야 한다.’
세현은 잠시 눈을 감고 자신이 떠올린 계획을 체크했다.
‘레이드 시점에 35레벨, 그리고 시즌2 클리어 때 50레벨! 그쯤이면 해 볼만 해!’
4개월 내에 50레벨 달성. 누가 와서 세현을 허언증 환자라 욕해도 할 말 없는 미친 목표였다.
하지만 지금의 세현은 이것이 가능하리라 확신했다.
‘뭐 일단 그건 큰 목표라 치고, 일단은 지금 닥친 일부터 하나씩 해치워야지.’
세현은 1레벨 때 쓰던 스타터 세트를 아직도 사용했다.
무려 팔콘 길드에 대항하려는 놈치고는 초라한 장비다.
앞으로의 사냥터 수준을 감안했을 때, 적어도 15렙 제의 장비는 맞춰야 앞으로 사냥이 수월하리라.
‘15레벨 돼서 준비하면 늦어. 미리미리 장비 세팅을 해야 15레벨이 되도 계속 달릴 수 있어.’
세현은 인벤토리를 열어 자신의 자산을 체크했다.
‘700만 원 정도에 재료 아이템들…….’
2주간 획득한 골드를 현금으로 환산하면 약 700만 원 내. 적지 않은 돈이지만 소환수 둘과 본인의 장비를 모두 맞추기엔 턱없이 부족한 돈이었다.
그렇다고 어디서 돈을 빌려다 아이템을 맞출 수도 없는 노릇.
‘어쩔 수 없지. 제작해서 쓰는 수밖에.’
세현은 현재 상황에서 최선의 결론을 내렸다. 이는 F급으로 200레벨을 넘긴 ‘트롤 허세현’에겐 아주 익숙한 일상이었다.
‘해 보자고!’
† † †
길거리가 온통 벚꽃으로 수놓아진 중세 일본풍 도시.
세현은 그 중심가의 도로를 느긋한 얼굴로 걷고 있었다.
이곳의 이름은 벚꽃의 도시 <사쿠라신>.
시즌1, 3~10층에 해당하는 ‘벚꽃국’의 수도였다.
사쿠라신의 가장 안쪽엔 커다란 벚꽃 나무가 1년 내내 만개해 있는 <벚꽃성>이 우뚝 솟아 있다.
그곳은 시즌1 메인 퀘스트에서 가장 핵심 역할을 하는 <벚꽃공주>가 있는 장소였다.
세현은 아련한 눈으로 벚꽃성의 풍경을 바라봤다.
‘벚꽃 놀이라…….’
실제로 벚꽃성 주변은 종종 팔자 좋은 입주자들의 소풍 장소가 되기도 했다.
전 세계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환상적인 벚꽃 놀이, 이는 아파트 입주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 중 하나였다.
세현은 최은철의 얼굴을 번뜩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으 됐다. 내 주제에 무슨 소풍이냐. 그 새끼한테 복수할 때까지는 참아야지.’
깡-! 깡-!!
발걸음을 재촉하자 저 멀리서부터 쇠를 두드리는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긴 담장을 따라가자 <마사무네 대장간>이라는 명패가 붙은 거대한 철문이 드러났다.
‘여기다.’
세현이 양팔로 문을 힘껏 열자 활기찬 전경이 펼쳐졌다.
수십 명의 대장장이가 쉴 새 없이 쇳물을 붓고, 강철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들의 옆에는 척 보기에도 품질 좋은 병장기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이곳의 대장장이 모두가 한 가닥씩 하는 인물들이라는 걸 알려 주고 있었다. 저들에게 의뢰를 맡긴다면 썩 괜찮은 품질의 장비를 만들어 줄 것이다.
하지만 세현은 그들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대장간의 안쪽로 이동했다.
‘최고가 쓸 장비는 최고에게 맡겨야지.’
그러자 안내원으로 보이는 귀여운 10대 초중반의 소녀 하나가 쪼르르 달려 나와 길을 막았다.
“안녕하세요, 마사무네 대장간입니다! 무슨 의뢰를 맡기시렵니까!”
“음, 마사무네 선생을 만나러 왔는데.”
세현의 말에 소녀는 흠칫하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서, 선생님은 지금 바쁘십니다.”
“나는 마사무네가 인정할 만한 사람이니 데려다 줘요.”
말을 꺼내는 순간, 안내원 소녀의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 말을 함부로 입에 담았다 죽은 자들이 여럿인 걸 알고 계시는지요?”
“당연히!”
결연한 대꾸에 소녀는 한숨을 푹 내쉬며 손짓했다.
“하아, 오늘만큼은 산송장 치르고 싶지 않았는데.”
대장간을 안쪽으로 굽이굽이 들어가자, 특별하게 꾸며진 공방에서 세현이 원하던 사람을 찾을 수 있었다.
“마사무네 선생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안내원 소녀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러자 모루 앞에서 있던 한 사람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벌써 잊은 게냐, 카오루. 작업 중엔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했을 텐데?”
붉은 머리에 씩씩한 얼굴. 까무잡잡한 피부 위로 검댕이 잔뜩 묻은 근육질의 여성이었다.
망치를 내리칠 때마다 꿈틀대는 근육과 땀방울은 절로 탄성이 나올 정도로 나름 멋이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마사무네’. 삼작이라 불리는 요시미츠, 요시히로와 더불어 <벚꽃국> 최고의 대장장이 중 하나였다.
“그, 그게 손님께서 자신이 선생께 인정할 만한 인물이라 하여…….”
“그래, 그딴 헛소리를 뱉는 작가가 누군지 얼굴이나 보자꾸나.”
안내원 소녀가 가늘게 몸을 떨며 대꾸하자 세현은 넉살좋게 손을 흔들며 입을 열었다.
“헤헷, 그게 바로 접니다, 마사무네 선생!”
마사무네는 손에 든 망치를 바닥에 내팽개쳤고 옆에서 대기 중이던 대장장이가 이를 재빨리 주웠다.
“나는 바쁜 몸이니 무슨 용무인지 말해라.”
“장비 제작 의뢰를 좀 맡기고 싶어서요.”
“그런 일이라면 다른 대장장이가 많이 있다. 접수처에 제작 의뢰를 하면 될 텐데?”
그녀는 분노를 참는 듯 보였다.
왕실, 최고의 영웅들이 쓰는 물건을 제작하는 그녀에게 어중이떠중이가 와서 시간을 뺏는 것 자체가 짜증나는 일이리라.
보통 대장간에는 별도의 접수처가 따로 있다. 접수처에 재료와 의뢰비를 맡기면 일정 시간 후에 아이템을 찾아갈 수 있는 시스템이다.
하지만 세현은 그렇게 할 생각이 없었다. 그 방법으론 평범한 아이템밖에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거야 알죠. 하지만 삼작 <마사무네> 선생께서 직접 아이템을 만들어 주셨으면 해서요. 저는 충분히 당신이 만든 물건을 쓸 만한 인물입니다.”
“스스로를 영웅이라 지칭하는 인간이라, 오만하군.”
“오만인지 아닌지는 직접 확인해 보십쇼.”
“흥, 죽을 각오가 돼 있다면 따라와라.”
그녀는 손을 안쪽으로 까닥거린 후 어딘가로 이동했다. 대장간의 뒤뜰 구석에 위치한 커다란 창고의 문이 활짝 열어젖혔다.
끼이이익-!
‘흐으음……. 여기도 오랜만이네.’
세현은 미간을 작게 찌푸린 채 주변을 훑어봤다.
문 너머엔 흡사 유도 도장 같은 장소가 펼쳐졌다.
나무 기둥에서 뿜어지는 푸른 불빛이 내부를 밝혔고, 마룻바닥 곳곳에 핏자국이 묻어 음산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세현이 멀뚱히 서서 기다리는 동안, 마사무네는 문을 닫은 후 중앙으로 걸어가 털썩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녀는 비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나, 삼작 마사무네에게 의뢰를 맡길 수 있는 건 왕실과 대영웅뿐. 내가 물건을 쓰고 싶다면 네놈의 가치를 증명해라.”
그러자 세현의 눈앞에 퀘스트 정보를 알리는 박스가 떠올랐다.
[#. 서브 퀘스트 / 마사무네의 인정]
- 삼작 마사무네, 그녀는 자신이 인정한 상대에게만 장비를 만들어 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와의 대련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자.
▶ 퀘스트 보상
1. 성공 시 마사무네에게 아이템 제작 의뢰 가능.
2. 타이틀: ‘마사무네의 인정’
[수락하기]
‘고민할 것도 없지.’
세현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수락하기] 버튼을 터치했다.
삼작 마사무네와 싸워 그녀의 인정을 받는 것. 이게 그녀에게 아이템 제작을 의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전생의 F급 세현은 35레벨 때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며 겨우겨우 클리어가 가능했던 어려운 퀘스트다.
실제로 이 퀘스트를 진행하다 마사무네의 검에 목이 달아난 입주자들의 숫자가 세 자리가 넘을 정도였다.
입주자들 사이에선 시즌1의 중간 보스가 ‘삼작 마사무네’라는 농담이 있을 정도로 그녀는 강력했다.
그런 상대에게 겨우 13레벨의 세현이 감히 도전장을 내민 것, 누가 본다면 차라리 자살을 하라고 권유할 것이다.
“용기는 칭찬해 주겠다만 내 검에 목이 달아나도 원망하지 마라.”
“하핫, 그럴 일 없으니 걱정 마십시오!”
마사무네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뒤편에서 일본도를 하나 집어 들었다. 푸른 검날이 번뜩이며 흉흉한 살기를 내뿜는 것이 그녀가 직접 제작한 명검으로 보였다.
[서브 퀘스트 ‘마사무네의 인정’을 시작합니다.]
“흐아아아아아!”
시작 메시지와 함께 그녀가 앞으로 달려들었다.
날아드는 새처럼 빠른 몸놀림에 세현이 침을 꿀꺽 삼켰다.
‘빠르게 끝낸다. 길게 끌어서 좋을 거 하나 없어.’
그녀의 검이 뻗어 오는 순간, 세현은 스타터의 검을 비스듬히 세웠다.
쨍-!!!
불꽃이 튀며 스타터의 검이 휘어졌다. 하지만 그 덕분에 마사무네가 뻗은 검의 궤도가 틀어졌다.
순간 빈틈이 만들어졌고, 세현을 이를 놓치지 않았다.
‘폰 소환!’
두 사람 사이에 작은 회오리가 솟구치며 그녀의 몸을 밀어냈고 그 안에서 창이 뻗어 나왔다.
챙-!
찰나의 승부였다.
일본도가 허공으로 날아가 빙글빙글 돌더니 마룻바닥에 거꾸로 처박힌 것이었다.
폰은 자신의 창을 마사무네의 목전에 들이댔다.
“행색을 보고 검사라고 생각했는데 사역마를 다루다니……. 너는 음양사였나?”
“뭐, 내가 검사라 말한 적은 없잖아요?”
마사무네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갑자기 세현을 향해 세 번의 절을 올렸다.
그리고 세현에게 존대를 하기 시작했다.
“졌습니다, 당신은 충분히 제 인정을 받을 만한 인물입니다.”
그 순간, 머릿속으로 메시지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