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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6
로웨나 블루로즈
김아흔
Part 6 - (7)
“그러고 보니 내가 너에게 엄마에 대해 말해준 적은 없었던 것 같구나.”
희미하게 미소 지은 아빠는 천천히 엄마와의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네 엄마를 브라이턴에서 있었던 이브닝 파티에서 만났어.”
그렇게 아름다운 사람을 본 건 처음이었다는 아빠의 말을 들으며 나는 사진 속 엄마의 모습을 떠올렸다. 사실 나는 엄마를 많이 닮은 편은 아니었다. 내가 자라면 자랄수록 엄마의 모습이 보인다고 아빠가 간간이 말씀하셨지만, 어릴 때부터 나는 엄마보다는 아빠를 닮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우리 집에서 엄마를 가장 많이 닮은 것은 오히려 루카스였다. 루카스는 발렌타인 때 항상 같은 반 여자아이들로부터 초콜릿을 잔뜩 받아오곤 했다.
“너의 엄마는 그 날 이브닝 파티의 여왕이었단다. 차갑고 도도해 보였지. 누군가 말을 걸어도 거의 대답을 하지 않았으니까.”
나는 아빠가 예전에 편지에서 드레스를 입은 엄마의 모습을 보고 첫눈에 반했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스테이시가 찢었던 그 초록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겠지. 아빠가 용기 내서 엄마에게 춤 신청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 아빠를 본 엄마는 조금 싸늘하다 싶을 정도로 아빠에게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나는 어느 정도 엄마의 반응을 이해했다. 순수혈통의 마녀로서 자라왔던 엄마에게 머글인 아빠가 눈에 들어왔을 리 없었다.
나는 머글인 척하는 엄마를 상상하려고 애썼다. 이브닝 파티에서의 모습이, 진짜 엄마가 ‘차갑고 도도한’ 성격이기 때문만은 아닐 거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것이 엄마가 머글 세계에 적응하는 과정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머글 세계에 완벽하게 융화하며 배워가면서 ‘모르는 것’을 티 내지 않으려는 일종의 위장이 아니었을까. 리들 교수는 엄마의 인간관계가 원만하다고 평했고, 자신의 감정을 잘 숨길 줄 안다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처음 만났을 때 너희 엄마가 ‘전화번호’가 없다고 말했던 것이 기억나는구나.”
나는 그때 집에 전화기가 없는 건가 싶어서 조금 의아했었지. 아빠가 중얼거렸다. 아빠는 전화번호가 없으면 주소라도 달라고 엄마에게 사정했지만, 엄마가 적어 준 주소로 보낸 편지는 ‘주소지 불명’이라는 이유로 반송 되었다고 한다. 나는 엄마가 마법사들의 주소라도 불러준 것은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우연처럼 그 후에도 세 번에 걸쳐 같은 장소에서 만났단다…… 하지만 로웨나, 너희 엄마도 모르는 사실을 고백하자면.”
아빠가 짓궂게 웃으며 덧붙였다.
“그건 우연이 아니었지.”
내 고향인 브라이턴은 그렇게 큰 도시는 아니다. 아빠가 마음만 먹는다면 엄마와 같은 장소에서 우연처럼 마주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빠는 부끄러워하면서도 자신이 꽤 적극적으로 엄마를 향해 구애했음을 고백하셨다. 엄마가 유독 바다를 좋아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주로 해변 근처에서 데이트하곤 했다고 말했다. 그럴 법도 했다. 셀윈 성은 산과 언덕으로 둘러싸인 외로운 곳이었다.
나는 그날 결국 엄마와 아빠가 결혼하게 된 이야기까지 들었다. 생각해보면 동생이 태어나기 전인 내 어린 시절 기억 속 배경의 대부분은 해변이었다. 내가 바다 근처에서 모래성을 쌓고 있으면, 엄마와 아빠는 조금 먼 곳에 앉아 유유자적하게 바다를 보며 담소를 나누곤 했다. 해가 질 때쯤 바다 건너편으로 길게 석양이 일곤 했는데, 나는 다른 건 몰라도 바다가 해를 먹는 모습을 바라보는 엄마의 눈동자만큼은 선명하게 기억이 났다. 나는 바다보다도 더 선명하게 쪽빛으로 빛나는 엄마의 눈동자를 홀린 듯 바라보곤 했었다.
그날 밤 나는 내 침대에서 동생들과 함께 잠들었다. 셋이 자기에는 너무 비좁았지만, 그래도 동생들은 어떻게든 나와 잘 거라고 우겨댔다. 나는 둘 중 하나라도 바닥으로 굴러떨어질까 봐 내가 가장 가에서 잔다고 말했지만, 또 나와 가까운 가운데에서 자겠다고 다투기 시작했다. 결국 아빠가 그나마 우리 집에서 가장 넓은 자신의 침대를 빌려주는 중재안을 내놓았고, 나는 안방에서 동생의 가운데 샌드위치처럼 끼어서 자야 했다.
* * *
나는 부활절 휴가 동안 동생과 놀아주는 것에 거의 모든 시간을 할애했다. 뭐가 그리 재밌는지 동생들은 둘이서는 절대 할 수 없는 다양한 머글 놀이를 하자고 나에게 졸라댔다. 한 시간은커녕 30분만 함께 놀아도 나는 금방 지치곤 했는데, 그래도 꾸역꾸역 동생들의 장단을 맞춰주었다. 언젠가는 숨바꼭질을 한답시고 장롱 속에 몸을 겨우 집어넣고 앉아 있으면서, 어쩐지 시리우스 생각이 났다. 그가 들고 다니는 제임스의 투명망토만 있다면 이렇게 비좁은 곳에서 어둡게 있지 않아도 될 텐데. 결국 루카스는 나를 찾아냈고, 나는 또 동생들이 몸 일부분이 드러날 정도로 어설프게 숨은 것을 애써 못 본 척하며 기꺼이 술래 역할을 맡았다.
나는 최대한 가족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도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책을 읽었다. 그러나 그렇게 여유가 많은 것은 아니었다. 지금과 같이 아침 시간에 동생들이 늘어지게 잠을 자고 있을 때나, 혹은 만화를 볼 때 겨우 짬을 낼 수 있을 정도였다.
책상에 앉아 천문학 교과서를 펴는데, 리들 교수가 기차에서 행성의 운행에는 규칙성이 있다고 말했던 것이 갑자기 떠올랐다. 어떤 규칙? 책을 들여다보아도 나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괜히 또 리들 교수를 생각하니 화가 나고 속이 갑갑해 책을 덮어버렸다. 그러다가도 천문학에 점점 소홀해져 P라도 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일기 시작했고, 결국 나는 다시 책을 펼쳤다.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일까.
그때, 창문 근처에서 무엇인가 툭툭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화들짝 놀란 나는 고개를 돌려 창문 가를 확인했다. 셰벗이었다. 아이작이 편지를 보냈나? 창가에 다가간 나는 미닫이 창문을 올렸다. 여느 때처럼 고아한 몸짓으로 날갯짓을 하던 셰벗이 작은 창문 사이로 들어와 편지를 내밀었다.
“수고했어.”
이제 나와 제법 친해진 셰벗은 낮게 울음소리를 내며 반가운 기색을 보였다. 나는 편지를 받으면서도 셰벗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었다. 지금 당장은 먹을 게 없는데. 나는 오늘 아침 식사로 남은 구운 닭고기라도 챙겨와야겠다는 생각으로 부엌으로 내려갔다.
계단을 타고 내려가면서 봉해져 있는 양피지를 뜯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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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ena Bluerose
로웨나, 잘 지내고 있어?
예언자 일보에 또 네 기사가 났어.
네가 셀윈 가의 후계자라고 하는데… 이거 진짜야?
Isa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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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심지어 자신의 성을 채 적지도 않고 그대로 편지를 보냈다. 많이 놀란 것이 분명했다. 그의 글씨체에서부터 급한 마음이 그대로 드러났다. 나는 부엌에 서서 아이작이 오려서 보낸 예언자 일보의 기사를 읽어내렸다. 그다지 새롭게 느껴질 만한 것은 없었다. 비밀의 방을 닫고 디멘터를 물리쳤던 호그와트의 영웅 로웨나 블루로즈가 알고 보니 셀윈 가의 마지막 남은 혈통이었다는 내용이었다. 셀윈 성의 성주가 되었고, 가문의 모든 것들을 승계받을 예정이라는 내용도.
기사를 다 읽고 나니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역시 일부이지만 ‘순수혈통’의 피가 흘렀기 때문에 내가 그만큼 재능 있는 마녀라는 것이 논지였다. 결국 사람들은 혈통적 우수성이 타고난 것이라는 생각을 더 굳건하게 가지게 될지도 모른다. 이렇게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무의식적 계급의식을 확고하게 만드는 것마저도 리들 교수의 의도는 아니었을까.
나는 닭고기를 얹은 접시를 들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다시 방으로 올라갔다. 얌전히 기다리고 있는 셰벗에게 닭고기를 챙겨 주고, 의자에 다시 앉아 깃펜을 들었다. 아이작은 어떻게든 빨리 답을 받고 싶겠지. 나는 양피지를 펴 아이작에게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내가 부활절 휴가 직전 외출을 간 이유는 이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내가 받은 충격이 너무 커서 말할 여유가 없었노라고. 휴가를 다녀와서 말해주려고 했고, 예언자 일보에 이렇게 대대적으로 보도되리라는 것은 기대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적었다. 그렇게 양피지를 마무리한 나는 그대로 편지를 봉인해 셰벗에게 내밀었다. 내가 편지를 쓰는 동안 이미 닭고기를 깨끗하게 먹어치운 셰벗은 편지를 덥석 물었다. 그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한번 크게 울더니 그대로 창문 밖으로 날아갔다. 나는 한참을 셰벗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나에 대한 소식을 신문에서 보았다는 것에 아이작이 서운함을 느꼈을지도 몰랐다. 비밀이 많아질수록 나는 끊임 없이 주변 사람에게 거짓을 말해야 하고, 속여야 하고, 숨겨야 한다. ‘이름을 말할 수 없는 자’가 몰락할 때까지. 아니, 설령 몰락한다 하더라도 그건 나에게 행복한 결말이 될 수 없었다. 나는 그에게 동조해왔다는 이유로 여생을 아즈카반에서 지내야 할지도 모른다.
여기에 어떤 답이 있을까. 나는 심지어 죽어버릴 용기조차 없었다. 죽는 게 두려워서는 아니었다. 나는 이미 엄마를 떠나 보내본 적이 있었고,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았다. 아빠에게, 동생들에게 그런 고통을 주는 것은 너무 가혹했다.
“로웨나!”
아빠가 아래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조용하게 창밖을 바라보던 나는 불안한 생각들을 떨쳐냈다. 오랫동안 나는 이 문제로 고민해왔고, 지금까지 이는 풀리지 않았다. 앞으로도 해결될 수 있을까. 한 걸음 내딛을수록 나락에 빠지는 기분만 들 뿐이었다.
나는 아빠가 들릴 정도로 큰 목소리로 1층을 향해 소리쳤다.
“네! 내려갈게요.”
계단을 타고 걸어 내려가는데 현관문이 열려있는 것이 보였다. 손님이라도 온 건가. 나는 빠른 걸음으로 1층에 내려가 현관문 앞에 도착했다. 그리고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을 본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오랜만이야, 블루로즈.”
평소와는 달리 예의 바른 태도로 인사하는 시리우스를 바라보면서도 나는 당혹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시리우스가 여기에 왜? 그의 등장도 놀라웠지만, 나는 그보다도 시리우스의 복장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대부분 교복 차림이었던 그가 지극히 머글처럼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키가 크고 골격이 탄탄한 시리우스가 단색의 티 위에 어두운 잿빛의 래더 재킷을 걸친 모습을 보니, 머글 잡지에서 보던 모델이 앞에 튀어나온 것 같았다. 그의 옷은 조금 흐트러진 듯한 시리우스의 흑발과도 잘 어울렸는데, 호그와트의 악동 느낌이었던 이전과 전혀 달라서 낯설게 보일 정도였다.
“얘가 너와 머글…… 뭐 어쩌고 하는 수업을 같이 듣는 학생이라고 하는데 말야.”
아빠가 나에게 그렇게 말하더니, 살짝 다가와 나만 들을 수 있도록 낮게 속삭였다.
“그새 남자친구가 생겼니?”
“남자친구 아니에요!”
나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급하게 부정했다. 내 목소리가 다소 컸는지, 시리우스가 나를 보며 씩 웃었다. 그는 입을 열어 낮고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평소 로웨나에게 머글 연구 수업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로웨나가 워낙 똑똑하고 친절하니까요.”
어쩜 저렇게 예의 바른 척을 잘하지. 나는 신실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은회안에 혀를 내둘렀다.
“다른 게 아니라, 로웨나와 함께 해야 할 머글 연구 수업 실습이 있어서요. 혹시 오늘 로웨나가 저와 함께 외출해도 될까요?”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실습이라니? 머글 연구 수업에 내가 모르는 실습 과제라도 있었나? 시리우스와 한참 사이가 좋지 않았을 때 나는 그에게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느라 수업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었다. 그 시기에 교수님이 뭔가 과제를 내줬는데 내가 듣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그건 로웨나의 마음에 달렸지.”
아빠가 미소 지으며 대답하자, 시리우스가 빤히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의 눈길에서부터 어서 수락하라는 무언의 압박을 느꼈다. 그가 우리 집까지 찾아와서 실습 이야기를 꺼내니, 혹여 머글 연구 수업에 내가 놓친 것이 있나 싶어 조금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현관 입구 근처에 걸쳐둔 가디건을 챙겨 입으며 말했다.
“아빠, 저 잠깐만 나갔다 올게요.”
나와 시리우스를 번갈아 쳐다보던 아빠는 무엇인가 장난기 섞인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늦지 않게 들어오도록 하고.”
“감사합니다, 블루로즈 씨.”
그는 침착하고 예의 바른 태도로 아빠에게 인사를 건네고 내 쪽을 쳐다보았다. 나는 아빠에게 손을 한 번 흔들어주고는 시리우스와 현관 밖으로 나왔다.
나는 집에서 나오자마자 그에게 물었다.
“무슨 실습이라는 거에요?”
“‘머글들의 운송수단’ 실습.”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가 싶어서 눈을 깜빡이며 올려다보았다. ‘머글들의 운송수단’이라면 시리우스와 내가 처음 만났을 때 했었던 과제였다. 굉장히 오랜만에 들어보는 것 같아 그때의 기억이 머릿속에 새록새록 떠올랐다. 우리는 그 발표 과제를 함께 하면서 친해졌었다.
“이번 시험 범위에 머글들의 운송수단이 포함되는 거 몰라?”
나와 보폭을 맞춰 걸으며 시리우스가 씩 웃었다.
“나는 오늘 모든 운송수단을 다 경험해 볼 거야.”
일단 버스부터 타러 가자. 그가 능청스러운 어조로 덧붙이며 나를 이끌었다. 시리우스가 워낙 자연스럽게 골목 사이를 걸어갔기 때문에 나는 여기를 몇 번 와봤나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대체 목적지를 정해놓고 걷고 있는 걸까? 나는 빠른 걸음으로 그를 따라가며 입을 열었다.
“좋아요, 취지는 좋은데.”
내가 말을 이었다.
“버스를 타고 어디로 가는데요?”
“지하철을 타러.”
시리우스의 대답을 들은 순간 나는 웃음이 터졌다. 정말로 오늘 머글들의 운송수단을 다 경험할 생각인가? 시리우스는 명확하게 목적지를 말해주지는 않았다. 호기심이 생겼지만, 그가 뭔가 일부러 숨기고 싶어하는 것 같아 굳이 캐묻지는 않았다. 나는 말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시내 쪽으로 걸어나가자 버스 정거장이 보였다. 내가 킹스 크로스 역에서 버스를 타고 왔을 때 내렸던 집 앞의 조그마한 역이었다. 그 정거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시리우스가 나에게 지나가듯 물었다.
“뭐 하고 지내고 있어, 요즘?”
“오랜만에 가족들이랑 만났으니까…… 보통 동생들이랑 놀아주죠.”
그 쌍둥이 동생? 나는 그에게 내 동생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었나 싶은 생각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생각해보니 블랙에게 한 적이 있었구나. 나는 조금 묘한 기분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동안 버스가 도착했고, 우리는 그대로 버스에 올라탔다.
“어때요, 감상이?”
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그에게 귀엣말로 물었다. 버스는 시리우스가 처음 접해보는 머글의 대중교통이었다. 천천히 한 번 주변을 둘러본 시리우스가 조금 느리게 답했다.
“뭐랄까, 굉장히… 여유롭군.”
분명 느리다는 표현을 조금 돌려 말한 것 같았다. 그러긴 했다. 플루가루든 포트키든, 심지어 빗자루마저도 마법 세계의 교통수단은 빠르고 신속했다. 심지어 6학년 때부터는 순간이동을 배우지 않던가. 눈 깜빡하면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에 비하면 느리게 느껴지는 것이 당연하겠지.
시리우스는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런던 시내버스 안에서 자신의 근황을 이야기해주었다. 휴가 동안 마루더즈 전부가 고드릭 골짜기에 있는 제임스의 집에서 지내는 모양이었다. 거기는 마법사들의 거주지라고 들었는데. 나는 그들이 지낼 일주일 동안 고드릭 골짜기의 주민들이 마루더즈의 짓궂은 장난의 피해자가 되지 않기를 빌어주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사이 런던 시내 한가운데에 도착했다. 사실 몇 정거장 간 것도 아니었다. 그는 패딩턴(Paddington) 역과 가장 가까운 버스 역에서 내려야 한다고 굳이 고집했는데, 베이커루(Bakerloo) 라인을 타기 위해서라는 거였다. 나는 그가 지하철 노선도에 대해 알고 있는 것도 꽤 신기했다. 그러고 보면 함께 과제를 할 무렵 지하철에 관한 부분의 보고서 작성은 시리우스가 담당했었다.
역에서 내려 조금 더 걷자 큰 도로가 나왔다. 우리는 사람이 많은 도심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갔다. 패딩턴 역은 우리가 내린 버스 역에서 도보로 5분 정도 걸어가야 하는 거리에 있었다. 횡단보도를 건너 크레이본 로드를 따라가야 하는지, 칠워스 스트리트를 통해야 하는지 혼자서 고민하고 있는데, 갑자기 시리우스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내 복장이 부자연스럽나?”
“왜요?”
“자꾸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 같은데.”
시리우스가 조금 불쾌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나는 그의 앞에서 차마 ‘당신이 너무 잘생겨서 그래요.’라고 설명할 수 없었다. 그런 말을 솔직하게 하기에는 다소 부끄러웠다. 나는 시리우스에게 그렇게 느껴지는 것일 뿐이라며 대충 둘러댔다.
우리는 큰 대로를 지나 횡단보도 앞에 섰다. 시리우스는 머글의 대도시 한가운데에 와보는 것이 처음인 것 같았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여유로운 태도를 고수하고 있었지만, 은회색 눈동자 한가운데에는 짙은 호기심이 일었다.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횡단보도 반대편을 유심히 살피더니 중얼거렸다.
“저게 신호등이로군.”
자신이 했던 발표가 떠올랐는지, 시리우스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머글들의 효율적인 이동을 가능하게 하는 간편한 신호체계지.”
“지금 헝가리 혼테일 앞에서 빗자루 잘 탄다고 자랑이라도 하는 거예요?”
처음 시리우스에게 신호등의 체계에 대해서 가르쳐 준 것은 나였다. 내 장난기 어린 대꾸에 시리우스가 낮게 웃었다. 나는 문득 함께 과제를 하던 기억을 떠올라 그에게 물었다.
“기억나요? 우리 처음 ‘머글들의 운송수단’ 주제로 처음 과제하던 날, 시리우스가 신호등이라는 것이 대체 왜 필요하느냐고 물었던 거.”
“그땐 자동차라는 게 이렇게 느리면서 많은지 몰랐었지.”
빗자루나 구조버스쯤을 생각하며 자동차를 상상했었던 그는 교통 신호 체계라는 것을 직관적으로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한참을 그에게 머글 자동차나 도로, 인도 등에 대해서 설명해 주어야 했다. 그러고 보니 그땐 시리우스가 참 별로라고 생각했었는데 말이지. 이렇게 친해질 것이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파란불이 켜지자, 시리우스는 머글 인파에 섞여 걷기 시작했다. 그가 너무 자연스럽게 머글인 척을 했기 때문에 나는 오히려 웃음이 터졌다. 누군가 횡단보도를 걷는 것을 보고 이렇게 웃어본 적은 처음이었다. 내가 자신을 비웃는 느낌이 들었는지, 그는 괜히 내 입을 틀어막으면서 그만 웃으라고 투덜댔다.
우리가 마침내 지하철 역에 도착했을 때, 나는 내가 직접 표를 발권하는 대신 그에게 표를 끊어오라고 장난스럽게 시켰다. 조금 당황하는 것 같았던 시리우스는 매표소에 다가가 별문제 없이 2인의 편도 티켓을 끊어왔다. 그렇게 힘든 일도 아니었는데 시리우스는 마치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라도 성공한 것마냥 의기양양해 보였기 때문에, 나는 낮게 웃으며 처음치곤 괜찮았다고 칭찬해주었다.
지하철에는 평소보다 사람이 별로 없었다. 처음으로 지하철을 탄 시리우스는 단지 지하에 있을 뿐 느린 호그와트행 열차와 다를 바 없는 것 같다는 평가를 내렸다. 노선도에 있는 무수하게 많은 역을 바라보며 그는 여기에 전부 머글들이 살고 있느냐고 물었는데, 그는 머글의 도시가 마법사의 것보다 훨씬 복잡다단하다는 사실이 그렇게 재밌는 모양이었다.
“도보로 가는 것보다 자동차를 이용하는 것이 15배, 그리고 자동차보다 지하철이 20배 빠르다는 거 알고 있었냐?”
그가 머글들의 운송수단을 공부하면서 외웠던 사실을 읊자, 나는 낮게 웃었다.
“그건 머글들도 잘 모를걸요.”
진짜? 시리우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머글 연구 교과서에서 실리는 내용들 대다수가 머글들도 잘 모르는 별 쓸모없는 내용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우리는 머글 연구 시간에 TV의 작동 원리에 대해 배웠지만, 사실 머글들 대다수는 어떻게 그것이 작동하는지에 관해서는 알지 못한다. 몰라도 사용하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으니까. 정작 머글 연구 수업을 듣는 마법사 학생들에게 TV를 가져다준다면, 당장 어떻게 켜는지조차 파악하지 못해 헤맬 것이다. 머글연구 수업은 다소 실용적이지 못한 구석이 있었다.
한참을 이것저것 얘기하는 사이 우리는 열 정거장 가량을 지났다. 점점 더 런던 외곽 쪽에 가까워지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더욱이 의문이 일었다. 이러다가 종착역까지 갈 기색인데. 하지만 시리우스는 우리가 가는 곳이 어디인지 아무 힌트도 주지 않았다.
나는 멀리에서 이륙하는 비행기를 멍하게 올려다보았다.
“비행기를 타자구요?”
정말 모든 운송수단을 다 경험할 생각이었던 거야? 나는 조금 얼빠진 표정으로 뒤돌아 시리우스를 바라보았다.
우리가 지하철역에서 내려 마침내 도착한 곳은 히스로 공항이었다. 나는 공항에 와 보는 것이 처음이었다. 분명 시리우스도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 그러나 그는 느긋한 어조로 나에게 한마디 던질 뿐이었다.
“어. 무게가 천문탑만 하고 길이는 호그와트 성만 하다던, 그 비행기.”
뭐? 멍하게 서 있던 나는 곧 웃음이 터졌다. 정말 오랜만에 듣는 소리였다. 어쩐지 감회가 새로웠다. 나는 시리우스가 발표 목차를 짤 때, 비행기 이야기를 가장 먼저 꺼내야 한다고 주장했던 때를 기억했다. 그가 발표 초반부에서 비행기를 강조함으로써 학생들의 관심을 쏠리게 만든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실제로 그의 발표는 빌헬름 교수님의 극찬을 받을 정도로 완벽하지 않았던가. 그러고 보면 시리우스는 비행기를 꼭 한번 타고 싶어 했다.
심지어 언제 준비했는지 그는 이미 발권까지 끝낸 상태였다. 내 앞에서 비행기 표를 흔들어대는 시리우스에게서 표를 낚아채며 내가 물었다.
“어디로 가는 건데요?”
“사우샘프턴.”
사우샘프턴? 나는 얼떨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거긴 왜요?”
나는 도착지가 사우샘프턴으로 적혀있는 표를 살피면서도 잔뜩 이는 호기심을 숨기지 못했다. 이건 일종의 마법으로 만들어낸 표일까? 마법으로는 이런 것까지 가능한 거야? 시리우스가 마치 지나가듯 툭 한마디 던졌다.
“거기가 브라이턴이랑 가장 가까운 공항이니까.”
비행기 표에 시선을 꽂고 있던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우리 그럼 최종 목적지가 브라이턴이었어요?”
나는 조금 얼떨한 목소리로 그에게 되물었다.
“거기가 그렇게 좋은 도시라며?”
시리우스가 느긋하게 말했다.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전에는 믿지 못하겠는데.”
나는 순간 기분이 묘해졌다. 이전에 나는 그에게 고향인 브라이턴에 관해 일장 연설을 했었다. 퍼프스캔이 뭐 어쩌니저쩌니 딴소리를 하더니, 제대로 다 듣긴 한 거였구나.
그러나 지금 내가 있는 곳이 공항이라는 깨닫자, 나는 불현듯 웃음이 터졌다.
사실, 런던에서 브라이턴으로 가기 위해서는 직통버스를 타는 것이 훨씬 더 빨랐다. 대체 마법사들의 공간감각이란 어떻게 생겨 먹은 것이란 말인가. 우리 집에서 지하철을 타고 런던 시외에 떨어진 히스로 공항으로 가서, 사우샘프턴까지 비행기를 타고 간 다음, 거기에서 브라이턴으로 향하는 경로를 짜다니. 나는 비집어 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못한 채 그에게 말했다.
“브라이턴에 가려면 차라리 버스를 타고 갔었어야죠!”
“그건 런던으로 돌아가는 길에 타면 되지, 뭐.”
시리우스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한마디 던졌다. 그는 우리 집에서 공항까지의 경로를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 정도로 준비한 그가 브라이턴에 가기 위해서는 버스로도 충분하다는 사실을 몰랐을 리 없었다. 그는 내 생각에, ‘머글들의 운송수단’을 경험해보겠다는 빌미로 일부러 더 긴 루트를 택했던 것도 같았다. 그래 놓고서는 능청맞게 자기 실수인 것처럼 말하는 게 조금 웃기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그래요, 뭐 우리 바쁜 건 없으니까.”
============================ 작품 후기 ============================
1. 유령플롯을 말씀드리자면, 시리우스는 알파드 블랙이 물려준 자산을 상속받은 상태입니다. 알파드 삼촌 고마워요...
2. 12월 31일이 리들과 로웨나의 생일이라고 후기에서 말하려다가 말았는데, 코멘으로 독자님들이 축하해주셔서 기뻤습니다. 챙겨주셔서 감사해요^^*
새해가 밝았습니다. 모두들 로웨나와는 다르게(?) 하는 일 잘 풀리시고, 2015년은 어느 해보다 만족스럽고 행복한 한 해가 되시길!
+ 이번 회차(90회)의 시리와 로웨나가 만나는 장면부터는 리메이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