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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5
로웨나 블루로즈
김아흔
Part 5 - (2)
나는 조용히 리무스를 살폈다. 그는 보통 마루더즈들과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나, 가끔 저녁 식사시간에 혼자 대연회장을 먼저 나가기도 했다. 나는 제임스도, 시리우스도 없는 곳에서 그에게 긴히 물어볼 것이 있었다. 이윽고 리무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연회장 입구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하자, 나는 그가 나가는 타이밍에 맞춰 연회장 입구로 향했다.
멀리 옅은 아마빛의 곱슬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리무스가 걷는 속도를 따라잡기 위해 뛰다시피 그에게 다가갔다.
“리무스!”
나를 발견했는지 고개를 돌린 리무스가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그를 오래 세워두는 것이 어쩐지 미안해서, 나는 짧은 거리를 달려 금방 그의 옆에 다다랐다.
“안녕, 로웨나.”
리무스가 평소와 같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인사했다. 멀리서는 잘 몰랐는데, 가까이에서 보니 오늘따라 그는 조금 창백해 보였다. 입술에도 조금 핏기가 없었다. 약간 초췌해 보이는 리무스의 얼굴을 바라보며 내가 조심스레 물었다.
“오늘 몸이 안 좋나요?”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괜찮아. 가끔 이럴 때가 있어. 그가 조금 부끄러운 듯 웃었다. 뭔가를 숨기는 듯한 느낌에 나는 더는 캐묻지 않았다.
“저, 궁금한 게 있어서요.”
같이 걸어도 될까요? 내가 먼저 그에게 제의했다. 그는 쉽사리 수락하지 못하고 창밖을 살짝 내려다보았다. 조금 머뭇거리면서 고민하던 그가 결국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이라면 괜찮을 것 같아.”
나는 시리우스와 함께 계단을 타고 내려와 성 앞의 안마당 쪽으로 나왔다. 해는 거의 져가고 있었고, 날씨는 그렇게 춥지 않았다. 우리는 정원을 따라 조성된 산책로를 향했다. 천천히 길을 걸으며 내가 그에게 물었다.
“요즘 블랙은 잘 돌아다니지 않나요?”
몇 주간 나는 호그와트 내에서 블랙을 본 적이 없었다. 아무리 찾아다녀도 그의 흔적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그냥 날씨가 추워서 잘 다니지 않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 시기가 길어질수록 블랙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음, 요즘 잘 안 나가는 것 같아. 기숙사에 있고 싶어 해.”
“왜요?”
그렇게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는 애가 방구석에 박혀서 뭘 하는지 모르겠다. 개도 우울증을 탄다는 이야기를 흘러 들은 적이 있는데. 그가 아무 의욕도 없이 방에 무기력하게 엎드려 있을 거라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아팠다.
“모르겠어. 요즘 애가 약간 사나워져서. 나도 건드리지 못해. 함부로 건드렸다간 팡 하고 폭발할 것 같거든.”
“제가 블랙을 한 번이라도 볼 수 있을까요?”
나는 리무스를 향해 다급하게 물었다.
“저도 그 앨 좋아하지만, 그 애도 분명 절 좋아해요. 저와 함께 놀면 기분이 나아질 수도 있어요.”
내 말에 그는 말문이 막힌 것 같았다. 다소 곤란한 표정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아 내가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한 것 같기도 했다. 한참 머뭇거리던 리무스가 천천히 말했다.
“널 좋아하는 게 맞긴 한데, 지금은 별로 보고 싶어 하지 않을 거야.”
그의 말에서 느껴지는 묘한 뉘앙스에 기분이 이상해졌다. 어쩐지 그 말이 블랙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 침묵하던 리무스가 나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시리우스와는 잘 지내고 있니?”
나는 순식간에 얼굴이 굳었다.
“…왜 시리우스 얘기가 나오는 거죠?”
“그냥, 예전엔 친했잖아.”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 그도 내가 시리우스와 틀어졌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시리우스가 나에게 고백했다는 사실도 짐작하고 있는 걸까. 친한 친구 사이니 시리우스가 말해줬을지도 모른다.
“그냥저냥 지내고 있는 것 같은데, 모르겠어요.”
길게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리무스가 얼마만큼 아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이것저것 떠들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나는 괜히 바닥에 있는 돌을 차면서 별 관심이 없는 듯 태연한 어조로 물었다.
“시리우스는, 잘 지내나요?”
“걔 안부를 왜 내게 물어? 같이 수업도 듣지 않나?”
리무스가 얼굴에 살짝 미소를 띄웠다. 조금 당황한 나는 변명하듯 말했다.
“그래도 거의 얘기는 나누지 않거든요.”
“잘 지내고 있는 건 아닌가 보네.”
나는 대답을 하지 않고 정면을 응시하며 걸었다. 리무스는 내 보폭과 속도를 맞추며 차분히 입을 열었다.
“그때 징계받은 이후로 말수가 퍽 줄었어. 사실 항상 집 안을 뛰쳐나오겠다고 말하던 애였는데, 정작 가문이 자신을 내쳤다고 하니까 썩 달갑진 않은 모양이야. 예전에는 밤에 호그와트를 돌아다니는 걸 즐기던 애였는데, 요즘은 기숙사 밖으로 나가는 걸 통 싫어하더라.”
리무스는 마치 내 마음이라도 읽은 듯 그의 안부에 대해서 길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좀 슬픈 거 같기도 하고 화가 난 것 같기도 한데, 문제는 입을 꾹 다물고 아무에게도 말해주지 않는다는 거지. 우리는 아직도 왜 시리우스가 그렇게까지 저주를 퍼부었는지 몰라. 그래도 시리우스에게 물어보지는 못하고 있어. 걘 그 얘기만 나와도 기분이 저조해지거든. 애버리나 뮬시버가 어지간히 시리우스의 성질을 돋웠나 봐.”
리무스가 싱긋 웃으며 물었다.
“넌 혹시 이유를 알고 있니?”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시리우스가 정말 나와 그들 사이에 있었던 사건에 대해 알고 있는 걸까. 레귤러스가 그에게 언질을 주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어떤 것이든 확신할 수는 없었다. 무언가 내가 놓치고 있는 것이 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 * *
금요일 밤에는 비가 내렸다. 빗길에 자박거리는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나는 홀로 호그와트 성으로 향했다. 이렇게 깊은 밤, 비 오는 호그와트 성 바깥을 나돌아다니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호그와트 성에 도착하자 빗줄기는 좀 더 거세지기 시작했다. 돌벽에 부딪히는 빗소리를 뚫고 나는 아무도 없는 어두운 복도를 걸었다. 리들 교수는 불러도 꼭 왜 이런 날 부르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무엇인가 튀어나올 것만 같은 불안감에 나는 종종걸음으로 그의 연구실로 향했다.
평소 같으면 연구실 문 앞에서 조금 머뭇거렸을 법도 한데, 날씨가 이래서 그런지 나는 리들 교수보다도 호그와트 성 자체가 너무 무서워졌다. 뛰다시피 해서 그의 연구실에 도착한 나는 급하게 문을 두드렸다. 몇 번 두드리지 않아 연구실 문은 자연스럽게 열렸다. 앞에 그가 없는 것으로 보아 리들 교수는 마법을 사용해 문을 열어준 것 같았다. 나는 이제는 익숙해진 그의 연구실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방 전체에서 비 오는 날 특유의 무겁고 습한 기운이 돌았다. 등이 그렇게 밝지 않아 연구실은 약간 어두침침했다.
흐린 불빛을 등진 채, 리들 교수가 팔짱을 끼고 책상 앞에 기대 서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래번클로 탑에서 급하게 오느라 푹 젖은 옷깃을 훔쳐내며 나는 그를 마주 보았다.
“안녕하세요.”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물안개가 시야를 가린 것처럼,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어둡고 깊은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내 얼굴을 따라 서서히 움직이던 그의 눈길이, 머리카락 끝에 와 닿았다. 고개를 숙여 확인해보니 머리카락의 끝 부분이 살짝 젖어있었다. 길게 풀려있던 탓에 바람결에 날린 빗물이 묻은 것 같았다. 나는 손으로 이를 살짝 털어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둘 사이의 고요한 침묵 사이로 유리창에 부딪히는 빗줄기 소리가 흘렀다.
“내일 있을 슬러그혼 교수의 민달팽이 클럽 모임에 참석하나.”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네?”
그가 민달팽이 클럽 이야기를 꺼낼지는 몰랐기에 나는 다소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하지만 리들 교수는 말없이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가 원하는 것이 자신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내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네, 참석하기로 했어요.”
“이번 모임이 어떻게 진행될 예정인지는 이미 들어서 알겠지.”
“아뇨…… 전혀 몰라요.”
슬러그혼 교수님은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을 비밀로 하고 학생들을 놀라게 해 주는 것에 재미를 느끼는 것일지도 몰랐다.
“슬러그혼 교수는 권력욕이 꽤 강해.”
리들 교수가 입을 열었다. 슬러그혼 교수님이 권력욕이 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으므로, 나는 못 들은 걸 들은 사람마냥 멍하게 그를 응시했다.
“그렇지만 앞서서 나서기보다는 자신의 연줄을 이용해 뒤에서 조정해가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즐기지.”
리들 교수는 태연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그는 내일 민달팽이 클럽 모임에 홈커밍 파티(Homecoming Party)를 준비했다. 민달팽이 클럽에서는 5년에 한 번 정도 대대적인 규모의 홈커밍 파티를 열곤 하지. 아마 민달팽이 클럽 출신의 마법세계 인사들이 꽤 참석하게 될 거다. 그리고 그는 이들과 재학 중인 학생들 간의 친분을 쌓도록 유도할 거야.”
슬러그혼 교수님이라면 충분히 이런 모임을 주최할 만했다. 나는 이제야 왜 교수님이 그렇게 나에게 참석을 당부했는지 알아차렸다.
책상에 반쯤 기대 서 있던 그가 팔짱을 풀며 바로 섰다.
“미리 알려주도록 하지. 밀리센트 배그놀드와 친분을 유지하도록.”
나는 의문스러운 기색을 지우지 못하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분명 먼저 너에게 먼저 호기심을 드러낼 거다. 적당히 상대해 둬.”
리들 교수가 느리게 말을 이었다.
“그는 네가 졸업할 때쯤 마법부의 차기 장관이 되어 있을 테니까.”
무엇인가 불안한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그는 나지막하고 차분하게 말하고 있었으나, 나는 그 안에 담긴 알 수 없는 무게감에 절로 초조해졌다. 일순 불투명했던 그의 의도가 점점 명확해지고 있었다. 조금씩 천천히, 그가 나를 속박해오는 것이 느껴졌다.
“에드가 본즈와도 대화를 나누도록 해. 그는 신의를 중히 여기지. 네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입증해야 할 거다.”
나는 순간, 그대로 몸이 굳었다. 그가 행하는 모든 것들이 어떠한 하나의 목적을 향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챘기 때문이다. 그간 잠시 잊고 있었던 나의 존재 가치를, 리들 교수는 다시 한 번 일깨우고 있었다.
“오러국(Auror Office)의 가장 강력한 결정권자로서 그는, 물론 내일, 네게 진로에 관한 질문도 하게 될 테고.”
목소리에서 풍기는 음색은 낮고 서늘했지만, 그는 음절 하나하나를 또렷하게 발음하고 있었다. 분명하고 무게감 있는 그 목소리가 묘하게 공기를 진동시켰다. 천천히 숨을 내쉬며, 나는 리들 교수와 눈을 마주했다.
하루아침에 계절이 바뀌기라도 한 것처럼, 나를 바라보던 그의 새까만 눈동자에 한기가 담겼다.
“그리고 너는,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 명확히 이해하고 있겠지.”
빗줄기가 점점 더 굵어지기 시작했다. 유리창을 두드리던 빗소리가 조금씩 더 세차게 들렸다. 나는 눈을 내리깐 채 그의 말에 아무런 대답하지 않았다. 리들 교수 또한 굳이 나에게 답을 요구하지 않았다. 습한 기운이 나를 내리누르고 있었지만, 어쩐지 더 추워지는 것만 같았다.
나는 조용히 그의 연구실에서 나왔다.
이제 눈 대신 비가 내리는 것을 보니 겨울도 다 지나간 것은 아닐까. 리들 교수의 연구실 문 앞에서 나는 곧 다가올 따뜻한 봄을 상상했다. 그러나 너무 오랜 시간 겨울을 겪어와서인지, 봄이 어떤 느낌이었는지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 * *
밤새 내리던 비는 다음 날 오후가 되어서야 그쳤다.
민달팽이 클럽에 옷차림을 신경 써야 하나 고민도 했지만, 딱히 드레스 코드가 정해진 것도 아니었으므로 지난번처럼 깔끔하게 입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나는 베이지색 블라우스에 무릎 위까지 오는 슬릿스커트를 입었다. 적어도 복장에 있어서 나는 전혀 창의적이지 못한 것 같다.
나는 아이작과 휴게실에서 만났다. 셔츠에 조끼까지 갖춰 입은 그는 평소와 같이 단정한 차림새였다.
“일찍 내려왔네.”
“응. 준비하는 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으니까.”
나는 그에게 제인과의 혼인에 관해 묻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았다. 아이작은 이에 대해서 한 번도 나에게 언급한 적이 없었다. 사실 그게 약간 서운하긴 했다. 나에게 조금이라도 언질을 주면 좋을 텐데.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이해가 가기도 했다. 아무리 친구라 하더라도 집안에서 일어나는 일까지 공유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가벼운 대화를 나누며 4층에 있는 교실로 향했다. 오늘의 모임 장소는 평소에 모임을 가졌던 슬러그혼 교수님의 연구실 옆 소규모 홀이 아니었다. 이윽고 4층 교실 앞에 도착했을 때, 나는 생각했던 것보다 규모가 큰 입구 문에 다소 놀랐다. 거기는 단순한 교실이 아니라 또 다른 작은 연회 홀이었다.
“이번 모임의 주제가, 홈커밍 파티래.”
문을 열기 직전, 내가 아이작에게 속삭였다. 그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어디서 들은 거야?”
“내가 제일 싫어하는 소식통한테.”
소식통? 미간을 찌푸리며 선 아이작을 내버려 두고 나는 입구 문을 밀었다. 홀에 들어가자마자, 일부 호그와트 생들과 마녀, 마법사들이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마 과거에 민달팽이 클럽에 속했던 사람들이겠지. 이미 리들 교수에게 귀띔을 받은 나는 그렇게 놀라지 않았으나, 아이작은 조금 당혹스러운 듯 눈꺼풀을 깜빡이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본즈 군, 블루로즈 양!”
우리가 입장하자마자 슬러그혼 교수님이 다가왔다. 그가 환하게 미소 지으며 환영 인사를 건넸다.
“와줘서 고맙네!”
슬러그혼 교수님은 이번 민달팽이 클럽의 컨셉은 호그와트 성이라고 알려 주었다. 너른 홀이었을 것이 분명한 이 교실은 확실히 작은 호그와트답게 꾸며져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연회장을 연상케 하는 중앙 홀에 있었지만, 그 주변의 분리된 공간에는 미로처럼 퀴디치 운동장, 마법약 교실, 학교 기숙사 방들이 섞여서 배치되어 있었다. 나는 감탄을 숨길 수 없었다. 6학년들이 준비하던 것이 이거였구나. 진짜인지 환영 마법인지는 몰라도 제법 잘 만들었다.
아직 모든 참석자들이 다 도착하지는 않은 듯싶었다. 나와 아이작은 괜히 주변을 둘러보며 마법사들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시선 끝에 마녀 여럿이 한 곳을 향하며 수군거리는 것이 보였다. 우연치 않게 그들이 바라보고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리들 교수를 발견했다. 그도 재학시절에 민달팽이 클럽의 일원이었던 것일까. 그가 학생이었을 시절, 나와 같이 긴장되는 마음으로 민달팽이 클럽에 참석했을 모습이 전혀 상상이 되지 않았다.
나는 새삼 리들 교수를 자세히 살폈다.
많은 마법사와 마녀들이 개성을 발휘하며 오색찬란한 색상의 옷으로 저마다 치장하고 있는 가운데, 그는 오히려 무채색에 가까운 정장을 입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인파 속에서 다수의 눈길을 끄는 짙은 매력을 풍겼다. 자신에게서 품어져 나오는 묘한 분위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리들 교수는 무릎 기장까지 오는 롱코트의 한쪽 주머니에 손을 넣고 무심하게 창밖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마치 여기서 이는 소란과 자신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듯.
흑색 콩테로 거칠게 칠한 것만 같은 그의 까만 머리카락이 정교한 얼굴선 위로 드리워져 있었다. 그 아래로 미간에서부터 솟은 가지런한 콧대와, 표정에 따라 부드럽기도, 차갑기도 한 입매가 얼굴 전체의 분위기와 조화를 이루었다. 그의 얼굴을 따라 훑던 나는 마침내 그의 눈동자에 시선이 닿았다. 새까만 어둠을 품은 검은 눈동자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제는 익숙해질 만했지만, 나는 여전히 그 속에 감춘 것이 두렵게 느껴졌다.
창밖을 바라보던 리들 교수가 살짝 고개를 돌렸다. 그에게 다가가는 낯선 남자가 보였다. 아는 사람인 듯 리들 교수가 그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뭔가 익숙한 느낌이 드는 얼굴이었기 때문에 나는 한참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오리온 블랙이네.”
아이작이 중얼거렸다. 그도 나와 함께 리들 교수를 쳐다보고 있었던 것일까. 나는 조금 놀랐다.
“블랙 씨도 슬러그혼 클럽의 회원이었나 보군.”
익숙한 느낌이 들었던 것은, 그가 시리우스와 닮아서였던 듯했다. 시리우스의 아버지 오리온 블랙은 놀라우리만치 그와 비슷한 분위기를 풍겼다. 제법 큰 키에 탄탄한 체격을 지닌 그는 우아했지만 동시에 오만해 보였고, 자신감이 넘쳤다. 시리우스가 조금 더 나이가 들어 특유의 반항기가 잠재워진다면 분명 제 아버지와 같은 중후한 매력을 풍길 것임이 분명했다.
“본즈 군!”
그때, 멀리서 처음 보는 마법사가 다가왔다.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것 같구나.”
“말킨 씨.”
아이작이 살짝 묵례하며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는 가문을 통해 아이작과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마법사인 것 같았다. 만면에 미소를 띤 그는 나를 본체만체하며 아이작에게 뭔가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여기에서나마 만나게 되다니! 나는 영국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말야…….”
그는 프랑스에서 있었던 일들에 관해 두서없이 떠들었다. 나는 어쩐지 그 자리에 있는 게 불편해, 두 사람이 대화에 집중하는 동안 살며시 그 사이에서 빠져나왔다.
혹시 익숙한 얼굴이 있을까 해서 휘 둘러보며 학생들의 얼굴을 확인했다. 릴리라도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마법 세계의 인사들을 내가 알 리도 없었으므로, 건성건성 그들을 스쳐 지나가다가, 익숙한 얼굴의 마녀를 발견했다.
그녀는 어깨 위에 닿을 듯 짧은 갈색 머리카락에, 눈썹 바로 위까지 앞머리가 있는 2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귀여운 인상의 마녀였다. 내가 저런 마녀를 알 리 없는데, 왜 이렇게 익숙한 느낌이 드는 거지? 그녀는 옆에 있는 비슷한 연령대의 남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잇몸까지 드러낼 정도로 크게 웃는 모습으로 비쳐 보아, 꽤 유쾌한 성격일 것 같았다.
어디서 만나기라도 했었나? 한참을 생각하던 나는 불현듯 깨달았다. 그녀는 내가 호그와트에 들어오기 전, 절제하지 못한 마력으로 머글 세계에서 사고를 낼 때마다 마법부에서 파견되던 마녀였다. 나는 머글 학교 입학식 날, 엄청나게 많은 머글들 앞에서 친구를 풍선으로 만들어 하늘로 날려 보내는 대형 사고를 친 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 그녀는 사고로 의기소침해 있던 나를 위로해주었었다.
마법부에 들어가게 된다면 언젠가 그녀를 다시 볼 것이라 기대했지만, 이 자리에서 만나게 될 줄이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그녀에게 다가가 먼저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옆에 있는 남자와 얘기하던 그녀가 나를 쳐다보았다. 어릴 때는 그렇게 커 보이던 마녀였는데, 지금 보니 나와 비슷한 체구였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는 생각을 했다.
“저, 기억나세요?”
그녀가 기억을 더듬기라도 하는 듯 고개를 갸웃하더니 한마디 내뱉었다.
“누구지?”
“저, 브라이턴 퀸즈 로드의 세인트 버나드 학교 입학식에서……”
내가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
“…제가 친구를 풍선으로 만들어 띄웠거든요. 그때 마법부에서 수습 차 오셨었죠…….”
미간에 살짝 주름이 진다 싶더니, 그녀가 깜짝 놀라서 소리치듯 말했다.
“아, 그 머글 출신의 꼬마마녀!”
다행히도 나를 완전히 기억한 듯싶었다. 그녀가 내 담당으로 배정되어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 지역이 그녀가 맡은 곳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어쨌든 내가 사고를 칠 때마다 거의 격주에 걸쳐서 얼굴을 보곤 했으므로 기억하지 못하는 게 이상했다.
“그 꼬맹이가 이렇게 크다니.”
그녀가 감회가 젖어 말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그땐 제가 정말 어릴 때니까요.”
“네 이름이 뭐였더라……?”
내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로웨나 블루로즈에요.”
“맙소사.”
그녀가 조금 얼빠진 감탄사를 내뱉었다.
“네가 그 유명한 블루로즈였어?”
이건 또 뭔 반전이래. 그렇게 중얼거린 그녀는 얼떨떨한 표정을 쉽사리 감추지 못했다.
“무슨 일이야.”
옆에 있던 남자가 물었다. 그녀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그에게 조잘댔다.
“앤디, 기억나? 그때 6년 전쯤, 마법 사고와 재난부 전체가 외근 나갔을 때. 왜 브라이턴에서 있었던 ‘풍선소년’ 사건 말이야.”
그녀의 말에 앤디라고 불렸던 남자가 무엇인가 생각난다는 듯 고개를 살짝 들었다.
“아, 그 부서의 모든 오블리비에이터(Obliviator, 기억을 수정하는 사람)들이 다 동원되었던 그거?”
사건번호가 93뭐로 시작했던 것 같은데. 그가 중얼거렸다. 꽤 오래된 이야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기억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때 고생 좀 했었지, 하고 그가 말하는 것을 듣자 내 부끄러움은 더욱 가중되었다.
“이런 인연이 다 있다니. 그때 그렇게 사고를 많이 쳤던 건, 역시 통제하지 못할 정도로 네 마력이 강하기 때문이었던 거야. 역시 마법부 사람들이 너 가지고 떠들만해.”
그녀가 다소 호들갑스럽게 말했으나, 나는 순간 부담스러움을 느꼈다. 바실리스크를 물리쳤다는 것이 이렇게 크게 회자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다들 나에 대해 과대평가를 하는데, 정작 내가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어린 마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조금 걱정이 되기도 했다.
“내 소개가 늦었네. 반가워, 로웨나. 나는 키이라 벨 그리고 얜, 앤디야. 앤디 에팅턴. 너도 이미 알겠지만, 우리 둘 다 마법사고와 재난부에 소속되어 있지.”
그녀가 말을 덧붙였다.
“참고로 난 그리핀도르, 앤디는 래번클로 출신이야.”
“저도 래번클로에요.”
“호그와트 영웅이 래번클로에서 나왔다니 영광인데.”
조금 무덤덤하게 서 있던 앤디가 불쑥 나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내가 래번클로 출신이라는 것이 반가운 모양이었다. 앤디가 내 쪽으로 손바닥을 내미는 제스쳐를 취했기 때문에, 나는 엉겁결에 그와 하이파이브를 했다.
나에 대한 감회가 새로운지 이것저것 끊임없이 말하던 키이라는 갑자기 건너편에서 무엇인가 발견한 듯 짧게 욕설을 내뱉었다.
“오, 젠장.”
그렇게 말하며 키이라가 내 뒤에 숨었다. 그녀는 나와 비슷한 체구였으므로 사실 숨는다는 것에 그렇게 큰 의미는 없어 보였지만.
“코델리우스 퍼지 부장이야.”
키이라가 투덜거리듯 내뱉었다.
“그도 민달팽이 클럽 출신인가 보군…… 몰랐는데.”
“많이 불편한 사이인가요?”
내가 그녀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키이라는 내 옆에 거의 찰싹 붙어 있는 상태였다. 앤디는 그녀의 이런 반응이 익숙한 듯싶었다. 언제 나를 보고 즐거워했느냐는 듯 그는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담담하게 서 있었다.
“내 직속 상사야, 저 사람. 오늘 같은 토요일에는 별로 보고 싶지 않았는데…….”
그녀는 가방에서 책을 한 권 꺼내더니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묻지 않았는데도 그녀가 퍼지 부장에 대해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출신을 엄청 따져. 결단력도 부족하고. 완전 우유부단해서 항상 모든 걸 나한테 물어보곤 하지.”
‘키이라, 이 사태에 대한 적절한 해결방안으로 떠오르는 건 없나?’ 그녀는 퍼지 부장의 목소리를 따라 하며 낄낄댔다.
“리더로서의 자질은 별로 없다고 생각해.”
그녀가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오, 방금 내가 했던 얘기는 부장님한테는 비밀.”
나와 앤디를 퍼지 부장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 끌고 가며, 키이라가 그의 욕을 한참 동안 늘여놓았다. 매번 보고서를 올릴 때마다 양피지를 몇 장 넘기기만 하고 제대로 읽지도 않는다느니, 그래서 결국 했던 말을 또 반복하게 만든다느니 하는 그런 얘기였다. 나는 학교만 다녀서 잘 몰랐는데, 일하다 보면 저런 고충이 있겠구나 싶었다. 하긴, 스테이시같이 하라는 건 제대로 안 하고 딴짓만 하는 애가 내 상사면 정말 화가 나겠지. 그냥 상상만 했는데 어쩐지 열불이 터지는 기분이었다.
“저기 봐, 톰 리들이 있어!”
그때, 키이라가 앤디의 팔을 치며 속삭였다.
“호그와트에서 교수직을 맡았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여전히 잘생겼네. 학생들에게도 인기 많지, 그렇지?”
그녀가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나는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리들 교수님을 좋아하는 학생들을 칭하는 리들러라는 말도 있어요.”
내 말에 그녀는 깔깔 웃었다.
“내가 학교 다닐 때도 그랬어. 특히 조금 덜떨어진 여자 후배들이 그를 쫓아다니곤 했지.”
“넌 마치 그 덜떨어진 여자 후배 중 하나가 아닌 것처럼 말한다?”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던 앤디가 끼어들었다. 그의 말에 나는 웃음이 터졌다. 키이라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을 이었다.
“뭐 그것도 그랬는데. 난 리들 선배를 이성으로서 좋아했던 건 아니었던 것 같아. 난 리들 선배가 셀윈 선배랑 같이 있을 때 그렇게 좋았거든.”
“…에밀리 셀윈?”
얼마 만에 들어보는 이름이야. 앤디가 마치 옛 기억을 더듬기라도 하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 작품 후기 ============================
퍼지 장관은 실제로 원작에서 장관이 되기 전 마법사고와 재난부에서 근무했습니다. 그건 그렇고 저 마녀를 기억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네요.ㅋ_ㅋ...
@이늬님, 쪽지로 답변 드렸습니다! 확인해보세여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