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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5
로웨나 블루로즈
김아흔
Part 5 - (1)
나는 지팡이를 쥐고 리들 교수를 바라보았다. 그는 언제나 그래 왔듯이 절도 있고 차분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오늘 배우게 될 마법은, 광역계 마법 굴절(Hex-deflection) 주문인 살비오 헥시아입니다.”
교실에서 실습 대형으로 정렬한 학생들이 그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어둠의 마법 방어술 수업은 두, 세 사람이 한 조가 되어 공방을 벌이는 대련 실습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수업이 이렇게 이론 대신 실습 위주로 흘러갈수록 나는 수업시간 내내 리들 교수와 눈을 마주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그렇게 다행스러울 수 없었다.
“이 주문은 일종의 결계를 형성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됩니다. 마법적 혹은 물리적 위협이 있는 장소에 벽을 쌓아 두는 것과 비슷한 효과를 발휘하죠.”
확실히 그의 가르침이 내 역량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리들 교수의 개인 교습으로 내가 깨닫게 된 것 중 하나는 기초의 중요성이었다. 어떠한 종류의 마법에도 기본 원리와 같은 역할을 하는 주문이 있었다. 이 기본이 되는 주문을 몇십, 몇백 번이고 연습하게 된다면, 그보다 심화된 마법에 능숙해지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기초고 뭐고 항상 수업을 따라가는 것에 바빠 당일 배운 분량만 겨우 이해하곤 했던 나에게는 혁신과도 같은 깨달음이었다. 나는 이전보다도 기초적인 것들을 연습하고 익숙해지는 것에 충실했고, 이것은 어둠의 마법 방어술뿐만 아니라 다른 과목을 공부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그 점에서 ‘프로테고’와 같은 방어마법과 차이가 있습니다. 단발적인 공격에 방어하기 위한 프로테고와는 달리, 살비오 헥시아는 시전 속도보다는 그 지속성 여부가 중요하니까요.”
그는 학생들이 있는 쪽으로 살짝 다가와 공중에 프로테고와 살비오 헥시아를 각각 구현했다. 리들 교수는 주문 없이도 충분히 두 마법을 시전할 수 있는 것 같았다. 그가 단상 아래로 걸어 내려가자, 짙은 남색의 그의 망토 끝자락이 조금 휘날렸다. 학생들은 그 모습에 매혹된 것처럼 리들 교수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옆 조의 데이지는 이미 넋이 나간 듯 멍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리들 교수는 학생들 전체를 고르게 쳐다보며 설명을 지속했다. 그러는 동안 그의 눈길이 잠시 나에게 닿았다가 스쳐 지나갔다. 불과 몇 초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는 그 어두운 눈동자가 짧은 시간 나를 향한 것만으로도 어쩐지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와 눈을 마주할 때마다 그 날의 기억을 반사적으로 떠올렸다. 친밀한 사이라도 되는 것 마냥 그의 품에 안겨 울었던 것들까지도. 내가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그리고 리들 교수가 왜 평소와 다른 태도를 보였는지 아직도 의문이었다. 그러나 그날 이후, 그와 나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행동해왔다. 우리 둘 다 그 일을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이 모든 것들이 꿈은 아니었나 싶기도 했다.
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그의 설명이 대충 마무리되었다.
“……또한, 대부분의 마법이 그렇듯 시전 시간과 그 강도는 마법 자체의 난이도, 시전자의 의지, 그리고 능숙도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 말을 끝으로 리들 교수는 학생들에게 직접 굴절 마법을 실습해보라고 지시했다.
“네가 먼저 할래?”
“좋아.”
반대편에 서 있던 아이작의 제의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지팡이를 조금 높게 쥐고 시전 자세를 취했다. 살비오 헥시아! 투명한 옅은 색의 방어막이 순식간에 생겼다가 사라졌다. 굴절 마법은 지속되는 동안 어떤 형태나 색채를 드러내지 않았으므로, 제대로 형성되었는지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었다. 아이작이 가볍게 지팡이를 휘둘러 내 쪽을 향해 작은 불꽃을 쏘았다. 그의 지팡이에서 튀어나온 불꽃은 무엇인가에 가로막힌 듯 내 바로 앞에서 바싹 태워졌다.
“오, 대단해. 로웨나.”
아이작이 감탄을 담아 말했다.
“단번에 성공한 것 같아. 이번엔 내가 한번 해볼게.”
아이작은 절제된 동작으로 지팡이를 휘두르며 주문을 외쳤다. 그의 지팡이 끝에서부터 푸른빛의 방어막이 선명하게 일었다가 사라졌다. 형성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나는 그 막의 방향으로 약한 마법주문을 쏘았다. 내 지팡이에서 흰 불꽃이 튀어나와 그를 향했다.
맹렬히 달려들던 흰 불꽃은 아이작이 만든 투명한 방어막에 닿아 산산이 부서졌다. 팍하고 튀는 듯한 불꽃의 전경은, 비밀의 방에서 내가 리들 교수와 바실리스크를 잡았을 때 사용했던 주문을 연상하게 했다. 나는 멍한 표정으로 남은 불꽃의 잔상을 응시했다.
결론이야 어쨌든, 나는 리들 교수와 같은 배를 탔다. 바실리스크를 죽인 순간부터 나는 이를 깨달았다. 그가 나를 저의 숨겨둔 체스 말로 삼을 것은 확실해 보였다. 내가 폰인지, 비숍인지, 나이트인지, 혹은 퀸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는 나에게 이용가치가 있는 한 나를 살려두겠노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를 죽이지 않겠다는 말이 내 가족을, 내 친구들의 안위를 보장하겠다는 의미는 아니었으므로 나는 아직도 그가 어떤 짓을 할지 몰라 전전긍긍하곤 했다.
“블루로즈 양.”
리들 교수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도중, 그가 갑자기 말을 걸었다. 순간 나는 지각하지 못한 사이 레질리먼시라도 당한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나의 마음을 읽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언제 내 근처로 온 것인지, 리들 교수는 아이작과 나 사이에 서 있었다.
“지팡이를 조금 더 높게 쥐어야 할 것 같군요.”
리들 교수가 내 손을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는 쥐고 있던 자신의 지팡이를 품에 넣고 나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자세를 교정해줄 요량인지, 그는 내 한쪽 손을 잡고 지팡이를 바로 쥐게 한 다음 팔을 들어 올렸다. 아주 잠깐 닿은 것에 불과했음에도, 내 팔에 감겨오는 손길에 나는 저절로 몸이 움찔했다.
가까이 선 리들 교수에게서는 알싸한 냉기가 흘렀다. 단지 그와의 거리가 가까워진 것만으로도 절로 긴장되었지만, 애써 이를 숨기고 태연한 척 가만히 서 있었다.
“다시 한 번 시전을 해보도록 하죠.”
그가 나에게서 조금 물러났다. 그의 말에 나는 손을 좀 더 위로 든 채로 지팡이를 휘두르며 외쳤다.
“살비오 헥시아!”
다소 희미했던 이전보다는 확연히 밝아진 빛깔의 방어막이 잠깐 형체를 드러냈다가 사라졌다. 이를 지켜보던 리들 교수가 말했다.
“발음만 정확하게 하면 괜찮겠군요.”
그는 아이작의 자세까지 봐주었다. 그러나 우리의 실습이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진행되고 있음을 깨달았던 까닭인지 그는 금방 우리를 봐주는 것을 마무리하고 다른 학생들을 보러 갔다. 리들 교수가 멀어지자 나는 다시 안도감이 들었다.
“리들 교수 말이야.”
아이작이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말을 꺼냈다.
“아버지가 그러는데, 꽤 유력 가문과도 연이 닿아 있다고 하더라고.”
“그래?”
그렇겠지. 누구신데. 그의 정체를 알고 있는 나에게는 그렇게 놀라운 사실이 아니었다. 어떤 사람들이 죽음을 먹는 자인지 아직 명확히 드러난 바는 없었지만, 리들 교수가 저렇게 정체를 숨기고 교수 일을 할 수 있을 정도면 어느 정도 이상의 재력과 권력을 갖춘 가문이 배후로 있는 것은 당연했다.
“호그와트 오기 전에는 마법부에서 일했던 적도 있어서 마법사들과도 안면이 꽤 있나 봐.”
“마법부?”
그건 새로 들은 사실이었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에게 되물었다.
“어, 어느 부서인지는 흘러들었는데, 아버지께서 호그와트 교수직으로 남아있기에는 아까운 사람이라고 그랬어.”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나는 아이작에게 아버지의 안목을 믿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고 싶은 충동을 겨우 참아야 했다. 애초에 안목의 문제가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당장 나만 해도 어떤가. 그의 정체를 알아차리지 못했더라면 호그와트 내 리들러 모임에 고위직책 하나 정도는 차지하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척 아이작에게 동조하며, 리들 교수에 대한 화제를 자연스레 다른 것으로 돌렸다.
* * *
학기 초에 시작해 거의 한 달이 넘게 지속해왔던 고대 룬 문자 해석 과제가 드디어 끝났다. 과제를 무사히 마친 것을 기념하며 우리 네 사람은 함께 점심을 먹기로 했다. 넷이서 모여 식사를 다 같이하는 것은 올해 들어 처음이었다.
아이작과 함께 연회장에 도착하니 필리다와 요한이 이미 래번클로 테이블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오, 호그와트의 떠오르는 영웅님.”
필리다는 요즘 나를 볼 때마다 그렇게 불렀다. 여느 때와 같은 장난스러운 어조였다. 그녀는 사람들이 나를 선망하든 경시하든 개의치 않고 항상 나를 똑같이 대했다. 그녀에게는 호그와트 내에서의 내 입지변동이 나에 대한 평가에 그다지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 같았다.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든, 그녀는 자신이 가진 일관적인 기준을 버리지 않았다.
비밀의 방 사건 이후, 나에게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많아졌다. 예전과는 달리 많은 학생들이 나에게 호의를 표하며 다가왔지만, 결코 달가운 일은 아니었다. 별로 친하지 않은 애들이 잘 보이겠다고 접근하는 것도 싫었고, 그들에게 매번 친절하게 응대하는 것도 번거로웠다. 교내에서 배척될 때보다야 훨씬 나을지 몰라도, 차라리 모두가 나에게 관심이 없었던 옛날이 좋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나는 얘들과 있을 때가 제일 편했다.
우리 네 사람이 모두 테이블에 앉자,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점심 식사가 테이블 위에 차려졌다. 배가 고팠으나 딱히 뭔가 먹고 싶은 것은 없었다. 나는 단호박 스프를 내 쪽으로 당겼다.
“내가 작년에 했던 가장 최악의 선택은.”
요한이 손으로 테이블을 탕탕 치면서 말했다.
“선택과목으로 고대 룬 문자를 듣기로 결정했다는 거야.”
우리는 꽤 오랜 시간을 과제에 투자해야 했다. 교수님은 이 과제를 한 학기 내내 진행하라고 내주신 듯했다. 그 분량을 한 달 만에 끝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이작과 나는 반쯤 지친 필리다와 요한을 다독여가며 어쨌든 간 마무리를 지었다.
요한은 익힌 파프리카를 포크로 집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핀도르의 프로비셔가 그러는데, 신비한 동물 돌보기 수업에는 과제가 하나도 없대.”
필리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과제가 아무리 없어도, 폭탄꼬리 스크루트의 꼬리를 제거하는 실습을 해야 하는 건 싫어.”
“네가 그런 소리 하면 안 되는 거 아냐?”
아이작은 어이없다는 기색을 지우지 못하고 대꾸했다.
“대체 그게 불꽃을 쏘아내는 선인장에서 가시를 제거하는 것과 다를 바가 뭐야?”
그는 얼마 전 약초학 시간에 그녀가 불꽃 가시의 제거에 누구보다도 전투적으로 몰두해, 결국 수업 한 시간 동안 열두 개의 가시를 제거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불꽃에 델까 봐 애초에 건드리지도 못한 학생들이 수두룩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실로 놀라울 기록이었다.
“심대하게 다르지.”
그녀는 포크를 들고 우아하게 말했다.
“불꽃을 쏘아대는 선인장에게는 절제된 미가 있잖아. 스크루트가 경박하게 까불기만 하는 것과는 극명한 차이가 있다구.”
밀랍같이 우아한 마른 껍질이나, 두꺼우면서 유려한 다육질 줄기라던가. 그녀는 그것 말고도 몇 가지 더 열거했으나, 제대로 들리지는 않았다. 우리 중에서 그녀의 독특한 미적 기준에 공감하는 사람은 없었으므로, 다들 그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나는 그녀가 하는 말을 흥미롭게 들으며 청어 샐러드를 먹었다. 근래 들어 친절한 로웨나를 가장하는 것이 꽤 스트레스였던 모양인지 친구들과 있을 때에는 말수가 퍽 줄었다. 친구들은 딱히 내가 대화에 동조하지 않아도 뭐 그리 할 말이 많은지 전투적으로 떠들어댔다. 나는 조용히 애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만으로도 재미있었다.
“로웨나, 이번 주 토요일에 민달팽이 클럽 모임이 있다는 거 들었지?”
갈 거야? 아이작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공로상을 받은 이후로 슬러그혼 교수님은, 민달팽이 클럽에 꼭 모습을 비치길 바란다며 몇 번이고 참석을 당부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는데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별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대체 민달팽이 클럽에선 뭘 해?”
요한이 궁금한지 내게 물었다. 내가 별거 아니라는 듯 호두 파이를 삼키며 대답했다.
“그냥 안부를 주고받는 것 같아. 서로 간에 뭐 하고 지냈는지.”
“그런 건 대연회장에서도 할 수 있는 거 아냐?”
필리다가 끼어들었다. 쓸데없이 이런 부분에 래번클로의 예리함이 발휘되는 것 같아 낮게 소리 내 웃었다.
“대연회장에서 할 수 없는 얘기도 있으니까.”
아이작이 그렇게 대답했으나, 필리다는 딱히 수긍한 것 같지 않았다.
우리의 화제는 곧 있을 퀴디치로 옮겨졌다. 그리핀도르와 래번클로의 퀴디치 경기가 다음 주에 있었다. 비밀의 방이 열렸던 시기 동안 계속 연기되어왔던 퀴디치가 재개되면서 학생들은 잔뜩 들떠있었다. 나는 요한과 아이작이 승패 여부를 분석하는 것을 한 귀로 흘러 들으며 호박 주스를 마셨다.
* * *
비밀의 방이 닫힌 지 며칠 후, 빌헬름 교수님은 다시 학교로 복귀했다. 그는 기억상실증에 걸린 채 머글 사회에서 헤매다가, 얼마 전 기억을 겨우 되찾고 다시 마법사 세계로 돌아왔다고 말했다. 그의 설명은 허술하기 짝이 없었고, 나는 기억이 조작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교수님이 호그와트에 돌아오면서 머글 연구 수업이 다시 시작되었다. 나는 수업에 늦지 않기 위해 평소보다 일찍 교실로 향했다. 크리스마스 연휴 기간까지 포함한다면, 거의 두 달 만에 머글 연구 교실을 찾는 것이었다.
아무도 없는 교실에 가장 먼저 도착한 나는 자리에 앉아 그간 펴보지도 않았던 머글 연구 교과서를 꺼냈다. 오늘 배울 부분을 먼저 읽어보려 했는데, 쉽사리 집중이 되지 않았다. 사실 교실에 들어온 순간부터 내 신경은 온통 빈 옆자리로 쏠렸다. 시리우스가 언제 들어와 옆자리에 앉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글자가 눈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멍하게 읽었던 부분을 읽고 또 읽기를 반복했다.
학생들이 하나, 둘 교실에 도착했다. 수업을 시작하기 직전쯤, 느지막이 시리우스 또한 앞문으로 들어왔다. 호그와트 성 바깥에 있었던 것인지, 그는 잔뜩 여민 망토 위로 그리핀도르 목도리를 얼굴에 파묻을 정도로 칭칭 감고 있었다. 들어오는 시리우스와 눈이 마주 지차, 나는 엉겁결에 그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시리우스.”
“어. 안녕.”
그는 나를 한 번 흘끔 쳐다보더니 우리의 책상 옆에 서서 두른 목도리를 풀었다. 그가 내 옆에 앉자 나는 슬슬 이 자리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더 이상 그에게 말을 걸지 않고 그대로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도 딱히 별말을 꺼내지 않았다. 흘끔 바라보니 나만 의식하고 있을 뿐 시리우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책을 펴고 있었다. 우리 둘 사이에 고요한 침묵이 흘렀다.
그가 감금 징계를 받고 나온 이후 사람들은 시리우스 블랙이 이전보다 더 폭력적으로 변했다는 소리를 입에 담곤 했다. 하지만 오히려 나는 학생의 인권이라곤 쥐뿔만큼도 고려하지 않는 호그와트의 잔혹한 처사에 화가 날 뿐이었다. 어떻게 아직 성인도 되지 않은 마법사에게 감금 징계를 내릴 수 있나. 솔직히 말해서 3일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에 갇혀 있는다면 없었던 폭력성도 저절로 생겨날 거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당사자의 정신만 피폐해지게 만들 뿐 교화의 효과는 전혀 없어 보이는 무의미한 처벌을 왜 내리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심지어 가문에서 퇴출당하기까지 했다. 사람들은 마치 즐거운 가십거리라도 되는 것처럼 어디에만 가면 그가 블랙 가의 호적에서 지워진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사람들의 야멸차고 잔인한 태도에 분노를 감출 수 없었으나, 시리우스에게 힘내라는 말 한마디조차 건넬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감히 그에게 먼저 다가가지도 못했다. 나에게는 그럴 용기도 없었고, 스스로가 그럴 주제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마치 아무런 관심도 없는 양 입을 꾹 다물고, 시리우스 앞에서 나는 징계나 가문 얘기는커녕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곧 빌헬름 교수님이 들어왔다. 그는 오랜만에 선 교단에 감회가 새로운 듯했다. 짧은 인사말을 건넨 교수님은 잔뜩 흥분한 상태로 자신이 기억을 완전히 잃은 채 머글 세계에서 떠돌아다녔던 이야기를 시작했다.
“여러분, 그 느낌을 아시겠습니까? 저는 제가 마법사라는 것조차 완전하게 잊었습니다! 머글 세계에서 스스로가 머글인 줄 알고 머글들의 병원에서 보살핌을 받았죠…….”
교수님은 그의 기억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영영 자신을 머글이라고 생각하고 머글 세계에서 뿌리를 내렸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머글 사회에서 생활하고 있던 교수님은, 자동차 사고를 당하기 직전 무의식적으로 발현된 마법으로 자동차가 공중으로 날아가 버리는 사건이 발생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출동한 마법 사고 복구반에 의해 발견되었다고 했다.
빌헬름 교수님은 진도를 빼는 것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였다. 마치 크나큰 모험이라도 하고 온 듯 그는 자신이 겪은 머글 세계의 문화에 대해서 길게 늘여놓았다. 이것이 시험에 들어갈지 아닐지 몰랐기 때문에, 나는 교수님의 말을 한자라도 놓칠세라 열심히 필기하고 있었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내 모든 감각이 옆에 앉은 시리우스에게 쏠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수업에 집중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평소처럼 딴짓을 하면서 장난을 치고 있지도 않았다. 그저 가만히 앉아있을 뿐인데도 나는 신경이 쓰였다.
이윽고 수업이 마쳤다. 반쯤은 빌헬름 교수님의 말을 흘려듣고, 반쯤은 시리우스를 생각했던 수업 시간이었다. 나는 천천히 책을 챙기며 그의 눈치를 보았다. 책을 정리한 시리우스가 금방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갈게.”
그는 심지어 내 인사도 듣지 않고 그대로 나가버렸다. 혹여 그와 대연회장에 함께 걸어갈까 봐 잔뜩 긴장했던 것이 허망할 정도였다. 나를 대하는 태도가 거리감이 느껴질 정도로 차가웠기 때문에 나는 이제 그가 나를 싫어한다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인사라도 해주는 것이 다행일 정도였다. 서운하긴 했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거리를 두길 원한다면 나도 더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이 옳다. 한참을 자리에 앉아 있던 나는 조용히 책을 챙겨 일어났다.
* * *
머글 연구 수업을 마치고 혼자 복도를 걸어가는 길에 그리핀도르의 제인 아보트를 만난 것은 우연이었다. 딱히 우리가 인사를 하고 지내는 사이는 아니었기 때문에 무덤덤하게 스쳐 지나가려고 하는데, 제인이 먼저 나를 잡았다.
“안녕, 블루로즈.”
“아…… 안녕하세요.”
나는 어색하게 그녀에게 인사했다. 그녀가 왜 나에게 말을 거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한 번도 아는 척을 해본 적 없었다. 그녀가 아이작과 약혼이 내정되어 있다는 뜬소문만 들은 것이 다였다.
그녀는 나보다 키가 더 크고 호리호리한 몸매를 가졌는데, 갈색 기가 도는 금발의 머리카락을 포니테일로 시원하게 묶어 올린 모습이었다. 퀴디치 선수라 그런지 살짝 어두운 피부에 탄력이 느껴졌고, 교복을 입고 있었음에도 무엇인가 씩씩하고 건강해 보이는 이미지가 강했다.
“저녁 식사 하기 전에, 나와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나는 조금 당황했지만, 이를 감추며 흔쾌히 대답했다.
“네, 괜찮아요.”
“좀 걸을래?”
제인이 자연스럽게 내 옆에 섰다. 그녀의 태도는 매우 조심스러웠는데, 마치 내가 잘못 건드리면 깨져버리는 유리잔이라도 되는 것처럼 구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음, 네가 비밀의 방을 닫았다는 얘기는 들었어.”
제인이 말했다.
“대단하구나.”
“소문이 부풀려진 거예요.”
대단하다는 소리는 비밀의 방 사건이 터진 지 몇 주가 지난 지금에도 간간이 듣는 소리였다. 나는 항상 그래 왔듯 겸손한 태도로 일관했다. 그것이 사실이기도 하고. 난 뭐, 한 것도 없는걸.
“아이작과는 요즘도 친하게 잘 지내고 있는 것 같던데.”
“아, 여전하죠.”
그녀가 유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너도, 지금 우리 아보트 가와 본즈 가 사이에서 나와 아이작의 혼담이 오고 가고 있다는 걸 알고 있겠지.”
“네.”
“사실 본즈 가도, 우리 가문도 너를 예의 주시하고 있어.”
“저를요?”
별로 깊은 생각을 하지 않고 제인의 말을 듣던 나는 깜짝 놀랐다. 본즈 가와 아보트 가라니, 대체 그들이 왜 나에게 관심을 가진단 말야?
“네가 본즈와 친하잖아.”
“전 걔랑 그냥 친구 사이일 뿐인 걸요.”
“그렇다면 다행이긴 한데, 그래도 확실히 해둬야 할 것 같아서.”
나는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제인은 나처럼 창백하고 약해보이는 이미지라기보다는, 전반적으로 굳세고 힘차다는 느낌이 강했다. 어두운 금빛의 눈썹 아래로 암갈색의 눈동자가 생기 있게 반짝였다. 일순 나는, 그녀가 태양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본즈가 마음에 들어.”
그녀가 제 마음을 너무 당당하게 말했기 때문에 나는 그게 마치, 나는 초록색이 좋아, 라고 말하는 것처럼 자신의 호불호를 밝히는 것이라고 느껴질 정도였다. 나는 눈꺼풀을 깜빡이며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와 잘해볼 생각인데, 네 생각이 어떤지 궁금하구나.”
“제 생각이 궁금하다구요?”
“네가 만약 아이작에게 다른 감정을 가지고 있다면, 미리 알아둬야 할 것 같아서 말야.”
나는 새삼 그녀의 그리핀도르적 태도에 놀랐다. 와, 이렇게 저돌적이라니. 내가 설령 아이작을 좋아한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나오지는 못할 것 같았다. 전혀 친하지도 않은 사람에게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마음이 있느냐고 물어보다니.
하지만 그런 태도가 싫은 것은 아니었다. 지금 제인은 내가 아이작을 좋아하니까 너는 물러서 줬으면 좋겠다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내가 솔직해지길 바라고 있었다. 만약 여기서 나도 그를 마음에 들어 한다고 고백한다면, 그녀는 기꺼이 선의의 경쟁자가 될 것이다.
갑자기, 그리핀도르와 슬리데린의 퀴디치 경기에서 보았던 그녀의 카리스마 넘치던 모습이 떠올랐다. 내가 항상 부러워하던, 나에게는 부족한 무엇인가를 그녀는 확실히 갖추고 있었다.
나는 잠깐 뜸을 두었다. 내가 아이작에게 가지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는 나 자신이 분명히 알고 있었다.
“저는 친구로서 아이작을 좋아하고 있어요.”
그렇게 말하고, 나는 약간 머뭇거리다가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라도 제인 선배가 아이작과 결혼하게 된다면, 저는 더 이상 그 아이와 친구가 될 수 없는 건가요?”
그녀는 웃음을 터뜨렸다.
“너와 아이작 사이에 친구 이상의 감정이 있지 않다면, 상관없지 않을까 해.”
난 그렇게 속 좁은 애가 아니거든. 제인은 장난스럽게 말을 잇더니 나에게 물었다.
“그럼, 난 너를 경쟁자라고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거지?”
나는 자그마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작이 그녀를 마음에 두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에 제인은 그렇게 나쁜 사람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긍정을 의미하는 내 대답에 그녀는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았다.
============================ 작품 후기 ============================
1. PART 5 드디어 시작입니다. 새로운 이야기를 진행한다고 생각하니 또 설레여..ㅎ_ㅎ
2. 시리우스 외전 타이틀은, 주신 의견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세 개 정도를 선정해 친구에게 골라달라고 했어요. 최종적으로 또롱또롱님이 주신 소제목이 결정되었습니다. 소중한 의견 내주신 또롱또롱님, 요륭님, 하쿠나 마타타님, Iriss님, 오막살이님, 뷁풺밂뽥뀽님, 가감님, 한유주님, 빛의피날레님, 이늬님, 고양이춤님 모두모두 감사합니다 :)
@멍므님, 두 형제는 완전히 멀어졌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아요. 그 날 이후로 현재 본편 진행 분까지 레귤러스와 시리우스는 대화를 한 번도 한 적이 없거든요. 서로 인사조차 하지 않습니다. 답이 되셨을까 모르겠네요. 항상 장문의 코멘트 감사드립니다..☆
@Anarkh님, 전 여자가 맞아요. 그래서 시리우스의 시점을 쓰기 위해 주변 남자들한테 그 나이대 남자의 심리에 대해 엄청 물어본 듯.. 그리고 개인지에 관해서는, 지금 벌써 분량이 1400KB가 넘어서 개인지 진행은 확신드리기 어려울 듯 싶습니다ㅠㅠ 단권으로 30권 정도 소량 제작해보려고 했는데 단권이 가능할까여..T_T 여튼 완결날 때 쯤에는 결정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계속 따라와주시고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
@Himeros님, 쪽지로 답변 드렸습니다. 확인 부탁드릴게요^_^