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7 / 0115 ----------------------------------------------
Part 6
로웨나 블루로즈
김아흔
Part 6 - (4)
나를 올려다보는 그의 은회안은 절로 블랙을 떠오르게 했다. 약해진 마음에 내가 조금 머뭇거리는 기색을 보이자, 시리우스의 표정에 옅게 미소가 돌았다. 그는 내가 블랙을 닮은 그의 눈동자에 어쩔 줄 몰라 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왠지 내 마음을 읽힌 것 같아 더 부끄러워졌다. 나는 시리우스가 잡고 있던 손을 떼고 망토를 걷어냈다.
“됐어요, 저 도서관 가야 해요.”
앉아 있던 시리우스는 순순히 내 손을 놓아주었다. 머리 위에서 망토를 벗어낸 그가 가뿐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며 한마디 툭 던졌다.
“넌 뭐 매일 도서관만 다니냐.”
“그쪽은 왜 도서관을 안 가요? O.W.L. 준비 안 해요?”
도리어 내가 의문스럽다는 듯 묻자 그는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틈틈이 하고 있어.”
“아, 예.”
별로 믿음직하지 못하다는 어조로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나는 시리우스가 도서관에 앉아 있는 걸 거의 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마루더즈들이 룸메이트인 자신의 방이나, 장난칠 거리가 잔뜩 있는 그리핀도르 휴게실에서 공부할 것 같지도 않았다. 대체 어디에서 틈틈이 공부를 하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긴, 사람마다 공부하는 스타일은 다 다르니까. 나는 무조건 책상에 오래 앉아서 혼자 끙끙대는 스타일이었지만, 어떤 사람들은 단기간에 효율적으로 집중해 같은 결과를 내기도 했다. 게다가 마법이라는 것 자체가 학문이라기보다는 기교에 가까웠기 때문에, 도출되는 결과가 노력보다는 재능에 좌우되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시리우스에게 성실하니 하지 않니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O.W.L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복도를 걸었다. 왜인지 모르겠으나 그는 모든 과목에 E 이상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자신했다. 나는 그의 성적을 몰랐으므로 그것이 단순한 허세인지 아닌지 판별할 수 없었다. 시리우스는 O.W.L과 전혀 무관한 내용의 과제가 나오면 끝낼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는 얘기를 꺼내다가, 불현듯 나에게 물었다.
“근데, 이번 부활절 휴가 때에도 학교에 있나?”
“아뇨, 저 이번엔 집에 가요.”
“그 무슨……”
시리우스가 조금 여유를 두더니 물었다.
“런던의 세인트 폴 뭐 어쩌고 하는, 뭐 근처에 있는 그 집?”
“네, 맞아요. 세인트 폴 대성당이요.”
성당이 대체 뭐 하는 곳이냐며 투덜거리던 시리우스는 자신 또한 이번 휴가 때 호그와트를 떠난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일주일가량인 부활절 휴가 동안 제임스의 집에 머무를 예정인 것 같았다. 나는 제임스의 부모님인 포터 부부가 굉장히 너그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말에 따르건대, 그들은 시리우스를 또 다른 아들 취급하는 것 같았다. 블랙 가에서 쫓겨난 그가 머물 곳은 있을지 걱정되었는데, 어느 정도는 다행한 일이었다.
한참을 이야기하며 학생들이 잘 다니지 않는 복도를 걷던 시리우스는 도서관 입구 근처에까지 오자 걸음을 멈추었다.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도서관 가는 거 아니었어요?”
“오늘은 안 가.”
그는 다시 투명망토를 자신의 머리 위로 두르며 대답했다.
“이미 너를 봤으니 됐어.”
공부 열심히 해. 시리우스가 씨익 웃으면서 한마디 던졌다. 내가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마치 마술이라도 부린 것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아무리 봐도 신기했다. 설령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지금 내 앞에 시리우스가 서 있는 거겠지? 짧은 시간 그가 있을 만한 허공 어딘가를 응시하다가, 나는 몸을 돌려 도서관으로 들어갔다.
* * *
토요일은 온종일 과제만 하면서 보냈다. 월요일까지 제출해야 할 것들까지도 오전에 다 끝내버렸다. 이렇게 과제가 많은 시기에, 외출 때문에 일요일 하루를 버려야 한다는 것은 타격이 컸다. 나는 점심도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도서관에서 나오지 않았다. 내가 하루종일 양피지와 깃펜만 쥐고 있자, 아이작이 조금 의아한 듯 옆자리에 앉으며 나지막하게 물었다.
“왜 이렇게 급하게 하는 거야?”
그는 내가 어젯밤에 끝낸 약초학 과제를 이제 시작하려는 것 같았다. 어제 내가 참고했던 책을 서가에서 들고온 것이 보였다. 쌓아놓은 양피지 몇 장을 들추며 내가 대답했다.
“이번 부활절 휴가 때 집에 가야 하기도 하고……. 주말에 외출도 있잖아.”
“외출?”
“응. 아침 일찍 나갔다가 저녁에 들어올 것 같아.”
재작년에 비슷한 과제를 해놨던 게 있었는데. 나는 테이블 앞에 쌓아놓은 양피지 더미를 다 해체했다. 해 놓은 과제들을 따로 정리하지 않았더니 다시 찾는 것에도 시간이 걸렸다. 제목만 대충 읽어 내리며 3학년 때 했던 과제를 훑는 동안 아이작이 조심스레 물었다.
“어딜 가는데?”
“아빠와 약속이 있어.”
플리트윅 교수님이 그랬듯 아이작도 부활절 휴가 직전에 이렇게 가족과 외출을 나간다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당사자인 나도 당혹스러웠으니 뭐. 그가 깊게 질문할 것 같아 나는 괜히 말을 돌렸다.
“너는 이번에 부활절 휴가 동안 학교에 있는 거야?”
“응. 이미 크리스마스 때 부모님 뵙고 왔잖아. 호그와트 남아서 공부 좀 하려고.”
나는 변신술이 약하니까. 아이작이 덧붙인 말에 고개를 절로 휘저었다. 변신술에 약하다니. 그는 작년 시험에 작은 실수로 고작 E를 받았을 뿐이었다.
4학년쯤 되면, 부활절 휴가에 집에 돌아가는 학생들이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었다. 저학년 때야 집이 좋고 학업이 부담스럽지 않으니 긴 연휴가 있을 때마다 고향을 찾게 되지만, 일단 4학년이 되면 기본적으로 해야 할 과제가 너무 많아 내려갈 여유가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번 휴가에 룬문자와 천문학, 마법의 역사책을 챙겨 가리라고 마음을 먹었다. 호그와트 밖에서는 지팡이를 사용할 수 없었으므로 집에서는 마법을 사용하지 않아도 되는 과목을 공부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저 세 과목 만큼은 교과서를 읽는 것으로 충분하니 뭐. 나는 집에서 쉬면서도 틈틈이 공부해야겠다고 다짐했다.
* * *
다음 날 아침,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일찍 일어났다. 리들 교수가 최대한 머글인 것처럼 입고 나오라고 지시했기 때문에, 전날 밤 가장 머글스러운 복장을 미리 골라두었다. 나는 평소에도 그렇게 마법사처럼 입고 다니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리들 교수의 말이 어쩐지 신경 쓰여, 지팡이를 넣기 쉬운 망토를 걸치는 대신 옅은 하늘색의 가디건과 주머니가 깊은 스커트를 입었다.
아침 일찍 호그와트 성을 나와 호그스미드 역으로 향했다. 봄이 되어 날씨가 풀리긴 했지만 아직 아침은 많이 쌀쌀했다. 두꺼운 옷을 고를 걸 그랬나. 호그스미드 역으로 가는 내내 나는 후회했다. 하지만 리들 교수와 약속한 시각이 이른 아침이었기 때문에 다시 돌아가서 옷을 챙겨올 여유까지는 없었다. 소환 마법을 써볼까 하다가 관두었다. 소환마법을 배운지 몇 개월이 지난 지금도 나는 원거리 소환 마법에는 익숙해지지 못했다. 외투가 이쪽으로 날아오다가 뭐 하나라도 깰지도 몰랐다.
약속 시각보다 일찍 호그스미드 역에 도착했으나, 리들 교수가 이미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고 조금 놀랐다. 나는 그가 호그와트가 아니라 호그스미드 근방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추측했다. 그는 완벽하게 머글 차림새를 한 채 서 있었는데, 런던 스트릿 어딘가에서 본 듯한 그의 진남색 테일러드 재킷과 주름 없이 깔끔하게 떨어지는 스트레이트 바지를 보면서 나는 그가 정기적으로 머글 도시를 탐방하기라도 하는 건 아닌지 의문이 일었다. 그의 복장에서는 마법사들이 머글 옷을 입었을 때 풍겨나오는 어색함이나, 시대에 뒤떨어지는 듯 부자연스러운 느낌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 인사를 건네자, 리들 교수는 시계를 흘끔 바라보았다. 마치 늦었다고 타박이라도 하는 것 같아 당황했다. 이 정도면 정해진 시간보다 일찍 도착한 건데. 그는 으레 그렇듯 별말 없이 나를 스쳐 역사 안으로 들어가며 한마디 던졌다.
“따라오도록.”
이미 발권을 끝냈는지 그는 자연스럽게 승강장으로 향했다. 호그스미드 역에서 만나자고 할 때부터 어딘가 다른 도시로 갈지도 모른다는 짐작은 했었다. 호그스미드 역에서는 항상 킹스크로스 행 급행열차만 타서 그런지, 완행열차를 타는 승강장은 처음이었다. 천천히 승차장 쪽으로 내려가던 그는 2번 플랫폼 앞에 섰다.
나는 말 한마디 없이 리들 교수와 함께 호그스미드 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다가, 마침내 차량에 올라탔다. 일요일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우리가 탄 완행열차는 런던까지 가는 기차였다. 중간 종착역 중 하나가 호그스미드 다음 역인 퍼스 역이었는데, 그는 거기에서 바로 내렸다.
점점 더 혼란스러워지고 있었다. 퍼스라니. 나는 처음 와보는 도시였다. 사실 나는 퍼스는 커녕 스코틀랜드에 있는 머글 도시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이름만 들어도 어쩐지 거리에 나가면 킬트 치마를 입은 남자가 백파이프를 부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우리의 목적지는 퍼스가 아니었다.
퍼스 역의 5번 플랫폼에서 내린 리들 교수는 그대로 머글 기차의 승강장 쪽으로 걸어갔다. 머글 인파 속에 섞이면서도 그는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너무나도 능숙하게 퍼스 역사를 걸어 들어가는 리들 교수를 바라보면서, 나는 그가 어느 정도 머글들의 문화에 익숙할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받았다. 길을 가다가 혹여 리들 교수를 놓치기라도 할까 봐 두려워 나는 빠른 걸음으로 그의 뒤를 쫓았다.
그는 머글 기차역의 표를 발권했다. 9시 출발, 도착지는 글래스고였다. 한 시간 십오 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는데, 나는 그가 굳이 머글 기차를 타고 가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우리는 머글들의 마을에 가는 건가요?”
“아니, 마법사의 마을이다.”
그가 짧게 대답했다.
“그럼 왜… 플루가루를 통하지 않는 거죠?”
“흔적이 남으니까.”
대체 뭘 하려고 흔적조차 남지 않는 곳으로 가려는 것일까. 그 이유를 묻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대답이 없을 것이 뻔했기 때문에 나는 꾹꾹 눌러 담았다.
승강장에서 기다리자 곧 기차가 플랫폼 안으로 달려오다가 천천히 멈추었다. 나는 그를 따라 기차의 차량 위로 올라탔다. 리들 교수와 머글 기차를 타게 될 일이 생기다니. 나는 ‘이름을 말할 수 없는 자’인 그가 지금 당장에라도 지팡이를 들어 기차에 탄 머글들을 학살하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순간했다. 한 차량 안에서 같은 공기를 마시기 싫다는 이유쯤을 들어도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내 상상과는 다르게 그는 주변 머글들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고 우리의 좌석 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기차 차량의 가운데 복도를 따라 걸으며, 나는 좌석에 앉은 젊은 머글 여자들의 시선이 그에게 쏠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걸어가는 족족 누군가의 눈길을 받는다는 것은 나에게 꽤 신기한 경험이었다. 하지만 리들 교수는 그런 시선에 너무 익숙한 나머지 별로 신경이 쓰이지도 않는 것 같았다.
3번 차량의 뒤쪽에서 네 번째 자리가 우리의 자리였다. 좌석 바로 앞에서 걸음을 멈춘 그는 먼저 들어가 앉으라는 듯 가볍게 고갯짓했다. 리들 교수는 복도 쪽 자리에 앉을 생각인 듯했다. 나는 그를 한 번 올려다보다가 조심스레 안쪽으로 들어가 창가 쪽에 앉았다. 내가 자리에 앉을 때까지 기다리던 리들 교수는 곧 옆에 자리 잡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길게 기적 소리가 울리며 기차가 출발했다.
머글 기차는 정말 오랜만에 타는 것 같았다. 선로를 달리는 레일 소리가 귀에 맴돌다가 서서히 익숙해졌다. 잔뜩 굳어 정면만 바라보는 것도 우습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괜히 시선을 창밖으로 향했다. 리들 교수와 함께 앉아 있어서 그런지 우리 둘 사이에 내려앉은 침묵이 더 깊고 무겁게 느껴졌다. 멍하게 창밖만 보다가 고개를 슬쩍 돌리니, 리들 교수는 어느새 재킷의 안쪽 주머니에서 손바닥만 한 크기의 소책자를 꺼내 무심하게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조금 주저하던 나는 결국 입을 열었다.
“도대체 어디 가느냐고 물어보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을 거죠.”
그는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도착하면 알게 될 거야.”
예상했던 대답에 나는 드러나지 않게 옅은 한숨을 쉬며 다시 창밖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풍경이 제대로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글래스고까지 가서 날 제거할 계획은 아니겠지. 호그와트에서 죽어라 공부하다가 인생의 마지막을 맞이하고 싶지는 않았다. 별생각이 다 들면서 머릿속이 오히려 복잡해졌다.
불안하게 흐르는 추측들을 애써 잠재우고 있는데, 옆에 앉은 머글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친구 둘이서 여행을 온 모양이었다. 글래스고의 볼만한 관광지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내가 아는 곳은 하나도 없었으므로─나는 아예 글래스고에 가본 적이 없었다─별로 흥미롭지는 않았다. 그래도 혼자 끔찍한 상상을 하는 것 보다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오히려 정신에 이로울 것 같아 나는 두 머글이 하는 대화를 듣고 있었다.
약간 지루하다고 느낄 무렵, 책에 시선을 꽂고 있던 리들 교수가 먼저 말을 걸었다.
“공부는 꾸준히 하고 있나.”
나는 그가 갑자기 던진 학교 공부 이야기에 다소 당황했다. 이번 학기에 수석을 하라는 말을 돌려서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지난주에 어둠의 마법 방어술 과제로 제출했던 20인치에 달하는 보고서를 한 번 읽는 것만으로도 내가 얼마나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 느껴지지 않을까.
“제가 하는 걸 보시면 알 텐데요.”
내가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리들 교수는 딱히 내 말을 부정하지 않고 이어 말했다.
“어둠의 마법 방어술은 제법 는 것 같더군.”
제법 정도가 아니지. 스스로 말하기는 부끄러웠지만, 솔직히 내 어둠의 마법 방어술은 4학년 초에 비해서 일취월장했다. 이제 나는 아이작과 결투를 벌여도 비등하게 싸울 자신이 있었다.
리들 교수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천문학은 열심히 하고 있겠지.”
그는 내가 천문학과 어둠의 마법 방어술에 약하다는 사실을 이전에 지적한 적이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유독 천문학에는 그렇게 높은 점수를 받지 못했다. 대체 왜 그걸 배워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고, 딱히 흥미도 없었다. 그래도 억지로 다른 과목과 비슷한 시간을 소모해 공부하는데도 유일하게 투자 대비 효율이 그렇게 높지 않은 것이 천문학이었다.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그렇지만, 성적을 잘 받을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어요.”
나는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
“저는 심지어 천문학이 저에게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조차 알 수 없거든요.”
리들 교수는 여전히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하는 말 만큼은 다 듣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책장을 넘기며 무심하게 답했다.
“별의 운행에는 어느 정도의 규칙성이 있다. 하지만 오로라 시니스트라 교수는 그런 것을 제대로 가르쳐주지는 않지. 그러니까 천문학이 암기과목처럼 느껴지는 거고.”
규칙성이 있다는 이야기는 이전에 들은 적 있었지만, 나는 적어도 천문학에 있어서는 어떠한 원리나 공식을 스스로 찾아본 적은 없었다. 그의 설명은 일정 부분 맞았으므로, 나는 리들 교수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었다.
“너는 생각 없이 외우는 편이 더 적성에 맞다고 판단하는 것 같지만, 그건 단지 네가 꾸준하기 때문이지, 딱히 암기에 소질이 있어서는 아니야.”
리들 교수가 말을 이었다.
“오히려 스스로 이해해야 납득하고 외울 수 있는 쪽에 가깝지. 아닌가?”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가끔 그가 이렇게 교수인 것처럼 보일 때면 묘한 기분이 들었다. 리들 교수의 직위가 현재 호그와트의 어둠의 마법 방어술 담당 교수이고, 내가 그의 학생인 것은 맞았다. 하지만 나에게 그는 교수도, 이름을 말할 수 없는 자도 아닌 어떤 ‘다른 사람’처럼 인식되곤 했다. 그래서인지 그가 이렇게 나의 학업적인 성향을 자세히 파악하고 있다는 것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불현듯 그와 입 맞췄던 순간이 떠올랐다. 이를 기억하는 것조차 싫고 부끄러운 일이었는데 왜 갑자기 생각난 것인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나도 모르게 오른손을 들어 올려 입술에 가져다 대었다가, 그 행동에 오히려 놀라 다시 아무렇지도 않은 척 손을 무릎 위로 내렸다. 갑자기 리들 교수의 어깨가 나에게 닿아 있다는 사실이 의식되었다. 나는 일부러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가 혹시 내가 하고 있는 생각을 읽을까 봐 두려웠다.
다시 대화가 끊겼다. 나는 조용히 차창 밖을 응시했다. 리들 교수가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 창가에 비쳤다. 봄을 증명이라도 하듯 지나가는 풍경 하나하나에는 자연 특유의 생기가 치솟고 있었다. 창밖의 풍경이 빠르게 바뀌는 것을 멍하게 바라보며 나는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다른 애들은 호그와트 성에서 주말 내내 과제를 하고 있겠지. 너른 대지의 전경을 눈에 담자, 묘하게도 여행이라도 온 것 같은 상쾌한 해방감을 느꼈다. 물론 나도 돌아가면 다른 친구들과 같은 신세가 되겠지만.
그러는 사이 글래스고 역에 도착했다. 기차에서 내린 나는 역명이 적힌 간판에 알아볼 수 없는 영어가 병기된 것을 발견했다. 아무래도 스코틀랜드의 지역어인 갈릭어인 것 같았다. 같은 영국인데도 전혀 다른 나라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주변을 바라보며 역사로 향했다.
동시에 도착했던 기차가 여럿이었던지, 역사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아무 생각 없이 걸어 들어갔다가 인파에 치일 뻔했다. 이러다가 리들 교수와 떨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그가 오른팔을 들어 내 어깨를 잡더니 자신의 쪽으로 끌었다. 나는 조금 놀라 몸이 굳었다.
승강장에서 빠져나와 마침내 역사에 도착하자, 글래스고 역의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도시의 중앙역이라 그런지 글래스고의 역사는 런던의 킹스 크로스 역보다 훨씬 더 크게 느껴졌다. 높은 천장의 스테인드글라스까지 나에게는 모든 것이 신기하게만 보였으나 리들 교수에게는 딱히 새로울 것도 없는 풍경인 것 같았다.
옆에 서 있는 두 사람이 큰소리로 대화를 하면서 지나갔다. 나는 익숙하지 않은 그들의 발음에 약간 놀라서 중얼거렸다.
“여긴 억양이 다른 것 같아요.”
“스코틀랜드니까. 악센트가 강할 수밖에 없지.”
리들 교수가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물론 래번클로에서도 스코틀랜드 출신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저렇게 강하게 발음하지는 않았다. 나는 괜히 주변 사람들의 대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그를 따라 걸어갔다.
리들 교수는 역에서 나와 시내로 걸어 들어갔다. 글래스고의 특징은 런던보다 훨씬 더 조용하고 한적하다는 거였다. 리들 교수를 따라 도심을 돌면서 나는 생각보다 사람이 별로 없어서 놀랐다. 런던이라면 이 시간에는 훨씬 웅성거리고 북적거렸을 것이다. 오늘 날씨가 흐려서 그런지 건물의 색채도 더 어두워 보였다.
도로를 걷던 리들 교수가 한 레스토랑 건물 쪽으로 향했다. 나는 처음에 그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가는 줄 알았는데, 그는 레스토랑 건물과 옆 건물의 사이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는 두 사람이 겨우 들어갈 법한 좁은 골목이 있었는데, 나는 리들 교수가 아무렇지도 않게 그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조금 당황했다. 내가 골목 앞에 주저하며 서 있자, 리들 교수가 조용히 말했다.
“이쪽으로 들어와.”
망설이던 나는 조심스레 골목 안쪽으로 들어갔다. 걸음을 더 내딛자, 우리 앞에 다 낡아 불빛도 들어오지 않을 것 같은 작은 가로등이 보였다. 가로등 아래에 나를 세운 그는 양피지 조각 한 장을 내밀며 그 위에 있는 글자를 읽으라고 지시했다.
─ 린 드라이브 21, 밀른케이브
나는 그가 시키는 대로 가로등 아래에 서서 쪽지의 내용 그대로를 읊었다. 그와 동시에 내 의지와 상관없이 몸이 어딘가로 끌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살짝 어지럽다 싶은 느낌이 드는 순간, 나는 낯선 곳에 서 있었다. 나는 이것이 머글의 공간에서 마법사의 공간으로 가는 포트키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여기가 어디일까. 글래스고와는 거리가 있는 곳이 분명했다. 리들 교수가 말했던 마법사들의 마을일지도 몰랐다.
여기의 날씨는 글래스고 도심보다 훨씬 더 흐렸다.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 같은 느낌에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잔뜩 구름이 껴 대낮임에도 조금 어두웠다. 나는 고개를 다시 숙여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 주변에는 너르게 잔디밭이 조성되어 있었는데, 오르막길의 언덕 군데군데에 주목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언덕의 끝은 절벽이었고, 절벽 위에 거대한 성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눈꺼풀을 한번 깜빡이고 절벽 끝에 외롭게 서 있는 오래된 성을 바라보았다. 돌벽으로 이루어진 회백빛의 높은 성벽은 오랫동안 누군가가 관리하지 않은 듯 색이 바래져 있었다. 런던 근교에서 보았던 윈저 성만큼 규모가 큰 것은 아니었지만, 성 자체의 구조에서부터 웅장함이 느껴졌다. 어떤 불필요한 장식도 없어 보였던 성은 오로지 방위의 목적에만 치중되어 지어진 것 같았다. 날씨 때문인지 나는 그 성이 매우 우울하고 슬퍼 보인다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