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
15화.
<메인 던전>.
이것은 현재 아파트의 각층에 있는 최종 던전을 일컫는 말이었다.
이 메인 던전은 메인 퀘스트와 연계되어 보통 10층 단위론 영웅급 보스가, 1층 단위로는 유니크급 보스가 나타나는데, 단 한 명이라도 보스를 먼저 클리어하면 해당 층의 난이도가 하락한다.
이렇게 클리어되어 난이도가 하향된 던전을 ‘클론 던전’이라 한다.
이는 후발 주자들이 앞선 입주자를 보다 빠르게 따라갈 수 있게 만든 시스템이었다.
물론 난이도 하향에 맞춰 보상 수준도 낮아지지만, 부담이 적기에 하층 메인 던전은 실력 없는 입주자들이 레벨링을 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이는 2층의 메인 던전 <거미 지옥>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2층 튜토리얼 지역을 벗어나기 위해선 필수적으로 10레벨을 달성해야 한다. 초보 입주자들은 이곳 ‘거미 지옥’을 뺑뺑이를 돌며 레벨링하는 것을 선호했다.
이러한 이유로 2층 메인 던전은 언제나 문전성시를 이뤘다.
이런 ‘거미 지옥’ 던전의 중심, 그곳엔 흑색과 백색, 두 명의 여신이 체스를 두고 있는 것을 형상화한 동상이 놓여 있다.
이른바 ‘제단’이라 불리는 구조물로 체스 판 위에 입장권을 찢어 올리면 입주자를 던전 안으로 텔레포트시켜 준다.
“메인 던전 스피드 플레이 파티 구합니다! 공략 숙지하신 분만 모십니다!!”
“재료 매입합니다!”
“물약 팔아요! 물약 필요하신 분들 사 가십쇼!”
이곳은 시장 통 뺨치게 소란스러웠고 세현은 인파를 힘겹게 뚫고 제단 앞에 줄을 섰다.
“지나가겠습니다. 네, 좀 지나갑시다.”
끝이 안 보일 정도로 긴 줄이지만, 입주자들이 입장권을 찢어 바칠 때마다 줄이 죽죽 줄어들어 조금씩 앞으로 갈 수 있었다.
그렇게 약 20분이 지난 후, 드디어 세현에게 제단을 사용할 기회가 찾아왔다.
입장권을 양팔로 제단에 바치려는 순간, 누군가가 세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와씨 미친. 이게 누구야! 너 자주 본다?”
얼굴을 구긴 채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딱 보기에도 이마에 ‘건달’이라는 두 글자를 써 붙인 것 같이 생긴 남자, 마상철이었다.
그는 세현의 왼쪽 팔목을 잡아당기며 썩은 미소를 지었다.
“뭐야, 저번에 SSS급이니 뭐니 개 허세를 부리더니 결국 E급이었냐? 그래도 F급 아닌 게 다행이네 새끼.”
“남이사, E급이던 뭐든 신경 끄세요.”
세현은 팔을 낚아채며 노골적으로 불쾌한 감정을 전했다.
“하 새끼가, 아가리만 살아선.”
마상철은 침을 탁 뱉고 철퇴를 앞으로 내밀었다.
자칫 잘못하면 한판 붙을 상황, 그때 상철의 등 뒤에서 세 사람이 더 나타났다.
“헤이~ 미스터 상철, 무슨 일이야?”
“아, 헨더슨 조장님. 이놈이 말입니다.”
상철은 뒤에 서 있던 세 사람에게 고자질하는 아이처럼 상황을 설명했다.
“흐음~ 그렇단 말이죠?”
이야기를 들은 후, 그들은 세현에게 차가운 시선을 보냈다.
세현은 세 사람의 갑옷에 새겨진 파란 늑대 문양을 보고 머리를 긁적였다.
‘마상철 저놈, 빽이 있네 뭐니 떠들더니 그게 블루울프 놈들이었냐?’
파란 늑대 문양은 <블루울프>의 상징.
그들은 아파트 길드 랭킹 20위 전후에 위치한, 나름 상위권 길드였다. 길드원만 200명이 넘고 실력도 확실했다. 얼마 전에는 백설희에게 거액의 연봉을 제시하기도 했다.
‘더러운 팔콘 따까리 새끼들…….’
하지만 세현은 그들의 진면목을 이미 알고 있었다.
놈들은 팔콘 길드의 산하 길드 중 하나로, 그들이 못하는 더러운 일들을 몰래 처리해 주는 청소부 역할을 하는 놈들이다.
괜히 엮였다간 피곤해질 가능성이 컸다.
그러던 중, 리더로 보이는 백인 남자가 싱긋 웃으며 마상철을 다독였다.
“과거의 일은 과거의 일로 넘어가자고, 미스터 상철. 우리는 블루울프잖아? 그 정도 아량은 베풀어도 되잖아?”
“그럼 볼일 끝난 걸로 알고 전 가 봅니다?”
세현은 서둘러 입장권을 재단 위에 올렸고 흰 빛이 세현의 몸을 집어삼켰다.
“이 새끼가…….”
마상철은 끝까지 분한 듯 세현이 사라진 자리를 노려봤다.
“뭐야, 간만에 싸움 구경하나 했더니 시시하게 끝났네.”
“야야. 그래도 명색이 블루울프가 쪽팔리게 저런 초보 입주자 상대로 뭘 하겠냐?”
구경꾼들 또한 실망스러운 듯 푸념을 늘어놓더니 하나둘씩 흩어져 버렸다.
그사이 블루울프 3군의 대장 헨더슨은 마상철에게 귓속말을 건넸다.
“미스터 상철, 잠깐 저랑 얘기 좀 나누죠.”
“네? 무슨 일입니까?”
그는 상철을 인적이 드문 바위 뒤로 데려가 진지한 얼굴로 되물었다.
“미스터 상철의 돈을 되찾을 좋은 방법이 생각나서요. 어떻습니까, 그 돈의 50%만 저한테 주시면 되찾아 드리겠습니다만…….”
그 말을 듣는 순간, 상철의 얼굴이 단번에 구겨졌다.
‘날강도 같은 새끼, 50%나 떼 간다고?’
속이 쓰렸지만 반박할 순 없었다.
헨더슨은 30레벨이 넘는 입주자인데다가 마상철이 속해 있는 3군의 대장이다.
아무리 간부진에 백이 있는 상철이라 해도 그에게 거역하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씨부랄, 내가 오늘은 참는다.’
아파트에서는 힘이 전부다. 속은 쓰렸지만 상철은 스스로를 합리화시킬 수밖에 없었다.
마음의 결정을 내린 후, 상철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헨더슨은 탐욕스러운 미소를 띠며 상철의 어깨를 두드렸다.
“잘~ 생각했어요, 미스터 상철. 내가 그 돈 확실히 받아 낼게.”
† † †
온 사방에 거미줄이 쳐져 있고 여기저기 이교도들의 제단이 차려져 있는 불길한 느낌의 던전.
이곳 <거미 지옥>은 거미를 추종하는 이교도들이 이곳을 점령했다는 콘셉트의 던전이었다.
세현은 소환수 둘과 함께 차근차근 2층 메인 던전을 공략해 갔다.
‘확실히 메인 던전이라 필드 몬스터들보단 귀찮긴 하네.’
붉은 라고데사, 거미 숭배자, 화염 거미 등등, 필드에선 볼 수 없었던 몬스터 무리가 세현의 앞을 막아섰다.
필드 몬스터보다 기본 스탯도 높고 공격 패턴도 난이도가 확 올라간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 정도는 세현에겐 전혀 문제가 없었다.
“갸아악!”
“키에에엑!”
블랙 폰이 붉은 창을 크게 휘두를 때마다 검붉은 로브를 입은 숭배자들의 허리가 잘리며 내장을 쏟아 냈다.
어그로가 블랙 폰에게 끌리면 화이트 폰은 안정적으로 화살을 날려 적들을 끊었다.
변별치 않은 저항도 없이 몬스터들의 시체가 쌓여 갔다.
“그분을 위해!”
거미 숭배자 중 하나가 무리를 이탈해 빠르게 세현 쪽으로 달려들어 왔다. 제일 약해 보이는 세현을 먼저 제거하겠다는 판단이리라.
“어딜.”
하지만 그런 시도가 무색하게 세현은 가뿐히 공격을 피한 후, 검을 휘둘러 놈의 다리를 베었다.
콰드득-!
“갸아아악!!”
놈이 중심을 잃은 틈을 타, 세현은 검을 휘둘러 목을 날려 버렸다.
주인을 잃은 몸뚱이가 괴로운 듯 버둥대다 축 늘어졌다.
“워~ 내 감각 안 죽었네.”
소환수를 앞세워 계속 싸우다 보니 전투 감각이 무뎌진 느낌이 들었는데, 조금 전 일격으로 다시 F급 시절의 감각이 조금은 되돌아오는 느낌이 들었다.
이후로 세현은 두 소환수가 몬스터를 흘리면 자신이 한두 마리씩 직접 처리하며 전투 감각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렸다.
메인 던전에 들어온 지 4시간이 지난 후. 세현은 거대한 철문이 있는 <보스 룸>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F급이던 시절, 5~10레벨로 구성된 파티원 10명이 8시간이 걸려 도착했던 걸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속도였다.
세현은 자신만만한 얼굴로 보스 룸의 문 위로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위로 붉은 색의 메시지 박스가 크게 떠올랐다.
[#. 경고! 보스 출현!]
- 문 뒤에는 강력한 보스가 출현합니다.
[입장하기]
“뭘 경고씩이나.”
세현은 피식 코웃음을 치며 입장하기 버튼을 터치했다.
끼이익- 쿵!
그러자 보스 룸의 철문이 자동으로 열어젖혀졌다.
그 너머엔 거대한 공동이 눈에 들어왔다.
중앙엔 커다란 돌기둥이 솟아 있었는데 그 위에에는 거미줄로 만들어진 커다란 구체가 올려 있었다.
“촤아아아!”
허공에서 들려오는 기괴한 소리에 세현이 고개를 들었다.
그곳엔 거미줄에 대롱대롱 매달린 보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체는 붉은색 거미를, 상체는 사마귀를 꼭 닮아 있는 생물로 그 크기는 거의 트럭만 한 수준이었다.
세현의 눈앞에 흰색 메시지 박스가 떠올랐다.
[#. 보스 몬스터 / 맨티스파이더]
- 거미 지옥의 주인, 거미줄을 이용한 기민한 움직임과 사마귀의 사냥 실력을 갖춘 포식자.
등급: 유니크(C)
레벨: 8
HP / MP: 1530 / 500
첫 번째 던전의 주인 맨티스파이더, 이 던전에 잔뜩 등장하는 거미 숭배자들이 모시는 거미신이 바로 저놈이다.
“촤아아아!”
놈은 곧장 입을 벌려 세현을 향해 붉은 거미줄을 토해 냈다. 마치 화살 같은 맹렬한 속도의 공격에 세현은 몸을 옆으로 굴렸다.
콰앙-!
조금 전까지 서 있던 돌바닥에 주먹만 한 자국이 움푹 패였다. 이를 피하지 않았다면 아마 세현의 머리통이 저렇게 됐을 것이다.
“자, 시작하자고.”
세현이 신호하자 두 마리 폰이 동시에 공격을 개시했다.
화이트 폰은 화살을 날려 놈을 견제했고 블랙 폰은 세현에게 바짝 붙어 거미줄이 날아올 때마다 창을 휘둘러 떨쳐 냈다.
“츠즈즈!”
거미줄 공격이 몇 번이고 실패하자 맨티스파이더는 바짝 약이 올랐는지 괴성을 내질렀다.
그리고 이번엔 몸에서 붉은 빛을 사방으로 내뿜었다.
그 빛은 거미줄을 타고 방 전체로 흩어졌고 거미줄 곳곳에 달려 있던 수박만 한 구체에서 새끼 거미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숫자는 어림잡아 40~50마리, 절대 만만히 볼 만한 규모가 아니었다.
“끼에에엑-!”
놈들은 특유의 기괴한 울음소리를 뱉으며 지상으로 추락해 세현에게 곧장 달려들었다.
세현은 이를 간단하게 피해 냈고, 블랙 폰이 창을 휘둘러 놈들의 몸을 갈라 버렸다.
그러자 새끼 거미의 몸에서 터진 녹색 피가 흩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