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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5
로웨나 블루로즈
김아흔
Part 5 - (4)
“이런.”
우리 둘만 있는 공간에 난입한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고개를 돌려보니, 워플 작가님이 멍한 눈으로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무엇인가 부도덕한 장면을 들킨 것 같은 느낌에 나는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그러나 반쯤 공황상태에 빠져있던 나와는 달리, 리들 교수는 그 자리에서 지팡이를 꺼냈다. 워플 작가님이 지팡이에 손을 가져가기도 전에 그를 겨눈 리들 교수가 낮은 목소리로 주문을 외웠다.
“오블리비아테.”
그의 지팡이에서 나온 연녹색의 빛줄기가 워플 작가의 머리에 꽂혔다. 빛줄기의 흐름에 따라 그의 갈색 눈알이 뱅글뱅글 돌기 시작했다. 리들 교수는 집중해서 그의 기억을 건드리고 있는 것 같았다. 오래지 않아, 그가 지팡이를 살짝 휘저어 빛줄기를 끊어냈다. 수정된 기억들이 머릿속에서 정리되는 것인지, 워플 작가의 눈은 여전히 정신없이 돌고 있었다.
그사이 리들 교수는 내 쪽으로 몸을 돌려 나에게 걸려 있던 임페리우스 저주를 해제했다. 그가 나에게서 한 걸음 물러나자, 마치 깊은 물 속에서 방금 빠져나온 것 같은 선연한 해방감을 느꼈다.
실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오… 로웨나, 여기 있었구나.”
그가 안경테를 매만지면서 눈을 끔뻑거렸다. 리들 교수가 확실히 기억을 지운 듯했다.
어릴 때 유독 마법 사고를 많이 쳤던 나는 전문 오블리비아터를 자주 보았었다. 리들 교수처럼 그들은 머글에게 지팡이를 겨누고 무엇인가 탐색을 하듯이 기억을 뒤져 원하는 부분만 제거하곤 했다. 이는 매우 정교한 작업이었고, 긴 시간이 필요했다. 나중에 호그와트에 들어와서야 기억이라는 것은 복잡한 사념들의 집합이므로, 다른 기억과 얽히지 않는 선에서 자연스럽게 특정 기억을 삭제하거나 조작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라는 것을 배웠다. 그렇기 때문에 ‘오블리비아터’라는 전문가가 있다는 사실도.
하지만 리들 교수는 달랐다. 그는 확실히, 내가 보았던 어떤 오블리비아터보다 훨씬 빠르고 신속하게 이를 처리했다. 나는 그의 뛰어난 능력에 새삼 감탄하면서도, 동시에 가슴 한켠이 싸해졌다. 그가 원한다면 내 정신을 지배하고 기억을 멋대로 조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리들 교수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정중하게 그에게 말을 건넸다.
“술을 조금 많이 드신 것 같군요, 작가님.”
“제가… 좀 그랬나요?”
나를 바라보던 워플 작가의 시선이 리들 교수에게 향했다. 그의 눈은 아직 제정신이 돌아오지 않은 듯 다소 초점이 없었다. 그가 리들 교수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난감해 하며 중얼거렸다.
“음, Mr.…….”
“톰 리들 교수입니다(Professor Tom Riddle).”
그가 서늘하게 대답했다.
“호그와트에서 어둠의 마법 방어술을 담당하고 있지요.”
“오, 리들 교수님. 만나서 반갑습니다.”
워플 작가가 그에게 다가와 반갑게 악수를 건넸다. 리들 교수는 흠 잡을 데 없이 단정하고 품위 있는 태도로 그를 응대했다.
“아끼는 제자와의 대화가 조금 길어졌군요.”
그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죄송하지만 조금만 더 기다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렇다면야, 물론이죠.”
워플 작가는 나에게 싱긋 한번 웃어주고는 그대로 뒤를 돌아 자리를 피했다. 다시 이 공간에는 우리 두 사람만이 남았다.
나는 절로 일어오는 긴장을 내리눌렀다. 잔상처럼 남은 미약한 열기가 나를 감쌌다. 언제까지 휘둘릴 수는 없다는 생각으로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나는 그에게 물어봐야 할 것이 있었다.
주먹을 꽉 쥔 채, 내가 입을 열었다.
“제 기억도.”
내가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렇게 지워버린 적이 있나요?”
그는 워플 작가에게 자연스럽게 기억을 수정하는 마법을 걸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나는, 내가 기억하지 못할 뿐, 언젠가 그가 내 기억을 삭제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지팡이를 갈무리해 품속에 넣던 리들 교수가 무심하게 되물었다.
“그게 중요한가?”
그대로 말문이 막혔다. 딱히 부정하지 않는 그의 태도가 나를 두렵게 만들었다. 나는 모르는 나에 관한 진실을 그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건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리들 교수가 나를 쳐다보며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내가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지워진 기억이 어떤 것인지 알아낼 자신은 있는지 모르겠군.”
“그 말은, 답해주지 않겠다는 의미인 건가요?”
내 말이 제법 당돌했던 까닭인지 그가 지그시 나를 내려다보았다. 방금 전, 그의 임페리우스에 억압당해 몸만 부들부들 떨고 있을 때와는 다른 모습이라 그럴지도 몰랐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여상한 태도를 보이며 그와 눈을 마주했다.
한참 후에서야 그가 입을 열었다.
“난 굳이 필요하지 않은 행동은 하지 않아. 네 기억을 수정할 필요성을 느꼈다면, 아예 처음부터 널 없애는 선택을 했겠지.”
그의 말에 나는 묻고 싶었다. 그럼, 나에게 키스를 할 만큼 가까이 다가온 것은 과연 필요한 행동이었느냐고. 하지만 나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할 용기는 없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었다. 치밀어 오르는 속마음을 내리누른 채 나는 그저 그를 응시하고만 있었다.
리들 교수는 냉랭한 눈길로 나를 훑으며 차분하게 말했다.
“어떤 대답을 원하는 건지 모르겠군.”
“만약 내 기억이 잘못된 거라면, 적어도 저는 제 기억을 신뢰하지 않을 수 있겠죠.”
나는 숨을 한 번 들이쉬며,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을 했다.
“전 진실을 원해요.”
“불필요한 짓은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그의 목소리에서 날카로운 경고가 담겼다. 리들 교수는 표정 하나 변함없이 말했지만, 나는 순간 한 걸음 뒤로 물러설 뻔했다.
“세상에 진실은 없어.”
그가 단언했다.
“단지 진실로 보이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뿐이지.”
높낮이 하나 없는 어조였음에도 나는 거기에서 서늘한 한기를 느꼈다. 한 줄기 햇빛을 바라며 고개를 든 꽃을 무자비하게 꺾듯, 리들 교수가 차가운 시선으로 나를 직시했다.
“이제 너도 이 세상이 얼마나 수많은 거짓으로 둘러싸여 있는지 알 때가 되지 않았나?”
“…아무것도.”
내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아무것도 궁금해하지 말고 입 다물고 있으라는 건가요?”
“너에게 그런 무가치한 것에 소모할 시간이 있던가?”
리들 교수가 나에게 한 걸음 다가왔다. 그와 가까워지자 나는, 억눌러 있던 긴장이 다시 스물스물 올라오는 기분에 주먹을 꽉 쥐었다. 저주에 걸리지 않았을 때만큼은 그에게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를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앞으로 계속 겪어야 할 것이라면 나는 적어도 이를 견딜 필요가 있었다.
“그럴 여유가 된다면 네 정신력부터 가다듬도록 해.”
그러나, 리들 교수는 더는 나를 건드리지 않았다. 어두운 눈으로 나를 잠깐 응시한 그는, 그대로 뒤를 돌아 그 자리를 떠났다.
* * *
연회 홀로 걸어 나왔는데도 워플 작가님은 보이지 않았다. 워낙 유명인이다 보니,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찾는 사람이 많을 것 같긴 했다. 사실 더는 그와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리들 교수가 그의 기억을 삭제하는 장면을 본 뒤로 나는 워플 작가님에게 말을 거는 것이 어쩐지 두렵고 미안하게 느껴졌다.
리들 교수가 내 기억을 건드린 적이 있을까. 나는 고개를 휘저었다. 그의 말대로, 기억을 수정할 필요가 있을 정도의 중대한 사실을 내가 알게 되었다면, 그냥 나를 제거하면 될 일이었다. 그는 기억수정마법을 써서 흔적을 남기는 것 보다는 죽여 버리는 것이 더 깔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왜 그랬을까. 생각해보면, 워플 작가의 기억을 수정하는 것은 그의 입장에서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굳이 그런 위험성을 감수하면서까지 나에게 다가온 이유는 뭘까. 조금 전의 일들이 다시 떠오르며 들뜬 긴장이 일었다. 멍한 상태에서 나는 무의식적으로 내 입술을 만졌다. 어쩐지 그의 입술과 닿기라도 한 느낌이었다. 밀려오는 혼란스러움에 마음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나는 내가 리들 교수에게 느끼는 감정을 하나하나 정리하기 시작했다. 나는 일단 그가 두려웠다. 이것이 가장 컸다. 나는 아직도 그만 보면 심장이 쿵쿵 뛰고, 어쩔 줄 몰랐다. 리들 교수가 나를 죽여 버릴까 봐 겁이 나는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도 그가 나에게 고통을 줄 수 있다는 것이 무서웠다. 리들 교수는 나를 온전하게 지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내가 하기 싫은 일, 나에게 고통스러운 일들도 내 의지와 상관없이 충분히 자행할 수 있고 강제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명령이 내가 행하고자 하는 방향과 다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을 경우 나와 내 주변 사람들에게 응분의 고통이 가해질 수 있다는 것이 나를 두렵게 만들었다.
한편으로 나는, 내가 그에게 경외감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무의식적으로나마, 나는 이 감정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단지 이를 애써 무시하려고 했을 뿐이다. 비록 그 과정은 고통스러울지라도 나는 리들 교수에게서 많은 가르침을 얻었다. 나는 이제 예전처럼 모든 것이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쉬웠다.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을 보았고, 할 수 없는 것들을 했다. 분명 그는 나를 변하게 만들었고, 성장하게 했다. 그러나 내가 그에게 조금이나마 긍정적인 영향을 받았다는 것 자체에서 본능적인 거부감이 일었다.
나는 불안했다. 나도 죽음을 먹는 자들이 그랬듯, 리들 교수를 동경하고 그를 따르게 되는 것일까. 그러면 나는 이렇게 영원히 그의 아래에서 종속되어 살아야 하는 걸까. 그렇지만 그것이 내가 원하는 길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했다. 내가 설령 그의 가르침에 조금이나마 경도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그의 삶의 잣대, 기준, 양심, 도덕과 같은 가치관까지 따르겠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스스로의 기준을 유지할 수나 있을까. 생각을 거듭할수록 혼란만 가중되었다. 마치 한 치 앞도 확인할 수 없는 안개 낀 강 위에서 배를 젓고 있는 기분이었다. 내가 어디로 가는지, 어떻게 될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리들 교수는 나를 어떻게 이용할 생각인 걸까. 나를 왜 영웅으로 만들었을까. 오늘 그가 보여주었던 태도는 어떤 목적에 따른 의도된 것이었을까. 나를 바라보던 그의 눈빛이 뚜렷하게 되살아났다. 무언가 평소와는 명백하게 달랐다. 그건, 확실히 나를……
“블루로즈.”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세베루스였다. 그가 말을 걸 거라고는 예상도 하지 못했으므로 나는 눈을 깜빡거리며 세베루스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는 별로 친하지 않은 사람에게 먼저 대화를 시도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나는 곧 세베루스에게 인사조차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황급히 내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스네이프.”
괜히 무안해진 나는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것을 물었다.
“‘피투성이 바론 경’은 어땠던가요?”
그분 이름이, ‘바르나바 쿠프’였던가요? 내가 덧붙였다. 어디서 많이 보았던 것 같은 이름이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세베루스는 ‘슬리데린 기숙사’를 뽑아 그의 멘티가 되었었다.
“예언자 일보 편집장이었어.”
아, 생각났다. 가끔 예언자 일보 사설란에서 보았던 이름이었구나. 별로 관심이 없어서 그냥 넘겼지만. 예언자 일보를 정기 구독하고 아침마다 읽는 아이작이라면 놀랄만한 데. 고개를 돌려 그를 찾았으나, 아이작은 보이지 않았다.
그 사이 세베루스가 말을 이었다.
“너를 찾고 있더군…… 직접 만나보고 싶어 하던데.”
“저요?”
나는 일순 당황했다. 세베루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언자 일보 기자가 호그와트까지 직접 찾아와 인터뷰를 한 것이 불과 몇 주 전인데 더 물어볼 것이 있단 말인가. 엊그젠가 아빠에게서 받은 편지가 떠올랐다. 요즘 런던에 있는 우리 집에 자신이 기자라고 소개한 이상한 마법사들이 방문해 나의 어린 시절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본다고 불만이 많으셨다.
“비밀의 방에 대해서는 딱히 할 말도 없는데.”
나는 이미 기자에게 리들 교수가 지시한 정도의 선에서 다 말했다. 그 이상으로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내가 중얼거리는 것을 들은 세베루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난 네가 비밀의 방을 닫았다는 것이 무척이나 이상하다고 생각해.”
“네?”
“크리스마스 연휴에, 너는 분명 나에게 비밀의 방에 관해서 물었지.”
완전히 잊고 있었던 기억을 그가 들추어냈다. 그랬다. 리들 교수에게서 뜬금없이 비밀의 방을 찾아내라는 지령을 받은 나는 도서관에서 만난 세베루스에게 도움을 요청했었다.
“그 후 학기가 시작되자 비밀의 방이 열렸고, 이를 네가 닫았어.”
세베루스의 새카만 머리카락이 볼 아래로 슬쩍 흘러내렸다. 그의 머리카락은 마치 다 탄 숯처럼 건조하고 메말라 보였다. 목소리에 쇠사슬이 달려있기라도 한 듯, 무겁고 느린 목소리로 그가 말을 이었다.
“과연 그게 그저 우연에 불과한 것일까.”
세베루스의 눈길이 천천히 나를 향했다.
“슬러그혼 교수님은 이 멘토링이 마치 우연의 결과인 것처럼 말했지만, 종이 쪼가리를 조작하는 것쯤이야 마법을 사용한다면 어렵지 않아. 그럼 너와 비밀의 방은 어떨까. 너와 비밀의 방의 관계 또한 전혀 우연한 결과로 보이지 않는단 말이지.”
한 번도 그렇게까지 생각해 본 적 없었으므로, 나는 세베루스의 말을 듣고 반쯤 넋이 나갔다. 설령 이것이 어떤 조작의 결과라 할지라도, 슬러그혼 교수님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성이 있나? 아무래도 그가 조금 과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죠?”
나는 그가 나를 의심한다는 확신이 들었다. 어쩌면 비밀의 방을 연 것이 나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세베루스는 애버리나 뮬시버같은 애들과 친했다. 그 두 사람의 성격을 생각했을 때, 비밀의 방을 열었으면서도 세베루스에게는 말 한마디조차 없었던 것이 그에게는 미심쩍게 느껴질 수 있었다. 세베루스가 뭔가 수상한 낌새를 눈치챈 것은 당연했다.
그는 한참을 유심히 나를 살폈다. 조금 긴장한 나는 세베루스와 눈을 마주하면서도 엄습하는 불안감을 감출 수 없었다. 만약에 이대로 그가 무엇인가를 알아내게 되면 어떻게 될까. 이 사실이 전부 폭로되는 걸까, 아니면…… 리들 교수가 그를 제거할 수도 있겠지. 순간 떠오른 섬뜩한 상상 때문인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네 얼빠진 얼굴을 보아하니 뭔가 뒤에서 꾸밀 만큼 치밀해 보이지는 않는군. 난 아직도 너 같은 애가 비밀의 방을 닫았다는 것이 믿기지 않아.”
내 얼굴에서 지울 수 없었던 당혹감이 오히려 그의 의심을 거두게 한 것 같았다. 마치 나를 수상하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안목이 부끄럽다는 듯 그가 한마디 던졌다.
“시리우스 블랙이나 잘 관리해.”
그가 싸하게 덧붙였다.
“네가 봐주지 않으니 자꾸 나를 건드리는 게 성가셔 죽겠으니까.”
그의 눈길이 누군가를 발견한 듯 먼 곳을 향했다. 나는 세베루스의 시선이 닿는 사람이 금방 알아차렸다. 멀리 릴리가 보였다.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나와 세베루스 쪽으로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그는 나에게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릴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세베루스와의 짧은 대화 후 나는 더욱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안 그래도 리들 교수 때문에 복잡해 죽겠는데 세베루스가 와서 잔뜩 엉킨 실타래 하나를 툭 던지고 갔다. 리들 교수에게 보고해야 할까. 그러나 리들 교수에게 이를 말하게 된다면 세베루스의 안위가 위협받을 수 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정면에서 오리온 블랙이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으나, 나에게는 그를 신경 쓸 만한 여유가 없었다. 내 문제로 머릿속이 터질 것 같았고, 그가 나에게 용건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으니까. 그가 나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대로 그를 지나쳤을 것이다.
“네가, 로웨나 블루로즈로군.”
오리온 블랙은 마치 나를 잘 아는 사이라도 된다는 것 마냥 자연스레 내 앞에 섰다. 시리우스와 풍기는 분위기는 비슷했으나, 가까이서 본 그는 나이의 무게를 제하고도 시리우스와 다른 구석이 분명 있었다. 그는 시리우스보다는 조금 각진 턱을 가졌고, 입매가 조금 굳은 느낌이었다.
“…네, 블랙 씨.”
그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노골적으로 나를 훑었다. 리들 교수 앞에서 보였던 정중한 태도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마치 나를 박물관에 박제된 전시품으로 보는 것 같아 기분이 상했다. 그는 블랙 가의 가주였다. 뼛속까지 순수혈통주의자인 그가 나 같은 머글 출신 학생을 상대할 리 없었다. 왜 나에게 말을 걸었는지 알 수 없었다.
“네가 시리우스와 크리스마스 파트너였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가 거만한 말투로 말했다. 나는 시리우스의 아버지가 그런 것까지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 애와 무슨 사이지?”
나는 우선, 그가 시리우스를 ‘내 아들’이라고 부르는 대신 마치 모르는 사이인 것 마냥 ‘그 애’라고 칭하는 것에서부터 거슬렸다. 나는 그 한마디만으로도 오리온 블랙과 시리우스 간의 좁힐 수 없는 간극을 느꼈다.
“같이 수업을 듣고 있어요.”
“…넌 4학년으로 알고 있는데.”
“아드님이 어떤 수업을 듣고 있는지 제대로 알지 못하시는 것 같네요.”
나도 모르게 그에게 비꼬듯이 내뱉었다. 그의 속눈썹이 조금 올라갔다. 내가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지 않던가. 그의 성질을 조금이나마 돋웠다고 생각하자 기분이 좋았다. 시리우스를 내쫓은 그에게 분풀이라도 한 것 같았다.
그러나 오리온 블랙은 내 장단에 맞춰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우리가 그렇게 사이좋은 부자지간은 아니니까.”
나는 자랑이시네요, 라고 한마디 덧붙여 주고 싶은 것을 참았다. 부자지간이라는 것을 인정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시리우스와는 친한가 보군.”
“물론이죠. 그는 따뜻하고 좋은 사람인걸요.”
누구와는 다르게. 그렇게 쏘아붙이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내리눌렀다. 정도를 넘은 말이겠지. 그래도 시리우스의 아버지인데 최소한의 예의는 갖춰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너도 알다시피 시리우스와는 좋지 않은 일이 있었으니, 내 손에서 떠났을지라도 그 애의 행복을 빌어주고 싶구나.”
마치 어쩔 수 없는 사정상 내린 결단이라도 된다는 듯 그가 자신의 행동을 포장했다. 멀쩡한 제 아들을 호적에서 팔만한 사정이라는 게 있기라도 한 것인지 궁금해졌다.
“……과연 그렇게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그가 중얼거리듯 덧붙인 말에 어이가 없었다. 마치 아들의 불운이라도 바라는 것 같은 뉘앙스였다. 내 감정에 절로 스며드는 적의를 숨기며 오리온 블랙을 응시하는데, 그의 뒤쪽으로 레귤러스 블랙이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오리온 블랙에게 대꾸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아요.”
나는 능청스럽게 말을 이었다.
“요즘 시리우스는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해 보이니까요.”
내가 이렇게 거짓말을 잘하는 줄 몰랐네. 그는 내 도발적인 말에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어느새 다가와 오리온의 옆에 선 레귤러스가 싸한 기운을 풍겼다. 얘는 내가 자기 아버지와 얘기하는 것도 마음에 안 드나. 애초에 내가 원해서 시작된 대화가 아니었으므로 나는 기분이 더욱 상했다.
오리온 블랙은 나와 그 이상 대화를 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대신 그는 다가온 레귤러스에게 짧게 말을 건넸다.
“친구와는 잘 지내도록 해라, 레귤러스.”
“네, 아버지.”
“블루로즈 양도 우리 마법 세계의 일원이니까.”
그가 나를 흘끔 쳐다보며 덧붙였다.
“출신은 비천해도 말이다.”
그는 비꼬듯 한마디 내뱉어놓고 천천히 홀 쪽으로 걸어갔다. 순식간에 기분이 저조해졌다. 어쩌면 말 한마디로 사람의 기분을 이토록 더럽게 만들 수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와 시리우스의 분위기가 닮았다고 느꼈던 것은 순간의 착각에 불과했다. 그는 시리우스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오만하고 반항적인 가운데에서도 선량함이 느껴지는 시리우스와는 달리, 오리온 블랙은 뼛속까지 악독하고 고압적이었다. 시리우스가 왜 집안을 싫어했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우리 아빠가 저런 사람이었으면 나는 집에 절대 들어가지 않았을 거다.
“로웨나 블루로즈.”
옆에 서 있던 레귤러스가 나를 한 번 불렀다. 그가 조금 사나운 어투로 나에게 말했다.
“내 눈에 띄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나도 너 좋아하는 거 아니니까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아 줄래.”
나는 어이가 없어져서 톡 쏘듯 내뱉었다. 그는 제가 저지른 일에 대해 조금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솔직히 그와 마주할 때마다 소름이 끼쳤다. 그는 애버리나 뮬시버보다 더한 인간이었다. 나로서는 사실 인간 취급도 하고 싶지 않았다. 레귤러스는 나를 뚫어지듯 노려보더니, 한마디 내뱉었다.
“처음에는 그냥 싫었는데, 이제는 널 증오해.”
나는 그에게서 나를 향한 강한 악의를 느꼈다. 대체 왜? 오히려 내가 그를 증오해야 마땅했다. 나를 바닥까지 추락시킨 가해자면서 오히려 자신이 피해를 당한 것 마냥 적대적으로 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
“형은 너 때문에 가문에서 퇴출당했어. 그런데 너는 비밀의 방을 닫았다는 이유로 희희낙락하며 잘 지내고 있지.”
“뭐? 무슨 소리야?”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나 때문이라니?”
“하, 몰랐나?”
그가 헛웃음을 지으며 싸늘하게 말했다.
“눈치도 없고 멍청하기 짝이 없군.”
그가 팔짱을 끼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아무리 시리우스 블랙이 반항적이라 하더라도 블랙 가에서 그 정도쯤은 어릴 때의 치기로 치부하고 충분히 감싸줄 수 있었어.”
그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형은 머글 출신의 여자와 크리스마스 파트너가 되었지. 그리고 고작 머글 여자애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듣기 싫다는 이유로 로시에르 가의 후계자에게 머글식 폭력을 휘둘렀고.”
내 탓이 아니었다. 나는 그에게 크리스마스 파트너가 되어 달라고 한 적이 없었다. 에반 로시에르에게 폭력을 사용하라고 요구한 적도 없었다. 어째서 그것이 내 잘못이라는 말인가? 나는 그의 불행이 나에게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고 애써 합리화했다.
“무엇보다 잡종 계집의 복수를 한답시고 순수혈통 가문의 자제 둘을 반쯤 죽여 놓은 탓에 블랙 가는 형을 내칠 수밖에 없었어. 그게 네 탓이 아니면 뭐지?”
그의 말에 내 몸이 절로 굳었다.
시리우스는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이를 인지하는 순간, 마치 머릿속이 텅 빈 것처럼 멍해졌다.
“이거 하나만 알아둬. 내가 너를 건드리지 않는 건 내가 게을러서도 아니고 네가 두려워서도 아냐.”
시리우스를 닮은 레귤러스의 회색 눈동자에는 나를 향한 서늘한 분노가 흘렀다.
“형이 상처받는 것이 싫어서야.”
============================ 작품 후기 ============================
소맥귀신님께서 팬아트를 그려주셨습니다. Part 4 끝부분 쯤 리들 품에서 로웨나가 우는 장면입니다. 제가 썼던 글이 그림으로 쨘 하고 나오니 너무 신기합니다 ㅇ0ㅇ 거기다가 제 머릿속의 장면보다 훨씬 더 아름다워영ㅇ0ㅇ 전 또 폰 배경화면을 바꿔야 했습니당..
으항 업로드 직전에 확인했는데 chococake님도 리들 팬아트를 그리셨네요. 전에도 그러셨지만 또 제 상상력을 자극하시는군여... 후... 이럴 수가.. 너무 과도한 표현의 자유를 행사하는 것 같아 구체적인 말은 아끼겠습니당ㅋㅋㅋㅋ
두 분 작품 모두 공지사항 혹은 뜰에서 확인하실 수 있어요!
+ 다음 업데이트는 월요일입니다. 아마 월요일 밤쯤 업로드될 듯 싶어요T_T
>>읽어도 읽지 않아도 될 김90의 사담<<
본편에는 딱히 날짜가 등장하지 않지만, 제 소설은 1975년의 달력을 따라 날짜별로 진행됩니다. (지금은 해가 지나서 1976년이네영) 오늘이 11월 29일 토요일인데, 신기하게도 2014년과 1975년의 달력은 똑같습니다. 그래서 ‘로웨나 블루로즈’속의 11월 29일도 토요일이에요.
한번 찾아봤더니 이 날은 로웨나가 시리우스에게 싫다는데 왜 친한척하냐고 화를 낸 다음 날이군요. 기억하시나요? 아침부터 우울한 로웨나는 추운 날씨에 목도리를 칭칭 감고 호수로 향하고, 블랙의 모습을 한 시리우스와 마주치죠. 그리고 블랙에게 자신의 진심을 털어놓구요.(본편 24회, 시리외전 60회)
둘이 화해할 때 쯤 한 번 더 말씀드릴게여^.^ 멍멍이 보고싶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