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웨나 블루로즈-88화 (88/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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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6

로웨나 블루로즈

김아흔

Part 6 - (5)

“저기로 가는 건가요?”

주변에 인가라곤 전혀 없었기 때문에, 나는 거의 확신을 가지고 리들 교수에게 물었다. 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천천히 언덕을 올라갔다. 성에 가까워질수록, 나는 그 성이 어떤 화려함이나 거창함보다는 실용적 목적으로 지어져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불필요한 장식이 전혀 부가되지 않아서인지, 오히려 성은 내가 봤던 그 어떤 건축물보다도 더 장엄한 분위기를 풍겼다. 깎아지르는 듯한 절벽을 따라 성을 보호하기라도 하듯 높고 견고하게 세워진 성벽에는 중간마다 드문드문 성루가 올라와 있었는데, 지금 당장에라도 누군가가 나와 우리를 내려볼 것 같았다.

마침내 나와 리들 교수는 성문 앞에 도달했다. 성문의 위쪽에는 꽤 섬세하게 조각된 용의 동상이 매달려 있었다. 그 용의 겉모습은 어둠의 마법 방어술 교과서에서 보았던 헝가리 혼테일의 사진과는 조금 달랐다. 하긴, 용은 지역마다 독특한 생김새와 특색을 가진다고 그랬지. 스코틀랜드 종이면 헤브리디스 블랙이었던가. 나는 작년에 배웠던 것을 겨우 기억해냈다. 하지만 보통 용보다 행동반경이 넓고 사납다는 것만 생각날 뿐, 헤브리디스 블랙의 외양을 자세히 알지는 못했으므로, 나는 그렇게 추측하는 것으로 그쳤다.

그때, 엎드려 있었던 용의 동상이 갑자기 기지개를 켜듯 몸을 일으켰다. 동상이 움직일 줄은 몰랐기 때문에 나는 일순 깜짝 놀라서 리들 교수의 옷깃을 붙잡았다. 그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용을 직시하고 있었다.

용의 동상이 우리 쪽으로 고개를 길게 내밀며 입을 열었다.

“얼마만의 방문자인지 모르겠군.”

용의 입에서는 날카로운 검 두 개가 맞부딪히는 듯한 강한 금속성이 흘러나왔다. 나는 그 소리에서부터 위압적이고 냉혹한 느낌을 받았다. 리들 교수는 자신의 바로 앞에서 위협이라도 하듯 이를 드러내고 있는 용과 눈을 마주하며 차분하게 말했다.

“셀윈을 만나러 왔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가까이 고개를 들이밀어 우리를 샅샅이 살피던 용이 이윽고 뒤로 약간 물러서더니 매끄럽게 꼬리를 내뺐다.

“무법의 침입자로부터 이 성을 보호하는 것이 내 역할인데 말이지.”

용은 표정 변화 하나 없이─표정이 변한다고 해서 내가 알아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딱딱하게 말을 이었다.

“가주가 없는 이곳에 네가 어떤 목적으로 왔는지 판단할 방법이 없군.”

나는 그제야 이 용의 동상이 성의 문지기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솔직히 성이든 집이든, 나는 마법사가 거주하는 곳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마법사들의 거주지에는 이렇게 다 마법이 걸려 있는 문지기를 두는 것일까. 하긴, 래번클로 기숙사를 들어갈 때도 청동 독수리 상에 암호를 대야 했었으니까. 나는 신기하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더 자세히 용의 외관을 살폈다.

“알렌 셀윈에게 톰 마볼로 리들이 찾아왔다고 전해.”

알렌 셀윈이라는 이름을 듣자 용의 표정이 조금 변한 것 같았다. 리들 교수가 용을 똑바로 직시하며 망설임 없이 말을 이었다.

“반가운 손님을 데려왔다고.”

성문은 마치 오랫동안 열리지 않았던 것처럼 갈라지는 듯한 쇳소리를 내며 열렸다.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 들어간 리들 교수는 이전에 여기에 와 본 적이 있는 사람처럼 자연스레 성벽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넓은 정원이었다. 관리를 하지 않은 오랜 세월을 반증하기라도 하듯 풀이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리들 교수의 뒤를 쫓으며 이를 슬쩍 훑다가, 우연치 않게 풀 사이로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누가 서 있는 것 같은데? 집요정보다 작은 난쟁이가 살고 있는 듯도 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고 싶었지만, 혹여 리들 교수를 놓칠까 봐 다시 고개를 돌려야 했다.

성벽 안에는 몇 군데의 작은 정원을 경계로 저택으로 보이는 건물들이 드문드문 서 있었다. 리들 교수가 향하는 곳은 그중에서도 가장 큰 건물이었다.

곧 우리가 4층 정도 되어 보이는 저택 앞에 도달하자,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문이 자연스럽게 열렸다. 전등 하나 켜져 있지 않아서인지 건물 내는 생각보다 어두웠다. 창에서 드문드문 들어오는 빛줄기를 따라 그나마 주변의 형상을 파악할 수 있을 정도였다. 창문 대부분에 커튼이 쳐져 있었기 때문에 더욱이 을씨년스럽게 느껴졌다.

리들 교수는 난관이 있는 계단을 지나 현관 오른편의 아치형의 문 앞에 섰다. 그가 자연스럽게 그 문을 밀고 들어가니, 파티를 벌여도 될 법한 큰 홀이 나왔다. 가장 먼저 눈에 띄었던 것은 마법사들의 전투가 그려진 천장화였다. 다소 높은 천장에 장엄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거대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는데, 나는 곧 그것이 1350년 청의 마법사 전쟁을 표현한 것임을 알아챘다. 마법의 역사 교과서에서 본 적이 있는 그림이었다. 시험 범위라 몇십 번 정도 지나가듯 본 것 같은데, 교과서에 있었던 그림은 저 천장화의 일부일 뿐이었다. 나는 내가 미처 보지 못했던 그림의 나머지 부분을 빠르게 훑었다.

리들 교수의 걸음에 보조를 맞춰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홀의 끝에는 문장(紋章, 가문의 권위를 상징하는 마크)이 그려진 융단이 벽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었다. 아래로 길쭉한 연 모양의 방패 위에, 성 앞에서 보았던 용이 불을 내뿜고 있는 듯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 아래쪽 그려진 띠에는 선명하고 큰 글자로 가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Selwyn.

셀윈? 그제서야 나는 리들 교수가 알렌 셀윈이라는 사람을 찾아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셀윈이라는 이름을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머릿속을 뒤지던 나는 곧, 민달팽이 클럽에서 키이라가 언급했던 에밀리 셀윈을 기억해냈다. 리들 교수가 호그와트를 재학하던 시절 어울려 다녔던 학생이라고 들었다.

“여긴 셀윈 가의 성인가요?”

내가 리들 교수의 옆에서 조심스레 물었다.

“그래.”

그는 이를 긍정할 뿐, 더 이상 부언하지는 않았다. 그럼 여기는 에밀리 셀윈이라는 사람의 집일까. 하지만 이 성은 누군가 살고 있다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고요하고 적막했다.

홀을 빠져나온 우리는 짧은 복도를 지나 거실처럼 보이는 방으로 들어갔다. 구석에는 불씨의 흔적 하나 없는 벽난로가 있었고, 그 위에 유니콘의 뿔이 걸려 있는 것이 보였다. 건물 내가 어두워서 그런지 나는 저택 전체의 장식이 굉장히 차갑고 절제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무심하게 눈길을 돌리다가, 원래대로라면 물이 흘러야 하는 장식장에 물이 흘러나오다가 멈춰져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마치 그대로 얼어버린 것처럼 물줄기가 공중에 떠 있었다. 조금 놀란 나는 그 자리에 서서 손으로 이를 만져보았다. 놀랍게도 이것은 액체인 물 상태 그대로였다. 뭐지? 왜 흐르지 않는 거지?

자세히 살펴보니 벽면에 세워져 있는 괘종시계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지나오면서 수많은 그림을 보았는데, 분명 마법사들의 그림임에도 불구하고, 움직이는 그림은 없었다. 오랜 세월 동안 아무도 손을 대지 않은 것 같은데 장 위에 먼지 하나 보이지 않는 것도 묘했다.

“여긴 뭔가… 이상해요.”

당혹스러운 어조를 숨기지 않으며 내가 중얼거렸다.

“마치 성 전체의 시간이 멈춘 것 같아요.”

“성의 주인이 없으니까.”

그가 대답했다.

“마법사들의 성은 주인이 없을 때 스스로를 봉인하지.”

그게 무슨 말이냐고 리들 교수에게 물어보려고 하는데, 입구 근처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하던 말을 멈추고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실의 문 앞에, 체구가 작고 마른 집요정 하나가 서 있었다.

“오랜만이에요, 톰.”

가래가 끓는 듯한 목소리로 그가 리들 교수에게 인사했다. 그는 굉장히 남루한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빛만큼은 형형하게 빛났다. 나는 그에게서 느껴지는 집요정답지 않은 기세에 약간 놀랐다.

집요정을 바라보던 리들 교수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입을 열었다.

“네가 아직 여기에 있을 줄 몰랐군.”

“전 당신이 여기에 다시 찾아올 줄은 몰랐네요.”

굉장히 심술궂은 말투로 집요정이 대꾸했다.

“그것도 지극히 머─글스러운 복장으로 말이죠.”

그 집요정은 특히 ‘머글’이라는 말을 강조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나는 그가 리들 교수를 비꼬고 있다고 느꼈다.

집요정은 뭔가 매우 못마땅하기 짝이 없다는 기색을 만면에 드러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리들 교수를 내쫓을 기세여서 나는 약간 의아했다. 집요정은 집 주인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들에게 정중하게 대한다고 배웠는데. 사람들이 각자의 성격을 가지고 있듯, 집요정 또한 개체마다 다른 성격을 가진 것이 틀림없었다. 내가 시리우스와 지하 식당에서 만났던 그 집요정은 저런 말투로 말하거나, 저런 표정을 짓지 않았다.

집요정이 마치 자신이 이 성의 성주라도 되는 듯 거만하게 몸을 내밀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당신은 누구죠? 머글인가요?”

리들 교수가 무심하게 대답했다.

“네 주인이 될 마녀지.”

“뭐라구요?”

“네?”

나와 그 집요정이 동시에 고개를 돌려 물었다. 그러나 리들 교수는 우리 둘의 반응에 별로 신경 쓰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가 평소와 같은 어조로 집요정에게 지시했다.

“알렌 셀윈에게 안내해. 아, 그전에.”

그가 반대편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 성의 봉인부터 풀어야겠군.”

리들 교수는 얼굴이 잔뜩 구겨진 집요정을 가볍게 무시하고 몸을 돌려 그의 반대편에 있는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의 뒤를 급히 쫓으면서 내가 리들 교수에게 속삭였다.

“저 집요정의 주인이 될 거라니요?”

내 목소리에는 당황스러운 기색이 잔뜩 묻어나 있었다. 나는 뒤쪽 멀리서 눈살을 찌푸리고 서 있는 집요정에게 들리지 않기를 바라며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갑자기 무슨 소리죠?”

“말 그대로의 의미지. 저 집요정은 네 거야.”

그는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니라는 듯 대꾸했다. 대체 말 그대로의 의미라는 게 뭔데. 나는 그가 한 마디 한 마디 내던질 때마다 더욱 의문스럽기만 했다. 그러는 사이 우리는 반원형 천장이 있는 방 두 개를 지나 긴 복도 앞에 도착했다.

복도 한쪽 벽면에는 가로 길이가 내 키의 다섯 배는 될 법한 길고 거대한 태피스트리가 걸려 있었다. 다채로운 선염색사로 짜여있는 그 직물에는 거의 천 년 전부터 시작된 셀윈 가의 가계도가 그려져 있었다. 실로 놀라울 정도로 길고 복잡했다. 우리가 서 있는 왼쪽 끝부터 시작되어 오른쪽으로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으나, 조금만 살펴봐도 셀윈 가가 그렇게 손이 많은 가문이 아니라는 점은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한 세대에 두 사람이 있는 것이 드물 정도였다. 아직까지도 가문의 이름이 이어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할 뿐이었다.

가계도의 끝은 리들 교수가 찾아온 ‘알렌 셀윈’의 딸인 ‘에밀리 셀윈’에서 멈추어져 있었다. 자주 보는 이름이구나. 나는 유독 그녀의 이름을 많이 접하게 되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태피스트리의 끝에는 장식장이 하나 있었다. 그 위에는 청동으로 만들어진 듯한 잔이 올려져 있었는데, 입구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은 용이 양각된 형태였다. 리들 교수가 잔을 향해 소환마법을 사용하자, 무엇인가가 당긴 것처럼 그 잔은 그대로 그의 손에 날아왔다. 잔 안에는 놀랍게도 투명한 물이 가득 차 있었다. 넘쳐 흐를법함에도 미동조차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어떤 마법이 걸려있는 듯했다.

“손바닥을 내밀어.”

나는 눈을 깜빡이며 그에게 손을 보였다. 리들 교수는 지팡이를 들어 내 손 위로 살짝 흔들었다. 따끔거리는 느낌이 든다 싶은 순간, 검지 끝에서 자그마한 핏방울이 맺혔다. 그는 그대로 내 손목을 잡고 잔 위로 올렸다. 동그랗게 올라온 핏방울은 이윽고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아래로 한 방울 떨어졌다. 투명한 물에 핏방울이 닿자 연기처럼 느리게 붉은 흔적이 퍼졌다. 자연스레 피가 물에 섞인다 싶더니, 갑자기 피의 궤적을 따라 잔에서 밝은 빛이 쏟아졌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와 동시에 성의 모든 것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를 중심으로 성의 등불이 하나씩 켜지고, 마치 잠들었다 깨어나듯 굳어 있던 정적이 깨졌다. 방금 전까지 제 기능을 멈추었던 물건들이 마치 처음부터 그랬다는 것처럼 다시 작동하기 시작했다. 시계의 초침이 돌아갔고, 멈추어있던 그림 속의 새들이 날았다. 유니콘의 형상을 한 조각이 기지개를 켜는 것처럼 한 번 울더니 다시 달릴 기세로 앞발을 내디뎠다. 조금 전에만 해도 어두웠던 성 내부가 불을 밝힌 듯 환해졌다.

나는 얼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게 무슨…….”

모든 것을 집어삼키기라도 할 듯 잔에서 쏟아지던 빛은 곧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성 전체가 활기를 되찾은 것처럼 움직이는 것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리들 교수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네 엄마가 마녀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나?”

“네?”

나는,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폭탄처럼 던진 말에 놀라서 되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가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에밀리 H. 셀윈. 그게 네 엄마의 마법 세계에서의 이름이지.”

“…우리 엄마의 성은 셀윈이 아니에요.”

내가 미간을 찌푸리며 그에게 대꾸했다.

“게다가 엄마는 마녀라고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어요.”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어릴 때지만 나는 엄마가 마법을 쓰는 모습을 보지도 못했다. 게다가 아빠는 마법에 대해서는 전혀 문외한이지 않았던가. 마법 세계에서 살아간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나는 마녀가 마법을 사용하지 않고 일상을 영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알고 있었다.

“무슨 이상한 소리를…….”

“네 엄마는 셀윈 가의 마지막 남은 혈통의 후계였지. 머글 세계로 도망가버렸지만.”

그는 벽면의 가계도를 힐끔 쳐다보았다. 에밀리 셀윈의 이름 아래에, 놀랍게도 내 이름이 새롭게 새겨져 있었다. 나는 멍한 눈으로 이를 빤히 응시했다.

리들 교수가 차분하게 말했다.

“지금은 네가 셀윈 가의 유일한 승계자인 것 같군.”

“…그럴 리 없어요.”

“네가 믿냐 믿지 않느냐는 중요하지 않아. 이건 사실이니까.”

그렇다면 왜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거지? 나는 주워온 딸이기라도 한 건가? 그러나 그 가정은 엄마가 마녀라는 것보다 더 끔찍했다─ 나에게 또 다른 엄마가 있다는 사실은 오히려 그간의 내 인생을 송두리째 부정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게 만들었다.

엄마는 왜 마녀라고 말하지 않은 걸까. 내가 마녀라는 것을 몰랐을 리 없었다. 조금의 힌트라도 줄 수 있었을 텐데. 엄마는 정말로 내가 이대로 머글 출신이라 핍박받으며 살기를 바랐던 것일까. 엄마는 대체 왜 마법 세계를 뛰쳐나와 머글인 척 살아갔던 거고, 리들 교수는 왜 여기로 데려와서 우리 엄마가 마녀였다는 걸 밝힌 거지. 그리고 어떻게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오, 이럴 수가.”

어느새 우리 쪽으로 다가온 집요정이 뒤늦게 소리를 내질렀다.

“이게… 이게 얼마 만에 보는 광경인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나를 노려보던 집요정의 눈가에 기쁨이 서렸다. 그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부산스럽게 방 주변을 한 번 돌았다.

“당신이 셀윈의 새로운 주인이셨군요.”

그는 아까와는 달리 예의 바른 태도로 나에게 다가와 말했다. 그 집요정은 정말로 나를 제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는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리들 교수를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무덤덤한 어조로, 집요정에게 알렌 셀윈이 있는 곳으로 안내하라고 명령했다.

* * *

리들 교수는 집요정의 안내를 따라 2층의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방의 벽면에는 길게 액자 틀이 늘어져 있었는데, 전부 검은 휘장으로 가려져 있었다. 초상화처럼 보이는 액자 틀 아래쪽에는 이름과 함께 태어난 해와 사망한 해로 추정되는 연도가 적혀져 있었다. 리들 교수는 이를 천천히 살피며 복도를 걸었다. 알렌 셀윈, [1918 ─ 1966]. 마침내 원하는 것을 발견한 듯, 리들 교수는 알렌 셀윈이라고 적혀있는 글자 앞에 서서 검은 휘장을 걷어냈다. 갈색 머리카락에 드문드문 흰 머리가 섞인, 노인이라고 부르기에는 젊고 장년으로 보기에는 늙어 보이는 한 남자가 초상화 속에서 눈을 감고 있었다.

휘장이 걷어지자, 그림 속의 그는 깊은 잠에서 깨기라도 한 듯 서서히 눈을 떴다. 그의 시선이 천천히 리들 교수에게 향했다.

“톰.”

그는 갈라지는 듯한 진득한 목소리로 리들 교수를 불렀다.

“네가 여길 다시 돌아올 줄 몰랐는데.”

“오랜만에 뵙겠군요, 셀윈 씨.”

리들 교수가 차분하게 대꾸했다.

“지금이 1976년이니까, 거의 15년 만인가요.”

“세월이 많이 지났군.”

그가 감회에 젖은 듯 조용히 중얼거렸다. 마치 방금 잠에서 깬 사람처럼 낮은 어조였는데도, 나는 거기에서 왜인지 짙은 거부감을 느꼈다.

“오랜만에 기쁜 소식을 알려드려야겠군요.”

리들 교수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부로, 셀윈 성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알고 있었다는 듯 그는 별로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이미 성안의 활기로 짐작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알렌 셀윈의 시선이 서서히 내 쪽으로 향했다. 색채가 옅은 그의 눈동자가 나를 위아래로 훑어내렸다. 알렌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네가 그럼, 에밀리의 딸이로군.”

“……엄마를 아시나요?”

“알다마다.”

그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대꾸했다.

“내 딸이니까.”

나는 조금 놀란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기계적으로 내뱉어진 목소리에는 어떠한 감정의 흔적도 담겨있지 않았다. 초상화를 유심히 살피다가, 나는 알렌 셀윈의 갈색 눈썹과 반듯한 이마가 엄마를 닮았다는 느낌을 일순 받았다. 그렇다면 그가 내 할아버지라도 되는 것일까. 나는 어쩐지 그에게 별로 정이 가지 않았다.

알렌 역시 나를 쳐다보고 있었던 것 같았다. 특유의 낮은 목소리로 그가 나에게 물었다.

“네 아비는 머글인가?”

아비? 나는 우리 아빠를 낮춰 표현하는 듯한 그의 말에 기분이 상했다. 별로 대답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그렇게 되었군.”

마치 짐작이라도 했다는 듯 무덤덤한 어조로 수긍했으나, 나는 그의 목소리에서 어딘지 모를 깊은 분노를 느꼈다. 처음으로, 차분해 보이던 그의 표정에서 어떤 깊은 감정을 읽었다. 들끓어 오르는 노기를 숨기는 것처럼 그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그는 내 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난 잡종 혼혈을 손녀로 인정할 수 없어.”

나는 그에게서 느껴지는 적의에 순간 당황했다. 애초에 혈육의 정이니 뭐니 있을 법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왜인지 그가 나를 지독하게 미워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당신의 인정은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리들 교수는 차갑게 그를 비웃을 뿐이었다.

“셀윈 가가 이미 인정했으니까요.”

리들 교수가 알렌 셀윈에게 성의 승계에 관해 물었으나, 그는 어떤 질문에도 명확하게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내가 셀윈 가의 자산을 물려받는 사실에 격한 거부감을 보일 뿐이었다. 리들 교수는 굳이 더 캐묻지 않았다. 초상화의 도움 없이도 유산 상속에 관한 일은 충분히 처리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초상화의 방에서 나온 나는 리들 교수를 따라 셀윈 성의 복도를 걸었다. 엄마가 마녀였고, 내가 셀윈 가의 마지막 혈육이라고. 채 정리되지 않은 새로운 사실들이 혼란스럽게 머리를 휘저었다. 그는 이미 엄마의 이름까지 알고 있었고, 확신을 한 상태에서 나를 데려와 내가 셀윈 가의 마지막 후계임을 입증했다. 불현듯 민달팽이 클럽에서 키이라가 에밀리 셀윈과 리들 교수와의 친분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었던 것이 기억났다.

나는 평소와 같은 자세로 내 앞을 걸어가고 있는 리들 교수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결국 걸음을 멈추었다. 내가 그 자리에서 멈추자 텅빈 복도에 그의 구두 소리만 크게 울렸다.

나는 내 앞에서 걸어가고 있는 리들 교수를 향해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당신은 이미 알고 있었군요.”

리들 교수가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심연의 한가운데를 헤매는 듯 깊고 어두운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마주친 눈길을 피하지 않고 나는 리들 교수를 그대로 직시했다.

“당신은.”

나는 단어 하나하나를 짓이기라도 하듯 또박또박 발음했다.

“이미 다 알고 있었어요.”

복도 창가에 걸린 커튼 사이로 흐린 하늘의 희미한 햇살이 리들 교수를 비추고 있었다. 그에게 닿은 빛은 그 자리에서 바스러지고 바닥에 검고 긴 그림자를 남겼다. 나는 햇빛보다도 어두운 그림자에 더 눈길이 쏠렸다.

닫혀있던 리들 교수의 입이 서서히 열렸다.

“그래.”

그는 심지어 부정조차 하지 않았다. 나는 분기 어린 목소리로 추궁하듯 물었다.

“대체 그걸 왜 지금에 와서야 말해준 건가요?”

“지금이 세상에 알려지기에 가장 적절한 시기니까.”

리들 교수가 조용히 대답했다.

“넌 곧 멸문된 셀윈 가의 유일한 후계로 회자될 거다.”

구름이 지나가면서 그에게 쏟아지는 빛의 밝기가 조금씩 변했다. 그와 동시에 리들 교수의 얼굴에 음영이 일며 평소와는 다른 낯선 느낌을 풍겼다.

“그럼 네 출신에서의 약점은 충분히 상쇄되고도 남겠지. 아무리 네가 혼혈이라고 하더라도, 셀윈 가에 유일하게 남은 핏줄이니까 말이야.”

당연히 발생할 앞일을 예측하기라도 하듯 그가 무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받을 충격이라곤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 같은 리들 교수의 싸한 태도에, 그렇게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어쩐지 기운이 빠졌다.

“이해할 수 없어요.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죠?”

“사람들이 영웅은 고귀한 혈통을 타고난다고 믿기 때문이지.”

그가 간결하게 대답했다.

“너 스스로가 지금 마법 세계에서 정의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로 여겨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을 거다. 게다가 마법적 재능에 능력까지 갖추고 있지. 물론 처음에는 네가 머글 출신이라서 오히려 더 크게 조명을 받겠지.”

리들 교수는 천천히 걸어오며 말을 이었다.

“그러나 너는 혈통적 정당성이 부족해. 그리고 셀윈 가의 이름은 이를 충족시켜주게 될 거다.”

나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머글 출신이라는 약자 계층을 통해 명성을 쌓게 하고, 셀윈이라는 출신을 후에 부각함으로써 내 명성을 더 강화시키기라도 하겠다는 의도인 걸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풀리지 않는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대체, 나를…… 왜?”

가까이 다가온 그를 올려다보며 내가 의문에 찬 어조로 물었다. 리들 교수가 왜 이렇게 나에게 집착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가 원하는 것처럼 오러가 되고 첩자가 되기 위해 굳이 혈통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어쩐지 불안해지는 기분에 이유도 없이 몸이 떨렸다. 오늘따라 그의 눈길이 더 시리고 차갑게 느껴졌다.

“인간들에게는 자신들이 맹목적으로 믿고 따를 수 있는 구원자가 필요한 법이지.”

리들 교수가 서늘하게 말했다.

“세상에는 빛도 어느 정도 필요하지 않겠나?

순식간에 몸이 굳었다. 무엇인가를 깨달은 것처럼, 나는 그 한마디만으로도 그가 그리는 그림이 어떤 것인지 상상할 수 있었다.

비밀의 방이 열렸을 때 어땠던가. 모든 학생들은 숨죽여 있었고, 학교의 분위기는 추운 겨울이 영원히 계속되기라도 할 것처럼 잔뜩 얼어 있었다. 온전한 어둠 아래에서는 아무도 제대로 숨 쉴 수 없었다. 사람들은 그저 그 침묵을 깰 누군가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비밀의 방을 닫고 나는 느꼈다. 내가 등장함으로써 그들은 안심했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 나에게 영웅의 역할을 주었다. 사람들에게 진실이나 실제적 가능성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나타났다 하더라도 여전히 ‘죽음을 먹는 자’들이 득세하고 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그들에게는 단지 자신들의 짐을 덜어줄 영웅, 밤이 끝나고 언젠가는 태양이 뜨리라는 희망이 필요했던 것이다.

희망, 나는 그가 그 단어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해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군요. 당신의 목적은 언제나 뚜렷하고 일관적이었어요.”

침묵하던 내가 겨우 입을 열어 말을 꺼냈다.

“모든 것을 지배하고 싶은 거군요. 빛이든, 어둠이든.”

아무런 표정변화도 없었지만, 나는 그가 이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아랫입술을 한 번 깨물고, 내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단지 오러가 끝이 아니었어. ‘이름을 말할 수 없는 자’에 대항하는 영웅을 직접 만들 생각이었던 거야.”

왜 나는 모르고 있었던 것일까. 그에게는 덤블도어 교수님의 역할을 대신할 정의의 허수아비가 필요했을 것이다. 거짓 영웅과 거짓된 적대자를 인위적으로 세워 모든 사람들을 기만하고 지배하는 것이 리들 교수가 꿈꾸는 미래라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당신을 몰락시킬 것 같은 희망을 주는 것이 제 역할인 거군요.”

그는 자신의 세력이 번성할수록 이에 대항하는 세력이 커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은 아마 덤블도어 교수님이 될 가능성이 가장 높겠지. 그는 교수님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분산하며, 오히려 대척점이 될 가짜 영웅을 만들어 낼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군.”

리들 교수가 나에게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싸하게 대답했다.

“너는 그들에게 미비한 희망에 되어줘야 하는 거다. 곧 나를 없앨 수 있을 것 같은.”

어느새 희미했던 햇살은 거두어지고 구름이 잔뜩 일었다. 그나마도 들어왔던 빛이 사라지면서 복도는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 깊게 인 먹구름이 무겁게 떠 있었다.

나는 주먹을 꽉 쥔 채 리들 교수를 올려다보았다.

“…그게 가능할 것 같나요?”

리들 교수의 얼굴에는 빛 한점 비치지 않는 서늘한 그림자가 가라앉아 있었다. 그가 나를 내려다보며, 오히려 차갑게 되물었다.

“안 될 이유는 뭐지?”

나는 저절로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이 자는, 정말 모든 것을 지배할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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