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1화.
Level 1. F급 트롤, 회귀하다.
“재미없는 건 아름답지 않아.”
평생 재미를 찾아 우주를 방황한 두 의지가 있었다.
그녀들은 수십만 년을 떠돌며 여러 별에서 수많은 유희를 반복했다.
그러던 중-.
둘은 어느 외딴 행성계에서 아름다운 푸른색의 별, 지구를 발견하게 됐다.
“여기, 아주 재미있어 보여.”
“그래. 이번엔 여기서 노는 건 어때?”
“좋아.”
전설, 문화, 게임, 역사 등등.
두 의지는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미친 듯이 탐닉했다.
그리고 자신들이 재미있다고 생각한 모든 것을 뒤섞어 방대한 규모의 게임을 만들었다.
“이게 우리가 만든 세계야.”
“정말정말 재미있을걸?”
“다들 즐겨 주면 좋겠네.”
<아파트>.
높이 100km를 자랑하는 100층짜리 콘크리트 구조물.
사람의 목숨을 끝도 없이 먹어 치우는 재앙의 탑.
재미만을 추구하던 두 여신의 농간이었을까?
아파트는 전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 대한민국과 북한의 한 가운데 위치한 DMZ 지역에 우뚝 솟아났다.
[9시 뉴스입니다. 하루 평균 아파트에 올라서는 사람들의 숫자가 500명을 훌쩍 넘은 것으로…….]
[오늘도 7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습니다. 긴급 구조대가 파견됐지만 이미 몬스터들에게 목숨을 잃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세상을 구하기 위해.
돈과 보물을 위해.
명예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많은 인간이 죽음을 불사하며 괴물들이 득시글대는 아파트의 정상으로 향했다.
두 여신의 축복을 받아 이능력을 사용하는 초인들.
사람들은 그들을 아파트의 입장을 허가받은 자, <입주자>라고 불렀다.
† † †
아파트 50층, 메인 던전 <올림포스>의 앞에 근 500명에 달하는 초능력자, 이른바 입주자들이 대기 중이었다.
다양한 인종, 나이, 성별로 구성된 그들은 제각기 비장한 얼굴로 거대한 철문을 노려봤다.
이들은 입주자 중에서도 상위 3% 이내의 최강자들이자 인류 최후의 결사대였다.
‘여기서 막히면 인류는 100% 멸망한다.’
수천 명의 목숨을 집어삼킨 최악의 메인 던전 50층. 이곳을 앞으로 40일 이내에 뚫지 못하면 아파트는 거대한 괴물을 지구에 풀어놓을 것이다.
수많은 군인과 입주자들의 희생, 탱크와 미사일, 심지어는 핵미사일까지.
지금까지 인류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버텨 왔지만, 더 이상 괴물들을 막아 낼 여력이 없었다.
“다들 조용히 해 주십시오! 지금부터 임무 브리핑할 테니 잘 들으셔야 합니다!”
그런 와중에 선두에 서 있는 금빛 갑옷을 입은 미남자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그의 이름은 최은철.
굴지의 재벌 ‘한성 그룹’의 후계자 중 한 명일 뿐만 아니라, S급 클래스의 소유자이자 랭킹 1위 <팔콘>의 길드장으로 이번 결사대의 총대장이라는 중책을 맡았다.
그가 작전을 브리핑하는 와중, 입주자들은 한 남자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이런 중요한 싸움에 저 새끼는 왜 온 거야?”
“저런 잡종 새끼가 이런 중요한 임무까지 참가한다고?”
구석에 앉아 눈을 감고 있는, 더벅머리에 평범한 인상의 남자.
왼쪽 팔에는 볼품없는 검은색 팔찌가 채워져 있었고, 갑옷의 색깔도 뒤죽박죽이어서 우스꽝스러웠다.
그의 이름은 허세현.
앞서 말했던 최은철과는 같은 대학교, 같은 과 동기 동창이지만 허세현은 엘리트 코스를 밟아 온 최은철과 정반대의 길을 걸어왔다.
‘클래스 복권’을 긁어 등수에 따라 받게 되는 클래스 등급.
세현의 등급은 최하급인 F급이었다.
성장의 한계가 명확하다 못해 처참했기에 보통 F급 입주자들은 아파트의 삶을 포기하고 민간인으로 살아간다.
하지만 그는, 허세현은 달랐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아파트의 시스템을 총동원해 힘을 키웠고, 특유의 실용적인 전투 방식으로 명성을 드높이며 무려 200레벨을 넘겼다.
동기인 최은철이 엘리트 중 엘리트라면, 세현은 변칙적인 망나니 같은 인간이었다.
최근에는 동레벨을 가진 B급 입주자와 PVP를 해서 승리했는데, 이 사건은 아파트 전체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클래스 등급이 전투력의 중요한 지표가 되는 아파트에서 F급이 B급과 붙어서 이겼다는 건, 토끼가 호랑이에게 이겼다는 것만큼이나 믿기 힘든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아마 허세현 씨가 B등급만, 아니 C등급만 됐어도 아파트의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겁니다.]
이런 어마어마한 일을 해낸 허세현이지만, 상위권 랭커들은 그를 조금도 인정하지 않았다.
“B급을 이겨? 웃기네, 돈 주고 짜고 친 거겠지.”
“F급 트롤 새끼.”
이유는 간단했다.
F급인 그를 인정하는 것은, 자신들의 권위와 자리에 위협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F급 트롤이라는 별명이 붙은 것 또한 이런 분위기 속에서 탄생한 것.
그들은 인류 멸망을 앞둔 지금조차 세현을 향한 조롱을 멈추지 않았다.
“거기 아저씨, 다 들리거든? 할 말 있으면 뒷담 하지 말고 면전에서 하지 그래.”
“이 잡종 새끼가 어디다 칼을 들이미는 거냐?”
한참을 듣고 있던 세현이 벌떡 일어나 비난을 퍼붓던 입주자에게 검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는 도리어 세현에게 화를 냈고, 가벼운 몸싸움까지 벌어졌다.
그렇게 감정이 점점 격해지던 중.
“세현아, 그만해라.”
브리핑을 하고 있던 최은철이 두 사람의 사이로 끼어들어 허세현을 잡아 말렸다.
“아 미안미안~ 상위 클래스 분들 일하시는데 내가 눈치 없이 방해가 됐네.”
“너 조심해. 그렇게 까불다가 진짜 다치는 수가 있어.”
“워~ 무서워라. 여기요 사람들! 재벌집 선량한 소시민을 협박합니다요!”
“천박하긴.”
자신의 경고에 세현이 요란을 떨자, 은철은 한숨을 푹 쉬며 사라졌다.
그 모습에서 묘한 분노가 느껴졌지만, 중요한 임무를 앞둔 상황이니만큼 이를 참는 듯했다.
소동이 일단락된 후.
“자, 출발합니다! 각자 포지션을 꼭 잘 지키세요!”
최은철이 검을 높게 올리며 외쳤다.
공대원들은 진영을 유지한 채 보스 룸의 문을 열었다.
철컥-!
문 너머엔 거대한 공동이 펼쳐졌다.
모래시계처럼 생긴 기둥들이 천장을 받쳤고 거대한 괘종시계들이 빼곡히 벽면을 장식했다.
그리고 정 중앙엔 커다란 물시계가 높게 솟아 있었다.
쾅-!!
“어우 씨발! 깜짝이야!”
순간, 등 뒤의 철문이 거칠게 닫히며 중앙의 물시계가 와르르 무너졌다.
먼지가 뭉게뭉게 일어나더니 그 사이로 거인이 나타났다. 한 손에는 낫을, 다른 손에는 모래시계를 든 여성형의 거인.
그녀의 머리 위로 네모난 박스가 떠올랐다.
[#. 보스 몬스터 / 시간의 신 크로노스]
- 시간의 신, 올림포스의 과거의 주인이었다.
등급: 신화(SSS)
레벨: 223
HP / MP: ??? / ???
<하하! 이번 놈들은 얼마나 날 즐겁게 해 주려나!>
크로노스의 입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신화급, 저런 등급이 있었냐?”
그를 본 결사대원들은 당황했다.
이번 던전의 보스가 여태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신화>라는 등급을 떡 하니 달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거 진짜 좆 되는 거 아니냐?”
“아씨, 유서도 안 써 놓고 왔는데…….”
입주자들 사이에선 웅성거림이 번져 나갔다.
최은철은 분위기를 다잡기 위해 그 즉시 거친 목소리로 외쳤다.
“다들 준비하십쇼! 작전을 속행합니다!”
† † †
“모, 모두 죽을 거야!”
“히이이익, 살려 줘! 살려 달라고!”
전투가 시작된 지 30분, 보스 룸 안에는 지옥이 펼쳐졌다.
500명에 가까웠던 결사대는 이미 절반가량으로 줄어든 상태였다.
“물러서지 마 이 새끼들아! 탱커가 빠지면 딜러들이 당하잖아!”
최은철이 거친 욕설을 뱉으며 최대한 전선을 유지하려 해봤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모래시계에 저딴 능력이 있을 줄이야!’
보스 ‘크로노스’의 능력은 한마디로 설명할 수 있었다.
오른팔에 든 모래시계를 이용해 시간을 조종하는 것.
설명이야 간단하지만 이 능력이 정말로 골 때렸다.
아군의 시간을 늦춰 이동속도를 극단적으로 낮추거나, 본인의 시간을 가속해 공격을 가해 온다.
게다가 데미지를 주면 아예 육체의 시간을 거꾸로 되돌려 데미지를 원천 무효화시켜 버렸다.
“딜러들은 모래시계를 먼저로 노립니다!”
그나마 해결책이라고 나온 것이 시간 능력의 매개체로 보이는 모래시계를 공략하는 것.
하지만 전력은 이미 약해질 대로 약해졌고, 놈의 공격을 뚫고 모래시계를 파괴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그렇게 모두가 절망에 빠졌을 무렵, 입주자 몇 명이 크로노스를 가리키며 놀란 목소리로 외쳤다.
“뭐, 뭐야 저거! 트롤 새끼 아니야?”
모두 시선을 돌리자 허세현과 그의 소환수인 스켈레톤 하나가 크로노스의 모래시계에 올라타 있었다.
“아, 여기까지 오느라 진짜 신나게 뺑이쳤네!”
전투가 지속되던 중, 허세현은 일체의 공격에 가담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야의 사각에서 천천히, 들키지 않게 크로노스에게 접근했던 것이다.
“한 방에 보내 주마!”
세현은 괴성을 내지르며 검으로 모래시계를 후려쳤다.
까앙-!
까앙-!
불꽃이 튀며 모래시계의 HP 바가 조금씩 줄어들었지만, 세현의 딜량으로는 파괴는 힘들어 보였다.
<뭐야, 날파리냐?>
크로노스는 얼굴에 비웃음을 띄우며 보란 듯이 낫을 세현을 향해 움직였다.
구태여 시간 가속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세현을 그다지 위협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젠 뭐 몬스터까지 나를 F급이라고 무시하고 그런 거냐?”
크로노스의 낫이 코앞까지 다가왔을 때, 세현은 스켈레톤을 옆으로 밀치며 아래로 뛰어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