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
18화.
“소환 해제.”
그것을 신호로 두 소환수가 빛을 발하며 공중으로 흩어졌다.
세현은 조금 전 상황이 못마땅하다는 듯 턱을 쓰다듬으며 입맛을 다셨다.
‘초장부터 길드 놈들이랑 벌써 엮여서 좋을 게 없는데.’
소환수를 이용한 자작극.
헨더슨이 조금 번거롭겠지만 현재 세현의 무력으론 정면도 충분히 해볼 만했다.
하지만 이를 피하고 굳이 번거로운 자작극을 벌인 이유는 간단했다.
대형 길드를 상대하기엔 아직 힘이 미약하기 때문이다.
당장 화풀이를 하자고 헨더슨과 마상철을 때려눕힌다?
그건 세현의 능력을 광고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놈들은 명분과 자존심을 중시하기에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보복을 해 올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개인인 허세현은 상대가 불가능해진다.
‘이빨을 드러내는 건 더 강해진 후에 해도 늦지 않아.’
세현은 분노를 삼키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전신의 긴장이 풀리자 근육통과 함께 눈꺼풀이 묵직해진 것이 느껴졌다.
연이은 강행군으로 피로가 극한까지 다다른 탓이었다.
“하아……. 일단은 집 들어가서 좀 퍼질러 자야지.”
세현의 고단했던 일주일이 이렇게 끝났다.
† † †
“흐아아아암!”
기지개를 켜며 자취방에서 일어났을 때 해는 이미 중천에 떠 있었다.
세현은 핸드폰을 뒤집어 시간을 확인했다.
“2시 30분이라……. 12시간을 내리 잤구만.”
입맛을 쩝쩝 다시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자 배에서 꼬로록-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난 며칠 간 먹은 거라곤 싸구려 에너지 바가 다였으니 어찌 보면 당연하다.
세현은 냉장고와 찬장을 뒤졌다. 하지만 자취방에는 그 흔한 라면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일단 목을 축이기 위해 싸구려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켜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배달 음식이라도 시켜 먹자……..”
일단 폰뱅킹 앱을 실행시켜 남은 통잔 잔고를 확인했다.
남은 돈 13,000원, 이게 현재 세현의 전 재산이었다.
초장부터 달리겠다고 4300만 원이라는 거금을 써 버린 것이 실책이었다.
“아……. 골드 환전이라도 해 놓을 걸.”
몬스터를 처치해 얻은 골드를 미리 원화로 환전하지 않은 게 실수였다.
아니, 실수라기보다는 워낙 피곤한 탓에 그럴 겨를이 없었다는 게 맞으리라.
마상철과 헨더슨이 깽판을 친 덕에 모든 게 꼬여 버렸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짜증나네. 블루울프 놈들, 데스노트에 반드시 적어 둔다.’
세현은 소심한 복수를 다짐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곤 편의점 도시락이나 먹을 심산으로 의자에 걸린 트레이닝복을 주섬주섬 입었다.
잠시 후, 집 밖으로 나서려던 찰나.
띵동-!
벨 소리가 들려왔다.
‘어, 택배 시킨 거 있었나?’
세현은 튕기듯 일어나 현관문 앞으로 갔다.
“누구세요?”
“저기……. 음…….”
귀에 익은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뭔가를 말하려는 듯 머뭇대자 세현은 문을 살짝 열었다.
그러자 의외의 인물이 문틈으로 보였다.
“무슨 일입니까?”
검은 포니테일 머리를 한 강아지상의 미녀.
며칠 전, 세현과 함께 입주 시험을 봤던 전 펜싱 금메달리스트 백설희였다.
“입주 시험 때 신세 졌던 거, 고맙다고 인사를 못 했던 것 같아서요.”
“뭐가 고마워요? 그리고 주소는 어떻게 알아서 찾아왔어요?”
“덕분에 합격해서 A등급 클래스도 받았잖아요. 그리고 주소는 아파트 공무원 분들에게 물어보니까 알려 주셨어요… 시, 실례가 됐다면 죄송해요”
“공무원들이 그냥 알려 줬다고요?”
“네. 같이 셀카 한 장 찍어 드렸더니 그냥 알려 주던데요.”
“이런 썩을 공무원놈들…….”
세현은 입주자의 신원을 겨우 셀카 한 장에 팔아넘긴 공무원에 분노하며 입주 시험 당시를 잠시 떠올렸다.
‘뭐……. 굳이 나를 은인으로 생각한다면야 말릴 필요야 없겠지.’
백설희는 뭔가를 문틈으로 밀어 넣었다. 얇고 기다란 손끝에는 두툼한 흰 봉투가 들려 있었다.
“바, 받아 주세요! 그래야 제 마음이 편할 것 같아요!”
봉투 안에는 돈이 들어 있었다.
5만 원짜리 지폐 다발, 얼핏 보기에도 200~300만 원은 됐다.
치킨 한 마리가 아니라 돼지, 아니 소 한 마리를 통째로 사다 먹어도 될 돈이었다.
이게 웬 떡이냐며 돈을 날름하려던 찰나, 세현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번개 치듯 지나갔다.
‘근데 이 여자, 빚 있지 않았나?’
자신의 기억이 맞다면 설희는 현재 수십억의 빚더미를 떠안은 상태다.
세현도 남을 동정할 처지는 아니지만, 이걸 넙죽 받자니 괜스레 마음이 불편했다.
“돈은 됐수다. 서로 이득 봤는데 뭘 이런 것까지.”
“아뇨! 꼭 받아 주세요.”
“아니 싫다니까!”
봉투를 돌려주자 설희는 곤란하다는 손을 절레절레 저으며 격렬히 거절했다.
현관문을 사이에 놓고 한 명은 돈을 주려 하고, 한 명은 이를 막는 요상한 광경이 연출됐다.
그러던 중.
꼬르륵-!
세현의 배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백설희 씨. 여기서 5분만 기다려 주세요. 옷 갈아입고 나올 테니까 밥이나 쏴요 오케이?”
“겨우 그걸로 괜찮으신…….”
“아 괜찮다니까 그러네.”
세현의 거듭된 설득에 설희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 † †
점심시간이 지날 무렵의 한산한 고깃집.
구석에 20대 초중반쯤의 남녀가 둘이 앉아 있었다.
강아지를 연상시키는 인상의 여자 쪽, 그녀는 누가 보더라도 미인이었다.
반면 남자 쪽은 더벅머리가 눈을 가리는데다 동네 마실 나온 것 같은 허름한 옷차림이었다. 게다가 배에 거지라도 들었는지, 불판의 고기를 거의 흡입하고 있었다.
“저 손님은 어디 열흘은 굶다 왔나…….”
고짓집 주인조차 그를 걱정스러운 얼굴로 보고 있을 정도였으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천천히, 많~이 드세요.”
“진짜 막 먹습니다? 나 이래 봬도 엄청 대식가인데!”
“네네, 그럼요. 아주 이 가게를 거덜 내 버리세요!”
그렇게 얼마나 더 흘렀을까.
“후아……. 이제 좀 살 것 같다.”
세현은 고기를 총 10인분이나 먹어 치우고 나서야 만족스럽다는 듯 배를 두드렸다.
간만에 제대로 된 단백질을 먹으니 행복감이 몰려왔다.
설희는 그런 세현이 재미있다는 듯 작게 웃으며 되물었다.
“배 많이 고프셨나 봐요?”
“아아, 말도 말아요. 던전 돈다고 4일 내내 에너지 바만 먹었다니까 글쎄.”
“4, 4일 내내요? 어디 길드에라도 가입돼 있으신 거예요?”
자연스러운 질문이었다.
합격과 동시에 이렇게 미친 듯 레벨링을 달리는 건, 애초에 랭커를 노리는 상위권 길드 멤버들이나 할 법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길드는 무슨,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길드 놈들 떼거리로 몰려다니면서 양아치 짓하는 건데요.”
하지만 세현은 손을 절레절레 저으며 단번에 이를 부정했다. 그를 본 설희는 잠시 침묵하다가 뭔가를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저기 허세현 씨, 혹시 저랑 파티 사냥 하실 생각은 없으세요?”
“푸훕!”
난데없는 제안. 세현은 입안에 머금은 물을 뿜어 바지에 질질 흘렸다.
“안 돼요, 안 돼. 팀플레이는 워낙 취미가 없어서!”
“하지만 입주 시험 때는 저랑 같이 팀플레이 했잖아요? 그때처럼만 하면 아주 환상의 듀오…….”
“아. 안 되는 건 안 되는 겁니다.”
세현은 완고하게 거절했다.
‘남을 돌볼 처지도 아니고, 같이 다니면 활동의 폭도 확 줄어들잖아.’
백설희는 유명인인데다가 A급 클래스인 게 동네방네 소문이 난 상태다. 현재 세현의 입장에선 동료로 삼기엔 최악의 조건을 갖춘 상대였다.
‘그래도 밥도 거하게 얻어먹었으니 팁이나 좀 줘 보자고.’
세현은 헛기침을 하며 운을 띄웠다.
“아 동료는 됐고, 제가 밥 얻어먹었으니까 간단한 컨설팅 정도는 해 줄게요.”
“컨설팅?”
“아파트 공략 팁 드린다고요. 내가 이래봬도 그쪽엔 빠삭합니다.”
“오오!”
설희는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백설희 씨, 클래스 어떤 걸로 받았어요?”
“<팬텀 싱어>라고 하는데요.”
“아, 그거 좋은 클래스네요.”
<팬텀 싱어>. 쉽게 말해 음유시인과 도적이 결합된 클래스였다.
높은 민첩 스탯을 바탕으로 한 근접 전투 능력, 노래를 통한 갖은 버프 스킬로 범용적인 전투가 가능한 전천후 클래스다.
이미 상위 랭커들 중에 <팬텀 싱어> 클래스가 있을 정도로 실전에서의 활용도는 이미 증명된 클래스였다.
“이렇게 레벨링해 봐요. 아, 지금부터 말하는 건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이니까 참고만 하시고, 다른 사람한텐 말하지 마요.”
“넵!”
세현은 지식을 총동원해 백설희에게 유용한 정보들을 풀어냈다. 물론 본인이 독점할 중요 정보들은 빼놓고 말이다.
‘그래도 이 정도면 아직까지는 어지간한 대형 길드도 모를 고급 정보지.’
설희는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진지하게 조언을 경청했다. 세현은 약간 흐뭇한 마음이 들어 원래 말하려던 것보다 조금 더 정보를 풀었다. 이 정도면 웬만한 입주자보다 몇 배는 빨리 치고 나갈 수 있으리라.
‘그건 그렇고 이 여자, 생각했던 것보단 성격 괜찮네.’
전생에 백설희는 허세현이 감히 바라보기도 힘든, 언론으로만 접할 수 있는 연예인 같은 존재였다. 꽤 콧대가 높을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털털한 모습에 조금은 놀랐다.
그렇게 약 30여 분에 걸친 조언이 끝난 후, 두 사람은 밝은 얼굴로 고깃집을 빠져나갔다.
“정말 감사해요!”
“아뇨, 나야말로 고기 잘 먹었습니다. 조심해서 들어가요!”
백설희가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건네자 세현은 대충 손을 흔들어 작별을 고했다.
“저, 저기……!”
자리를 뜨려던 때, 등 뒤에서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등을 돌리자 설희가 스마트폰을 내민 것이 눈에 들어왔다.
“또 뭐요?”
“실례가 안 된다면, 핸드폰 번호 좀 알려 주세요. 기회가 되면 또 식사 대접을…….”
어쩐지 설희의 뺨이 살짝 붉게 상기됐다.
‘전화번호라, 뭐 괜찮겠지?’
세현은 잠시 고민하다 설희에게 폰 번호를 찍어 줬다.
“뭐, 다음에 기회 되면 또 밥 한 끼 하자고요.”
“네네! 다음에 또 봬요!”
설희의 얼굴에 해바라기 같은 미소가 만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