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
11화.
잠시 생각에 잠긴 동안, 백설희 앞에 서 있는 세 명의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자네, 우리 길드에 가입할 생각은 없나? 우린 재능 있는 신입 입주자들을 찾고 있다네.”
파란 중갑옷을 겹겹이 껴입은 남자 3명.
이들은 각각 노란색, 녹색 마스터키를 착용했는데 척 보기에도 랭커의 느낌을 풍겼다.
이에 세현은 혼자만 들릴 정도로 작게 중얼거렸다.
“블루울프 놈들이군.”
<블루울프>.
어지간한 기업보다 재력 있는, 현재 랭킹 20위권의 상위권 길드 중 하나였다.
저 길드에 가입하는 순간부터 최소 억대 연봉을 받는다 해도 과장이 아닐 정도다.
그런 어마어마한 길드가 갓 입주자가 된 백설희에게 스카우트를 한 것이었다.
그만큼 A급 능력자는 타이틀은 아파트 내에서 대단한 힘을 가졌다.
‘이건 전생에서도 벌어졌던 일이야.’
이번 일이 전생과 다른 것이 있다면 그때는 백설희가 B급이었다는 것뿐이었다.
백설희는 이때 블루울프에 들어가 승승장구하며 몇 년 만에 모든 빚을 털어 낸다.
“와씨, 초장부터 블루울프에 스카우트돼? 장난 아닌데.”
“야, 요즘 길드들 경쟁 엄~청 과열됐잖아. A급 구하기가 어디 쉽냐. 게다가 백설희면 예쁘고 인기도 있으니까 길드 홍보 차원에서도 좋지. 아오, E급은 어디 서러워서 살겠나.”
“원래 인생이 운 빨이야 인마, 헛소리 말고 사냥이나 하러 가자.”
구경 나왔던 입주자들이 백설희를 안주 삼아 신나게 떠들어대고, 와중에 세현은 쓴웃음을 짓고 홀을 빠져나갔다.
“저기 백설희 양. 되도록 빨리 결정해 주게. 이런 기회 흔치 않을 걸세.”
“으음…….”
설희는 잠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매만지며 고민했다.
그러곤 결정을 내린 듯 고개를 치켜들고 진중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제안은 감사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 보고 싶네요.”
† † †
‘좋아, 물 들어왔을 때 미친 듯이 노 젓자고.’
홀을 빠져나온 세현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다음 목적지로 이동했다.
1등도 됐겠다, 내친김에 클래스를 정할 생각이었다.
잠시 후 도착한 곳은 <승강의 방>.
벌집처럼 늘어선 수천 대의 엘리베이터가 쉴 새 없이 입주자들을 아파트 위로 실어 나르는 장소.
세현은 구석에 놓인 엘리베이터로 다가가 터치 패널에 자신의 마스터키를 가져다 댔다.
[입주자 허세현 님. 인증 완료됐습니다.]
안에 올라타 2층 버튼을 누르자 엘리베이터가 빠른 속도로 상승했다.
목적지는 2층, 얼핏 듣기엔 가까운 거리지만 아파트 한 층의 높이가 1km에 달하기에 무려 3분이라는 시간이 소요됐다.
[2층에 도착했습니다. 입주자님의 행운을 빕니다.]
잠시 후, 문이 열리며 시원한 바람이 두 뺨을 때렸다.
“후우…….”
세현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주변을 둘러봤다.
‘누가 콘크리트 건물 안에 이런 공간이 있다고 꿈에나 생각하겠어.’
맑은 공기, 푸른 하늘과 드넓은 북유럽풍의 초원이 눈앞에 펼쳐졌다.
초원의 중심에는 잘 다져진 흙길이 나 있는데, 그 위로 마차와 사람들이 지나다니며 활기찬 모습을 연출했다.
판타지 소설 속에서나 보던 아름다운 대자연의 모습 그대로였다.
한참 풍경을 즐기던 때,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새로 오신 입주자 분입니까?”
Level 4. SSS급 클래스
“아, 네.”
고개를 돌리자 흰 수염의 늙은 마부가 마차 위에서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거주자인가.’
<거주자>.
세현과 같이 아파트 밖에서 온 입주자가 아닌, 아파트에서 원래부터 살고 있던 원주민들을 일컫는 말이다. 게임으로 치면 NPC와 비슷한 존재라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타시죠, 입주자님. 도시까지 모셔 드리겠습니다.”
“아예, 감사합니다.”
세현은 고개를 살짝 숙인 후, 마차의 짐칸으로 펄쩍 뛰어올랐다.
“이랴!”
마부는 기다렸다는 듯 고삐를 힘껏 휘둘렀고 마차가 흙길을 따라 터덜터덜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언덕 몇 개를 넘자 저 멀리 거대한 성채가 눈에 들어왔다.
노인 마부는 고개를 옆으로 틀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습니까, 꽤 근사하죠? 저기가 <시작의 도시, 스타티움>랍니다 허허.”
‘스타티움…….’
스타티움은 튜토리얼 구간인 2층의 수도다.
갓 아파트에 들어온 입주자들은 지겹게 봐야 할 장소다.
세현 또한 F급 시절 스타티움에 오랜 기간을 머물며 아파트의 생태계를 익혔다.
잠시 후, 마차가 정문을 넘어 성채 안으로 들어갔다.
“입주자 제군! 스타티움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그 앞을 지키던 경비들이 세현을 향해 작게 고개 숙여 인사를 건넸다.
아무래도 초심자를 위한 공간이다 보니 이곳 거주자들은 입주자들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는 편이었다.
“자, 도착입니다~!”
마차가 도착한 곳은 스타티움의 중앙 광장.
아름다운 인어 분수대가 사시사철 물을 뿜어 대는, 스타티움에서 가장 많은 유동 인구를 자랑하는 장소였다.
세현은 마차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그러자 늙은 마부가 기다렸다는 듯 말을 꺼냈다.
“여기서 북쪽으로 3분만 걸어가세요. 검은 벽돌로 지어진 커다란 사원이 <선택의 사원>입니다.”
“고마워요, 할아버지.”
정중히 인사를 건네자 늙은 마부는 밀짚모자를 살짝 들어 올리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자, 가 보실까.’
북쪽으로 3분쯤 걷자 검은 벽돌의 커다란 사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원 정문으로 곧장 들어가자 넓은 홀이 펼쳐졌고 그 안에는 수십 개의 부스가 벽면을 따라 세워져 있었다.
각각의 부스 앞에는 많은 합격생이 클래스를 받기 위해 줄을 서 있었다.
저 안에 들어가면 수녀들이 각 입주자들과 간단한 상담을 한 후, 등급에 맞는 클래스를 점지해 주는 것이 보통이다.
“후, 이거 시간 좀 걸리겠는데.”
세현이 곤란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고 있자, 저 멀리서 수녀 한 명이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와 질문을 던졌다.
“입주자님, 실례지만 마스터키를 좀 보여 주실 수 있겠습니까?”
“네, 뭐 보세요.”
세현이 팔목을 내밀자 그를 본 수녀가 순간 놀란 듯 침음을 흘렸다.
“이, 이건…….”
그러곤 몸을 뒤로 휙 돌리더니 작게 읊조리듯 말했다.
“따라오시죠.”
‘뭐야. 갑자기 왜 이러는데?’
두 사람은 홀을 지나 안쪽에 나 있는 작은 나무문으로 들어갔다. 그 내부가 미로 형태로 구성돼 한참을 굽이굽이 걸어야 했다.
그렇게 10분쯤 걸었을까. 미로의 끝에서 거대한 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반쪽은 흰색, 반쪽은 검은색으로 만들어진, 여신의 모습이 정교하게 각인된 철문.
수녀는 문을 두드리며 정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헬시안 님, 손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잠시 후, 문 너머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너라.”
“알겠습니다.”
끼익-!
수녀가 문을 열어젖히고 세현은 안으로 발을 들였다.
‘사원에 이런 공간이 있었던가?’
벽에는 검은색, 흰색 여신상이 일렬로 늘어서 있고 곳곳에 화려한 켈트 무늬 장식이 수놓아져 마녀의 방을 연상시키는 기괴한 장소였다.
7년이나 아파트에서 굴러먹었지만 사원 내부에 이런 장소가 있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
“어서 와라, 입주자. 나는 이곳 튜토리얼 구간을 관리하는 <관리장> 헬시안이라고 한다.”
한 가운데 놓인 제단 위에 한 여자가 앉아 있었다.
‘포스가 장난 아닌데.’
핏기가 없는 창백한, 흡사 도자기 인형 같은 얼굴의 미녀였다. 그녀의 가슴과 하체엔 기괴한 문신이 빼곡히 새겨져 있었다.
더욱 특이한 것은 양팔과 등에는 푸른빛을 내뿜는 뼈다귀만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지금부터 너의 클래스를 정하기 위해 신탁을 받아 주마.”
“신탁이 뭡니까?”
“너의 몸에 두 의지께서 정해 주신 힘을 내리는 것이다.”
‘어……. 뭔 소린지 모르겠으니 그냥 존나 가만히 있어야겠다.’
눈앞의 여자는 아파트 안에서 무소불위의 힘을 가진 관리자, 그것도 보통의 관리인보다 한 등급 높은 ‘관리장’급의 존재다. 괜히 밉보여 좋을 게 없기에 세현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흔들었다.
“시작하겠다.”
헬시안은 눈을 지그시 감고 앞에 놓인 수정 구슬에 손을 얹은 채 주문을 읊조렸다.
붉은 전기가 빠르게 구슬 속을 회전하며 무서운 소리를 뿜어냈다.
그 기세가 절정에 달했을 때.
파지직!
“끄아아아아악!!!”
전기가 앞으로 뿜어져 나와 세현의 몸을 덮쳤다.
시야가 빠르게 어두워지더니 완벽한 흑색으로 물들었고, 귀에선 모기가 윙윙대는 것 같은 이명 증상이 나타났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났을까, 하나의 목소리가 어둠을 뚫고 세현의 귀를 때렸다.
<왕이시어!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마수들이 몰려옵니다!>
많은 소리가 들려왔다.
폭음, 검이 부딪히는 소리, 화살이 날아가는 소리, 전사들의 함성과 마수들의 소름 끼치는 울음까지.
세현은 흐릿한 의식 속에서 어둠으로 물들었던 시야를 되찾았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놀라 외쳤다.
“아오 씨, 깜짝이야!”
눈앞에 펼쳐진 것은 전장이었다.
수십, 아니 수백만의 군세가 마수들과 뒤엉켜 전투를 치르는 대 전쟁.
세현은 고개를 떨어뜨려 자신의 몸과 팔을 가만히 바라봤다.
중세의 기사를 떠올리는 은빛의 갑주가 덧씌워진 몸.
오른팔에는 고풍스러운 문양이 정성스레 새겨진, 척 보기에도 ‘명검’이라는 단어가 떠오르는 철붙이가 들려 있었다.
“이거 도통 영문을 모르겠네.”
그때 누군가가 어깨를 두드렸다.
고개를 돌리자 흰 수염을 길게 기른 노인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폐하, 제가 소환술로 중앙을 뚫어 보겠습니다! 그사이 이들과 함께 적의 심장부를……. 마수의 왕을 노리십쇼!>
노인은 해골이 끝에 달린 지팡이를 힘껏 휘둘렀다.
그러자 땅에서 뼈와 살덩이를 엮어 만든 모습의 골렘이 솟아났고 주변에선 해골과 좀비들이 땅을 뚫고 지상으로 올라왔다.
엄청난 광경에 세현은 반사적으로 탄식을 흘렸다.
‘네크로맨서? 이 정도면 적어도 S 클래스, 아니 그 이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