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웨나 블루로즈-78화 (78/115)

0078 / 0115 ----------------------------------------------

Part 5

로웨나 블루로즈

김아흔

Part 5 - (12)

“요즘 저녁 시간만 되면 왜 그렇게 보기가 어려워?”

고대 룬 문자 교과서를 덮으며 아이작이 나에게 물었다. 그는 내가 도서관에서 찾아도 없다고 불만이 가득했다. 블랙을 찾느라고 간간이 저녁을 거르기도 했기 때문에 그의 입장에서는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요즘은 기숙사 방에서 주로 공부를 하거든.”

“방에 있다고?”

“응. 가끔… 산책도 나가고 말야.”

예전만큼 도서관이 그렇게 편하지가 않아서. 나는 준비해두었던 대답을 했다. 어차피 아이작은 룸메이트인 안나나 데이지 같은 애들과 말을 섞지 않으니, 이 말을 확인할 방법은 없을 것이다.

“그럼 휴게실에서 같이 과제나 하지.”

“그래, 기회 되면 그러자.”

리들 교수가 나를 놔주면 말야. 내가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며 책을 챙겨 일어났다. 바쁜 일도 없나. 그는 주말을 제외하고는 예외 없이 나를 만나 공격마법의 수련에 몰두하게 했다. 밤새 양피지를 들여다보기도 하면서 나를 가르칠 시간을 낼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공격마법을 배우는 것이 재미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강압에 의해 억지로 해야 한다는 것이라면 조금 다르다. 공격마법을 배우는 것이 재밌다고 해서 그에게 매일 교습을 받는 것을 유쾌하게 여기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다음 시간인 머글 연구 수업에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따 봐.”

아이작이 인사차 가볍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같은 시간에 점성술을 듣는 그는 교실과의 거리가 그렇게 멀지 않아서인지 여유로워 보였다. 시간이 많이 늦었다. 나는 급하게 머글 연구 교실로 향했다.

이제 나에게 가장 최악의 수업은 머글 연구 수업이 되었다. 나는 시리우스와 다시는 인연을 만들지 않으리라 다짐했었다. 그러나 정신을 차려보면 수업시간 내내 그를 의식하면서 혹여 그가 나에게 말이라도 걸지 않을까 이상하게 기대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언제나 그와는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은 채 수업이 끝나버리곤 했다. 대부분 시리우스가 먼저 교실을 나갔는데, 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알 수 없는 야속함을 느꼈다.

나는 내가 욕심이 많다고 생각했다. 시리우스가 울면서 빌기라도 하길 바라는 걸까. 어쩌면 나는 그가 모든 잘못을 회개하고 내가 그를 용서함으로써 모든 것이 종결되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아니면, 아무리 내가 시리우스를 쳐낸다 하더라도 그가 계속 다가와 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받아주지도 않을 거면서 계속 나를 좋아해 주기를 원하는 건가 싶기도 했다. 나는 시리우스만 보면 느껴지는 미련 비슷한 감정이 어디서 기인한 것인지 항상 머리가 아팠다.

나는 텅 빈 머글 연구 교실에 한참을 혼자 앉아있었다. 머글 연구 수업 시간만 되면 그랬듯이 저녁을 먹을 기운도 나지 않았다. 검은 호수에 가서 블랙을 보고 싶다는 충동만 일었다. 하지만 나는 애써 이를 떨쳐냈다. 이제 그만하자. 공격 마법의 수련에 집중하느라고 공부할 시간도 부족했다. 7시에 시작하는 리들 교수의 교습 시간에 맞추려면 미리 해두어야 할 과제도 많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복도로 나갔다.

3층 계단으로 내려가다가 익숙한 얼굴과 마주쳤다.

“잡종, 안녕.”

나는 내 앞을 가리는 알렉토 캐로우를 빤히 바라보았다. 왜 또 나를 건드리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친구 두 명과 와서 서 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잡종이라고 부르지 마세요.”

나는 차분하게 그들에게 응대하면서, 세 사람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조용히 지팡이에 손을 가져다 댔다. 일 대 다수, 위치, 거리, 광역계마법. 마치 공식처럼 나는 그들의 동태를 파악하며 머릿속으로 효과적으로 공격할만한 마법을 훑었다.

“래번클로 영웅님이라고 이제 말대꾸도 잘해?”

“무슨 볼일이 있는 거죠? ”

그들이 딱히 나에게 볼일이 있을 리는 없겠지만, 어쨌든 차분하게 물었다. 지팡이를 쥐고 나에게 덤벼든 것은 아니었으나 언제든지 그럴 가능성이 있겠지. 5학년인 저들과 맞붙었을 때 어떠한 타격도 없이 끝낼 방법이 존재하기나 할까. 나는 언제든지 그들이 나에게 저주를 쓸 수 있다는 생각으로 바짝 긴장한 상태였다.

“요즘 시리우스 블랙과 사이가 틀어졌나 봐? 서로 아는 척도 안 하네?”

내 표정이 차갑게 식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안 그래도 시리우스 때문에 머릿속이 엉망이었다. 그들이 왜 그를 운운하면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걔가 잘 나갈 때는 그렇게 들러붙더니, 가문에서 퇴출당하니까 모르는 척 하는 것 봐.”

“뭐라구요?”

나는 어이가 없어서 되물었다.

“그런 거 아냐? 이제 친한 척할만한 가치가 없다 이거지.”

호그와트에 돌고 있는 소문을 본인만 모르네. 알렉토의 옆에 있던 슬리데린 여자 선배가 비웃듯이 말했다.

시리우스와의 사이가 틀어졌다는 것이 사람들 사이에 가십이 될지는 몰랐다. 그들의 눈에는 내가 순수혈통의 후계자를 홀려 가주의 자격을 박탈시켰으면서 사용가치가 없어지자 그를 버린 머글 출신 마녀처럼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차분했던 마음에 급격한 파문이 일었다. 이런 것에까지 신경 써야 하나. 내 의도와 전혀 다른 결과까지도 내가 책임져야 하는 건가. 그저 내가 관여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래서 이제 아이작 본즈에게 다시 꼬리 치는 거니?”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죠.”

“우리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생겨야 대화를 나누던 사이는 아니잖아?”

알렉토가 친근한 척 한마디 하자, 그의 옆에 있던 여자들이 뭐가 그리 웃긴지 깔깔 웃어댔다. 지팡이를 쥔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내 낌새가 이상하다고 여겼는지 뒤에 서 있던 슬리데린 여자 하나가 지팡이를 드는 것이 보였다.

“아니, 뭐. 제인 아보트에게는 본즈에게 관심 없다고 그렇게 강조했다던데.”

알렉토는 여유롭게 말을 이었다.

“그러면서도 왜 계속 집적대시는지 몰라.”

봤어? 어떻게 홀렸는지 본즈가 요즘 완전 싸고돌더라. 내가 기절한 이후로 아이작은 꾸준히 나에게 신경을 써주었다. 그것마저도 비꼬는 그들의 태도에 어이가 없어졌다. 그럼 나더러 어쩌라고? 울분이 치밀어 올라 당장에라도 지팡이를 휘두르고 싶었다.

“진짜 머글 출신은 어쩔 수 없다니까.”

“본즈도 웃기지 않아? 이런 잡종이 뭐가 좋다고 홀려있는 거래.”

“제 친구는 욕하지 마세요.”

나는 그들이 아이작을 언급하기 시작하자 속에서부터 화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친구?”

알렉토는 정말 재밌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 깔깔 웃어댔다. 그녀의 새빨간 머리카락이 웃음소리와 함께 물결치듯 흔들렸다.

“본즈가 잠깐 홀려서 너를 상대해주는 걸 친구라고 생각하나 보구나.”

그녀는 웃음기를 지우지 못한 채 나에게 말했다.

“아보트와 결혼이라도 하면 너를 쳐다보기라도 할 줄 아는 거니?”

아이작이 그런 애가 아닐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알렉토의 말은 나에게 상처가 되었다. 그녀는 내 굳은 표정을 보고서 더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난 얘가 호그와트 영웅이니 뭐니 떠들어대는 것도 진짜 웃겨.”

“무장해제 주문에도 당하는 애 아녔어?”

“바실리스크도 별거 아닌가 보지.”

이쯤 되니 대체 내가 왜 그들의 말을 순순히 듣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대꾸조차 할 필요 없는 폭언들 아니던가. 열 받아. 보나 마나 시험을 망쳤거나, 기분 나쁜 일이 있거나 해서 만만한 나를 괴롭히러 온 것이 틀림없었다. 내가 자기들의 스트레스 해소용 인형도 아니고 사람을 앞에 두고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인 거야. 지팡이를 쥐고 있던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그 모습에 알렉토가 비꼬듯이 한마디 던졌다.

“오, 영웅님. 마법이라도 쓰시겠다, 이거야?”

뒤에 서 있던 여자애가 먼저 지팡이를 들어 나에게 겨누며 주문을 외웠다.

“인센디오!”

“프로테고!”

나는 순식간에 방어마법을 펼쳐 그녀의 불꽃을 막았다. 내 얼굴에서 절로 핏기가 가시는 기분이었다. 단순히 엿가락 다리 저주와 같은 장난 수준의 마법이 아니라, 더 직설적이고 공격적인 마법이었다. 내 능력을 시험해보기 위함일지도 몰랐다. 위기 상황이라 느껴서인지 두뇌 회전이 평소보다도 더 빨라지며 시야가 명확해졌다. 알렉토를 비롯해 뒤에 서 있었던 다른 여자 선배 하나가 지팡이를 꺼내 들었다. 총 세 명. 리들 교수가 교습했던 대형이었다. 방어마법을 펼친 채, 나는 그들을 무장해제시켜야겠다는 생각을 순간했다. 그들은 슬리데린이었다. 말로서 끝날 리 없었다. 그대로 둔다면 나에게 어둠의 마법이라도 사용할지 모른다는 불안이 일순 일었다.

“리덕토!”

갑작스러운 폭발마법에 그들이 조금 놀란 것 같았다. 바닥이 가라앉으면서 알렉토 왼쪽에 있었던 여자가 비명을 지르며 넘어졌다. 나는 그대로 알렉토 방향으로 지팡이를 겨누며 주문을 외웠다.

“스투페파이!”

확실히 리들 교수의 환영으로 상대하는 것과 실제 사람을 상대하는 것은 달랐다. 알렉토를 향해 날아갔던 빛은 그녀가 피하면서 그 옆에 있던 슬리데린 여자 선배에게 닿았다. 그녀는 그대로 발작하듯 기절했다.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내 지팡이가 누군가에게 해를 가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피가 점점 더 빨리 도는 기분이 들었다. 알렉토는 그대로 내 쪽으로 지팡이를 겨누며 동작 금지 마법을 쏘았지만, 나는 재빠르게 피했다.

나는 지팡이를 꽉 쥐고 그대로 알렉토를 향했다.

“페트리피쿠스 토탈루스!”

“엑스펠리아르무스!”

어디선가 들리는 무장해제 마법과 함께 내 손에서 지팡이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 전에 지팡이 끝에서 쏘아져 나간 빛은 알렉토에게 닿았다. 나는 그녀의 몸이 돌처럼 단단해지는 것을 보며 뒤로 돌았다. 내 지팡이를 쥔 리들 교수가 표정을 굳힌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레귤러스와 슬리데린 4학년 토르핀 라울이 함께 서 있었다.

리들 교수가 나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지금 복도에서 뭘 하고 있는 겁니까.”

그가 내 뒤를 훑어보았다. 슬리데린 여자선배 한 명은 무너진 바닥 위에서 겨우 일어나고 있었고, 두 사람은 기절한 상태였다. 마치 나 혼자 모든 일을 저지른 것 같아 변명하려고 하는데, 리들 교수가 먼저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래번클로에 30점 감점입니다.”

“교수님.”

나는 리들 교수를 바라보며 또박또박하게 대답했다.

“저 애들이 먼저 공격 마법을 사용했어요.”

“블루로즈 양,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복도에서 공격 마법을, 그것도 저주 마법을 쓰는 건 교칙에 어긋나는 행위라는 걸 알 텐데요.”

그가 조금 서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블랙 군, 라울 군. 알렉토 양과 파킨슨 양을 부축해서 병동에 데려가 주세요.”

그는 지팡이를 휘둘러 의식을 잃은 두 여학생의 정신을 일깨웠다. 토르핀과 레귤러스가 나를 흘끔 쳐다보며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나는 눈도 떼지 않은 채 리들 교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블루로즈 양은, 저를 따라오는 게 좋겠군요.”

그가 그렇게 한마디 던지고는 뒤를 돌았다. 나는 지팡이를 다시 집어넣고 리들 교수의 뒤를 따랐다.

* * *

그가 차분하게 연구실 문을 열었다. 연구실 특유의 싸한 향이 코끝을 스쳤다. 나는 여기에 올 때마다 반사작용이라도 이는 것처럼 잔뜩 긴장했다. 내가 조용히 그를 따라 들어가자 문은 자동으로 닫혔다.

리들 교수가 천천히 뒤를 돌아 나를 내려다보았다. 찬 기운이 도는 그의 눈빛에 나는 조금 위축되는 기분이 들었다.

“재밌는 일을 벌였군.”

그렇게 말하면서도 리들 교수는 전혀 재미있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입을 꾹 다물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나와 눈을 마주한 그가 냉랭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공격마법을 그런데 쓰라고 가르쳤던가?”

“아까도 말했지만, 걔들이 먼저 저를 건드렸어요.”

나는 변명이라도 하듯 대답했다. 설령 징계를 내린다 하더라도 적어도 전후 사정 정도는 물어봐야 하는 것 아닌가. 상황이 어땠는지조차 모르면서.

“그 정도의 참을성도 없나?”

그러나 그는 싸한 눈빛으로 나를 비꼴 뿐이었다. 나는 알렉토가 나를 괴롭힐 때만큼이나 기분이 나빠졌다. 당신 앞에서 내 인내력과 참을성을 다 써버려서 더는 남은 것이 없네요, 하고 쏘아붙이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저런 식으로 말하는 것에 화가 났다.

내가 더 참아야 했다고? 나는 참을 만큼 참았다. 그건 단지 자기방어일 뿐이었다. 내 분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리들 교수가 한마디 내뱉었다.

“징계받은 일은 학적부에 기재된다고 내가 말했을 텐데.”

“그럼 그 애들이 나에게 욕을 하든 말든 가만히 있으란 말인가요?”

“네 보복 여부는 중요한 것이 아냐.”

그가 말을 이었다.

“난 지금 네 대처방법이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고 지적하는 거다.”

그 상황에서 어떤 방식으로 대처해야 했단 말인가. 아니, 괜찮은 대처방법을 찾을 시간도 없었다. 리들 교수는 항상 그랬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해도 그게 적절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가 원하는 것이 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한가지만큼은 분명했다. 내가 하는 모든 행동들이 마음에 안 드는 거다. 그냥 입 다물고 문제 일으키지 말라 이거지.

숨이 턱 막히는 기분에 그에게 마치 따지듯이 물었다.

“유치하지 않은 방법이 뭐가 있는지 듣고 싶군요.”

“적어도 남들에게 들키지 않게 자리를 옮기는 방법 정도는 있었겠지.”

그가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대답했다.

“3층 계단 앞에서 마법을 쓰는 건 지나가는 사람들 모두가 구경이라도 하라는 의미인가?”

나는 리들 교수의 말을 듣고 기분이 더욱이 저조해졌다. 그의 말은 다 맞았다. 오히려 그 사실이 나의 기분을 날카롭게 건드렸다. 리들 교수는 나를 화나게 하는 방법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있는 힘껏 그를 노려보며 공격 마법을 쓰고 싶은 것을 참아야 했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들끓어 오르는 성질을 드러낼 것 같아 고개를 푹 숙였다.

내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으므로, 우리 둘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나는 화를 참는 것에 내 모든 힘을 쏟았다. 그러나 그럴수록 마치 반작용이라도 이는 것처럼 리들 교수의 기분 나쁜 태도가 하나, 둘 씩 머릿속을 채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알렉토 무리에게 향했던 억하심정이 서서히 리들 교수에게 옮겨졌다.

깊게 자리 잡은 고요함을 먼저 깬 것은 리들 교수였다. 조금 싸하게 나를 내려다보던 그가 갑자기 한마디 내뱉었다.

“4월 마지막 주 주말에 외출을 신청해둬라.”

“네?”

“가야 할 곳이 있으니까.”

그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한 번 휘둘러 책장에서 여러 권의 책을 띄워냈다. 무엇인가 찾고 있는 것 같았다. 허공에 뜬 책들의 책장이 저절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리들 교수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어디를 가야 한단 말씀이시죠?”

“그때 가서 알게 될 거야.”

그는 나와 눈을 마주치지도 않고 책에만 시선을 꽂으며 대답했다. 내 질문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듯이. 나는 대체 그가 나를 여기에 불러서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기분이 나빴다. 이유라도 말해주던가. 왜 저렇게 구는 건데. 심지어 나는 그의 무심한 태도에 더 화가 났다.

“……왜 항상 아무 설명도 없이 그렇게만 말하는 거죠?”

그가 내 의지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은 안다. 나는 리들 교수와 상의해서 결정을 내리는 것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나는 그와 동등한 관계가 아니니까. 그래도 상황을 파악한 상태에서 그것에 수긍하는 것과, 이유도 모른 채 끌려다녀야 하는 것은 다르다. 그는 나에게 힌트조차 주지 않았다.

“어딘지라도 말해줘요.”

리들 교수가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지금 네가 알아야 할 필요는 없어.”

“저는 그럼 뭘 알아야 하는 거죠?”

내가 흥분된 기색을 숨기지 않고 대꾸했다.

“아무것도 모른 채 당신의 말에 순응하기만 해야 하나요?”

공중에서 파르륵 넘어가던 책장이 갑자기 멈추었다.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내 반항적인 어조가 그의 심기를 거스른 것 같았다. 나는 순간 겁에 질렸지만 차분한 척 입매를 가다듬었다.

“그걸 묻는 의도가 뭐지.”

리들 교수가 조금 서늘한 어투로 덧붙였다.

“내가 그걸 부정한다면, 네 마음이 편하기라도 하나?”

“…쓸데없는 질문 하지 말고 입 꾹 다물고 있으란 말이죠.”

그의 시선이 다시 책 쪽을 향했지만, 책장은 한 장도 넘어가지 않고 있었다. 나는 리들 교수가 그어놓은 경계 너머를 건드렸고, 그가 나를 매우 거슬려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쉽게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미묘했으나, 여기서 한 발자국만 더 넘어가도 그가 제 본색을 드러내리라는 것은 분명했다.

나는 차갑고 딱딱한 어조로 그에게 물었다.

“나를 당신의 도구로 사용하는 게 재밌나요?”

리들 교수의 표정에 조금이나마 파문이 느껴졌다.

“자신 아래에 두고 필요할 때만 사용하는 게?”

내가 왜 그렇게 말했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고, 당황스럽게 만들고 싶었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복수였다. 마치 내가 자신의 통제하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고 생각하는 그에게 무엇인가 한마디라도 던지고 싶었다.

내 말에 리들 교수는 책에서 시선을 돌려 나를 냉랭하게 응시했다.

“그래서.”

그가 서늘하게 나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지금 너는 그렇지 않다는 위로의 말을 듣고 싶어서 이런 태도를 보이고 있는 건가.”

무엇인가를 머금은 것처럼 분위기가 습해지며 침묵이 흘렀다. 그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지만, 어쩐지 리들 교수가 나를 비웃고 있을 것만 같아 기분은 점점 더 나빠졌다. 위로? 지금 나를 놀리기라도 하는 건가. 차라리 나는 도구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철저히 도구처럼 대하던가.

“난.”

나는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마주했다. 여전히 감정을 읽을 수 없는 그의 어두운 눈과 마주한 순간, 나는 충동적으로 한마디 내뱉었다.

“난 당신이 싫어요.”

“뭐?”

리들 교수의 눈이 순식간에 싸하게 가라앉았다. 진심을 담아 던진 말에 그가 반응하자, 이상하게도, 나는 그대로 복수하고 싶은 마음만 들었다. 이게 그에게 어떤 의미인지 몰라도, 분명 여기에 조금이나마 감정의 파문을 보이고 있었다.

“당신이 싫다구요.”

조금 차가웠던 그의 안광이 서늘하게 빛났다. 허공에 둥둥 떠 있던 책들은 마치 시간 정지 마법을 걸어놓은 것처럼 그대로 멈추었다. 칼로 벼려낸 듯한 날카로운 공기가 순식간에 연구실 전체를 덮었지만, 나는 겨우 참아냈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내뱉어내듯 느리게 말했다.

“…다시 한 번 말해봐.”

정말로 다시 한 번 말하라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지금 여기에는 리들 교수와 나 둘만이 존재했고, 나는 어떻게든 그를 이기고 싶었다. 그가 나에게 정신계 마법으로 고문을 해 내가 미쳐버리든 말든 이제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나는 마음을 다잡으며 리들 교수의 위협적인 눈과 마주했다. 한 글자 한 글자 힘을 담아, 나는 그에게 각인이라도 시키는 듯 하고 싶은 말을 뱉어냈다.

“나는, 정말로, 당신이, 싫…… 흡!”

순간, 그의 입술이 내 입에 닿았다.

리들 교수는 한 손으로 거칠게 내 볼을 잡은 채 자신의 혀로 내 입술을 열었다. 그와 동시에 허공에 떠 있던 책들이 한꺼번에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런 저주를 내리지 않았는데도 나는 몸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저항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머릿속은 혼미해진 상태였다. 다리에 힘이 풀리려고 하자, 그는 한쪽 팔만으로 내 허리를 감싸 나를 바로 세웠다. 현실 감각이 없어 정신이 멍해졌는데도, 심장만큼은 정신없이 뛰기 시작했다.

그가 입술을 떼며 조용히 속삭였다.

“내가 싫다고.”

한쪽 팔을 쥔 그가 내 귀에 다가와 귓가를 혀로 살짝 말았다. 처음 느끼는 자극에 나도 모르게 짧게 신음 소리를 흘렸다. 그의 혀가 귀에 살짝 닿을 때마다 나는 마치 가장 민감한 부분을 만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더니 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이래도?”

몸이 덜덜 떨려오기 시작했다. 그가 닿는 곳 하나하나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 같아서 나는 혼란스러웠다. 그의 입술이 부드러우면서도 집요하게 귓바퀴를 쓸었다. 혀가 살짝 살짝 닿으면서 몸 깊은 곳에서부터 달뜬 열기가 흘러나왔다. 호흡이 가빠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난 네가 어디를 자극하면 반응이 오는지.”

그의 흐린 눈동자가 스치듯 나를 훑었다.

“다 알고 있어.”

그의 입술이 내 목덜미를 지나 열린 셔츠 아래의 쇄골에 닿았다. 내 몸이 파르르 떨리자 그가 한쪽 손으로 내 손목을 부드럽게 움켜쥐었다.

“건드리기만 해도, 그런 표정을 지으면서.”

평소와 달리, 그의 목소리는 잔뜩 쉬어있었다. 그의 목소리 하나만으로, 아랫배에서 저릿한 느낌이 올라오면서 힘이 꽉 들어갔다. 내 얼굴은 열이 올라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어느 때보다 깊게 가라앉은 그의 눈에는 평소에는 절대 드러나지 않았던 열망이 조금씩 새어 나오고 있었다.

“내가 싫단 말인가?”

그는 한 번 더 입술에 입을 맞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