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
17화.
“그게 말이지~ 다른 게 아니라, 우리 길드에서 지금 인재를 영입 중이거든? 그런데 네가 생각나서 말이야. 그래서 소개를…….”
“어이구, 몇 시간 전만 해도 죽이네 뭐네 하더니 고새 생각이 바뀌셨어?”
세현은 상철의 말을 뚝 잘라먹고 한쪽 입꼬리를 비죽 올렸다.
‘제기랄. 말렸다.’
마상철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없는 말이기에 재빨리 변명을 떠올려야 했다.
“내 본업이 사채업이잖아? 돈 되는 일 앞에선 사적 감정은 접어 둬야지~ 뭐 인재를 스카우트하면 길드에서 인센티브를 준다나 뭐라나?”
물론 이것도 거짓말이다. 하지만 현재 상철이 할 수 있는 말 중에서 그나마 가장 그럴싸한 구라였다.
‘제발 걸려라, 제발! 이 호구 새끼야!’
마상철은 초조한 마음으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렇게 초조함이 극에 달했을 때 세현이 싱긋 웃으며 먼저 입을 열었다.
“올~ 천하의 블루울프 길드가 나를 필요로 한다 그거야? 아~주 구미가 당기는데?”
“엥? 구미가 당겨?”
상철이 당황한 얼굴로 되묻자 세현은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시원시원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럼 진짜지. 블루울프에 아무나 들어가는 게 아니잖아?”
“그, 그치, 아무나 못 들어오지!! 하하하하!”
“내가 길드 들어가면 아저씨를 마상철 선배라고 불러야 되나? 상철 선배,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상철은 상체를 살짝 숙였다. 얼굴에 떠오르는 악의 가득한 미소를 감추기 위함이었다.
“어디로 가면 됩니까, 선배?”
“그래 후배님! 나만 믿고 따라오라고!!”
상철은 앞장서서 세현을 헨더슨이 말한 장소로 이끌었다.
자신에게 어떤 일이 펼쳐지리라곤 손톱만큼도 생각지 못한 채 말이다.
† † †
헨더슨 D. 블레이커.
노란 머리에 능글능글한 미소를 지닌 푸른 눈의 미국인.
그는 30레벨 이하의 입주자들만 속할 수 있는 <블루울프> 3군 전체를 관리하는 관리자의 위치에 있었다.
30레벨을 찍은 지는 벌써 한 달, 그는 자신의 의지로 레벨 업을 멈춘 상태였다.
‘아무래도 뱀의 머리가 용의 꼬리보다는 나은 법이니까요.’
현재 블루울프의 2군은 31레벨~60레벨까지, 이 구간에 소속되면 헨더슨은 다시 막내가 된다.
그런 상황이 싫기에 헨더슨은 C급 클래스 중에서도 괜찮다 평가되는 ‘엘더 뱀파이어’의 소유자임에도 차일피일 레벨 업을 미뤄 왔다.
물론 길드 상층부의 눈치가 있기에 영원히 3군에 머물 순 없다. 헨더슨은 그저 지금 위치에서 최대한 이득을 본 후 2군으로 올라갈 생각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이득’은 심플하다.
블루울프라는 대형 길드의 배경을 이용해 갖은 명목으로 저 레벨 입주자들의 호주머니를 털어먹는 것.
초보 입주자 대부분이 대형 길드에게 감히 저항할 수 없는 걸 노린 다소 치졸한 방법이다.
대단한 벌이는 아니지만 뒤탈 없이 깔끔하기에 헨더슨의 입장에선 딱 좋은 용돈 벌이였다.
“헨더슨 조장님, 마상철한테 연락 왔습니다. 지금 이리 온답니다. 블루울프에 가입시켜 준다고 뻥쳤다고 하는데요?”
“뭐~야, 그런 말에 속아서 오는 놈이 있어요? 한국말로 이걸 뭐라고 하더라…….”
“보통 호구라고 부릅니다.”
“오, 호구 호구~ 맞아요, 그 말이었어요.”
헨더슨은 코웃음을 치며 입꼬리를 추켜올렸다.
그의 일행들은 음습한 바위 계곡 안쪽에서 대기 중이었다.
소리를 질러도 개미 새끼 한 마리 찾아오지 못할, 범행을 저지르기엔 더할 나위 없이 딱 좋은 장소였다.
그렇게 몇십 분이 지났을까.
저 멀리서 두 사람이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허세현과 마상철이었다.
자신의 운명을 모르는 호구 세현은 해맑은 얼굴로 사뿐사뿐 걸어와 헨더슨을 향해 힘찬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양키 선배, 허세현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인사가 무색하게 헨더슨과 조원들은 무표정한 표정으로 세현의 주변을 둘러쌌다.
세현은 당황한 듯 고개를 두리번대며 ‘어? 어?’라는 말만을 반복해서 내뱉을 뿐이었다.
“워워. 호구 친구! 잘~ 부탁하기 전에, 우리 리턴~할 건 리턴해야지?”
“리턴이라뇨?”
“아~ 스튜핏. 미스터 상철에게 갈취한 돈 4300만 원, 전부 리턴해야지.”
“얼탱이 없는 소리 하지 마쇼, 양키 선배. 그건 갈취가 아니라 정당한 거래…….”
콰득-!
그 순간, 그의 손톱에서 붉은 혈관이 채찍처럼 뻗어나 바닥을 세차게 뜯어냈다.
이는 엘더 뱀파이어의 전매특허인 블러드 써스트였다.
“우흥, 허세현이라고 했나요? 내가 말대답을 실어해서 말이에요”
싱긋 웃으며 말했지만 헨더슨은 명백히 협박을 하고 있었다.
그러자 세현은 몸을 와들와들 떨며 비굴한 얼굴로 두 손을 싹싹 비볐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 돈은 다 써 버려서 없습니다!”
“이 새꺄, 일주일도 안 되서 4300만 원을 다 썼다는 얘기를 믿으라고?”
“그, 그게 카지노에서 슬롯머신 하다가 다 날렸어요!”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세현의 말도 안 되는 변명에 마상철이 버럭 화를 내며 주먹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헨더슨이 팔을 뻗으며 그를 막아섰다.
“돈 워리~ 블루울프는 꽤 관대한 길드에요. 지금 돈이 없으면 이런 방면에 전문가인 미스터 상철의 도움을 받으면 되죠.”
상철은 그 말을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작게 까딱였다.
그러곤 품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들었다.
계약자의 이름과 금액이 빠져 있는 백지 차용증. 사채업자나 가지고 있을 법한 물건이다.
상철은 그것을 볼펜과 함께 헨더슨에게 넘겼고 그는 위에 뭔가를 휘갈겨 세현에게 건넸다.
“야, 돈을 빌려줄 테니까 이걸 나한테 갚은 셈 쳐라.”
“히이이익! 이자가 1년에 100%나 된다고요? 이거 완전 개사기 아닙니까!”
그 순간, 헨더슨은 미간을 구기며 세현의 멱살을 붙잡아 올렸다.
“그래서 싫다고요?”
“켁! 네, 알겠습니다! 알았다고요!! 계약서에 사인하겠습니다.”
헨더슨은 입꼬리를 올리며 손을 놓고, 바닥에 계약서와 볼펜을 던졌다.
세현은 볼펜을 잡고 계약서 위로 옮겼다. 그러곤 잔뜩 분노한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고개를 숙인 채 혼잣말을 중얼댔다.
“아우 씨. 연기한다고 귀찮아 죽겠네.”
그러곤 다시 한마디를 이었다.
“폰, 소환.”
그때였다.
빠악-!
흰색 그림자, 검은색 그림자가 빠르게 날아와 세현의 몸을 걷어차 버렸다.
“커헉!”
세현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아니, 정신을 잃는 연기를 했다.
† † †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헨더슨 일행이 곧장 전투태세를 취했다.
“와, 왓 더! 뭡니까 갑자기!”
“헨더슨 대장. 몬스터인 것 같습니다! 본적 없는 놈들인데요?”
몬스터는 둘이었다.
전신이 검은색으로 뒤덮인 창을 든 근육질 전사.
거대한 활을 든, 매끈하고 유려한 실루엣을 가진 여성형 궁사.
둘은 곧장 헨더슨 일행에게 달려들었다.
“뭐, 뭐야!!”
“끄아악!”
흰색과 검은색, 두 명의 몬스터는 네 사람을 철저히 짓밟았다.
놈들이 날리는 창과 화살에 순식간에 어깨가 뚫리고 무기가 박살 났다.
그나마 레벨이 높은 헨더슨이 혈액을 방패 형태로 변형시켜 검은 놈의 공격을 받아 냈다.
하지만 틈이 날 때마다 사각에서 여성형 궁사가 발사한 화살이 데미지를 쌓아 갔다.
‘쉣, 2층에 이런 수준의 몬스터가 있었다고?’
불과 몇 합을 주고받는 것만으로 두 세력의 전력 차이가 명백히 드러났다.
1:1이라면 어떻게 해 보겠지만 두 몬스터의 연계가 워낙 좋아 도무지 승산이 없어 보였다.
헨더슨의 여러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해졌다.
‘이대로 가면 다 죽는다…….’
버티는데 한계가 명백하기에 그는 빠른 판단을 내렸다.
“다들 도망친다!”
“하, 하지만 그럼 저놈은 어떻게 합니까?”
마상철이 당황한 얼굴로 허세현을 가리키자 헨더슨은 윽박지르며 대꾸했다.
“스트핏 쉿! 지금 남 목숨 챙겨 줄 땝니까?”
“하지만 나중에 조사단이 수사라도 나오면…….”
조사단. 정부 직속의 입주자 사법기관을 지칭하는 말이다.
아파트 내부는 기본적으로 힘이 모든 것을 설명하는 무법 지대다.
하지만 강자가 약자를 일방적으로 학살하는 것은 인류의 전력손실로 이어진다.
조사단은 그것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 쉽게 말해 입주자를 대상으로 한 느슨한 경찰 조직이라 이해하면 쉽다.
그들 구성원 하나하나가 모두 입주자인 데다가 그 뒤에 있는 게 정부이기에, 대형 길드라 해도 그들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다.
허세현이 죽는다면 조사단이 파견되어 이를 조사할 것이고 자칫 피곤해질 수도 있다.
“똥오줌 못 가립니까? 어차피 몬스터한테 죽은 건 우리 책임 아니에요!”
“……그치만!”
헨더슨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허세현을 버려둔 채 협곡 반대편의 샛길로 내달렸다.
“가, 같이 갑시다, 대장!”
“히이이익! 사, 살려 줘!”
다른 조원들도 얼굴이 창백해져선 그 뒤를 따랐다.
뒤에서 화살이 날아올 때마다 그들의 입에선 어린아이 같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다행인 건 화살이 그들의 동선을 아슬아슬한 간격으로 비껴간다는 것이다.
그렇게 헨더슨 일행이 협곡에서 사라질 무렵, 죽은 듯 쓰러져 있던 허세현이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이제 됐으니까 그만 쫓아.”
흑색 전사와 백색 궁사가 그대로 멈췄고 허세현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온몸에 먼지 범벅이 됐고, 얼굴은 불쾌함으로 일그러졌다.
“하씨……. 귀찮아 죽겠네. 저것들, 다음에 만나면 그냥 죽여 버릴까?”
세현은 온몸의 먼지를 탁탁 두드려 털고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내며 작게 읊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