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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5
로웨나 블루로즈
김아흔
Part 5 - (7)
나는 리들 교수를 따라 7층 계단을 올라갔다. 언젠가 그는 이 공간을 ‘필요의 방’이라고 불렀다. 원리는 알 수 없었으나, 그가 가르치려고 하는 교습의 종류에 따라 거기에 맞춰진 방이 생겨나곤 했으므로, 나는 그 호칭이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신기하게도 오늘 나타난 방은 그의 연구실과 흡사했다. 구석진 벽에 서가가 있었고 그 건너편에 연구실에서의 것과 비슷하게 보이는 책상이 있었다. 다른 점이라고 한다면 반대편에 긴 소파와 테이블, 그리고 작은 부엌이 새롭게 생겼다는 것이었다.
리들 교수는 마치 자신의 방에 들어온 것처럼 자연스럽게 코트를 벗었다. 그가 손을 한 번 들자 코트는 저절로 날아가 구석의 옷걸이에 걸렸다. 조금 더 걸어 들어간 리들 교수는 허리춤에서 지팡이를 꺼내어 벽난로 방향으로 겨누었다. 벽난로에 낮은 불씨가 일며 방이 약간 밝아졌다. 그렇게 추운 날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조금 서늘했던 까닭인지 순식간에 방 전체는 따뜻한 온기로 채워졌다.
리들 교수가 부엌 쪽으로 지팡이를 휘두르자, 싱크대 위에 얹혀 있던 주전자에서 순식간에 물 끓는 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주전자 옆에는 따뜻한 김이 올라오는 우유가 소환되었다. 이로써 할 일이 끝난 듯, 그는 지팡이를 책상 위에 얹어놓고 한쪽 손으로 입고 있던 남색 조끼의 단추를 끌러냈다. 나는 당혹스러운 기분을 감추지 못하며 그에게 물었다.
“왜 절 여기에 데리고 온 거죠?”
“기숙사에 들어가기 싫다고 말하지 않았나.”
그가 무덤덤한 어투로 대답했다. 리들 교수가 벗은 조끼는 자연스레 개어져 코트가 걸려있는 옷걸이 아래에 놓였다. 나는 옷이 스스로 개켜지는 그 마법을 언젠가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럼 전 여기서 뭘 해야 하는 건가요?”
“네가 원하는 대로 해도 상관없어. 방해만 되지 않는다면.”
방해되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라는 생각은 들지 않으시나요? 어쩐지 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말을 내뱉으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조금 더 유한 표현을 쓰도록 하자. 새롭게 생긴 필요의 방이 그의 연구실을 연상하는 공간이었기 때문인지, 방금 전까지는 반항적이었던 어조가 내 선에서 절로 검열되었다. 여기서라면 그는 정말로 저주를 퍼부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런 곳에서 제가 제대로 쉴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요.”
“네가 바란다면 지금 당장에라도 래번클로 기숙사에 데려다주도록 하지.”
그가 가볍게 대답하자,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부엌에서 혼자 끓고 있던 주전자가 소리를 내기 시작하며, 방 전체를 실론 향기로 채웠다. 리들 교수가 부엌 방향으로 손을 약간 휘젓자, 찬장에서 혼자 뛰어내린 머그잔 위에 살짝 데워진 우유가 부어졌다. 그 위로 주전자에서부터 우러난 홍차가 섞였다. 마법으로 차를 타는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통통거리며 안에 있는 내용물을 스스로 섞던 머그잔은 허공을 갈라 내 쪽으로 다가오더니, 마치 처음부터 제 자리였던 것마냥 내 손에 쥐어졌다.
“…마시라는 건가요?”
그는 고개를 까딱하며 책상에 앉았다. 나는 머그잔 안의 밀크티를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향이 생각보다 좋았다. 진하게 우려낸 실론보다는 따뜻하게 데워진 우유향이 짙게 흘렀다.
마치 이제 나와는 볼일이 끝났다는 듯 리들 교수가 양피지에 시선을 고정했다. 책상 위에는 그의 연구실에 있는 것과 똑같은 양피지 뭉치들이 쌓여 있었다. 그의 방에서 소환한 것인지, 아니면 이 방이 저런 것들조차 재현해낼 수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양피지 몇 장을 허공에 띄워놓고 동시에 몇 가지의 서류를 살펴가며 깃펜을 놀리기 시작했다. 이제는 내가 보이지도 않는 것 같았다.
그의 눈치를 보다가, 텅 빈 소파에 앉아 조용히 밀크티를 한 모금 마셨다. 위로 살짝 솟아오른 거품과 함께 특유의 단맛이 혀에 감돌다가, 알싸하고 시원한 실론의 향이 코끝을 스쳤다. 그가 대충 마법으로 탄 음료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맛이 괜찮아서 조금 놀랐다.
이상하게도, 리들 교수가 건네준 밀크티를 마신 순간부터 기분이 훨씬 나아졌다. 왜일까. 따뜻한 곳에서 단것을 마셔서 그런 걸까. 나는 다시금 마음이 차분해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나를 괴롭혔던 문제들을, 지금이라면 한 번 더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이작에 대해서는, 내가 너무 감정적으로 대처했던 것 같다. 그도 할 말이 많았을 텐데. 내가 듣고 싶지 않다고 무조건 도망쳐 나온 것은 분명 잘못된 행동이었다. 게다가 그는 나와 친구 관계 이상을 기대한다고만 말했지, 그렇게 하자고 요구한 것조차 아니었다. 기숙사에서 아직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렇게 생각하자 어쩐지 미안해졌다. 지금이라도 일어나서 래번클로 기숙사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리들 교수가 함께 간다고 말할 것 같아 겨우 참았다.
시리우스는 아직 리들 교수의 정체에 대해서는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다행이었다. 나는 그와의 대화를 머릿속으로 다시 회상했다. 왜 나에게 비밀을 밝히라고 요구했던 것일까. 나에게 일종의 배신감을 느끼는 걸까. 내가 그에게 진실을 가르쳐주지 않는다는 것을 서운해하는 걸까. 나는 아직도 시리우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명확하게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시리우스를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그와의 대화는 항상 감정적으로 격해진 상태에서 이어지곤 했다. 조금 감정의 기포를 터뜨려버릴 필요가 있었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긴장하지 말고 솔직하게 말하자. 필리다가 조언했던 것처럼.
그리고…… 톰 리들 교수. 나는 머그컵을 손에 든 채로 그를 응시했다. 내가 옆에서 무슨 짓을 하든 보지 못할 정도로 집중하고 있었다. 나는 슬쩍 벽에 걸려 있는 시계를 훔쳐보았다. 새벽 두 시 십오 분. 늦은 시간까지 깨어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어른이 되면 다 저렇게 지낼 수 있는 걸까.
방은 노곤하리만치 온도가 따뜻했고, 나는 이 방에 흐르는 정적이 어쩐지 낯설게 느껴졌다. 그의 깃펜 끝을 쳐다보다가 충동적으로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당신의 어린 시절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어요.”
내 목소리가 그에게 닿자, 리들 교수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뭐?”
“슬러그혼 클럽에서 키이라가 이야기해 주었어요.”
“마법 사고와 재난부의 키이라 벨 말인가?”
그가 나와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 그녀를 정확하게 칭하는 어조가 마치 다음 타겟을 상정하는 것처럼 느껴져 나는 약간 무서워졌다.
“키이라를 죽일 건가요?”
내 말에 리들 교수는 소리를 내어 피식 웃었다. 그가 다시 양피지에 고개를 돌리며 흘러가듯 말했다.
“내가 할 말은 알고 있겠지?”
“……불필요한 행동은 하지 않는다.”
그는 내 대답에 그 외의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조금 머뭇거리는 기색으로 내가 리들 교수에게 물었다.
“지금 저와 대화를 하는 건…… 필요에 의한 건가요?”
“불필요하다고 보나?”
나는 머그잔을 감싸듯 한 손으로 쥔 채 조금 생각에 빠졌다.
“솔직히, 딱히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렇겠지.”
리들 교수는 깃펜을 놀리며 건성건성 대답했다.
“그럼… 왜…….”
그는 말이 없었다. 나는 조용히 밀크티를 한 모금 더 마셨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에 대해서만 대답했다. 그 외의 것에 관해서는 수수께끼라도 내고 있는 것처럼 굴었다. 더 이상 무엇인가 물어보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키이라가 리들 교수님은 어릴 때도 지금도 똑같다고 말했어요.”
그녀와의 대화를 떠올리며 내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나는 당신의 모든 것이 거짓인 걸 알아요.”
리들 교수의 깃펜이 살짝 멈추었다. 나는 내 쪽에서 보이는 그의 옆모습을 조용히 응시했다. 책장 근처에 세워진 등에서 나온 희미한 빛에 그의 얼굴 윤곽이 흐리게 비추어졌다.
“교수님의 진짜 모습은 어떤 건가요. 톰 리들인가요, 이름을 말할 수 없는 자인가요.”
딱히 그의 대답을 바라며 던진 질문은 아니었다. 애초에 나는 둘 다 그의 ‘진짜’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톰 리들 교수’와 ‘이름을 말할 수 없는 자’의 공통점은 겉으로 보기에 그들이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 쉽게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겪어왔던 리들 교수는 달랐다. 그는 지금까지 내가 만나오고, 간접적으로 경험해온 어떠한 사람과도 달랐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애초에 그가 어떤 사람인지 틀에 넣고 분류할 수 없었다. 심지어 그를 예측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진짜라.”
리들 교수가 그렇게 입을 열었을 때, 나는 다소 놀랐다. 내 중얼거림에 가까운 말에 그가 응대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리들 교수는 여전히 깃펜을 쥔 손을 놓지 않았다.
“넌 그럼 어떤 게 ‘진짜’지? 교수들에게 보여주는 모범생 블루로즈가 진짜 너인가?”
그는 무엇인가를 계속해 써내려가면서도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아니면 본즈에게 보여주는 친구로서의 로웨나 블루로즈? 혹은, 네 아버지에게 비치는 딸로서의 블루로즈가 진짜 너라고 할 수 있나?”
나는 어이가 없어졌다.
“……그 모습들이, 당신처럼 그렇게 많은 차이가 있지는 않아요.”
리들 교수가 낮게 헛웃음을 지었다.
벽난로에서 타닥거리는 불씨 소리가 들렸다. 분명 여기는 필요의 방인데도, 나는 어쩐지 그의 연구실에서 나는 싸한 책 냄새가 어디선가 흘러나온다는 느낌을 받았다. 리들 교수의 침묵은 짧고 단조로웠지만, 나는 그것이 아주 길게 느껴졌다.
말없이 깃펜만 놀리던 그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네가 말하는 것이 속마음을 드러내는 모습이라고 한다면, 나는 지금이 가장 ‘진짜’에 가까운 것 같군.”
“지금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말씀이신가요?”
나는 믿을 수 없다는 어조를 숨기지 않으며 그에게 물었다.
“내가 너에게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으니까.”
나는 그의 옆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나 또한 그의 앞에서 거짓을 가장할 필요는 없었다. 리들 교수는 나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었고, 나는 그에게 어떤 비밀도 감출 수 없었다. 아마 ‘진짜’의 나를 가장 잘 아는 것도 리들 교수일 것이다.
그러나 그가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고 한들, 내가 그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리들 교수는 여전히 안개 낀 숲과 같은 사람이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었고, 무엇이 튀어나올지도 알 수 없었다. 그와의 대화를 계속할수록 이는 분명해지기는커녕 더 모호해졌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마치 천재지변을 미리 예상하지 않듯, 그의 행동을 예측해보는 것을 포기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리들 교수를 생각할 때마다 공포심의 저변에 기묘한 호기심이 이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당신은 정말 알 수 없는 사람이군요.”
벽난로에 이는 불꽃을 바라보며, 내가 들릴 듯 말 듯 조용히 중얼거렸다. 리들 교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애초에 대답을 기다린 것은 아니었다. 내 말을 끝으로 우리는 대화를 멈추었다.
결국 나는 혼자서 밀크티 한 잔을 다 마셨다. 그러는 동안에도 리들 교수는 양피지 더미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거의 세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평소의 취침시간보다 훨씬 늦은 시간이었다. 혼자 소파에 앉아있는 시간이 길어지기 시작하자, 나는 중간중간 꾸벅 졸다가 잠에서 깼다. 몇 번 졸다 깼다 하면서 리들 교수를 살펴보았는데도, 그는 미동 하나 없이 책상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나는 하품을 크게 하고 다시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여기서 잠이 드는 것만큼 우스운 일은 없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적과의 동침이 아닐까…….
마치 가위로 자른 듯, 내 상념은 거기에서 끝이 났다. 졸음을 참지 못한 나는 결국 쓰러지듯 소파에 누웠다. 누군가가 담요를 덮어주는 것 같았지만, 기척을 느낄 새도 없었다. 나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어디에 있는지 깨달은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황급히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았다. 7시. 그렇게 늦은 시간은 아니었다. 내가 잠에서 깨자 리들 교수가 가볍게 기지개를 켰다. 저대로 밤을 새운 건가. 머리카락이 평소보다 조금 더 가라앉은 것만 제외한다면 잠들기 전과 전혀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밤새 그와 함께 있었다는 사실이 뭔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일어났군.”
“조, 좋은 아침이에요.”
내가 왜 그렇게 말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다소 민망했던 나는 괜히 그에게 아침 인사를 건넸다. 나를 흘끔 바라보던 리들 교수는 손을 까딱여 양피지를 정리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지팡이를 살짝 휘두르자 조끼와 코트가 그의 손으로 들어왔다. 조끼는 책상 위에 올려둔 채, 그는 셔츠 위에 코트만 가볍게 걸치며 물었다.
“이제 기숙사로 돌아갈 마음이 좀 생기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리들 교수와 헤어지고 싶었다. 그는 나를 한 번 쳐다보더니 그대로 문 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종종걸음으로 그를 따라 나갔다.
* * *
래번클로 기숙사에 들어가면서도 혹여 아이작과 마주칠까 두려웠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는 휴게실에도, 복도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수업 시간에 만나게 되면 무슨 이야기부터 꺼내야 할까. 나는 급한 걸음으로 방에 들어갔다. 아침 수업이 없는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안나와 데이지는 아직도 잠들어 있었다.
다시 침대에 누우면 일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 나는 대충 씻기라도 할 요량으로 샤워실에 들어갔다. 거울을 살펴본 순간부터 치밀어 오르는 부끄러움을 참을 수 없었다. 아무렇게나 누워 있어서 그런지 머리는 반쯤 산발이 되었고, 밀크티를 잔뜩 마시고 잠들었던 탓에 얼굴이 부은 것 같기도 했다. 리들 교수에게 굳이 잘 보일 필요까지는 없지만 이런 모습을 들켰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부끄럽기 짝이 없고, 뭔가 자존심이 상했다. 내가 왜 그 자리에서 잠이 들었을까. 어쩐지 리들 교수에게 져 버린 느낌이 들기도 했다.
오늘의 첫 수업은 고대 룬 문자 수업이었다. 수업이 시작하기 직전 교실에 들어가자, 필리다와 요한, 그리고 아이작이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아이작과 평소처럼 인사를 나눴다.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교수님이 들어왔고 우리는 수업에 집중했다.
수업이 끝나고, 요한과 필리다는 소란스레 떠들며 먼저 점심을 먹으러 갔다. 뭔가 심적 준비를 하기도 전에 둘이 남게 되니 더욱 긴장되었다. 나는 아이작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그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말을 채 시작하기도 전에, 아이작이 내 말을 끊어냈다.
“로웨나. 미안해.”
나는 눈꺼풀을 깜빡였다. 대체 어떤 것이 미안하다는 거지.
“어제 내가 그렇게 무작정 이야기를 꺼내는 게 아니었는데.”
아이작은 어느새 귀까지 새빨개져 있었다. 그가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중얼거리듯 내뱉었다.
“내가 정신을 놓았나 봐.”
“그럼 그게 진심은 아니었다는 거야?”
“아니,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는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당황해 했다. 항상 철저한 모습을 보이는 그에게서 이런 면모를 발견하게 될 줄은 예상도 못 했기 때문에, 나는 그의 당혹감을 이해하면서도 평소와 다른 아이작의 모습에 색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난 너에게, 음, 친구로서 가지는 것 이상의 감정을 가지고 있는데…….”
그가 한 손을 들어 자신의 금발 머리카락을 살짝 흐트러뜨렸다.
“그러니까… 아, 어젯밤에 생각 많이 했는데 지금 머릿속이 하얘졌어.”
정말 혼미하다는 기색을 역력하게 드러내는 아이작의 표정에 나는 어쩐지 웃음이 터졌다. 그의 이런 반응은 처음이었다. 내가 정말 유쾌하게 웃기 시작하자, 아이작은 긴장이 조금 풀린 것 같았다. 짧게 이어진 내 웃음소리가 그치고, 그는 진심 어린 목소리로 차분하게 말했다.
“로웨나, 난 너를 좋아해. 어제 시리우스 이야기를 듣고 조금 열이 받아서 충동적으로 고백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렇게 가볍게 내뱉을 감정은 아니었어.”
나는 말없이 그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아이작은 나와 눈을 마주하려고 노력했지만, 그래도 아직 창피한 감정이 남아 있는지 살짝 눈을 내리깔았다.
“나는 너를 여자로서도 좋아하지만, 친구로서도 좋아해. 그래서…… 어제 생각한 건. 설령 네가 지금 마음이 없다 하더라도 난 상관없어.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는 일이니까.”
그가 말을 이었다.
“너만 부담스럽지 않다면 나는 지금처럼 지냈으면 좋겠다.”
하. 다 끝냈어. 아이작은 준비한 자신의 말을 다 뱉었다는 듯 조금 혼이 나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어젯밤 그가 하루 온종일 고민했을 거라 생각하니 많이 미안해졌다.
“뭐야, 너 지금 나 꼬드기는 거야?”
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해, 나는 괜히 새초롬한 척 농담조로 그에게 대꾸했다.
“로웨나 블루로즈가 네 감언이설에 쉽게 넘어갈 것 같아?”
“…제발, 넘어와 줘. 쉽게.”
아이작이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기 때문에 나는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그의 배려가 고마웠다. 정말로 나와의 관계를 오래 지속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일 테지만, 무엇보다도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앞으로도 그를 예전처럼 대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아마 이제 쉽게 할 수 없는 말들도 많아지겠지. 하지만 그래도, 그의 배려를 생각해서라도, 나는 친구로서 지금과 같은 태도를 버릴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우리는 더는 이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마치 어젯밤의 일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듯, 고대 룬 문자 교수님의 수업에 대해 별거 아닌 사담을 나누며 나와 아이작은 대연회장으로 향했다.
============================ 작품 후기 ============================
1. 로웨나의 극중 나이는 1976년이지만 생일이 지나지 않아 만 14세입니다. 하지만 저는 만 15세, 한국 나이로 17세 가량의 여아로 상정하고 글을 쓰고 있어요. 그래서 그 나이대 마인드를 물어본 거랍니다. 독자 님들중에 열일곱 소녀들이 숨어 계셨군요.. 아, 너무 거친 표현을 쓰지 말아야겠당...
2. 밀크티 묘사를 하다가 밀크티가 너무 마시고 싶어서 노트북 들고 투썸가서 밀크티를 마시며 글을 썼습니다. 젤리시리즈님이셨나요? 슬러그혼 파티 편에서 바닐라쿠키가 먹고싶다고 코멘트로ㅋㅋㅋㅋㅋㅋ 보고 빵터졌는딩
저는 모든 코멘트 세세하게 확인하고 있습니다. 특히나 지난회차의 정성어린 코멘트들을 보고 저는 너무 감동을 받았어요. 저는 모든 독자님들이 소중하지만, 매회차 꼬박꼬박 써주시는 분들께는 더욱이 말로 다 할 수 없는 감사함을 느낍니다.
그래서 코멘트를 달아주시는 독자님들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게 뭐 없나, 라고 생각한 끝에 조아라에 게재되지 않는 미공개 외전의 텍본을 배포하는 이벤트를 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팬아트를 주셨거나 제 소설에 몇회 이상의 코멘트 다신 분들에 한해서요. 물론 지속적으로 코멘트를 다셨던 분들은 이미 해당되십니당. 메일을 통한 텍본 배포쯤이 되지 않을까 싶지만, 조금 더 계획해보고 담회차나 다담회차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도록 할게요.
본편과 전혀 다른 스핀오프나 아니면 흐름과 관계 없는 본편 외전을 쓸까 고려중인데, 의견 있으시면 부탁드립니다. 개인적으로 스핀오프 재밌을 것 같아요. 해리포터 세계가 아닌 일반 대학교의 리들 교수와 로웨나라던가.. 시리우스의 부사수로 들어간 신입사원 로웨나의 직장생활 같은거... 로웨나가 얼빵하게 굴면 엄청 갈구지만 그래도 뒷수습 다 해주겟징.. 아..그냥 방금 생각한 건데 급 타오르네옄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2014-12-05 추가
필요의 방에서 밀크티를 마시는 부분에 대해 설정 지적이 있어 추가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리들은 밀크티 재료를 소환마법을 사용해 외부에서 내부로 반입했습니다.
저는 원작책이 없기 때문에 모든 설정에 관한 사항들을 해리포터위키에서 참조합니다. 해리포터위키에 따르면, 일단 ⓐ필요의 방에서 음식을 만들어내는 것은 Gamp's Law of Elemental Transfiguration에 따라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이미 어디에 있는지 장소를 아는 곳에서 음식을 소환하는 것은 이 원칙에 반하지 않습니다. (The food can be summoned if one knows the approximate location and is fairly sure the food will still be there, 해리포터위키 'Gamp's Law of Elemental Transfiguration'항목 참조)
또한 ⓑ필요의 방 내부에 있는 물건에는 소환이 불가능한 보호마법이 걸려있습니다. 헤르미온느가 필요의 방에 숨어있는 래번클로의 보관을 소환해내지 못했죠.
그러나 필요의 방 외부에서 내부로 소환마법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 딱히 언급한 바는 없습니다. 필요의 방 자체가 unplottable한 장소라고 해서 여기서 소환마법을 사용할 수 없다는 말도 찾을 수 없구요. 그래서 저는 리들이 무언으로 소환 마법을 사용했다고 설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