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웨나 블루로즈-94화 (94/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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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6

로웨나 블루로즈

김아흔

Part 6 - (11)

짧게만 느껴졌던 부활절 휴가가 끝나고 나는 다시 킹스크로스 역으로 향했다. 아빠를 따라 역까지 배웅을 나온 동생들은 유독 나를 보내기 싫어했다. 내가 너무 오랜만에 와서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울먹이던 미아가 울음을 터뜨리자, 옆에 있던 루카스도 같이 소리 내 울기 시작했다. 당황한 나는 두 사람을 품에 안으며 어르고 달랬다.

“언니, 두 달 후면 다시 돌아 올 거야.”

나는 루카스와 미아의 등을 쓰다듬으며 설명했지만, 미아는 두 달도 너무 긴 것 같다며 더 크게 울었다. 그 사이 아빠가 미아와 루카스 앞에 웅크려 앉아 두 달이 얼마나 짧은 시간인지 설명했다.

“우리 일요일 오후마다 피칸 파이 만들어 먹는 거 알지?”

“…네.”

“그 거 고작 여덟 번만 먹으면 로웨나 누나가 집에 돌아오는데?”

아빠는 이제 나 없이도 동생들을 달래는 것에 익숙해진 것 같았다. 울먹임을 그치지 못하던 루아가 천천히 숨을 삼켰다. 나는 아이들을 품에 안은 채 계속 말을 이었다.

“맞아, 언니 곧 또 오면 음유시인과 비들 이야기도 마저 해줄게.”

흥미를 가질 만한 소재로 달래가며 나는 겨우 두 사람의 울음을 그치게 했다. 이대로 울고 있는 동생들을 내버려두고 떠나게 된다면 너무 마음이 아팠을 것이다. 결국 아빠의 실없는 농담과 장난에 동생들의 얼굴에 웃음기가 돌고 나서야, 나는 겨우 자리에서 일어나 가족들에게 인사하고 열차에 몸을 실었다.

열차에 올라타자마자, 놀랍게도 차량 안에는 예언자 일보의 기자라는 사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내 얼굴을 알고 있는 듯 나에게 다가와 이것저것 질문을 하는 바람에 조금 당황했다. 리들 교수의 허락 없이 함부로 입을 놀렸다가 그에게 저주마법을 맞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나는 고개를 저으며 아무 할 말이 없다고 대답했을 뿐이었다. 그는 엄마가 머글 남자의 아이인 나를 임신했다는 이유로 셀윈 가에서 떠난 것을 알고 있느냐는 식의 자극적인 질문을 던지며─이는 그저 나에게 무엇인가 답변을 얻기 위해 지어낸 얘기들인 것 같았다─나를 추궁해댔지만, 나는 그가 어떤 말을 꺼내도 단호하게 무시했다.

빈 열차 칸을 찾아 복도를 지나갈 때마다 학생들의 시선이 나에게 쏠렸다. 대부분 학생들이 내가 셀윈 가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들은 나에게 말을 걸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것처럼 먼저 인사를 하며 내 눈치를 보았다. 머글 출신이 하루아침에 순수혈통의 유일한 계승자로 거듭났다는 사실, 그것도 그 머글 출신의 마녀가 바실리스크를 죽여 비밀의 방을 닫은 호그와트의 영웅이라는 것은 사람들의 흥미를 돋우는 가십인 것이 당연했다. 나는 인사는 받아주되 그들이 묻는 말에 일일이 대답하지는 않았다.

내가 먼저 객실에 도착해서 앉아있자, 약간 늦게 열차에 오른 필리다가 객실 칸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복도 쪽 문을 닫으며 불평부터 쏟아냈다.

“오빠들이 네가 어떤 애냐고 계속 물어봐서 피곤해 죽는 줄 알았어.”

자리에 앉은 그녀는 가방에서 개구리 초콜릿을 꺼냈다. 나에게도 하나 건네주었으나 나는 황급히 고개를 휘저었다. 굳이 필리다가 캐묻지 않아도 나는 그녀에게 그간 있었던 일들을 다 얘기해 줄 생각이었다. 어차피 웬만한 이야기들은 이미 예언자 일보에 실린 것들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셀윈 가의 이야기를 꺼냈다. 필리다는 특히나 내 피에 반응해 열린 셀윈 성의 이야기를 그렇게 좋아했다. 이름이 있다 싶은 가문들은 그렇게 자신들의 혈통들만이 제어할 수 있는 특정한 결계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당장 스포어 집안에도 비슷한 원리로 가문의 직통만 열 수 있는 특수한 약초 비급 같은 것이 있다고 그녀가 말해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 전체에 강력한 결계 마법이 걸려 있을 정도는 그렇게 흔하다고 볼 수 있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하긴, 당장 호그와트 성만 해도 그런 규모의 보호 마법은 지금의 마법사들이 쉽게 걸 수도, 풀 수도 없는 종류였다.

한참을 이야기하던 필리다는 이제 알파드의 재산을 물려받은 시리우스와 다시 친해질 필요도 없겠다며 농담을 걸었다.

“아빠가 그러는데 셀윈 가가 아빠 세대에 꽤 잘나가는 스코틀랜드 유지였대.”

나는 그녀의 대답을 들으면서도 실없이 미소 지었다. 그런 얘기는 꼭 잘 기억하는구나. 나는 그녀가 약재상 투자에 관한 얘기를 꺼내는 게 결코 농담처럼 느껴지지 않아서 속으로 계속 웃음만 나왔다.

* * *

다시 학기가 시작한 후로부터, 사람들은 나를 로웨나 블루로즈가 아니라 셀윈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나는 내 이름을 바꿀 생각이 없었으므로 그럴 때마다 항상 잊지 않고 이를 정정해주곤 했다. 이제 타인의 관심이 예전처럼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나에겐 그것들이, 일종의 ‘만들어진 영웅’으로 거듭나기 위한 전초적 준비 단계인 것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이제 여기에도 익숙해져야 하겠지. 아마도 마법 세계 내에서 내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는 더욱.

호그와트에 돌아오자마자 아이작에게 붙들린 나는 마치 문초라도 당하듯 모든 질문에 대답해주어야 했다. 이제 로웨나 셀윈이 되냐는 그의 질문에, 나는 셀윈 가의 자산과 권리에 대한 상속을 받는 것 정도지 그것이 내가 셀윈이 되어 가문을 잇는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답해주었다. 애초에 여자인 내가 가문을 승계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모든 이야기를 건네 들은 아이작이 중얼거리듯 한마디 던졌다.

“어쩐지 너 외출 나갔다 와서 얼이 좀 빠져 있다 싶었어.”

“그걸 기억해?”

“당연한 거 아냐?”

내 일을 어떻게 기억 못 하겠느냐는 뉘앙스의 말이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너 막…… 제출 기간 한 달이나 남은 천문학 과제를 한다고 밤샐 기세였잖아.”

내가 그랬던가. 사실 제대로 기억나지는 않았다. 셀윈 성에서 있었던 일이 나에게 너무 강력했던 탓에 나는 그 외의 것들을 명확하게 떠올릴 수 없었다. 그저 셀윈 성을 다녀와서 정신없이 과제와 공부만 했었던 기억만 드문드문 날 뿐이었다.

“나한텐 말 한마디도 안 하고 혼자서만 걱정했다, 이거지.”

“아, 아이작.”

나는 스스로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고 변명하며 그의 눈치를 보았다. 그냥 미리 말해 줄걸. 애초에 눈치 볼 일을 만들지 않으면 되는데 나는 왜 항상 이렇게 아이작을 서운하게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지나고 나면 정말 별거 아닌 얘긴데.

푸른 벽안을 바라 보며 아이작의 기분을 살피고 있는데, 그가 결심이라도 했다는 듯 한마디 던졌다.

“나도 너에게 비밀을 만들겠어.”

“비밀이라고?”

“이미 너에 대한 보복심을 불태우며 약초학 과제를 다 끝냈어.”

나는 곧 그가 농담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웃음이 터졌다. 나와 함께하기로 약속했던 과제를 벌써 끝내버렸다고. 분명 아이작이라면, 내가 시간이 부족해 기일을 못 맞추겠다 싶으면 먼저 와서 자기 걸 보라고 넘겨줄 것이다. 그는 별로 화난 것 같지는 않았다. 아니, 서운하긴 했으나 지금에 와서는 다 풀려버린 것일지도 몰랐다. 다행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그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 * *

“오늘 실습할 주제는 ‘독니가 있는 제라늄’입니다. 특히 이 약초는 독니가 중요한 약재로 사용되곤 하죠. 독특한 식감 때문에 독이 빠진 독니는 갈아서 식재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스프라우트 교수님은 실습에 앞서 용가죽으로 된 장갑을 제대로 끼라고 거듭 당부했다. 학생들이 장갑을 잘 끼고 있는지 확인하며 그녀가 말을 이었다.

“…여러분들도 분명 마법의 역사 시간에 배웠겠지만, 머글들의 장미 전쟁이 이 ‘독니가 있는 제라늄’을 둘러싼 마법사들의 분쟁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유명한 역사적 사실이죠…….”

그녀는 ‘독니가 있는 제라늄’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자세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는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부분들을 필기하며 화분에 꽃을 피운 제라늄을 흘끗 바라보았다. 이미 온실에는 제라늄 향기가 가득했다. 이렇게 얌전해 보이는 약초를 다루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교수님은 ‘독니가 있는 제라늄’을 위험하지 않게 다루기 위한 몇 가지 주의사항을 알려주고는 우리에게 실습을 시켰다.

“넌 아마 올해의 수정구 점을 쳤다면 분명 유니콘이 나왔을 거야.”

필리다가 지팡이를 들어 ‘디핀도’를 외치면서 말했다. 잎사귀 끝이 날카롭게 잘리며 독니가 더 선명하게 드러났다. 저 독니를 손상 없이 뽑아내야 하는 것이 오늘의 실습과제였다.

“그게 무슨 의미인데?”

“명예. 급격한 변화. 이상적인 상황.”

옆에 있던 아이작이 지나가듯 대답했다. 제라늄의 독니는 잎사귀 근처에 달려 있었는데, 특히 독니의 뿌리에 독샘이 있으므로 뿌리부터 제대로 뽑는 것이 중요했다.

“그것도 3시에서 5시 부근일수록 더욱 의미가 강해져.”

“맞아. 특히 오망성이 뜬 직후!”

필리다와 아이작이 주고받듯 말했다. 점술 수업을 듣지 않는 나는 잘 몰랐지만, 저렇게 자세히 파고드는 것을 보니 과제가 있었거나 시험 범위였던 모양이었다. 이상적인 상황? 남들이 보기에 그렇게 느껴지는 것일까.

나는 급격한 변화도, 재산도, 명예도 필요 없었다. 하지만 그런 얘기를 하는 게 다른 사람들에게는 분명 배부른 소리로 느껴질 것이다. 지금은 ‘죽음을 먹는 자’들이 득세하는 시대였다. 내가 그나마 혼혈이라고 증명된 것이 타인들에게는 내 안위를 보장하는 안전장치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나는 속에 있는 생각을 꺼내어 드러내 보이는 대신 그들의 점술 이야기에 동조하며 흘러가듯 한마디 던졌다.

“그러고 보니 금지된 숲에서 만난 켄타로우스가 나에게 수성의 기운을 타고났다고 그랬어.”

“수성?”

필리다는 그 얘기를 듣자마자 역시 로웨나 래번클로라며 크게 웃었다.

“수성이 총기와 현명함의 상징이거든.”

아이작의 설명을 듣고서야 나는 왜 필리다가 저렇게 웃는지 알 것 같았다. 총기니 현명함이니 하는 표현은 나에게 전혀 와 닿지 않았다. 내가 애초에 총기가 넘쳤으면 이런 상황이 닥쳤을까.

제라늄의 잎사귀가 내 팔목을 움켜쥐지 않도록 조심하며 나는 비료를 뿌렸다. 이렇게 비료를 뿌려줘야 독성이 더욱 강해져 쓸만한 약재가 나온다고 교수님이 말씀하신 탓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 만난 켄타로우스는 약간 다른 말을 했었던 것 같은데.

“수성은 별자리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얘기도 하던걸.”

“수성의 공전 주기가 꽤 빠르잖아. 그래서 변덕스럽고 호기심이 많은 성향이래. 그리고 황도대에 따라 다른 별에 영향도 많이 받고.”

아이작이 해주는 설명이 나에게 적합한 것인지는 잘 몰랐지만 그래도 대충은 납득했다.

“화성이 밝은 거랑은 무슨 상관이 있는 건데?”

“그건 잘 모르겠다? 그 위치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걸?”

우리가 대화하는 사이 벌써 필리다는 독니 하나를 뽑아냈다. 그녀와 함께하면 실습이 따로 필요 없었다. 세 개쯤 뽑고서도 필리다는 만족하지 못했는지 제라늄의 모든 독니를 본인이 다 뽑아내고 싶어하는 기색이었지만, 기꺼이 우리에게도 기회를 양보했다. 하지만 필리다의 손에서는 집요정처럼 얌전히 굴던 제라늄이 내가 잎맥을 쥐자마자 성난 바실리스크마냥 흉포하게 변하는 바람에, 뱀의 이빨이라도 뽑는 기분으로 겨우겨우 독니를 제거해야 했다.

약초학 수업을 마치고 우리 세 사람은 자연스럽게 함께 마법 교실로 향했다. 3층 복도를 지나가려다가, 나는 멀리서 리들 교수를 발견했다. 그 날 이후로 리들 교수를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맥고나걸 교수님과 대화를 나누며 이쪽 복도로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들고 있던 약초학 교과서를 품에 꽉 쥐었다. 어쩐지 평소보다도 더 긴장이 되었다. 고개를 살짝 들었다가 그와 눈이 마주쳤다. 잠깐 나를 향한다 싶었던 리들 교수의 시선이 금방 무심하게 스쳐 지나갔다. 나와 아이작이 인사를 건네자, 그는 별다른 표정 변화 하나 없이 평소와 같은 태도로 인사를 받아줄 뿐이었다. 그가 당장에라도 내 팔목을 움켜쥐고 나를 멈춰 세울 것 같은 긴장감을 느꼈으나, 어깨를 닿을 듯한 거리를 스친 리들 교수는 자연스레 나에게서 멀어졌다.

도무지 알 수 없는 묘한 기분이 들었지만 나는 태연하게 그를 지나 아이작과 함께 마법약 교실로 걸어갔다.

* * *

머글 연구 교실에 먼저 도착해 책을 읽고 있는데, 여느 때처럼 시리우스가 내 옆자리에 앉았다. 그는 마치 휴가 기간 동안 나와 보냈던 시간을 다 잊었다는 것처럼 인사도 하지 않았다.

수업이 시작할 시간이 되자 교실에 들어온 빌헬름 교수님은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 보였다. 출석을 부르지도 않고 학생들을 한 번 쭉 둘러본 그는 곧바로 강의를 시작했다. 오늘은 통신수단에 관련된 주제로 수업이 진행할 것 같았다. 여느 때와 같이 책과는 무관한 머글 세계에서의 경험에 관한 이야기로 수업 시간의 반절을 소모한 교수님은 다시 원래 주제로 돌아왔다.

“마법이 없는 머글들에게는 통신수단이 제한되어 있죠. 그들은 부엉이를 쓰는 대신 우편제도를 이용하여 편지를 주고받습니다. 그래서 거리가 멀수록 훨씬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또한 머글들은 직통의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는 ‘전화’를 연락 수단으로 사용하는데……”

다 아는 내용이라서 교수님의 설명이 지루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그래도 애써 집중하려고 노력하며 나는 교수님의 말을 귀담아들었다.

수업이 시작한 지 40분쯤 지났을까, 빌헬름 교수님이 잠깐 시선을 반대편으로 돌린 사이 내 앞으로 나비 모양으로 접힌 쪽지가 사뿐사뿐 날아왔다. 깜짝 놀라 멍하게 이를 바라보는데, 쪽지가 접힌 그대로 저절로 펴지더니 갈색 양피지 위에 검은 잉크로 새겨진 글자를 드러냈다.

─ 블랙이 검은 호수에 대왕 오징어 구경하러 가고 싶다는데.

내가 문장을 읽자마자 마치 잉크는 마치 흡수되기라도 하듯 양피지 속으로 서서히 사라졌다. 그리고 다음 글자가 나타났다.

─ 수업 마치고 산책 좀 시켜줘.

나는 그 쪽지가 시리우스가 보낸 것임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이전에 그가 세베루스에게 주었던 사라지는 종류의 쪽지였던 것인지, 내가 마지막 글자를 읽자마자 양피지는 그대로 불타오르듯 자취를 감췄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시리우스 쪽을 슬쩍 바라보았다가, 무표정하게 책상에 턱을 괴고 모르는 척 딴청을 부리고 있던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시리우스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나른한 미소가 번졌다. 싫어? 그가 소리 내지 않고 입만 움직여 나에게 되물었다.

나는 빌헬름 교수님께 들키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양피지를 꺼내 글자를 몇 자 적었다.

─ 저 과제 할 게 너무 많아서 힘들어요.

시리우스는 양피지 위에 내가 글자를 쓰는 동안 이미 다 읽은 것 같았다. 다행히도 그는 더는 조르지 않았다. 나는 누가 볼까 봐 검은 줄을 그어 내 낙서를 지웠다.

지루하다 싶었던 수업은 곧 끝났다. 오늘따라 빌헬름 교수님이 평소보다 일찍 마쳐주셔서 다행이었다. 수업을 마치자 시리우스는 언제나 그랬듯 먼저 나가버렸다. 나는 학생들이 빠져나갈 때까지 가만히 앉아 있다가 책을 챙겨 들고 나왔다. 딱히 리들 교수가 공격 마법 교습이 있다고는 하지 않았으므로, 오늘 저녁에는 아이작과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

머글 연구 수업 교실이 있는 북쪽 탑 복도를 지나 입구 쪽으로 나왔다. 그리고 성 바깥으로 발걸음을 내디딘 순간, 나는 그 자리에서 익숙한 검은 개를 발견했다.

조금 일찍 나간 시리우스는 블랙으로 미리 변해 있었던 것 같았다.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내 앞에 나타난 그가 은회안을 빛내며 나를 올려다보더니, 내 망토를 입으로 물고 나를 정원 쪽으로 살살 끌고 가기 시작했다. 그게 너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뭐에요, 진짜. 안 된다니까.”

왜 나는 지금까지 블랙과 시리우스가 동일 인물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을까? 블랙은 영락없이 시리우스와 똑같았다. 저런 능청스러움까지도. 그리고 시리우스는 내가 블랙으로 나타난 그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그 자리에서 무릎을 굽혀 앉았다. 블랙의 은회안이 나와 마주했다. 나는 그에게 다짐이라도 하듯 물었다.

“잠깐만 다녀오는 거죠?”

그가 귀를 내리더니 혀를 살짝 내밀어 내 손바닥 끝을 조심스레 쓸었다. 긍정인지 부정인지 모를 의사 표현이었지만, 더는 그의 요구를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시리우스를 따라 성 바깥 정원 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평소 시리우스에게 말하듯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냈다. 개에게 존댓말을 쓰고 있다니. 누가 보면 웃긴 모습일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에게 블랙 대하듯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대화라기보다는 내 일방적인 하소연─맥고나걸 교수님은 대체 학생이 시간 내에 해결할 수 있는 과제의 양을 고려해서 분량을 정하는 걸까요, 아니면 그냥 잠을 자지 말라는 걸까요? 시리우스는 대답이 없었지만 나는 그것을 불평에 대한 동조로 받아들였다─을 뱉어내며 나는 그와 함께 검은 호수로 향했다.

이 시간에 언제나 그랬듯 붉은 해가 호수 위로 길게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블랙과 항상 만나곤 했던 산책로와 다소 떨어진 잔디밭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시리우스가 내 곁에 바짝 붙어 엎드렸다. 나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그의 털을 쓰다듬다가, 스스로 놀라서 손을 뗐다. 그 순간 그가 고개를 슬며시 들더니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어쩐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그에게 물었다.

“그거 계속 쓰다듬어도 괜찮다는 의미 맞죠?”

시리우스가 거부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부드럽게 그의 등을 만졌다. 그가 다시 고개를 숙이며 얌전하게 엎드렸다. 마음이 안정되면서 기분이 좋아졌다. 하긴, 그랬다. 숨 막히는 일상 속에서 그나마 나에게 편안했던 순간들은 블랙과 함께할 때였다. 시리우스가 블랙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지금에 와서도 그게 그렇게 다르지 않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었다.

블랙은 내가 원할 때마다 마치 마법을 부린 것처럼 나타나서 위안을 주었다. 나는 이제 그것이 단순히 우연이라거나 마법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시리우스는 내 기분과 상황을 언제나 지켜봐 주고 필요할 때 나에게 다가왔을 것이다. 그것은 온전히 그의 노력이자 나를 위한 헌신이었다.

“고마워요. 전부다.”

블랙의 모습을 한 그가 대답할 리 없었다. 아마도 나는, 그가 시리우스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에 오히려 이렇게 말을 꺼낼 수 있었던 것 같다. 나는 곧 입을 다물어버렸다. 우리 둘 사이에 조용한 침묵이 흘렀다.

내가 앞으로 이렇게 누군가에게 분에 넘치는 마음을 받고, 조건 없이 좋아해 주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검은 호수의 끝을 바라보며, 나는 시리우스와 연인이 되는 순간을 상상해 보았다.

분명 그는 나를 누구보다도 더 아껴줄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 어떠한 희망이 있을까. 모든 것이 희미하고 불투명해서, 나는 그와 함께 행복해지는 결말을 도저히 떠올릴 수 없었다. 내가 시리우스의 손을 잡고 ‘이름을 말할 수 없는 자’가 없는 먼 곳으로 도망이라도 가야 하는 걸까. 아니, 그것도 결코 행복은 아니었다. 나에게는 친구들이 있었고, 가족들이 있었다. 나는 결코 아끼는 이들을 내 뒤어 버려둘 수 없었다.

알고 있었다.

시리우스와 이어지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그가 나에게 처음 고백을 했을 때부터 이미 이를 예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미안해요.”

더 일찍 말했어야 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당장에 내가 힘들다는 이유로 그를 이용한 것도, 조금 더 확실하게 시리우스에게 거절의 의사를 전하지 못한 것도 모두 미안했다. 당장 오늘만 해도 나는 블랙으로 변한 시리우스에게 마음이 약해져 그를 따라 여기까지 왔다. 이 행동들이 과연 시리우스를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해야 할 말을 차마 꺼내지 못하고 침묵했다. 검은 호수는 언제나 그랬듯이 고요하고 적막했지만, 낮게 바람이 불면서 잔잔한 호수 면에 조그마한 파문이 일었다.

심장의 어느 한 부분을 찌르듯 가슴이 너무 아팠다. 눈물이 흐를 것 같은 기분을 삼키며 나는 생각했다. 이대로 내버려두면, 시리우스는 나보다도 더 아프게 될 것이다. 나를 이렇게 아끼고 좋아해 주는 사람에게 더 이상 상처를 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마침내 나는 입을 열어 그에게 가장 하고 싶지 않은 말을 꺼냈다.

“…저는 절대 당신을 받아줄 수 없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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