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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7
로웨나 블루로즈
김아흔
Part 7 - (6)
홀 중간에 놓여있던 괘종시계에서 길고 높은 종소리가 아홉 번 울렸다. 그 순간, 나는 퍼스에서 호그스미드로 가는 마지막 기차가 아홉 시에 있었다는 것이 떠올랐다. 지금 당장 순간이동을 한다고 해도 제시간에 도착하지는 못할 것이다.
종소리가 그치자 커다란 저택은 공허한 침묵으로 가득 찼다.
“왜 너였냐고.”
리들 교수의 입에서 나온 저음의 목소리가 나를 일깨웠다. 그의 눈길이 차분하게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너는 내 계획 속에 없는 변수였으니까.”
“뭐라구요?”
변수라고? 나는 그가 내뱉은 말의 의중을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물론 내가 리들 교수의 정체를 알아낸 것은 그의 입장에서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단지 뜻밖에 발생한 상황의 가변적 요인이라는 것이, 하필 ‘나’를 영웅으로 키우겠다는 것에 대한 적절한 답이 되어주지는 못했다.
“내가 지금까지 계획했던 것들을 어떻게 달성시켜왔는지 아나?”
무심히 다시 고개를 돌린 리들 교수가 천천히 홀의 계단을 내려갔다. 나는 그가 뜬금없이 꺼낸 말에 미간을 찌푸리며 리들 교수의 뒤를 따랐다.
딱히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은 듯 그가 말을 이었다.
“원인이 없다면 결과 또한 없다는 원칙을 철저히 지켜왔기 때문이지.”
마침내 1층에 도착한 리들 교수는 천장화가 그려진 홀을 지나 천천히 걸어갔다. 나는 그가 꺼낸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억지로 조합해가며 그의 뒤를 쫓았다. 셀윈 가의 문장과 응접실 방을 건너 마침내 복도 끝까지 걸어간 우리는 보통 사람의 키보다 더 큰 마법사 동상 앞에 도달했다. 동상은 지팡이를 바닥에 짚은 채 길게 로브를 두르고 있는 마법사의 모습이었는데, 옷의 주름까지도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그가 마법사 동상을 겨누며 주문을 외우자, 미약하게 흔들리던 동상이 마치 처음부터 분리되어 있었던 것처럼 반으로 갈라졌다. 나는 그 뒤에 모습을 숨기고 있었던 거대한 철제문을 보고 조금 놀랐다. 리들 교수가 잠금 해제 마법을 걸자 철제문이 스스로 열리더니 아래로 향하는 지하 계단이 나타났다. 여기가 지하 금고로 향하는 계단인 걸까. 안쪽에서 역한 공기가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꽤 오랫동안 환기를 시키지 않은 것 같았다.
“뒤로 물러서.”
리들 교수가 나에게 명령했다. 나는 그의 말에 따라 살짝 뒷걸음질 쳤다. 리들 교수가 지하실 안쪽으로 어떤 주문을 읊조리자, 주변의 공기가 갑자기 인위적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기류를 순환시키는 종류의 마법인 것 같았다. 철제문을 중심으로 주변 공기의 흐름이 느낄 수 있을 만큼 분명하게 변했다.
나는 초점이 흐려진 대화를 재개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잘 모르겠어요.”
리들교수가 철제문 쪽에서 시선을 떼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당신이 말하는 것이 제가 영웅이 되는 것과 어떤 관계가 있다는 건가요?”
“원하는 결과를 내기 위해서는 그와 관련된 원인을 수시로 주시하고 조정해야 하지. 그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미지의 것이 튀어나오면, 과감히 제거한다. 그래야 예정되었던 것들이 상호작용을 일으켜 기대하는 결과를 도출해낼 수 있을 테니까.”
그가 지팡이로 공기를 순환시키는 마법을 해제하며 덧붙였다.
“너는 내 계획 속에 없는 존재였어. 특히 네가 그 자리에 있었던 건 말이지.”
내가 애니마구스의 모습으로 그가 ‘이름을 알 수 없는 자’라는 것을 엿본 그 날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그가 더 설명해주기를 기대했으나, 리들 교수는 다시금 지하실 쪽에 시선을 꽂았다. 지하실에서 올라왔던 습한 냄새는 어느새 사그라져 있었다. 그는 마법을 이용해 철문을 열려있는 상태에서 고정했다.
“지팡이를 들어라.”
리들 교수가 나에게 짧게 명령했다. 그의 말에 따라 지팡이를 순순히 꺼내면서도 나는 의문스러운 어조로 중얼거렸다.
“호그와트 밖에서는 마법을 쓰는 것이 금지되어 있는데…….”
“이 성은 추적방지 마법이 걸려 있어서 상관없어.”
그는 그렇게 말하며 앞장서서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따라오라는 거겠지. 나는 그의 뒤에 붙어 조심스레 계단 쪽으로 발을 내디뎠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좁아서인지 우리의 발걸음 소리가 유난히 크게 반사되어 울렸다. 마치 내가 가는 길을 환히 밝히기라도 하듯, 걸음을 한 번 내디딜 때마다 양쪽 돌벽의 횃불에서 밝은 불빛이 치솟았다. 횃불에서 흐르는 불은 십몇 년간 잠들어있던 진득한 어둠을 집어삼켰다.
그는 내가 따라오는 속도를 맞춰 천천히 걷고 있었다. 나는 그의 뒤에 바싹 붙어 뒤를 따랐다.
“당신의 말에 따르면, 나를 제거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예상치 못한 요소니까요.”
“나는 이 변수를 또 다른 결과를 위한 원인으로 생각했을 뿐이야.”
또 다른 결과? 그것이 나를 영웅으로 만드는 것이란 말인가? 이를 위해 새롭게 계획을 만들고 조율했다고? 그럼 비밀의 방을 열고, 내가 셀윈의 유일한 후계임을 공개한 것도 모두 이 변수를 활용하기 위해 추후에 계획했던 것이라고?
“당신은 그럼 내가 엄마의 딸이라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게 아니었나요?”
“네가 에밀리의 딸이라는 사실은 네 가족관계를 파악하다가 알게 된 사실이야.”
리들 교수가 말했다.
“나에게도 꽤 놀라운 일이었어. 그녀는 정말 마법사 세계에서 홀연 듯 사라졌으니까.”
그러는 사이 우리는 지하실에 도착했다. 정작 지하실 내부에는 횃불이 없었기 때문에, 리들 교수가 지팡이를 들었다.
“루모스.”
지팡이 끝에서 환한 빛무리가 올라왔다. 나 또한 그를 따라 루모스를 시전했다. 두 지팡이에서 나온 빛 때문인지 내부는 생각보다 더 밝아졌다. 공기 중에 도는 음습한 기운과는 달리 의외로 지하실은 깔끔했다. 꽤 오래되어 보이는 서책이나 빗자루 등 마법이 걸려있는 것처럼 보이는 온갖 종류의 물건들이 제자리에 정리되어 있었다.
창이나 방패 같은 무기를 지나 우리는 왼쪽 구석에서 금고처럼 보이는 물건을 발견했다. 꽤 견고하고 단단하게 느껴지는 철제 금고였다. 리들 교수는 다가가서 지팡이로 이를 먼저 건드려보았다. 그가 여러 가지 마법을 사용했으나 금고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아마 너만이 직접 열 수 있을 테지.”
내 손이 금고의 손잡이에 닿자, 나에게 반응하듯 금고가 붉게 달아올랐다. 다소 놀라서 리들 교수를 올려다보았더니, 그는 계속하라는 듯 가볍게 고갯짓했다. 나는 살짝 힘을 주어 금고문을 열었다. 금고 깊숙한 곳에 열쇠가 놓여 있었다.
나는 손을 집어 넣어 금고 안에 들어있던 열쇠를 꺼냈다. 금빛으로 된 보통의 열쇠였다. 그린 고트의 열쇠라길래 말을 할 줄 안다든가, 날개가 달렸다든가 하는 등의 독특한 형태를 상상했던 나는 조금 의아했다.
“이게 그린 고트 열쇠가 맞나요?”
“그래.”
이렇게 쉽게 그린 고트 열쇠를 찾을 줄은 몰랐기 때문에 조금 얼떨떨한 느낌이었다. 그는 열쇠에 여러 가지 추적 마법을 걸고는, 제대로 간수하라는 말과 함께 나에게 돌려주었다. 이걸 어떻게 간수하고 어디에다가 쓰라는 거지? 내가 그린 고트에 방문하는 것은 머글 돈을 마법사 돈으로 환전하기 위해서였다. 열쇠를 들고 금고에서 돈을 꺼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1층에 올라가자마자 로지가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꽤 친근한 미소를 보이며 나에게 물었다.
“지하실에 다녀오신 건가요?”
“응. 금고 열쇠를 찾으러.”
“이제 어떻게 하실 예정이죠?”
내가 리들 교수를 바라보았다. 손목시계를 확인한 그가 가볍게 대답했다.
“오늘 하룻밤은 여기서 보내야 할 것 같군.”
리들 교수의 말에 로지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오, 그럼 로웨나 아가씨는 에밀리 아가씨의 방을 쓰시면 될 것 같네요.”
로지가 다소 호들갑스럽게 외치며, 나를 방으로 안내했다.
* * *
산악 지대에 위치한 셀윈 성은 밤이 되니 호그와트의 초겨울만큼이나 춥게 느껴졌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창밖에서는 보슬보슬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는 조금 느린 걸음으로 1층 복도를 걸었다. 여기 이 장소에서, 리들 교수는 나를 만들어진 영웅으로 활용할 계획에 대해 말했었다. 얼마 되지도 않은 일이었는데 마치 아주 옛날의 것처럼 멀게 느껴졌다. 나는 복도를 지나 천천히 응접실로 향했다.
응접실 문을 넘어 벽난로 근처까지 걸어 들어가자 리들 교수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머그잔을 든 채 비 오는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내 인기척을 느낀 듯 고개를 돌려 나를 한 번 쳐다본 그는 지팡이를 꺼내 벽난로에 불을 붙였다. 그의 지팡이 끝에서 나온 불꽃은 벽난로에 남이 있던 마른 장작에 닿자마자 응접실 전체를 채울 만큼 거대한 불꽃으로 화르륵 타올랐다가 다시 사그라들었다. 벽난로에서 불길이 치솟자 물기를 잔뜩 머금은 공기가 건조해지며 습기가 조금 가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망설임 없이 벽난로에 불을 피워내는 그를 바라보며,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당신은 셀윈 성에 익숙해 보이는군요.”
“내가 어릴 때 와본 적이 있으니까.”
그가 벽난로 근처에 있는 소파에 앉으며 대답했다. 나는 리들 교수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엄마와 호그와트를 다닐 때 말하는 건가요?”
“아니, 그보다 더 어릴 때.”
나는 로지가 했던 말을 기억했다. 알렌이 그를 데려왔었다고.
리들 교수가 말을 이었다.
“알렌 셀윈이 나에게 레질리먼시를 가르쳤어. 나에게 처음으로 호기심이라는 것을 보인 인간이었지.”
“처음으로 호기심을 보였다뇨?”
“나는 고아였으니까.”
나는 그가 무심코 던진 말에 깜짝 놀랐다. 지금까지 나는, 리들 교수가 나는 모르는 어떤 순수혈통 가문에서 태어나 엄격한 마법 교육을 받으며 자라왔으리라 막연히 추측했었다. 그게 아니라, 고아였다고. 놀란 표정을 숨기려고 애썼으나, 리들 교수는 내 반응에 별로 개의치 않는 듯했다.
“내가 태어나던 시기는 그린델왈드의 세력이 가장 강할 때였어. 마법사들간에 거듭된 분쟁으로 부모를 잃은 고아가 많았지. 심지어 머글 세계에서는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였으니, 마법사 세계든 머글 세계든 발에 치이는 것이 전쟁고아인 시대였다고 할 수 있겠군.”
리들 교수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알렌 셀윈은 연고가 없는 순수혈통의 남자아이가 필요했어. 그리고 내가 파셸통크를 하는 것을 보고 순수혈통이라고 지레짐작했고, 내가 그 역할을 하기에 적합하다고 판단했던 것 같군. 그래서 셀윈 성에 데려온 거고.”
리들 교수가 덧붙였다.
“나중에는 결국, 제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당신에게 어떤 역할을 기대했길래요?”
“그는 제 후계를 찾고 있었다. 아마 제가 통제할 수 있는 어리숙한 마법사이길 바랐겠지.”
호그와트에 입학하기도 전의 리들 교수라. 나는 그가 미아나 루카스보다 어린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어쩐지 눈에 선히 그려지지 않아 나는 잡생각을 거두어버렸다.
“셀윈이 자신의 판단이 틀렸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금방이었어. 나는 순혈도 아니었고, 그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지도 않았으니까.”
“그래서요?”
나는 초상화 속 알렌 셀윈의 거친 심성을 떠올리며 물었다. 리들과 알렌은 그렇게 친해 보이지는 않았다. 내가 중얼거리듯 말을 이었다.
“가만히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리들 교수가 일상적인 이야기라도 하듯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맞아. 나를 죽이려고 하더군.”
“……뭐라구요?”
“내가 셀윈 가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이유였을 거다.”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제법 고집 있어 보이던 알렌의 눈동자가 떠올랐다. 아직 호그와트에 입학하기도 전의 어린아이를 죽이려고 했다고.
“어찌 됐든 나는 살아남았고, 다시 머글 고아원으로 보내졌지.”
왜인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가 측은하거나 불쌍해서는 아니었다. 리들 교수는 아무리 봐도 담담한 어조로 말하고 있었다. 아마 내가 동정심을 가지길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내가 묻는 것을 가감 없이 그대로 대답하고 있었으니까. 우리 둘 사이에 막연한 침묵이 스며들었다.
그 후의 리들 교수는 어땠을까. 지금까지 한 번도 그가 어떤 경험을 했고, 어떤 성장 배경에서 살아왔는지 궁금했던 적은 없었다. 그러나 그가 고아였고, 알렌 셀윈에게 살해당할 뻔했다는 이야기를 듣자 나는 불현듯 리들 교수가 이를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알고 싶어졌다. 그러나 내가 무엇인가 질문을 채 하기도 전에, 먼저 입을 연 것은 리들 교수였다.
“덤블도어 교수가 너를 따로 부른 적은 없나?”
나는 그가 자신의 이야기를 길게 하고 싶지 않아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갑자기 덤블도어 교수님의 이야기를 꺼낸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겠지. 굳이 캐물을 필요까지는 없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휘저었다.
“아뇨. 덤블도어 교수님이 뭔가 알아차린 건가요?”
불안한 마음에 내가 오히려 그에게 되물었다. 시리우스가 대연회장에서 리들 교수의 정체를 폭로했을 때, 다른 모두가 이를 장난으로 치부하는 와중에도 덤블도어 교수님만큼은 이를 흘려듣지 않는 기색이었다.
“확실히 나를 의심하고 있는 것 같더군.”
그가 무덤덤한 말투로 대답했다.
“시리우스 블랙의 기억을 이미 읽었는지도 모르는 일이고.”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요?”
“아직까지는 별다른 증거가 없으니까 문제가 되지 않을 거다. 하지만 조심할 필요는 있겠지.”
리들 교수가 조용히 말했다. 나는 단지 고개만 끄덕였을 뿐이었다. 우리 둘의 대화는 다시 맥없이 끊겼다.
낮게 어둠이 드리운 응접실에는 벽난로에서 나오는 불빛만이 우리를 비추고 있었다. 마른 장작에서 흐르는 타는 냄새가 습기 찬 공기와 묘하게 섞여 들어갔다. 고요한 침묵 사이로 따뜻한 기운이 흘렀다.
너무나도 평온한 순간이었다. 리들 교수와 함께 있다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나는 난롯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일렁이는 불꽃이 커졌다가 작아지기를 반복하며 시선을 되잡아 끌었다. 그와 동시에 수많은 생각이 선후를 분간하지 않고 뒤섞이며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오늘 있었던 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며 내 사고를 교란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을 제쳐놓고서라도, 내 머릿속에는 풀라지 않는 한 가지 의문이 계속 맴돌고 있었다.
이를 물어볼 것인가, 말 것인가. 거듭 망설였으나, 결국 나는 입을 열어 하고 싶은 말을 꺼냈다.
“생각하면 할수록 당신이 필요에 따라 나를 살려둔 것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어요.”
내가 먼저 입을 열자, 리들 교수의 검은 눈동자가 차분하게 나를 향했다. 나는 이를 피하지 않았다. 여느 때와 다르게, 나는 그의 검은 눈동자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마치 거기에서 무엇인가를 읽어내리기라도 할 듯이.
“오히려 나를 살려 두고, 거기에 살려둘 이유를 만든 것 같아요.”
내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이건 제 착각인가요?”
리들 교수는 꽤 오랫동안 나를 바라보았다.
“…네 말대로, 굳이 널 살려둘 필요는 없었지.”
“아뇨, 이건 필요나 선택의 문제가 아니에요.”
나는 리들 교수와 눈을 마주하며 말했다.
“당신은 그때 나를 없앴어야 했어요.”
“…….”
그는 대답이 없었다.
나는 알았다. 생각하면 할수록 나를 이용하겠다는 그의 계획은 불완전했다. 그가 아무리 완벽하게 모든 것을 구상한다 하더라도, 그것의 주체가 되는 내가 이를 따라가지 못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법이었다.
그는 원인과 결과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필요 없는 변수를 모조리 제거하고 남은 원인으로 원하는 결과를 만든다고. 그 방식은 확실히, 갑자기 끼어든 변수로 새로운 계획을 세우는 것보다 훨씬 효율적이고 적실한 선택이었다. 변수에는 또 다른 변수가 따르는 법이고, 이는 결국 예상하지 못하는 결과를 불러올 뿐이니까. 그러므로 변수인 나는 제거되어야 함이 마땅했다. 그리고 아마도, 이를 더 잘 알고 있는 것은 리들 교수일 것이다.
“말해줘요.”
벽난로에서 마른 장작 하나가 크게 타올랐다. 불빛이 길게 일었다가 다시 사그라졌다. 나는 다시 한 번 차분하게 물었다.
“난 이유를 듣고 싶어요.”
“…너를.”
머그잔에 담긴 티를 한 모금 마신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죽이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가 꺼낸 말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위화감에 순간 내 몸이 굳었다. 지금까지 리들 교수에게 들었던 그 어떤 설명보다도 그답지 않은 대답이었다. 죽이고 싶지 않다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그는 결코 좋다, 싫다의 감정적인 이유로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게 무슨 소리죠?”
이상하게도 그의 말 한마디가 나에게 깊게 꽂혔다. 마치, 흠 하나 잡을 데 없이 세워진 굳건한 성에서, 이와 어울리지 않는 치명적인 ‘결함’을 발견한 것처럼. 그가 세운 방벽의 작은 틈새 사이로 뭔가가 보일 듯 희미한 빛줄기가 일렁였다.
“분명, 모든 것을 필요에 따라 결정한다고 말한 건 당신이에요.”
“…….”
리들 교수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심지어 내 쪽을 바라보지도 않았다. 그는 항상 필요와 목적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의 모든 행동들은 확실히 그의 목적에 부합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리들 교수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자, 선택의 기준이라는 것을 안다. 그랬기 때문에 ‘그러고 싶다’라는 감정적 결단을 내렸다는 그의 설명이 나에게는 너무나도 낯설면서,
무엇인가를,
더없이 분명하게 만들었다.
창밖의 빗줄기가 더 거세지고 있었다.
이미 알고 있던 것을 상기해내듯, 확 정신이 들었다. 흩어진 조각들이 한 곳에 모아지며 불투명한 것들이 분명해졌다. 그의 눈동자에 인 서늘함은 그대로였으나, 이제 나는 거기에서 이전과 다른 무엇인가를 볼 수 있었다.
“그동안……”
나는 그의 옆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타오르는 난롯불에서 새어 나온 불빛이 그의 눈동자에 흐리게 일렁였다. 그의 뒤쪽으로는 검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내가 말을 이었다.
“나를 죽이지 않기 위해…… 나를 이용한 거군요.”
“…….”
리들 교수는 철저히 자신의 목적을 위한 결단만을 내리는 사람이었다.
그의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인지는 모른다. 마법세계를 완벽하게 자신의 지배하에 두고 싶은 것일지도. 분명 그의 정체를 아는 내 존재는 그의 목적에 반하는 것이었으리라. 나는 제거되어야 하는 것이 마땅했다. 그러나, 리들 교수는 대신 나를 이용하려고 했다.
나는 이제야 그가 지나칠 만큼 나를 몰아세운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이용가치가 충분히 높아야, 나를 살려 둘 수 있을 테니까. 내게 이용가치가 없다면, 그의 약점을 쥐고 언제든지 그의 안위를 위협할 위험성이 있는 나를,
그의 손으로 죽여야 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지금까지 불투명해 보이던 그의 모든 행동들이 명료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드디어 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얻어냈다. 그러나 이게 정말 내가 원하던 것이었나. 어쩌면 모르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었다. 손에 잡힐 듯, 모든 것이 보이기 시작했지만 그것은 결코 유쾌한 광경이 아니었다.
“이 모든 것은.”
내가 아랫입술을 물며, 겨우 입을 열어 말했다.
“당신이 처음부터 저를 죽이지 않은 탓에 발생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리들 교수는 이를 부정하지 않았다.
내 생존은 애초에 그의 안위와 양립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살려둠으로써 그가 구축한 견고한 세계에 균열이 일었다. 이미 그는 자신이 가진 약점을 노출했고, 어쩌면 리들 교수는 근시일 내에 톰 리들로서의 자신을 포기해야 하게 될지도 모른다. 합리적인 그가, 나를 이용하겠다는 지극히 비합리적인 선택을 내렸기 때문에.
그리고 그 대가로 나는 살아남았다.
나는 이제야 그의 시선 속에 감추었던 감정의 정체를 확연하게 느꼈다. 그리고 그가 왜 나를 건드리지 못했던 것인지도.
그냥 나를 그 자리에서 죽여 버렸으면 더 나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통도 없었을 것이다. 나는 내가 죽는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제거되었을 수도 있었다. 리들 교수를 만난 이후로 내가 겪어왔던 것들이 머릿속을 스치며, 왜인지 내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눈물을 닦아내고서야 나는 이를 알아차렸다.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내가 울 이유는 없었다. 이제까지 저자는 나를 죽일 듯이 괴롭혔고, 나는 수없이 고통받았다. 지금껏 내가 겪어왔던 시간이 서러워서? 그렇다면 지금, 왜? 새삼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은 당연했다…….
내가 왜 여기서 울어야 하지. 그에게 어떤 감정적 동요라도 느끼는 거란 말인가.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확인이라도 받듯 분명하게 내뱉었다.
“당신은 내 고통의 근원이에요.”
“…알고 있어.”
리들 교수가 조용히 대답했다.
“당신은 지극히 악하고, 개인적이고, 이기적이고…….”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울컥 올라오는 무엇인가를 삼키며, 나는 겨우 한 마디 내던졌다.
“절대, 나는, 당신을 이해하지 못해요.”
내 목소리에서 희미한 떨림이 느껴졌다. 이를 감추기 위해 나는 잇새를 그러물고 숨소리를 겨우 삼켰다. 그는 악한이었다. 이는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그런데도 나는 왜. 눈물이 흐른다는 것을 들키기 싫어서,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허망하게 빠져나간 눈물은 멈출 줄 몰랐다.
결국 나는, 정작 하고 싶은 말은 뱉어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