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
8화.
“야, 얌전히 점수 내놔, 허세현!”
“누가 맘대로 준다냐!”
백설희가 한 남자와 격렬히 전투를 펼치고 있었다.
‘뭐야 이거, 일이 쉽게 돌아가는데?’
이를 본 상철은 이빨이 드러날 정도로 웃으며 파티원들의 진입을 막았다.
“잠깐 여기서 대기해.”
두 사람이 싸우는 중이라면 그 승패에 따라 포인트는 한 명에게로 몰릴 터. 그때 몰려가 포인트를 뺏으면 그만이다.
도리어 싸움을 통해 적의 힘을 빼놓을 수 있기에 일이 한층 쉬워진다.
한 3~4분이 더 지났을까.
‘백설희 저년이 꼴에 펜싱 금메달리스트라고 꽤 하는군.’
백설희는 압도적인 기세로 상대를 몰아붙였다.
더벅머리 남자도 총을 검처럼 사용해서 나름 잘 응전했지만, 서서히 뒤로 밀려 전망대의 깨진 유리창 앞까지 몰리고 말았다.
위기 상황에 몰린 남자는 울먹이며 애원했다.
“사, 살려 줘! 포인트는 다 넘겨 줄 테니까!”
“웃기지 마, 나보고 그 말을 믿으라고?”
백설희는 귀여운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차가운 얼굴을 하고선 검을 앞으로 힘껏 내질렀다.
검신이 남자의 가슴을 단번에 관통했다.
“끄아아아악!”
괴성과 함께 그가 타워 아래로 추락했다.
이를 지켜보던 상철이 반사적으로 외쳤다.
“미친년, 진짜로 저질러 버렸어!”
콰직-!
2~3초 후, 아래쪽에서 파열음이 들려왔다.
필시 남자의 몸뚱이가 콘크리트 바닥과 충돌하며 나는 소리다.
“저거, 죽은 거 아니야?”
파티원들이 웅성댔다. 예상치 못한 상황 전개에 당황했기 때문이리라.
“이 새끼들아! 뭘 구경만 하고 있어! 빨리 덮쳐!”
상철이 버럭 소리 지르자 파티원들이 전망대 안으로 들이닥쳐 백설희를 제압했다.
“놔! 이거 놔!!”
약간의 저항이 있었다지만 애초에 50:1의 싸움, 아무리 백설희가 날고 긴다 해도 상대가 될 리가 없다.
설희는 결국 처참히 짓뭉개져 밧줄에 포박됐다.
상철은 그 틈에 전망대 아래를 내려다봤다.
피범벅이 돼서 몸을 축 늘어뜨린 남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씨발, 저건 확실히 죽었겠군.”
상철은 씁쓸한 표정으로 혀를 찼다.
그건 동정의 뜻이 아니었다.
남자가 가지고 있던 300점이 넘는 포인트가 혹시 날아갔을까 걱정됐기에 나온 행동이었다.
상철은 일단 설희가 가진 점수를 파악하기 위해 팔찌로 지도를 열었다.
‘젠장, 점이 너무 모여 있어서 파악이 안 되네.’
N타워 정상은 좁은 공간에 파란 점 수십 개가 겹쳐 점수를 제대로 보기가 어려웠다.
상철은 입맛을 쩝 다시며 말했다.
“자, 포인트는 일단 내려가서 정산하자고.”
상철 본인이 설희를 직접 이끌고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뭐, 그래도 내 합격은 어차피 확정이니까.’
300포인트가 날아갔어도 백설희의 점수는 최소 100점 이상.
이미 확보한 점수를 생각하면 상철의 합격은 확실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이년이나 조금 데리고 놀아 볼까?’
4층 계단을 내려가든 즈음, 상철은 엉뚱한 생각을 품었다.
그의 눈동자가 백설희의 몸을 노골적으로 훑고 지나더니 엉덩이를 탁탁 두드렸다.
“금메달도 받으신 아가씨가 왜 그러셨어. 이젠 살인자 신세가 되셨네.”
“……더러운 손 치워.”
“허허~ 만진다고 닳아 없어지는 것도 아닌데 왜 예민하게 구나? 어차피 감방 들어갈 몸뚱이인데 좀 만져나 보자고.”
상철은 도리어 신이 나서 설희의 허리에 손을 감싸 안는 등, 성추행을 아무렇지 않게 저질렀다.
애초에 사채업자인 그이기에 이 정도는 범죄라는 자각도 제대로 없는 수준일 터였다.
3층을 지나갈 때 즈음, 인내심이 한계에 달한 백설희가 상철을 죽일 듯 노려보며 외쳤다.
“꺼져 버려 이, 변태 새끼야!”
그녀는 갑자기 어깨로 상철의 몸을 밀쳐 낸 후 품속으로 파고들어 어퍼컷으로 턱을 가격했다.
“커헉! 이런 씨발 년이!”
“어디서 년년 거려!”
설희는 다시 비틀대는 상철에 명치에 주먹을 한 방 더 박아 넣고, 비상문을 열고 엘리베이터를 향해 뛰었다.
상철은 입에서 침을 질질 흘리며 파티원들을 향해 소리쳤다.
“이 새끼들아! 저년 잡아!”
부랴부랴 파티원들이 뒤를 쫓았지만 간발의 차로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혔다.
애꿎은 철문을 쾅쾅 두드려 봤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뭐야, 엘리베이터가 작동되는데?”
“이거 어쩌냐!”
멀뚱대는 파티원들의 모습을 보던 상철이 버럭 외쳤다.
“야이 씹……. 멍청한 새끼들아! 계단으로 뛰어 내려가!”
50명의 인원이 부랴부랴 계단 아래로 뛰었다.
하지만 폭이 좁은 계단을 빨리 내려가려다 보니 발이 꼬여 넘어지는 등 엉망진창의 상황이 펼쳐졌다.
겨우겨우 2층까지 내려왔을 때, 그들의 앞엔 예상치 못한 인물이 계단을 막고 서 있었다.
“커헉, 뭐야 저 인간! 죽은 거 아니었어?”
더벅머리의 남자 허세현. 조금 전 전망대에서 떨어져 죽었던 남자였다.
사람들은 귀신이라도 본 듯, 멍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세현은 어깨를 으쓱하며 여유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야야, 아무리 상대가 금메달리스트여도 그렇지 50명이서 다구리 치는 건 너무 치사하지 않냐?”
“이 새끼 무슨 개수작이야? 넌 분명 전망대에서…….”
“떨어져 죽었다?”
남자가 장난스러운 얼굴로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마상철 씨가 돈놀이하는 분치고 머리가 좀 나쁘네, 관리인이 말했잖아. 수험생들 간 전투로 생긴 부상은 완벽하게 회복시켜 준다고.”
“이이익!! 이것들이 짜고 친 거냐!”
상철은 순간 뒤통수가 서늘해짐을 느꼈다.
현재 수험생들은 몸에서 흐르는 푸른빛이 부상을 회복시켜 줄 터. 그 효과는 몇 번이고 확인한 적이 있기에, 설사 타워에서 떨어졌다 해도 죽을 리 없다.
세현이 추락하는 장면이 워낙 강렬해서 잠시 그 사실을 잠시 망각한 게 결정적인 실수였다.
“멍청한 새끼, 그렇다고 네가 뭘 어쩔 건데? 우린 50명이야!”
상철은 이를 빠득 갈며 검을 휘둘렀다.
세현은 능숙하게 허리를 숙여 이를 피했고 검은 애꿎은 콘크리트 벽을 드르륵 긁었다.
그 틈에 세현이 뻗은 주먹이 상철의 복부를 강타했다.
빡-!
“커헉!”
[허세현 님이 마상철에게 5포인트를 빼앗습니다!]
상철이 컥컥 신음하며 주저앉자 세현은 품에서 붉은색 캡슐 하나를 꺼내 들었다.
“뭘 어쩌긴 어째, 이러면 되지.”
‘작열 캡슐’, 자판기에서 5포인트를 주고 살 수 있는 소모형 아이템이다.
캡슐을 계단에 집어던지자 빠각-! 소리를 내며 바스러졌다.
그러자 상철과 세현 사이에 불길이 화륵 치솟았다.
“이거 앞으로 1시간은 탈거거든? 불 꺼지면 보자고.”
“거기 서! 거기 서 이 새꺄! 너 진짜 뒤진다! 여기서 빠져나가면 너 뒤진다고 이 새끼야!”
“어 그래~ 할 수 있으면 해 봐.”
세현은 빙긋 웃으며 손을 흔들며 계단을 내려갔다.
상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등 뒤로 의미 없는 욕지거리를 내뱉는 것뿐이었다.
† † †
시험 종료까지 30분.
남산 중턱, 콘크리트 구조물 위에 세현과 설희 두 사람이 쪼그려 앉아 있었다.
20m 높이에 올라올 수 있는 방법은 사다리 하나뿐인 장소였다.
둘이 이곳에 있는 건 끝날 때까지 포인트를 안전히 지키기 위함이었다.
원거리 무기가 없는 한 아래에서 공격이 불가능하고, 사다리로 올라가 싸우기엔 위에 있는 사람이 지키기 훨씬 유리하다,
이곳은 천혜의 요새나 다름없었다.
“백설희 씨, 200포인트 받아 가요.”
“헤헤, 200포인트까진 필요 없어요. 그냥 제 점수만 돌려주세요.”
“받아 둬요. 뭘 하든 한 만큼 먹자는 게 내 신조거든. 그리고 누가 또 알아요? 포인트 많으면 좋은 일이 생길지도 모르지.”
“뭐, 정 그렇다면…….”
설희는 마지못해 제안을 받아들였다.
세현은 팔찌를 조작해 포인트를 전달했다.
[허세현 님이 200포인트를 전달했습니다.]
[현재 백설희 님의 포인트는 200점입니다.]
[현재 허세현 님의 포인트는 238점입니다.]
분배가 끝나고, 조용히 시험이 끝나길 기다리던 중.
설희가 침묵을 깨고 세현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쪽은 밖에서 무슨 일 하셨어요? 뭐 특전사? 아니면 경호원? 아까 싸울 때 몸놀림이 보통은 아니던데.”
이에 세현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특전사는 무슨, 그냥 노가다 뛰고 뭐 그랬어요.”
“노가다요?”
“임용고시 보다가 4번이나 떨어져서요.”
“임용……고시요?”
“뭐 길게 말해 봐야 재미도 없으니 그런 줄 아세요.”
세현은 적당히 둘러대며 대화 주제를 바꿨다.
“그건 그렇고, 심심하면 올림픽 결승전 얘기 좀 해 봐요. 그때 엄청났잖아요. 10연속 득점.”
주로 백설희의 올림픽 당시의 일화 따위를 물으며 시간을 때웠다.
그렇게 시간을 죽이고 있자니 저 멀리 사람 무리가 몰려오는 것이 보였다.
“저기다! 저기야!”
가장 앞에는 건달 같은 인상의 남자, 마상철이 분노한 얼굴로 달려왔다.
“씨부럴 새끼야! 당장 안 내려와! 야, 당장 올라가서 끌어내려!”
상철의 다그침에 파티원 몇 명이 곧장 당장 사다리를 붙잡고 위로 성큼성큼 올랐다.
“어이구, 성질들도 급하시네.”
세현은 씨익 미소 지으며 저격총의 방아쇠를 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